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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이 시인을 다시 본다/이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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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인을 다시 본다|이성률
말레이시아 여자 벌목공
오늘도 나는 말레이시아 여자 벌목공과 잠을 잔다
인연의 실타래 거슬러 오르면
슈퍼 아줌마의 눈인사 또르르 굴러오고
구수한 사투리 구슬땀으로 지펴내는 배달기사 있고
여공들의 손길 재촉하는 벌목선
그 끝에 열일곱의 그녀 있다
새벽 안개 걸치고 수통 가득 담아내도
줄지 않는 목마름
우물 속에 일찌감치 벌목 당한 그녀 있다
두 눈 불끈 여미지 않으면 외길도 늪이다
어르고 달랠 때마다 드러나는 숲의 골절
열심히 산다는 일이
스스로를 얼마나 서글프게 하는지
발목 잘려 나뒹구는 목숨들은 안다
아무리 잘라내도 미끈한 길 열리지 않는
이국 땅 제지공장에 몸을 풀고
미용티슈로 갈무리하는 그녀의 하루
내 입술 훔칠 때마다 배어 나오는 그녀의 물집
아버지 유품을 태우고 온 날
맨손으로 돌산을 일구시던 아버지가
가랑비에 젖어들고 있다
나흘 장대비에도 한숨 한번
내보이지 않으시던 아버지가
한 점 불꽃에 잦아들고 있다
일평생 가슴으로 밟아온 길들이
뒤축 닳은 구두 한 켤레로 모아지고
수없이 채워놓은 공간들이
두어 벌의 해진 옷으로 채워져
다시 못 올 길을 가고 있다
양보해 드리지 못할 일 하나 없고
용서받을 일 잔손금처럼 많아도
나는 바람 한 톨 어쩌지 못하는 허깨비
정작 죽은 것은 살아있는 나이다
이렇게 떠나게 할 순 없어
살 만한 것 다 내주고
가난한 짐만 져가게 할 순 없어
사흘 밤낮 술에 절인 허무 걸치고 누우니
미소 짓는 꿈속의 아버지
나 먼저 가
씨앗 뿌리고 있으마
연변 홍씨
냉동창고 잡부 석 달 만에
손가락 마디마디 동상 물들여준
이놈의 겨울
내 나라 그리워한 죄 사무치게 커
발가락 마디마디 마저 내주고
신문지 한 장으로 날 수도 있었지만
솜이불 덮고도
마음의 시린 한기 어쩌지 못하는
고향의 노모 그리다
몸뚱이 꽁꽁 얼어서야
고국의 냉대 풀고 간
연변 홍씨
얼음 속의 어머니
한겨울 냇가의 살얼음마다
젊은 시절의 어머니 깃들어 있다
시집살이 절은 때 이고 가
발목 깊이 언 물에 풀어놓고
바람도 손목 시리게 세척한 것은
생채기 가득한 여린 가슴이었다
일어설 기미 보이지 않는 보릿고개
절절이 풀 먹여 세우려던 배고픔이었다
고생도 나이 들면 실없어지는지
손자들에겐 우스갯소리로 팔리는지라
60년 만에 한강이 얼었다는 날 아침
아이들과 함께 찬물로 세수를 한다
손등의 핏줄 새파랗게 드러나도록
채색하고 다져놓은 살 만한 세상
이젠 짊어지고 갈 것 아린 무릎뿐인
어머니 떠올리며 머리를 감는다
머리가 얼어 터질 것 같다며
비명 지르는 아이들 앞세우고
한 바가지 더 듬뿍 붓는다
에덴동산 세탁소
18층 열두 동 아침, 수의를 수거하러 가면
이름 없는 집에서 호수가 말을 한다
그 집 사람들은 어른이고 아이고 1606호다
그들의 선악과는 평수에만 매달려
45평의 장막 떠나서야 비로소 하나가 된다
한껏 치맛단 올리고 나오는 이브들아
넥타이로 단단히 목 치켜세운 아담들아
21세기 모피 거느리고 하나둘씩 첨단을 걸어도
네 앞의 발걸음 관 속에 누우면
마지막으로 배웅하는 것은 단 한 벌의 옷이다
엘리베이터에서 재단되어 나오는
좀처럼 다려지지 않는 순모도
빳빳이 고개 세운 큐브라도
차려입을수록 초라해지는 알몸
껴입을수록 싱거운 삶이다
구겨진 나날 허물 벗는 세탁에는 골이 없다
꼭 꼭 걸어 잠근 방마다 번지수 다르고
내 허물 네 것으로 미루는 가시가 없다
내 안의 때 네 것 되고 네 안의 때 내 것 되어
서로가 서로를 씻긴다
처진 어깨 드라이로 치켜올리고
주름진 치마 가지런히 펼치는
자정 무렵의 세탁소에는
무화과 잎이 무성하다
시작노트
나는 무덤이었다. 내 몸은 목관처럼 삭아가고, 머리에선 시체의 썩은내가 진동했다. 나는 벗어나야 했다. 나를 구원해 줄 그 무엇인가를 붙들어야 했다. 사관생도의 꿈을 접은 후 사흘을 굶었다. 그렇게 사흘을 더 버틸 수도 있었다. 나를 구원해 줄 그 무엇을 찾지 못한다면 아침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다.그렇게 해서 붙든 것이 문학이었다. 소설이라는 허구의 골짜기를 거닐다가 동화의 숲을 지나 시의 능선에 다다랐다.
내 앞에 놓여 있는 고독의 잔이 얼마일지 가늠할 수는 없다. 매캐한 담배연기와 함께 보낼 불면의 밤이 또 얼마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준비되어 있다. 그 길만이 무덤에서 깨어나는 길임을 확신한다.
이성률․2000년 ≪세기문학≫으로 등단
|추천평|
따스한 휴머니즘의 시학
그럴싸한 언어구사에만 의존하여 삶의 진실성과 깊이를 엿볼 수 없게 하는 작품들이 난무하는 판에, 구체적 생활의 체험에 이어져 있으면서 시적 리얼리티를 획득하고 있는 이성률 씨의 시들을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가웠다. 일그러진 시대의 어둠과 그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초상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시선, 그리고 무리 없이 전개해 나가는 어조와 이미지 구사 능력 또한 믿음직스럽게 생각되었다.
「말레이시아 여자 벌목공」과 「연변 홍씨」는 냉혈적인 사회 상황 속에서 처참하게 유린당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에덴동산 세탁소」와 「얼음 속의 어머니」 등은 각각 우리 주변의 이웃과 육친에의 절절한 사랑을 감동적으로 그리는 데 일단 성공한 작품들로 평가할 만했다. 특히 「말레이시아 여자 벌목공」에 나오는 “내 입술 훔칠 때마다 배어 나오는 그녀의 물집” 같은 시구에서 볼 수 있는바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의 싱싱함은 이성률 씨의 만만치 않은 시적 형상 능력을 믿게 하기에 충분했다.
앞으로 더욱 치열하게 시의 광맥에 도전하여 한국시가 가보지 못한 새 길을 뚫어주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이가림:시인, 본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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