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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리토피아 신인작품상/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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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50회 작성일 08-02-23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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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토피아 신인작품상|김지연



내 과거는 항아리 안에 숨어 있다


몸 가운데 토막 난 상처가 도질 때마다
난 애써 눈감으며 참으려 하지 않는다.
거실장 가운데칸 뒷줄에
별이 가득 담긴 사기 항아리를 조심스레 꺼내
상처가 도진 곳에 가져다대는 것도
싱싱한 눈물을 감상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별의 재채기가 끊길 듯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낸다.
쉿 아무도 모르게 상처 난 길을 따라
항아리 안으로 들어간다.
눈물의 향연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봄바람


저년 좀 봐
담벼락 아래 홑겹치마를
요조숙녀처럼 깔고 앉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아이의
고추를 훔쳐보는 저년 좀 봐
물 건너온 지가 언젠데
아직 하얀 얼굴 그대로
목줄기 알듯알듯한 단내로
파랗게 절여져 돌아오는
사내들을 하얗게 웃게 하는
색색의 얼굴로 도시 담벼락마다
철없이 쭉 둘러앉아 아우성치는
봄바람의 독(毒)




조기에 대한 이야기


오늘이 기회야
조금만 자를게
아아주 조금만

그날 밤만을 기다려 동쪽을 보고, 웃는
연습만 했다는 그놈 실한 놈 그놈을
철퍼덕 도마 위에 올려놓고 비늘을 벗긴다.
비늘에 쌓였던 인연들이 하나씩 물속으로
떠내려간다. 멋모르고 환생하던 기억만이
갈증을 불러낸다.
-바다보다 더 큰 세상을 향해 날아오를 거야
내가 꿈꾸어오던 푸른 별이 사는 곳으로,
꼭 깊은 밤을 택해야 한다던 할머니
말씀대로 그때까지만 동쪽을 보고 웃고 있으면
돼, 갈증이 심하게 왔다.
바람이 자는 그때 잠깐 내려온다는 푸른 별
반쯤 잘린 지느러미와 꼬리는
죽을힘을 다해 움직였다.
평소에 맡아보지 못했던 향내가 난다.
떠나온 바다는 짧지만 깊은 미소를
선물로 주었다.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음복을 한다. 아무도,
아무도 조기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물속에는 물고기가 없다


물속에는 물고기가 없다.
어젯밤 갈등으로 긁어버린 생선비늘이
지하 강을 떠내려가다 잠그지 못한 수도꼭지를
통해 물방울로 돌아왔다.
망쳐버린 그림 한점 갈기갈기 찢겨져
물위에 던져진 것처럼
세면대 속 그림자는 볼 수가 없다.
그리 길지 않을 숨소리를 향해
두 손 가득 살포시
반짝거리는 물방울을 움켜쥔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
쉬이 빠져나갈 리 없는데
비릿한 냄새가 세면대에 쌓인다.
손바닥에 비누를 비볐다.
불빛에 생선비늘이 살아난다.
산뜻하게 돌아온 내 얼굴.
아래층 물소리가 오래도록 샌다.
대어를 낚을 모양이다.
물속에는 물고기가 없다.



그 여자


아래층에 사는 여자는 미용실을 자주 간다.
오늘은 짙은 은행잎을 닮은 염색 파마를 하고 나타났다.
눈동자에는 아직 어젯밤 반짝거리던
불빛이 꺼지지 않은 채 졸고 있다.
슬리퍼 소리가 길다.
여자가 해장국집으로 들어간다.
해장국집 문이 뒤따라 들어간다.
여자가 좋아하는 알탕을 시켰겠지?
알탕을 마주하고 ‘난 속이 크다 그래 니 속은 앙증맞게도
작아 토독토독 잘도 씹히겠다’는 둥 숟가락 위에
올라온 남의 속들을 후후 불어주며 다독이다
얼른 뱃속에 숨겨버리겠지?
남의 속들을 제 속에 넣고 어줍게 돌아 나오는 길에도
바람은 없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를 손가락으로 바람 일으키며
걷다가 신호등에 멈춰서 죄 없는 하늘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여자,
아이들은 자주 껌을 주는 그 여자를 좋아한다.




|당선소감|

계절은 태연하게 지난 계절의 방석을 깔고 산을 타고 내려오고, 정돈된 도시의 하늘은 언제나 혼잡한 나들목의 지체 현상이다. 언제부터인가 미쳐버리도록 정신이 혼미한 나를 발견했다. 욱신거리며 저려오는 통증을 혼자 속앓이하며 지내온 날들, 새벽이면 훔쳐온 별들로 불꽃놀이를 한다. 반복되는 일상이 권태롭지만 반복이 생의 조건이고 이런 반복 속에 생의 비밀과 의미가 있다는 나만의 일탈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아직 하늘에 남아있는 별들이 많기에 훔쳐 올 詩語들도 많다. 무엇이 나를 도둑으로 몰고 갔는지 거슬러 올라가보려 애쓰지만, 아직도 뿌연 안개만이 시야를 가려 길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그 길 어디에 영원히 찾을 수 없는 미로가 있겠지. 찾고 싶은, 잡히지 않으려는 기억이 있겠지. 겁 없이 달려든 갈증의 길, 그 길이 그 길일 것 같은 길을 뚜벅뚜벅 아픈 발 내디디며 가는 수밖에. 지금 베란다 밖에는 소나무 사이에 낮달이 고이 안겨 잠을 청하느라 소나무의 잔가지가 일렁이고 있다.
기회를 주신 ≪리토피아≫, 차오르던 욕망을 기댈 수 있게 묵묵히 믿음을 주신 선생님, 그리고 매일 제 졸시를 듣느라 귀를 빌려준 학형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앞으로 더욱 흥건하게 내면을 퍼부을 낯설음에 대하여 오늘밤에는 작은 보시라도 해야 할 것 같다.(김지연)



김지연(본명 김미경)․
경북 영주 출생




|심사평|

확실히 우리는 산문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 탓인지 요즘 시는 산문화(散文化)되어 길어진 경향이 있다. 시에는 시의 기능이 있고, 산문에는 산문의 기능이 따로 있다. 시는 짧아야 한다. 압축시키는 기술이 필요하다. 작은 그릇에 많은 것을 담으려 한다. 과욕은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수산시장에 가면 비릿한 냄새가 난다. 향기 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다. 김지연 씨의 시를 읽으면 생선의 비릿한 냄새와, 그 속에 향기 같은 것을 맡게 된다. 「조기에 대한 이야기」는 망자(亡者)의 제삿날에 바다만큼 이야기가 많을 법한데 “아무도 조기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라는 종결구가 돋보인다. “아래층에 사는 여자는 미용실로 자주 간다”로 시작되는 「그 여자」는 실의에 빠져 있는 밤여자의 아픔을 담담하게 미화시켜 주고 있다.
김지연 씨의 시는 신기성(新奇性)보다는 흔한 우리 이웃들의 노래를 담고 있으며, 흔히 범하기 쉬운 언어의 평범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기왕에 선을 보였으니 좋은 재목으로 발전하기를 빈다.(임)
―본심:임강빈 이가림 김동호

추천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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