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16호 연재-속담으로 읽는 문화사②/고재환
페이지 정보

본문
연재|속담으로 읽는 문화사②
속담에 나타난 제주인의 삶의 모습
고재환
2. 의생활(衣生活)
■리 손당1) 사름 베창옷 입엉 나사민 식께 시넁 다.
(다리 송당 사람 베창옷 입고 나서면 제사 있느냐고 한다.)
옷이 날개라고 했듯이, 현대인들의 복장은 그 질에서부터 모양에 으르기까지 화려하고 다채롭다. 철 따라 유행 따라 색채는 물론이고 개성과 취향에 맞게 골라 입을 수 있어야 세태에 밝고 깬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렇지 못해서 차림새가 꾀죄죄하면 시세에 뒤떨어진 사람이라고 나무람받기 일쑤이다. 그러나 옛 분들은 사정이 다르다. 먹고살기에 고단한 생계 여건에서는 분수에 지나친 옷은 사치로 알고 꺼렸다. 사람이 옷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옷이 사람을 선택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옷이 귀했던 것이다. 어린애인 경우는 더하다. 한두 살 때는 배만 가려서 보호하면 되는 ‘베부루(르)기’라는 두렁이를 입히면 그만이고, 네댓 살이 돼도 거의 아래옷은 안 입고 무릎에 닿는 윗옷만 입는다. 그래서 길에서 놀고 있으면 어른들은 지나가다가 고추 따먹겠다고 놀려댄다. 애들은 정말인 줄 알고 손으로 움켜잡고 도망치기가 바쁘다. 십대 소년이 돼도 옷을 만들 때 앞으로 체격이 불어날 것에 대비해서 일부러 헐렁하게 만들었으니, 새 옷 때 몸에 맞는 것은 입지 못한다. 또 성인들은 성인들대로 평시에도 노동복 차림인데, 그것도 여러 개를 만들어 두고 번갈아 입을 만큼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 일년에 한두 벌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낡아 찢어지는 날이면 헝겊을 대고 이중삼중으로 기운 누더기가 되고 만다. 평상시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한생애를 마감하고 관속에 들어갈 때 입는 수의마저도 무명옷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이 예사이다. 오늘날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비단수의는 꿈같은 얘기다. 그러니 깨끗이 손질한 삼베로 만든 창옷만 입고 나서도 무슨 특별한 일이 있는 것으로 알고 의아스럽게 여길 수밖에 없다.
위 속담에 등장하는 ‘리’와 ‘손당’이란 마을은 화전을 일구고 목축과 사냥에 의존해서 생계를 유지했던 제주도 고유의 산골 오지마을의 대명사로 떠올려지는 곳이다. 이 마을에서는 어쩌다 말쑥한 옷차림을 하고 거리에 나서면, 집에 기제사가 있는 것으로 여겼으니, 그 의생활의 정도가 어떤 것인지를 엿볼 수가 있다. 그와 같은 실상이 드러나고 있는 속담들을 몇 편 더 간추려 보기로 한다.
∙갈중의 적삼 입엉 못 일 엇나.
(갈중의 적삼 입고서 못 할 일 없다.)
∙밥 줄 인 셔도 옷 줄 인 엇나.
(밥 줄 사람은 있어도 옷 줄 사람은 없다.)
∙싀 의이 소중의가 나인다.
(세 모녀가 고쟁이가 하나이다.)
∙입단 옷에 다리웨질영 어린 지집 홀리레 뎅긴다.
(입던 옷에 다리미질해서 어린 색시 유혹하러 다닌다.)
‘갈옷’인 갈중의와 적삼은 삶의 바닥을 누비던 제주인의 살 내음과 정서의 진기가 짭짤하게 절어 있는, 제주도를 대표하는 옷이다. 그 명칭은 무명이나 광목으로 만든 바지와 저고리에 풋감물을 들여 햇볕에 바랜 것으로, 그 빛깔이 갈색이어서 붙여진 것이다. 일설에는 가죽으로 만든 ‘갖옷’에서 유래했는데, 그 대용품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1960년대까지만 해도 농촌에서는 ‘갈옷’을 즐겨 입었는데, 밭일을 하는 노동복치고는 지금도 그 이상이 없다. 질겨서 마구 입어도 때가 끼는 줄 몰라 눈에 거슬리지 않아서 맨땅 위에 덥석 주저앉아도 표가 나지 않는다. 또한 땀에 흠뻑 젖어도 몸에 달라붙지 않으므로 더위를 덜 느끼게 된다. 더욱이 편하고 실용적인 것은 세탁이 쉬워서 좋다. 냇물에 훨훨 헹궈서 돌 위에 올려놓고 밟으면 비누칠을 안 해도 때가 잘 빠진다. 그러니 개천에 멱 감으러 갔다가도 빨아서 물기만 짜면 즉시 입어도 되니 빨래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지금도 그 명맥이 끊기지 않고 전수되고 있다는 것은 천만다행이지만, 옛 솜씨와 모습이 아니다. 바느질도 재봉틀이 맡고, 풋감도 제때에만 따서 믹서를 이용하면 되므로 공이 덜 든다는 이점은 있으나, 옛 할머니와 어머니들의 숨결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다. 양복 차림에 길든 남성도 그렇지만, 흙이 묻지 않는 손에 루즈와 파운데이션을 짙게 바른 여성에게는 궁합이 맞지 않아서다.
사실 옛날의 ‘갈옷’은 그 만드는 과정만도 간단하지 않아서 큰 일거리의 하나로 꼽힌다. 작년에는 누구의 것을 만들었으니 올해는 누구의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복안이 서있다. 그에 따라 옷감을 마련하고 나면, 낮에는 시간이 없으니 주로 밤을 이용하거나, 비가 오는 날을 이용한다. 바느질도 굵은 실을 곱잡아서 촘촘히 단단하게 박아야 그 옷이 헐 때까지 실밥이 떨어지지 않으므로 만사 단단한 것이 제일이다. 감물을 들이는 것도 음력 6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로, 그 시기가 정해져 있다. 그때가 풋감의 떫은 액이 가장 많이 나와서 고운 색을 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시기면 아무런 풋감이나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쾌청한 날씨를 택해서 재래종 씨가 많이 박힌 떫은 팥감이라야 좋다. 따낸 감은 꼭지를 잘 다듬어서 물에 담근 후에 커다란 함지박에 꺼내놓으면서 방망이로 으깨어 빻은 다음, 옷에 싸서 끈적끈적한 감물이 흠뻑 배도록 마구 주무른다. 감물이 고루 잘 들여졌을 때 그 풋감 부스러기들을 떨어내고 볕에 말린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밤에는 이슬을 촉촉이 맞히고 낮에는 물을 적셔 편편한 멍석이나 잔디밭에 널고 구겨진 곳은 손으로 바로잡으면서 햇볕이 골고루 비치도록 엎었다 뒤집었다 하루에 두세 번씩 반복한다. 적어도 일주일은 그렇게 해야만 갈빛으로 잘 바랜 ‘갈옷’이 된다. 만약에 감물을 들인 다음에 날씨가 흐리거나 빗날이 계속돼서 햇볕에 바래지 못하면 실패하고 만다.
이와 같이 옛날은 일년에 한 벌을 장만하면 이삼 년을 입고 견뎌야 하는 판에, 남에게 줄 남아도는 옷이 있을 리가 없다. 먹는 밥은 덜 먹고 남에게 나눠줄 수 있지만, 옷은 여분이 없으니 남에게 줄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노동복인 ‘갈옷’을 입은 채 웬만한 나들이는 예사로 알고 해도 흉잡히지 않는다. 그보다 더 딱한 것은 세 모녀가 속옷 하나를 가지고 돌려 입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옛날은 오늘의 팬티에 해당하는 속옷을 평상시에 입고 지내는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가뜩이나 겉옷도 제대로 못 해 입고 사는 형편인데, 고쟁이인 ‘소중의’는 거의 입지 않고 지내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아무리 친숙한 혈육인들 세 모녀가 속옷인 고쟁이 하나를 가지고 어떻게 돌려가며 입을 수가 있었는지, 좀처럼 납득할 수가 없지만 거짓말 같은 참말이다. 하나를 마련해 놓고 나들이 때만 입고 다녔으니 말이다. 그러니 입던 낡은 옷을 다려 입고 뽐내면서 색시를 유혹하러 다녔다는 것도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그만큼 옛 분들의 의생활은 식생활 못지않게 어려워서 옷 한 벌을 장만하면 일년 내내 입어야 했고, 낡아서 해지면 기워서 입는 것은 필연적이다. 아마 오늘날의 X-세대들은 이와 같은 지난날들을 비웃고 나무랄지 모른다. 누가 그렇게 살고 싶었으랴만, 땅을 파먹어야 하는 농경생활을 벗어나지 못한 역사적 현실이 가난의 울타리를 허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 현대인들의 의생활은 어떤가? 옷에 조그만 흠집이 생기거나 싫증이 나면 말짱한 옷을 장롱 속에 구겨 넣고 만다. 더 안타까운 것은 엊그제 사서 거울 앞에서만 입어봤을 뿐인데도, 새로운 유행의 캐주얼이 나왔다는 영상 광고가 눈에 들어오기가 바쁘게 제일 차로 사들인다. 그래야 시대의 첨단을 걷는 멋쟁이 엘리트로 착각하는, 가진 집 아줌마들을 어떻게 봐야 할지……. 하기야 요즘과 같은 불경기 때 소비를 촉진시킨다는 선의의 시각으로 보면 나무랄 것이 아닌지 모른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한다는 생각이 울컥 치민다. 또 있다. 새 옷을 일부러 찢고 헌 옷으로 만들어 무릎과 엉덩이 밑을 드러내놓고 활보하는 차림새들, 그저 어리광으로 귀엽게 보기에는 낯이 뜨겁다. 단정하고 맵시 있게 입는 옷은 인품과 직결돼 있다. 이 말은 꼭 유행에 맞춰 값비싼 고급의 새 옷을 입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럴 때 “말은 여위어 비루한 데서 놓치기 쉽고, 선비는 옷이 남루한 데서 잃기 쉽다.”는 옛 속담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봐야 할 것 같다.
■봇듸창옷 안 입어난 놈 저싕가민 박접다.
(배내옷 안 입었던 사람 저승 가면 박대한다.)
어머니 뱃속에 있던 태아가 세상에 나왔노라고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부터 이승의 삶이 시작된다. 앞으로 그 주어진 삶의 시간은 얼마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저 천 명에 달렸을 뿐, 무병장수를 위한 초인적 영험을 주문할 따름이다. 바로 그 초인적 영험을 얻는 무병장수의 비결의 하나가, 갓 태어난 신생아에게 남녀 구분 없이 입히는 깃저고리인 ‘배내옷/배냇저고리’이다. 이 옷은 깃과 섶이 없는 것이 특징인데, 무명이나 광목, 삼베로 만들어진다. 그 명칭을 제주도에서는 ‘봇듸창옷/봇듸옷’이라고 해서, 자기 집에 없을 경우는 일가친척이나 이웃집에서 빌어다가 입힌다. 그것도 건강하게 자랐던 애가 입던 것을 선호했는데, 지금은 자기 집안에서 만들어 입었던 것을 그대로 입히거나, 없으면 사다가 입히고 있다.
왜 이렇게 신생아에게 배내옷을 입혔던 풍습이 생겼을까? 옛 분들의 말을 빌리면 직접적으로는 피부와 몸이 튼실해서 무병장수한다는 속설을 중시한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어린 아기도 엄연한 사람인데, 그저 알몸 상태로 지낸다면 짐승의 출산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데 있다. 사람은 하등동물과 다른 인격체로서 통과의례를 치르기 마련인데, 출산 후 첫 단계가 배내옷을 입는 일이다. 그것은 그저 몸을 가리는 것이 아닌, 인생 첫 출발의 무게가 실린 예복으로써 사람대우를 받는 의식이다. 그러니 배내옷인 예복을 못 입어보고 살았던 사람은 죽어서 저승에 가도 사람대접을 제대로 못 받고 냉대를 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속담이 있다. “어린 아이 벌러진 그릇에 밥 줫당 죽엉 저싕가민 꼿밧듸 물 줘도 유운다.(어린 아이 쪼개진 그릇에 밥 주었다가 죽어서 저승 가면 꽃밭에 물 줘도 시든다.)”가 그것인데, 어린 아이라고 아무렇게 대했다가 사후의 세계인 내세가 어둡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것은 어린애를 낳으면 우선은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자라도록 보살펴야 한다. 옛날은 현재처럼 의술이 발달하지 못해 민간요법이나 무당의 주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니, 한 여인네가 아기 열을 낳고 다섯을 길러내면 자식농사 평년작은 됐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아기 열을 낳고도 한 명도 살아남지 않아서 가문의 대가 끊기게 되므로, 양자를 데려야 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태어났을 때 배내옷을 입으면 질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자랄 수가 있었을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의술의 취약성을 토속적인 민간신앙으로 극복해 보려는 의존심 때문이다. 필자도 태어났을 때 분명 그 옷을 입었었지만, 다섯 살까지는 자주 앓아서 죽을 것으로 알고 창문 앞에 괭이와 삼태기를 비치했었다고 한다. 지금 이렇게 살아남아서 이런 글을 쓰게 된 것도 어쩌면 배내옷인 ‘봇듸창옷’을 입었던 효험을 본 것인지 모를 일이다. 사실 8․15 광복 직후까지만 해도 들녘 오솔길을 지날 때마다 어제는 없었던 어린애의 무덤들이 자꾸 즐비하게 들어서는 것을 보고 소름이 끼쳤던 어린 시절이 눈에 선연하다.
기왕 출산과 무병장수에 연관된 무당의 얘기가 나왔으니, 옛날 유소년들에게 무서운 전념병인 천연두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병에 걸리면 제주도에서는 ‘마누라한다/손님한다’고 해서, 집안 식구들 모두가 근신해야 하는 금기사항이 꽤 많다. 부잡한 언행은 말할 것도 없고 음식마저 정갈해야 하므로, 육류나 생선을 함부로 구워먹지도 못한다. 다른 사람의 방문은 더 안 되므로 금줄을 매어 출입을 막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번 걸리면 생명을 잃기도 하지만, 십중팔구는 얼굴이 흉측하게 얽빼기가 되고 마니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오직 그 예방과 구제책으로 무당을 청해다가 탈 없이 무사히 회복되기를 비는 것이 유일한 치유법이다. 그때 이뤄지는 주술은 ‘마누라본풀이’2)가 주된 내용이 골간을 이룬다. 그 내용을 엮은 것은 오늘날 ‘서사무가’라고 해서 민속 문학 작품으로 다뤄지고 있는데, 그 주요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하루에 천 명을 잉태시키고 만 명을 환생케 할 수 있는 출산과 양육의 신인 생불할머니 즉, 삼승할머니인/명(멩)진국 할머니가 서천강 다리에 나가서 만나게 된, 마마의 신인 대별상에게
“제가 생불을 주고 환생을 준 자손에게 고운 얼굴이 되게 마마를 시켜 주십시오.”
간청했으나 이를 묵살하고 바가지처럼 흉측한 몰골을 만들고 만다. 이에 분개한 삼승할머니는 대별상의 아내인 서신국 부인에게 생불꽃을 내려 임신을 시키게 됐는데, 열 달이 지나고 열두 달이 넘어도 출산을 못해 죽을 지경에 다다른다. 이때 남편인 대별상을 불러 나는 이제 죽게 되었으니 마지막으로 생불할머니라도 불러 달라고 애원한다. 그 말을 들은 대별상은 장부의 체통에 여자를 청해 들일 수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부인이 죽게 되었으니 체면을 무릅쓰고 명(멩)진국에 들어가 삼승할머니 뵙기를 청하지만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대별상은 댓돌 아래 무릎을 꿇고 엎드리니, 그제야 입을 열어 말을 한다.
“너의 집에 청하고 싶으면 머리를 빡빡 깎고 송낙과 장삼을 둘러 입고 버선만 신은 채로 다시 댓돌 아래로 와서 꿇어 엎드리면 가겠다.”
대별상은 그 말대로 해서 댓돌 아래 엎드리니, 삼승할머니가 이르기를
“이만하면 하늘 높고 땅 낮은 줄 알겠느냐? 뛰는 재주가 좋다고 해도 나는 재주가 있다고 한다. 나를 너의 집까지 청하려면 물명주와 강명주로 서천강에 다리를 놓으면 가겠다.”
“예, 과연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지난날 오만불손했던 대별상의 과오를 사죄 받은 후에, 물명주와 강명주로 놓은 서천강 다리를 건너 서신국에 들어가서 부드러운 손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 부인의 배를 삼세 번 쓸어 내리니 자궁이 열리며 애가 태어난다.
이와 같은 ‘본풀이’는 말 그대로 ‘본’과 ‘풀이’가 합해진 합성어다. 신의 근본이 되는 내력을 풀어내는 것이 곧 ‘본풀이’인 것이다. 제주도에는 신들의 고향이라고 일컬을 만큼, 무려 18,000여 무속신(巫俗神)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돼 있다. 그 내용도 다양해서 현용준의 제주도무가(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6)에 보면 <일반신본풀이>가 12편, <당신본풀이>가 11편, <조상본풀이>가 6편, ‘희곡무가’ 3편, ‘일반무가’ 3편으로 정리하여 수록하고 있다. 이제 그들 형상을 가시화하기 위한 신화․역사공원이, 남제주군 안덕면 서광리에 있는 목야지에 조성하기로 돼 있는데, 순조로울 경우 2010년대 중반에는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신단 신에 용갱(강)기 감앙 어린 지집 달레레 간다.
(신던 신에 총갱(감)기 감고서 어린 계집 달래러 간다.)
이 속담은 앞에서 예시한 바 있는 “입단 옷에 다리웨질영 언린 지집 홀리레 뎅긴다.”와 같은 맥락이다. 다름 점이 있다면 ‘옷’ 대신에 ‘신발’인 ‘짚신’이 중심 소재가 되고 있는 것뿐이다. 옛날은 옷만 귀했던 것이 아니라, 신는 신과 버선도 귀하다. 버선인 경우는 새 신부가 시댁 어른들께 예물로 드리는 혼수품이었음이 그것을 입증해 준다. 전국적인 현상이었지만, 서구의 문물이 들어오기 전의 신발은 날이 좋은 때는 짚신이고, 비가 와서 땅이 질면 통나무를 파서 만든 나막신인 ‘남신’을 신는다. 어린애인 경우는 날씨에 관계없이 맨발이다. 오직 지위가 높고 부유층에 속하는 사람들만이, 오늘날 가죽으로 만든 구두격인 당혜(唐鞋)에 해당하는 ‘창신’3)을 신고 다닌다. 하기야 겨울철 짐승을 쫓던 사냥꾼이나 거친 들판에서 우마를 치던 목자(牧子)인 ‘테우리’들은 가죽신뿐만 아니라, 털가죽 감투를 쓰고 털가죽 옷도 입는다. 하지만 이것들은 오늘날 호사가들을 위해 공들여서 만든 고급 제품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가죽신이라고 해야 버선처럼 꿰매서 발만 들어가면 되게 만든 것이고, 가죽옷 역시 가공되지 않은 털가죽 그대로였으니, 현재의 가죽제품과 비굣거리가 못 된다. 일반 서민들에게는 그저 짚신이 제격이다. 그런데 이 짚신도 질기고 맵시 있게 제대로 삼으려면 손재주가 있어야 하고, 시간과 공력이 만만치 않아서 한 켤레를 완성하려면 꼬박 이삼 일이 걸려야 한다.
음력 7월 중순으로 접어들면 억새의 삘기인 ‘미’를 뽑아서 볕에 말려 꼰 신날을 장만한 해야 하고, 발을 감싸도록 짚신 앞부분의 양옆 운두에 촘촘히 두를 총도 볏짚의 윗부분에 달린 속줄기를 잘라내서 다듬은 다음, 허벅다리에 올려놓고 비벼 꼬아서 만들어야 한다. 또 그 총의 빛깔을 곱게 하기 위해서는 노란 물감을 들여야 하고, 삼은 신은 총의 윗고를 하나하나 끈으로 다 꿰고 일렬로 일으켜 세워서 돌기총에 연결시켜 총갱기를 감아야만 짚신의 형태가 이뤄진다. 그 다음은 골을 박아서 골격이 잡힐 때까지 대여섯 시간 이상을 둬야 한다. 볏짚도 아무거나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논에서 나는 볏짚이 최상품이고 밭벼인 경우는 ‘원산뒤(듸)’라야 하는데, 그것은 수확량과 쌀의 질이 좋지 않다고 해서 그 짚이 우마용 사료밖에 안 되는 ‘뒈(데)수리’를 선호했으니, 쓸모 있는 볏짚도 결코 흔치가 않다. 그러니 짚신인들 여유 있게 여러 켤레 마련해 두고 외출 때 갈아 신고 다니는 사람도 드물다. 또 신고 다니다가 비가 내리는 날이면 벗어서 겨드랑이에 끼고 비를 피하기가 일쑤인데, 요즘 사람들은 코미디의 한 장면을 연상할 것이다. 또 꼭 같이 짚으로 삼아서 신는 짚신 중에는 ‘북깍신’이 있는데, 빨리 삼는 사람은 하루에 네댓 켤레를 만들어낸다. 그러니 억새의 삘기의 겉껍질인 ‘미’로 꼰 신날이 아니라도 되고, 운두의 울을 두르는 총도 별도로 공들여 만들 필요가 없다. 그저 짚으로 적당히 만들어 듬성듬성 끼워 넣으면 된다. 이런 ‘북깍신’은 노동 현장에서 아무렇게나 마구 신는, 지금의 노동화의 구실을 했던 싸구려 짚신이다.
이런 현상은 6․25 전만 해도 신발이 귀해서 시골에서는 운동화 한 켤레를 사서 신으면 여간한 자랑거리가 아니다. 아껴서 신기 위해 사람이 보는 데서만 신고 가다가 사람이 보이지 않는 데서는 벗어서 들고 갔으니까. 그러고 보면 신던 신에 총갱(감)기를 새 것으로 곱게 감아서 어린 색시를 꼬이러 다녔다는 것이 거저 해보는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좀 장난 끼가 있어 보이지만, 남의 눈에 들게끔 멋을 부리려는 것은 남성만이 아닌 여성도 마찬가지다. 남의 시선을 끄는 신발을 신고 뽐내면서 활개치고 걷고 싶은 심정은 옛 분들이라고 없을 리가 없다. 다음의 제주도민요 <맷돌․방아노래> 중 ‘집안노래’의 한 대목은 그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방에 레 짛구젱 건, 리 손당 시집을 가라
가죽 창신 신구젱 건, 쉐목쟁이 시집을 가라
유지 산물4) 먹구젱 건, 가웨쟁이 시집을 가라
(방아 맷돌 찧으려 하거든, 교래 송당 시집을 가라
가죽 창신 신으려 하거든, 백장에게 시집을 가라
유자 산물 먹으려 하거든, 정원사에게 시집을 가라)
―김영돈 제주도민요연구 501번
이처럼 짚신만 신던 아녀자들에게 가죽신이 얼마나 부러움의 대상이었는지 알만 하다. 이제는 고무신과 운동화가 옛날 짚신의 자리를 차지했고, 가죽신인 구두는 유별난 모양의 것들이 나돌고 있어 격세지감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뒤꿈치가 높은 구두는 이미 눈에 익을 대로 익어서 아무렇지 않게 생각돼 버린 지 오래지만, 앞 부리가 마치 뾰족한 호미 끝처럼 볼이 좁고 날카로운 구두를 신고 발끝을 치켜올려야 걷는 모습은 불안해서 보기가 딱하다. 어디 그뿐인가. 항공모함을 방불케 하는 통구두(?)는 더 숨이 차서 답답해진다. 신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터덜터덜 끌고 다니고 있으니……. 그것도 키가 훤칠하게 크면 덜한데, 도토리 키에 제 몸통보다도 더 넓은 통바지에다가 모자까지 옆으로 비틀고 눌러써서 코밑만 드러낸 모습은 더 가관이다. 아무리 제멋에 산다지만, 그렇게도 비정상의 파격적인 것이 좋다는 말인가. 병 주고 약 주는 상업주의 영상 매체의 덫에 걸려든 것은 아닌지 개운치가 않다.
주)
1)리 손당:‘리’는 북제주군 조천읍에 있는 마을의 속칭으로 지금의 ‘교래리’이고, ‘손당’은 북제주군 구좌읍에 있는 마을인 ‘송당’의 ‘송’이 ‘손’으로 전음된 것임.
2)마누라본풀이:‘일반신본풀이’ 12편 가운데 하나로서 마마신을 다스리는 주술을 담은 서사무가.
3)창신:밑창에 징을 박아 운두가 얕고 뾰족하게 코가 나온 가죽신.
4)산물:귤의 일종으로 자그마한 열매의 껍질에 뾰족뾰족 튀어나 있고 그 껍질은 진피라고 해서 한약재로 씀.
고재환
․1937년 제주 출생
․저서 제주속담총론 제주도속담사전 외
․제주교육대 명예교수 ․제주도문화재위원
- 이전글16호 연재-하이쿠 에세이②/김영식 08.02.23
- 다음글16호 리토피아 신인작품상/김지연 08.02.2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