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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임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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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976회 작성일 08-02-23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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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작품읽기【소설】

질병의 시대를 투시하는 SF적 시선
―이평재의 「사이랜, 사이랜」
(≪동서문학≫ 2004년 가을)

임준서(문학평론가)


1.
바야흐로 질병의 시대이다. 에이즈, 에볼라, 사스, 조류독감 등 도처에서 치명적인 질병이 창궐한다. 인류는 이 신종 질병들에 대해 무력하다. 높은 치사율과 강한 전염성, 그리고 예방백신의 부재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더 큰 공포는 이 질병들이 진화한다는 사실이다. 혹 백신이 개발되어도 병균들은 박멸되지 않는다. 금세 내성을 갖추어 끝없이 새로운 변종을 낳는다. 병균의 진화속도는 백신의 진화속도를 추월한다. 그리하여 강력한 백신이 더 강력한 병균을 낳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그런 점에서 신종 질병의 등장은 근대 문명의 위기를 시사한다. 질병의 실체를 밝혀 그 근원을 제거하면 건강에 이를 수 있다는 근대의학의 논리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질병은 의학의 발전을 비웃으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도처에 편재한 채 불특정 다수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가한다. 사람들은 앞 다투어 마스크를 착용하고, 타인과의 접촉을 피한 채 집안에 은둔한다. 세계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찬 거대한 병동이 된다. 질병의 내습은 이처럼 21세기 기술문명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2.
이평재의 「사이렌, 사이렌」(≪동서문학≫ 2004년 가을)은 이 질병의 시대에 대한 뢴트겐 필름이다. 소설은 화자인 구규가 호송차에 실려 격리병동에 수용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끌려온 이유를 알 길 없는 그는 최근 며칠간의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본다.
대학 강사인 그는 임용을 위해 최 교수에게 모은 재산을 몽땅 털어 바친다. 그리고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중요한 학술 발표를 펑크 내고 화가 지망생인 뮤와 충동적인 카섹스를 벌인다. 이후 그의 몸에는 이상 징후가 나타나고, 뮤도 종적을 감춘다. 뮤의 집을 방문한 그는 공포영화의 가면을 발견하고 묘한 해방감에 사로잡힌다. 가면을 쓴 채로 강의실에 들어가는가 하면, 급기야 최 교수를 폭행 치사하기에 이른다. 결국 보건복지부로부터 그에게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전염병에 감염된 사실이 통보되면서 소설은 종결된다.
이평재는 작품에서 ‘질병’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동시대 현실의 내부를 투시하고자 한다.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독한 포르말린 냄새이다. 그것은 도입부의 병실 풍경에서부터 감지된다. “침대 위에 짐짝처럼 놓여진” 화자의 모습은 “벽과 바닥이 온통 하얀” 병실과 대비되어 병적인 무력감을 환기시킨다. 아울러 장면 사이에 삽입되는 전염병에 관한 뉴스는 화자의 의식을 토막 내며 죽음을 암시하는 불길한 전조(前兆)로 작용한다.
이때 작품 전체에 드리운 이러한 병적인 분위기는 화자의 병적인 내면을 부각시키는 데 기여한다. 그렇다면 그의 병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도덕적 죄책감이다. 교수자리를 얻기 위해 “어머니가 닭 모가지를 비틀어 모은 재산을 몽땅 털어 최 교수에게 가져다” 준 데서 그는 심한 자기 모멸감에 빠진다. “그렇게 해서라도 교수가 돼야겠어?”라는 뮤의 말은 실상 구규의 독백이나 다름없다. 결국 이러한 자기 모멸이 그를 뮤와의 비정상적인 섹스로, 최 교수에 대한 살인으로까지 몰고 간 것이다.
여기서 작품의 전염병이 ‘정신병’으로 설정된 점은 의미심장하다. “멀쩡한 사람이 정신병자가 되는 괴이한 전염병”은 현실에 대한 일종의 은유이다. 교수자리를 놓고 돈이 오가고, 화가 데뷔를 위해 스스럼없이 옷을 벗는 세태. 구규에게 있어서 이는 비정상적인 광기의 세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되레 구규를 정신병자로 몰아 격리시킨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인지 내가 미친 것인지 분간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질병 모티프는 광기로 편만한 사회에 대한 패러디라고 할 수 있다.
후반부의 ‘가면’ 모티프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구규는 스크림 가면을 착용한 후부터 도덕적 중압감에서 해방된다. 여기서 가면은 질병과 마찬가지로 비정상적인 광기의 세계를 가리키는 기표이다. 가면의 어원은 페르소나(persona)로, 이는 ‘사회적 자아’ 혹은 ‘거짓 자아’라는 심리학 용어로도 쓰인다. 그런 점에서 가면은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세태에 대한 풍자이다. “봐, 가면 위에 가면을 쓰니까 훨씬 사람답게 보이잖아”라고 최 교수에게 내뱉는 구규의 말이 이를 웅변한다.
요컨대 작가는 신체적 질병을 빌어 이 시대의 정신적 질병, 도덕적 타락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전염병이 만연하는 시대를 관찰하며 역설적으로 정신의 환부를 투시하는 작가의 시선은 예리하다. 어쩌면 오늘날 신종 바이러스는 정신의 병듦, 가치관의 혼탁에서 유래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바이러스는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한 붉은 경고등이다. 물신에 사로잡혀 추악한 뒷거래도 서슴지 않는 광란의 세계에 울리는 불길한 사이렌이다.

3.
그러나 이평재의 문학적 개성은 단순히 은유로서의 질병을 부각시킨 데 있지 않다. 그보다는 이를 활용하여 소설적 재미를 생산하는 특유의 SF적 감수성에 있다. 소설은 도입부에서부터 공상과학물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스릴과 서스펜스를 유발한다. 위생복을 입고 방독면을 쓴 채 주름관이 달린 기구를 들고 하얀 기체를 뿜어대는 보건복지국 직원들의 모습, 바이러스의 창궐로 인해 폐허처럼 변모해 가는 도시의 풍경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나아가 뮤의 미스터리한 실종, 스크림 가면을 쓴 채 구규가 은사를 살해하는 장면 등 작품은 시종일관 지극히 비현실적인 상황을 그려 보인다. 작가는 기승전결이 뚜렷한 전통적 서사문법을 장면의 비약과 과장이 심한 SF의 문법으로 대체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비현실적 서사가 현실의 진상을 왜곡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되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 소설의 ‘구조적 질병’이 역설적으로 현실의 질병 상태를 더욱 뚜렷이 부각시킨다고나 할까.
문제는, 작가의 이 새로운 감수성이 얼마나 치밀한 서사 전략으로 승화될 수 있는가에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이평재의 소설은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갖게 한다.



임준서․
1969년생  ․200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등단
․현재 고려대, 숭실대 강사

추천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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