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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신작단편/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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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875회 작성일 08-02-23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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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리지가 있는 풍경

김종성



1.
내가 연리지(連理枝) 조각품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샘골 사거리에 거상마트가 들어오던 날 남편한테서였다. 안라국(安羅國)의 왕궁지(王宮地)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성산산성의 펄층에서 다량의 목기(木器)와 목각을 비롯한 목간(木簡), 무경식암막새기와, 귀신얼굴막새기와, 연꽃문양막새기와, 뚜껑 등이 출토되었다. 신라의 지방 지배와 관련된 내용이 적힌 목간이 출토되어, 성산산성이 축조된 시기와 유물들이 만들어진 시기는 대략 6세기 중반 이후로 추정된다. 그러나 유적의 아래층에서 5세기 대의 가야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성산산성이 처음 축초된 시기는 가야시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고목재학(考古木材學)을 전공한 남편은 펄층에서 출토된 다량의 목기(木器)에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고고목재학이 옛 나무의 재질과 보존 방법을 연구하는 분야인지라, 남편은 펄층에서 1600년 동안 썩지 않고 온전히 보존되어 온 삼국시대의 나무에 대해 관심이 컸다. 더군다나 나무로 연리지를 형상화한 조각품이 출토되었다는 이야기를 고등학교 후배로부터 전해들은 남편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함안에서 좀 떨어져 있는 창원문화재연구소로 옮겨져 보존처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남편은 아침 산책을 갔다 온 후 줄곧 책상에 앉아 도록(圖錄)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함안박물관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분지로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역인 함안은 지형적으로도 농경문화가 일찍 싹 틀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야.”
검은 테 안경과 창백한 얼굴빛으로 인해 언뜻 차가운 인상을 주는 남편이 도록을 넘기며 말했다.
“가야(加耶) 하면 금관가야와 대가야만 보통 이야기하는데 아라가야도 세력이 상당했다지?”
내가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야사를 보통 전기 가야시대와 후기 가야시대로 나누지. 전기 가야시대에는 김해에 있던 가락국(금관가야)이, 후기 가야시대엔 고령에 있던 대가야(반파국)가 우이를 잡던 나라라고 알려져 있는데, 안라국(아라가야)도 그에 못지않은 세력을 가지고 있던 나라였다는 게 함안 지역에서 출토되는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 드러나고 있지. 이번에 성산산성 펄층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지.”
남편의 도수 높은 안경알 속에서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연리지 조각품은 어디서 보관하고 있어?”
내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마 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 중일걸.”
남편이 짧게 대꾸했다.
“오늘 하루 종일 책상에만 앉아 있을 셈이에요? 약수터에 갔다 와요.”
내가 남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럴까?”
남편이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102동 옆에 하얀 자태를 뽐내고 있던 자작나무들이 모두 목이 댕겅 잘린 채 서 있었다. 어제 저녁까지 멀쩡하던 나무들이었다. 일순 남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가 이 나무들을 이렇게 잘랐어요?”
나의 목소리가 톡 튀어 올랐다.
중앙경비실에 앉아 있던 경비원 박씨가 모자를 고쳐 쓰고 다가왔다.
“608호 장씨가 잘라라 해서 잘랐습니다.”
경비원이 쭈뼛거렸다.
“가지가 뻗어 나왔으면 가지치기를 하면 되지, 이렇게 나무를 기둥줄기만 남기고 우듬지부터 싹둑 잘라내면 어떻게 합니까?”
남편이 경비원 박씨를 바라보며 말끝을 잘라냈다.
“아저씨, 나무도 생명이 있는 건데, 저렇게 무참히 자르면 어떻게 해요.”
나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물기가 묻어 있었다.
“608호 장씨가 나뭇가지 때문에 화물차가 다니는데 지장이 많다고 난리를 쳐서…….”
경비원 박씨의 길쭉한 얼굴이 모닥불을 뒤집어쓴 것처럼 벌개졌다.
남편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앞장서서 걸어갔다. 남편은 자작나무를 좋아했다. 자작나무는 껍질이 하얗게 벗겨지는 나무였다. 경주 천마총에서 나온 그림이 바로 자작나무 껍질에다 그린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종이를 발명하기 전에는 경전(經典) 같은 것들을 자작나무 껍질에 썼다는 것이다. 더구나 남편의 고향으로 가는 길에 꼭 넘게 되는 태백산 굽잇길에 가로수로 심어놓은 나무들이 자작나무였다. 아파트 단지의 출입구로 들어오는 길가에 심어놓은 자작나무들은 잘 자랐다. 남편은 자작나무들을 바라볼 때마다 태백산 굽이 길의 자작나무를 생각하고 경주 천마총의 천마도를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 아파트에 정나미가 떨어졌어.”
남편이 뒤돌아서서 걸음을 멈췄다.
“이사를 가든지 해야겠어.”
잠자코 걷던 내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골프연습장 만든다고 아파트 단지 안의 주목을 캐다가 팔아먹지를 않나……. 벽면을 도색한다고 단풍나무와 벚나무를 밑동부터 잘라버리지 않나…….”
남편이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걸 어떻게 다 알고 있어?”
“난 우리 아파트 단지 안에 나무가 몇 그루 있는 줄도 다 안다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그린아파트 단지는 48평짜리가 두 동, 35평짜리가 한 동, 그리고 32평짜리가 한 동 들어서 있다.
모롱이를 돌자 돈사가 여러 채 나타났다. 돈사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돈사 곁의 도랑으로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골짜기가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바짓가랑이에 관목의 잎들이 스쳤다. 진달래들이 군락을 이루고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플라스틱 물통을 든 사람들이 샛길을 내려왔다.
“약수터에 사람 많아요?”
내가 점퍼 차림의 사내에게 물었다.
“열댓 명 있어요.”
점퍼가 짧게 대꾸했다.
약수터 앞에는 물통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나는 플라스틱 물통을 줄의 맨 끝에다 내려놓았다. 소나무 옆에 세워놓은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에 왔을 때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안내판의 글자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이 약수터는 샘골 새마을부녀회에서 조성하여 개방하는 것이오니 감사한 마음으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샘골 새마을부녀회 일동.”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어 약수터의 북쪽 비탈을 바라보았다. 연리지 소나무 위로 햇빛이 부서졌다. 연리지 소나무는 어느 날 문득 남편의 눈에 들어왔다. 전임 자리가 점점 멀어져가자 남편은 서재에만 틀어박혀 좀처럼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뒷산에 약수터가 있는데 같이 가자고 설득하여 약수터에 오르내린 지 한 달쯤 되던 어느 날이었다. 약수를 받기 위해, 들고 간 플라스틱 통을 고무호스 밑에서 뻗어 나온 줄의 맨 끝에 내려놓고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비탈을 쳐다보던 남편의 시선이, 북쪽 비탈에 나란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소나무 두 그루에 가 멎었다. 위쪽에 있는 소나무의 굵은 가지 하나가 뻗어 내려와 아래쪽에 있는 나무를 잡아당기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20년쯤 되어 보이는 연리지였다. 연리지는 서로 가까이 있는 두 나무가 자라면서 하나로 합쳐지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처음에는 그저 가지끼리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맞닿은 자리가 붙어 한 나무로 변한 것이다. 이렇게 연리지가 된 가지는 두 번 다시 떨어지지 않는다.
떠들썩한 소리와 함께 노란 빛깔의 트레이닝복들이 나타났다. 모두 녹색 모자를 쓰고 손에는 플라스틱 물통을 들고 있었다. 윗옷의 등에는 ‘샘골 새마을부녀회’라고 씌어 있었다.
“아, 상쾌하다아.”
살집 좋은 몸집의 목련나무집이 커다란 물통을 땅바닥에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목소리는 매주 수요일 타이탄 트럭을 끌고 아파트 단지 안에 들어와 채소를 파는 아주머니의 그것보다 더 우렁찼다.
“아따, 양남에서 샘골처럼 공기 좋고 물맛 좋은 데가 어디 있나유.”
호박씨로 찔러놓은 듯한 눈의 여자가 오른쪽 어깨를 으쓱했다.
“한참 걸었더니 목이 칼칼하네…….”
볼이 넓은 여자가 바가지를 호스 밑으로 들이밀었다.
호스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빈 주스병에 받고 있던 207호 여자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언 무우빛처럼 푸르딩딩한 얼굴을 보고는 207호 여자가 주스병을 들고 뒤로 한발짝 물러섰다.
“물맛 한번 조오타아…….”
바가지 가득 샘물을 받아 들이켠 여자가 호기심에 찬 눈길로 207호 여자의 날씬한 몸피를 훑어 내리고는 다시 바가지를 호스 밑으로 들이밀었다.
“회장님, 죽 들이켜봐유.”
볼이 넓은 여자가 물이 가득 담긴 바가지를 목련나무집에게 건넸다.
나는 목련나무집의 살집 좋은 몸집을 일별하고는 플라스틱 물통을 줄의 맨 끝으로 당겨놓았다.
그린타워아파트에 입주한 지 한 1년이 채 안 되었을 때였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앞이 시끌시끌했다. 샘골 원주민들과 아파트 주민들이 서로 고함을 지르며 뒤엉켰다. 그린타워아파트도 엄연히 샘골마을에 속해 있으므로 한 가구당 1만원씩 이장 세를 내야 해유. 샘골 이장이 말했다. 이장이 마을을 위해 수고하고 있으므로 1년에 한번씩 수고의 대가로 예전에는 곡식을 얼마씩 거두어 주었는데 지금은 현금으로 준다는 설명을 이장이 했다. 샘골서 더불어 살려면 이장 세를 꼭 내야지유. 목련나무집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파트에는 관리사무소와 입주자 대표회가 있고 부녀회도 따로 있는데 이장 세를 왜 내느냐 말야. 1307호 여자였다. 니 말 잘했다. 니가 언젯적부터 아파트 주민이니? 낮은 데 살다가 높은 데 가 사니까 눈에 뵈는 게 없냐? 목련나무집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촌년이 부녀회장 되더니 눈에 뵈는 게 없냐? 니가 이장 여편네라도 되냐? 설치긴 왜 설치니. 뭐 촌년? 이게 찢어진 아가리라고 함부로 쳐 놀리네. 그날의 맞손질은 용동면 지서에서 경찰관들이 출동하고서야 끝났다.

2.
거상마트는 사흘째 개점기념 판촉행사를 하고 있었다. 첫날보다 사람들이 줄어들었지만, 매장 안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복잡했다.
오늘 주부님들을 모실 상품은 영광굴비세트입니다. 영광굴비세트를 이십 프로 할인해서 판매하고 있사오니 많이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금테 안경을 쓴 사내는 마이크를 잡고 연신 떠들어대고 있었다. 목련나무집이 카트카를 밀며 다가왔다. 카트카에는 상품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나를 힐끗 한 번 쳐다보고는 계산대로 카트카를 밀고 갔다.
식품코너에서 두부와 콩나물을 산 나는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내와 휴대전화를 손에 든 이십대 후반의 사내가 공중전화부스 옆에 두꺼운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목청을 돋웠다.
“아, 이렇게 두꺼운 동화대백과사전 28권을 단 돈 2만원에 파는 사연을 들어보세요. 우리 동화출판사가 저명한 학자인 이석명 박사님께 일일이 감수를 받아 편찬한 동화대백과사전을 단 돈 2만8천 원에 파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백과사전을 한 권씩 펼쳐들고 연신 입을 놀려대는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화출판사에서 우리 회사에 어음 쪼가리를 끊어주고 종이를 사 갖고 가서는 백과사전을 왕창 찍고는 부도를 내고 도망쳤다 이 말입니다. 악덕 동화출판사 때문에 우리 한세제지회사마저 부도 위기에 몰리게 되어 종이를 팔던 우리들이 직접 거리로 책을 팔러 나오게 된 겁니다.”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내의 입가에서 거품이 일고 있었다.
“이 책 정말 한 권에 천 원이에요?”
목련나무집이 백과사전을 펼쳐보며 물었다.
“방금 들으신 대로 출판사가 쫄딱 망했기 때문에 종이 값으로 드리는 겁니다. 동화대백과사전 28권을 사시는 독자분들에게는 문화출판사에서 나온 대옥편 한 권, 민중출판사에서 나온 고사성어사전 한 권을 보너스로 드립니다.”
휴대전화기를 손에 든 사내가 말했다.
“정가는 얼마입니까?”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백과사전은 정가가 98만원입니다. 대옥편하고 고사성어사전까지 합하면 정가가 108만 원입니다. 2만8천 원이면 이자도 안 되는 돈입니다.”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내가 나를 일별했다.
“싸긴 되게 싼데…….”
“사야만 싼 거지 사지 않으면 안 싼 거지요.”
휴대전화기를 손에 든 사내가 말했다.
“이거 몽땅 주세요.”
목련나무집이 동화대백과사전을 가리켰다.
“예, 예.”
휴대전화기를 손에 든 사내가 연신 고개를 꾸벅거렸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싸다고 책 사다놓으면 계륵(鷄肋)이 되어버려.”
“계륵은 괜찮게. 아예 쓰레기가 되어버려, 치우기도 곤란한.”
삼십대 초반의 여자 둘이 이기죽거렸다.
나는 집어 들었던 고사성어사전을 책더미 위에 슬그머니 내려놓고 허리를 세웠다.
버스가 정류장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버스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버스 안은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핫도그를 입에 물고 있는 여학생 옆의 남학생은 만화책에다 머리를 박고 연신 낄낄거리고 있었다.
애인 구함. 나이 16세. 용구여중 삼학년. 017- 375- 000 양남여고생들은 모두 내꺼다. 양남농업생명산업고 이춘삼. 버스 유리창 옆에 어지럽게 씌어 있는 낙서에서 눈길을 떼며 나는 입맛을 쩍 다셨다.
버스가 목련나무 집 앞 정거장에 멈췄다. 목련나무집 마당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목련나무를 포크레인이 커다란 삽으로 파 올리고 있었다. 목련나무집은 커다란 목련나무가 있어 마을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었다. 목련나무집은 그린타워아파트 1307호 여자와 동기간이나 다름없이 샘골에서 30년을 살아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도 같이 다니고 교회도 같이 다녔다. 목련나무집은 1307호 여자네 땅위에다 집을 짓고 살아왔다. 그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린타워아파트가 샘골에 들어서자, 샘골 일대의 땅값이 올라갔다. 1307호 여자네가 샘골의 땅을 팔게 되었다. 평당 1백만 원에 집터를 사라고 했다. 평당 1백만 원을 줄 수 없다고 맞섰다. 지상권을 주장하며 도로 땅위의 집을 사라고 나섰다. 다 낡은 집을 누가 사느냐고 1307호 여자네가 버텼다. 결국 목련나무집은 평당 1백만 원에 땅을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저 나무 밑에서 화투도 치고 잠도 자고 그랬는데 아쉽구먼.”
“왜 저 나무를 파 옮기는 거지.”
“집을 헐고 그 자리에 1층에는 가게를 짓고 2층과 3층에는 원룸을 짓는다지 아마.”
“이젠 양남도 옛날 양남이 아니야. 하루가 다르게 상가와 집이 들어서고 있어.”
맥고모자를 쓴 사내가 차창 뒤로 물러서는 목련나무집에서 눈길을 떼며 중얼거렸다.
양남은 서울의 동남쪽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농촌 마을이었다. 군청이 있는 양남읍내 가까이로 4차선 고속화도로가 뚫리자 서울로 가는 교통로가 좋아졌다. 고층아파트단지가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집값이 서울의 전세 값도 안 되었다. 우리는 전세를 빼서 서울을 떠나 양남으로 이사를 왔다. 그것이 재작년 일이었다. 남편은 양남으로 이사 온 것을 무척 흡족해 했다. 바로 옆에 광릉숲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학교 강의가 없는 날은 광릉숲길을 걷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었다. 아마 남편은 숲길을 걸으면서 가슴에 깊게 패인 상처를 치유하는 것 같았다.
1980년 10월 경상남도 김해에서 다리 공사를 위해 굴착 공사를 하다가 펄층에서 가야시대 선박이 발견되었다. 선박 안에는 다량의 철정과 철기, 그리고 도자기들이 발견되었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부정하는 획기적인 유물이라고 크게 보도했다. 문제는 엉뚱한 데서 터졌다. 남편은 펄층에서 썩지 않고 1천6백여 년을 견뎌낸 선체(船體) 나무의 재질(材質)을 분석하여, 1981년 4월 한국임학회(韓國林學會) 봄 총회 때 결과를 발표했다. 일본에만 자라는 삼나무로 선체가 만들어졌다는 내용이 포함된 논문이었다.
학술 발표장을 막 빠져나오는데 대동일보 기자가 남편에게 다가왔다. 인터뷰를 하자는 것이었다. 남편은 어리둥절하였으나 나쁠 것도 없다는 생각에 인터뷰에 응했다. 일본산 삼나무로 선체를 만들었으니 일본 배일 것이라는 기자의 추정이 더해져 특종기사가 되어 대동일보의 일면에 머리기사로 실렸다. 일본의 매스컴들이 가만둘 리 없었다. 일본 아사히신문, 요미우리신문에 보도되고 엔에이치케이 방송까지 탔다. 급기야는 우리나라의 조선일보․동아일보에도 기사가 보도되고, 한국방송 9시 뉴스와 문화방송 9시 뉴스데스크에도 보도되었다. 언론의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뒤 일주일쯤 지났을 때 국가안전기획부에서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남편이 국가안전기획부 요원을 학교 앞 다방에서 만났을 때 그는 “고위층이 기사 내용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 무렵은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1년이 채 안 되는 시기였다.
국가안전기획부 요원은 연구 동기부터 죄인 신문하듯 물었다. 신상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 신상명세서를 작성하고 난 뒤, 연구 때 사용한 표본을 직원을 보낼 테니 안기부로 제출하라는 명령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남편은 마흔넷에 겨우 얻은 전임강사 자리도 위태로워졌고, 매일 밤 불안에 떨어야 했다. 정부에 눈치를 보는 대학당국은 남편이 국가안전기획부 요원에게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통보받고 다음 학기부터 강의 배정을 하지 않았다. 그 자리는 남편이 동기처럼 아끼는 후배가 차지했다. 나도 남편의 후배를 알고 있었다. 남편이 시간강사 자리도 주선해주고, 학술서 출간도 출판사에 연결해주기도 했다. 후배가 학과장을 통해 학교재단 이사장에게 접근해 전임강사 자리를 차지하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남편은, 광릉숲으로 내려간다는 전화를 하고는 일주일 동안 연락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을버스가 삼사미로 들어서자 그린타워아파트 단지의 옥상에 솟아 있는 이동통신 기지국의 안테나가 햇빛을 받아 반짝 빛났다. 샘골 정육점 앞에 늙수그레한 청년들이 쪼그리고 앉아 돼지비계를 몇 점 놓고 소주잔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마을버스에서 내리는 아파트 여자들에게 눈길을 힐끗힐끗 주며 엉덩이를 달싹거렸다.
영어학원 차가 타워아파트 정문을 막 빠져나가고 있었다. ‘영어는 유아 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경쟁에 뒤지게 됩니다.’라는 광고문을 뒤꽁무니에 두른 영어학원 차가 사라지자, 글짓기․논술학원 차가 아파트 정문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린타워아파트가 입주가 시작되던 날, 제일 먼저 아파트로 달려 온 사람들이 학원 사람들이었다. 아파트 입구에 봉고차를 세워놓고 공책과 책가방을 나눠주면서 학원 선전에 열을 올렸다. 속셈학원, 미술학원, 피아노학원, 글짓기학원, 그리고 영어학원에서 나온 사람들로 며칠간 아파트 정문 앞이 시장판처럼 북적였다. 그 가운데 영어학원에서 나온 사람들은 공룡모형을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아이들은 공룡모형을 서로 받으려고 아우성을 쳤다. 공룡모형을 뿌린 탓인지 아파트 아이들 가운데 영어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많았다. 노란 빛깔의 영어학원 차는 하루에도 서너 차례 아파트 단지를 누비고 다녔다.
엘리베이터가 멎었다.
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자 번호판에서 17을 눌렀다. 1307호 여자가 재빨리 열림단추를 손가락으로 누르고 밖을 향해 소리쳤다.
“제인, 허리 업.”
1307호 여자가 손을 앞으로 내저었다.
아이가 쪼르르 뛰어왔다. 그제야 1307호 여자가 열림단추에서 손가락 끝을 뗐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제인아, 5를 영어로 뭐라 하지?”
“화이브.”
“7은?”
“세븐.”
“아이 잘하네. 우리 제인 참 잘했어요.”
“우리 언니네가 대치동에 사는데 거기 사는 엄마들은 간단한 대화 정도는 아이와 영어로 대화하거나 서로들 로버트 엄마, 줄리엄마라고 부른데요.”
408호 여자가 말했다.
“어머 그래요.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도 아이들과 간단한 대화는 영어로 하는 게 어떨까요? 동산택지개발지구의 잉글리시 빌리쥐라든가 하는 아파트 단지는 주민 전체가 영어를 사용한다잖아요.”
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호호호, 민규 엄마는 아직 모르고 있었구나. 우리 아파트 부녀회원들은 벌써부터 간단한 대화는 영어로 하고 있어요.”
1307호 여자가 말했다.
엘리베이터가 13층에 멈췄다.
“민규 엄마도 차 한잔 하고 가세요.”
“그래도 되겠어요?”
“주님 안에서는 모두 이웃이고, 형제가 아닌가요?”
나는 1307호 여자와 408호 여자를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
1307호 여자가 길쭉한 얼굴 전면에 웃음꽃을 피우며 금세라도 날아갈 것처럼 날개를 펼치고 서 있는 박제독수리 옆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커다란 주목 조각품이 서 있었다.
“글쎄, 이번에 마음먹고 하나 샀지요. 주목(朱木) 뿌리로 만든 조각품이에요.”
“참 좋은 작품을 구했네요.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썩어 천 년, 합해서 삼천 년을 이어간다는 주목이라잖아요.”
“어떻게 주목을 아세요?”
“주목 하면 태백산이 유명하잖아요. 애기아빠가 고향이 강원도 태백이에요.”
내가 말했다.
딩동동, 딩동딩동……. 초인종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1307호 여자가 급한 걸음으로 현관으로 내달았다. 목련나무집이 살집 좋은 몸집을 현관 안으로 들이밀었다.
“니가 웬일이니?”
1307호 여자가 문을 닫으며 말했다.
“왜 내가 너희 집에 오면 안 되니?”
목련나무집이 말끝을 높였다.
“안 되긴……, 어서 들어와.”
“손님들이 있었네.”
목련나무집이 오른손에 들고 있던 누런 서류봉투를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1307호 여자가 찻잔을 다탁 위에 내려놓았다.
“시청에서 4백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쓰레기 소각장에서 나오는 소각잔재 매립장을 샘골에 조성하기로 했는데유, 매립장을 유치하는 마을에는 시청에서 대대적으로 투자를 해서 마을을 개발시켜준다는 거예유. 지금 서로 매립장을 유치하려고 야단인데 샘골에서도 이장님을 비롯하여 새마을지도자님과 반장님들이 매립장을 유치하려고 적극 노력하기로 했어유. 아파트 주민들도 함께 힘을 합쳐주었으면 해유.”
목련나무집이 말을 마치고 커피잔을 앞으로 당겨 입으로 가져갔다.
“쓰레기 소각잔재 매립장이 들어오면 아파트 값 떨어지는 게 불을 보듯 뻔한데 누가 찬성할까?”
1307호 여자가 목련나무집을 빤히 바라보았다.
“…….”
“아파트 입주민들로서는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지요.”
408호 여자가 침묵을 밀어내며 말했다
“뉴스에도 자주 나오지만, 쓰레기를 태울 때 나오는 다이옥신이 큰 문제인데……, 쓰레기 소각잔재 매립장을 자청해서 유치하자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1307호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환경시설을 다 싫다고 하면 어떻게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어유. 국가적 차원에서 문제를 풀어나가야지유. 하여간 난 새마을부녀회의 뜻을 아파트부녀회에 전달하러 온 거니까유.”
목련나무집이 허리를 세워 일어섰다. 1307호 여자가 목련나무집을 따라 현관으로 나갔다.
거실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좋은 말씀도 많이 듣고…….”
나는 커피잔을 다탁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내가 인터폰을 누르자 민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현관문을 닫고 거실로 들어섰다.
“어딜 갔다 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던 남편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모습은 빈 수수깡 같았다.
“시내 할인마트에 가서 장 좀 보고 오다가, 부녀회장 집에 들렀다 오는 거야.”
“부녀회장 집엔 왜?”
“우리 마을에 문제가 생겼는가봐. 광릉수목원 옆에 소각잔재 매립장을 짓는대.”
내가 식탁 위에 장바구니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누가 그래?”
“샘골 부녀회장이 1307호에 왔었거든. 그 여자한테 들은 이야기야.”
“샘골 부녀회장?”
“응. 우리 동네는 부녀회가 둘 있는데, 원주민으로 이루어진 샘골 새마을부녀회가 있고, 우리 아파트 입주민들로 이루어진 아파트부녀회가 있어.”
“그렇다면 이미 양남시청은 샘골에다 매립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했을 거야. 그래 놓고는 새마을부녀회라든가 마을 이장, 새마을지도자 등을 바람잡이로 내새워 여론몰이를 하는 거지.”
“그래요? 그러면 이거 예삿일이 아니네.”
“큰일이지……. 광릉수목원은 절대보존림 지역으로 요즘은 주말 입장도 제한되고 평일에도 예약을 해야 갈 수 있는 곳이야. 그리고 광릉숲은 우리나라 나무들의 종자 은행 역할을 하고 있고, 조선시대부터 이 숲의 가치를 높이 사서 보존해 온 곳인데……, 이 광릉 숲 바로 옆인 샘골에 쓰레기 소각잔재 매립장을 건설하다니……. 허, 참…….”
남편이 말끝을 흐렸다.
“4백억의 예산을 들여서 2006년까지 완공할 계획이래.”
“광릉숲 전체는 조선시대 세조 이래 국가에서 6백년간 보존해 왔고, 특히 일제 때도 일본이 백 년 계획을 세웠을 정도로 굉장히 중요한 숲이야. 이것은 단순히 이 숲이 좋다는 차원이 아니라 한반도 생태계의 표본관이며 유전자원은행이야. 이곳이 파괴되면 향후 전국의 파괴된 곳을 복원할 수 있는 근본 종자들이 말살돼.”
“광릉숲이 파괴된다면 우리나라의 생태나 산림의 미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네.”
“그렇지. 88올림픽 때 외국인들에게 선전을 하기 위해서 광릉숲 관통 도로를 만들었지.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광릉숲에 찾아오면서 숲이 파괴되기 시작했지.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부에서는 97년에 종합대책을 세우고 평일에만 예약제로 출입을 허용하고, 주말에는 출입을 금지시켰지.”
나는 겉옷을 걸치고 발코니로 나갔다. 시원한 밤바람이 달려들었다. 나는 고개를 길게 빼고 멀리 길 건너편 돈대를 바라보았다. 성냥갑만한 샘골장로교회의 이마에 솟아 있는 십자가 불그스름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교회 담장 옆에 기대다시피 붙어 있는 두리통닭집의 아크릴 간판이 파르스름한 빛을 두 평 남짓한 앞마당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나의 시선이 아크릴 간판에 가 멎었다. 아기공룡이 닭다리 하나를 들고 있는 간판이 우스꽝스러웠다. 촌스럽긴. 나는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붉은 불꽃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양남 쓰레기 소각장의 굴뚝에서 새어 나오는 불꽃이었다.

3.
스피커에서 관리사무소 아가씨의 긴장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 주 금요일 오전 10시에 시청 옆 중앙공원에서 쓰레기 소각잔재 매립장 건설 저지 입주민 총궐기대회가 있으니,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부녀회 임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관리사무소 2층 부녀회 사무실로 나오라는 내용을 아가씨가 반복해서 말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벌써 일주일째였다. 어이구 지겨워. 이젠 그만해도 될 텐데.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며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부녀회원들이 유인물을 들고 각 세대를 방문하여 총궐기대회 참석을 독려했다. 1307호 여자는 매립장이 아파트 단지 옆에 들어서면 재산상의 손해가 초래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파트 단지 여기저기에 플래카드가 내걸리기 시작했다. ‘가자! 중앙공원으로! 그린타워아파트 입주민 총궐기대회’라고 씌어진 붉은 글씨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금요일 아침이 밝아왔다. 아파트 단지가 술렁이고 있었다. 보도를 밟는 발자국 소리가 발코니창으로 줄기차게 뛰어올라왔다.
“입주민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드디어 결전의 아침이 밝아왔습니다. 오늘 오전 10시에 시청 옆 중앙공원에서 쓰레기 소각잔재 매립장 건설 저지를 위한 입주민 총궐기대회가 있습니다. 입주민 여러분은 한 가구도 빠짐없이 아파트 정문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관광버스 3대를 대절하여 놓았습니다. 우리 재산을 지키고 쾌적한 환경 아파트를 만들기 위서 우리는 반드시 매립장 건설을 저지해야 합니다. 이번 총궐기 대회에 참석하지 않는 세대는 벌금을 부과하기로 했사오니 적극적으로 참가하시기를 요청합니다. 이상은 부녀회에서 알려드렸습니다.”
나는 설거지를 미뤄놓은 채 관리사무소 앞으로 갔다. 아파트 여자들이 마치 소풍이라도 떠나는 듯이 손에는 가방을 하나씩 들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파트 정문 앞에는 관광버스 세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입주민 여러분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 이벤트 회사에다 전체 진행을 맡기기로 했어요. 모갯돈이 들지만, 양남시청의 촌놈 근성을 확 뿌리 뽑아 버릴려고 해요. 이번에 우리의 거사를 위해 608호 장 선생님은 생업을 제쳐두고 자원하여 운전을 맡으셨습니다. 자, 장 선생님 우리의 거사를 위해 한말씀…….”
1307호 여자가 마이크를 608호 사내에게 넘겼다.
“우리 모두 쓰레기 소각잔재 매립장 건설을 결사반대하여 우리 재산을 지킵시다. 파이팅.”
608호 사내가 마이크를 높이 치켜들며 소리쳤다. 파이팅! 파이팅! 까르르 웃음소리가 버스 안을 가득 채웠다. 순간 버스가 왼쪽으로 기우뚱 했다. 608호 사내가 핸들을 오른쪽으로 급히 꺾었다.
관광버스가 시청 옆 중앙공원에 바퀴를 멈췄다. 관광버스가 그린타워아파트 입주민들을 인도에 토해 놓았다. 경찰 사이드카가 사이렌을 울리며 몰려오고 철망을 친 경찰버스가 미끄러져 왔다. 시청과 중앙공원 사이 도로는 사람과 차가 뒤엉켜 발을 들여놓기조차 어려웠다. 그린 타워 아파트 입주민들은 전국노래자랑 경연장에 온 사람들처럼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뿌리며 “결사반대, 쓰레기 소각잔재 매립장 건설!”이라고 씌어진 플래카드 걸려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그린타워아파트 여자들의 용역을 받은 이벤트 업체가 미리 와 땅바닥에 그냥 앉도록 돗자리를 단체로 주문해 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동화장실을 3칸 실은 트럭과 생수를 실은 타이탄 트럭이 현장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1307호 여자의 지시로 아파트 주민들이 일사분란하게 돗자리를 공터에 깔았다.
이벤트 업체 진행자가 공터 한가운데에 마련된 연단 앞에서 빨간 모자를 꾹 눌러쓰고 시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물 맑고 공기 좋은 양남에서 오래오래 살려고 했더니 쓰레기 소각잔재 매립장이 웬 말이냐, 웬 말이냐. 빨간 모자가 마이크를 잡고 소리쳤다. 웬 말이냐. 웬 말이냐. 웬 말이냐. 아파트 여자들이 하얀 손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며 소리쳤다.
이벤트 업체가 매달아 놓은 스피커에서 가요가 흘러나왔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자,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힘차게 부릅시다.”
빨간 모자가 흰 장갑을 낀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아파트 여자들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불렀다. 어깨를 좌우로 흔들 때마다 1307호 여자의 젖가슴이 출렁였다. 408호 여자는 연신 악보에다 눈길을 꽂은 채 입을 크게 벌리고 노래를 불렀다.

깨어나서 외치는 끝없는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잘 살고, 모두 스카이 대학 나왔지요?”
빨간 모자가 목 가다듦을 한 번 하고 나서 소리쳤다.
“예.”
아파트 여자들이 손을 높이 치켜들 때마다 목덜미를 미끄럽게 타고 내린 속살이 젖가슴께에 이르러 깊은 고랑을 이룬 게 살짝살짝 드러났다. 왕왕거리는 스피커 소리가 줄기차게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날아와 나의 고막을 잡아당겼다. 중앙공원 옆 도로가에 철조망을 친 버스들이 미끄러져 와 바퀴를 멈췄다. 방패를 앞세운 전경들이 버스에서 내렸다. 빨간 모자가 스피커를 통해 계속 금속성 목소리를 사람들 사이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양남시청에서 환경과장이 누런 서류 봉투를 든 사내와 함께 나타났다.
“고층 아파트 단지 옆에 쓰레기 소각잔재 매립장을 건설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아파트 단지와 매립장 사이의 거리는 약 8백 미터밖에 안 되고 아파트 발코니에서 보면, 도로 건너편에 매립장이 보이는 상황입니다. 문제는 92년부터 매립장 건설 계획을 세워두고도 바로 옆에 주택 단지가 들어서도록 승인했고, 또 그 주민들에게 바로 옆에 매립장이 들어설 것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내년에는 이 매립장 바로 밑에 외국어 고등학교가 들어설 예정인데도 매립장 건설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는 겁니다. 쓰레기를 태우고 난 소각잔재가 다이옥신 덩어리라는 걸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1307호 여자가 환경과장을 향해 삿대질을 해댔다.
“양남시에서는 매립장 부지를 선정하면서 환경성 검토도 했고, 양남시 관내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도 고려했고, 환경부 등 관계 기관과의 협의를 거쳐서 부지를 선정했습니다. 이 매립장이 광릉 숲으로부터 약 4백 50미터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광릉숲 경계로부터 20미터 이상 떨어져 있으면 매립장 건설이 가능하다는 회신도 환경부로부터 받았습니다. 양남시는 다이옥신이나 중금속은 비산재에 포함돼 있고, 바닥재는 그렇게 환경적으로 위험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번에 건설되는 매립장에는 바닥재만 매립하는 데다가 갖가지 안전 조치를 취하기 때문에 환경적으로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파트 여자들의 등등한 기세에 무르츰해진 환경 과장이 무겁고 웅근 목소리로 말했다. 바람이 불어와 희끗희끗한 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고 지나갔다. 기름기가 번들번들한 이마가 드러났다.
“밤작업은 잘하게 생겼어.”
207호 여자가 나의 귓전에다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광릉숲 옆에 매립장 시설을 허가한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되는데요.”
“무조건 반대만 하지 말고 대안을 내놓으세요, 대안을.”
“우리들의 대안은 일단 쓰레기 매립장을 설치하더라도 처음부터 입지선정위원회 등 투명한 절차를 거쳐서 해야 된다는 것이구요. 현재 이 잔재를 재활용할 수 있는 기술도 나오고 있고, 정부에서도 이 실험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쓰레기 소각 잔재를 그냥 묻는 매립지가 아닌 새로운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양남시의 경우는 신기술 도입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또 당장 양남시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김포 수도권 매립지로 보내고 있는데, 수도권 매립지에서는 양남시가 자체 매립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더 이상 쓰레기를 받지 않는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매립장 건설을 계속 추진해야 합니다.”
환경과장이 목울대가 움직이도록 입에 괸 침을 삼켰다.
“되지도 않은 소리 집어치세요.”
408호 여자가 말허리를 꺾고 나서 뒤돌아섰다. 그녀는 부녀회 총무를 맡고 있었다.
환경과장이 굳은 얼굴로 시청을 향해 걸어갔다. 아파트 여자들이 그의 등에다 우우 하고 야유를 보냈다.
“자자, 제가 선창을 하면 피켓을 높이 치켜드세요.”
빨간 모자가 말했다.
“깨끗한 환경 속에 살자고 왔더니 다이옥신이 웬 말이냐?, 매립장이 웬 말이냐?”
“웬 말이냐?”
“웬 말이냐?”
아파트 여자들이 피켓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4.
퀴퀴한 냄새가 엘리베이터 안에 맴돌고 있었다. 나는 코를 킁킁거리며 남편의 뒤를 따라갔다.
“어딜 가세요.”
408호 여자가 다가왔다.
“약수 뜨러 가요.”
내가 플라스틱 물통을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자, 방송소리가 바람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다시이 하안 번 알려어 드립니이다. 부라악미인 여러부운…….
청대문집 할아버지가 두엄을 밭이랑에 깔고 있었다. 돼지 똥냄새가 강하게 코를 자극했다. 408호 여자가 그에게 다가갔다.
“아휴. 이 지독한 냄새, 할아버지 그거 똥 아네요?”
408호 여자가 오긋하니 둥근 주걱턱을 치켜들었다.
“돼지똥 두엄이유, 왜 그러시유?”
키가 작고 몸집이 왜소한 청대문집 할아버지가 이마 위로 오송송하게 솟은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으며 되물었다.
“저기 저 아파트부녀회 총무인데요……. 아휴, 지독한 냄새……. 고층 아파트 옆에다 똥거름을 퍼부어 대다니, 이거 공해 아네요? 땅 파먹고 살면 공해도 모르세요?”
408호 여자가 쇳소리를 튕겨냈다.
“……말본새 보게……. 그래유. 땅 파먹고 살아왔시유. 그런데 댁이 땅 사는데 돈 한푼 보태주었시유?”
“이렇게 앞뒤가 꽉 막힌 사람들과는 상대하지 말아야지. 직접 시청 환경과에다 고발하든지 해야지 원 나 참.”
408호 여자가 빠르게 말받이를 하고는 걸어갔다.
“저런저런.…… 말대거리를……. 굴러 온돌이 박힌 돌 뽑는다더니……. 아파트에 살면 우리 같은 농투성이는 사람으로 보지 않는가벼…….”
청대문집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부락미인 여러부운들께 알려드립니이다. 며칠 있으면 개애천저얼 날입니이다. 우리 민족이 시조 할아버지로 떠받드는 다안군 와앙검께서 나라를 세운 날이라는 말씀입니다아. 개애처언저얼을 맞이하야 태극기를 염가로 판매하고 있사오니 필요하신 부락미인들은 마을회관 앞으로 오셔서 사가시기 바랍니이다. 에 또 그라고유, 가을 김장용 축분(畜糞)이 필요하신 부락미인들은 지금 곧 마을 회관으로 오셔서 신청하시기 바랍니이다. 다시 하안 번 알려드립니이다. 그라고유, 에 또 추가적으로 말씀드릴 것은 매립장 문제인디유 우리가 매립장을 우리 마을로 댕겨 오면유 우리 마을이 발전할 것임을 장담합니다아. 반대하시는 분들은 서명 안 하시면 되구유, 찬성하시는 분들은 마을 회관으로 도장을 갖고 나오셔서 서명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유. 다시이 하안 번 알려드립니이다……. 부라악미인 여러 부운…….”
마을 회관 옥상에 매달려 있는 스피커에서 마을이장의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동네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군.”
나는 꺼끌거리는 혀끝을 씹었다.
“아파트 주민들도 만만치 않지만…… 원주민들도 만만치 않아.”
남편이 우울한 눈빛으로 말했다.
포장길이 끝나자 돼지똥 냄새가 골짜기에 가득했다. 돼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돈사 속에는 돼지들이 가득했다. 도랑에는 돈사에서 흘러내린 분뇨들이 고여 있었다. 또 한쪽에는 돼지똥을 비닐로 덮어놓았다. 나는 한손으로 코를 싸쥐고 걸음을 빨리했다. 돼지똥 냄새가 폐부 가득히 쌓이는 느낌이었다.
“당신은 저 나무 이름 알아?”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편이 손을 들어 축사 뒤편에 우뚝 서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상수리나무 아냐?”
내가 코를 싸쥐었던 손을 뗐다.
“당신도 제법인걸……. 상수리나무도 다 알고.”
“당신두 참, 방학 때 외갓집에 내려가면 상수리나무 잎을 뜯어 갈잎모자를 만들어 쓰고 다니곤 했거든.”
“그럼 저건 무슨 나무야?”
큰 바위 옆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물푸레나무.”
“정말 당신 대단해.”
“연리지 소나무가 잘 있을까.”
내가 낮게 중얼거렸다.
“잘 자라고 있겠지.”
“그런데 왜 원주민들은 매립장이 마을에 들어오는 걸 찬성할까?”
내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매립장이 들어서면 주민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져서 매립장의 주민지원협의체가 구성되게 돼. 주민지원 협의체는 이름뿐이고 이들이 임명한 주민감시원도 감시원을 넘어 아예 고급 일자리로 전락하여 직장화되어 버리지. 이웃 구리시의 경우도 소각장 주민감시원의 임기가 3개월인데도 불구하고 불구 장기 연하고 있고, 월급여도 백50만 원을 상회한다는 거야.”
남편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시의원들이 임명권자라는 점이야. 주민감시원이라는 자리를 이용해 자기 식구들의 일자리를 챙겨 알 박기를 하는 거라는 거야.”
“기가 막혀…….”
“……샘골 새마을부녀회라는 거도 사실은 시의원의 사조직이라고 볼 수 있어.”
“그래…… 원주민들은 행정기관과 밀접하게 얽혀 있는 거 같더라고.”
“그런데 저기 뭐야?”
남편이 발걸음을 멈추고 커다란 자작나무를 가리켰다. 자작나무 줄기와 소나무 줄기 사이로 철조망이 여러 겹으로 쳐져 있었다. 사람은 물론 강아지도 빠져 나갈 수 없을 만큼 촘촘했다.
“왜 갑자기 철조망을 쳤을까?”
내가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글쎄, ……음.”
남편이 낮게 신음을 발했다.
철조망을 따라 올라가자 굵은 철망으로 만든 문이 나타났다. 문은 어른 주먹만한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그 밑으로 조그만 안내판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안내문을 읽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환경 보호를 위해 약수터를 폐쇄하고 자연 안식년을 실시하오니 출입을 금합니다. 샘골 부녀회. 나는 고개를 쳐드는 순간 폐부 가득 남아 있던 돼지똥 냄새가 한꺼번에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샘골 부녀회원들의 행위 때문에 그러한 것인지, 나 자신을 포함한 그린아파트 여자들의 행위 때문에 그러한 것인지 얼핏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는 눈꺼풀 밑의 근육이 뒤틀려오는 것을 느꼈다.
남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남편이 연신 응, 응, 그래, 그래, 하고 응답을 했다. 남편이 휴대전화를 바지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샘골 부녀회에서 약수터를 폐쇄하는가봐.”
내가 다리로 플라스틱 물통을 툭툭 치며 말했다.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지는군 그래.”
남편이 다소 낭패한 얼굴이 되어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아까 무슨 전화야?”
나는 화제를 바꾸려고 남편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함안박물관에 있는 후배한테서 왔어. 함안박물관에서 성산산성 출토 유물 특별전시회를 하니까 오라고…….”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남편이 말했다.
좀처럼 남편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5.
며칠째 나의 머리에서 환경호르몬이라는 단어가 떠나지 않았다. 1996년 3월 미국에서 ‘잃어버린 미래(Our Stolen Future)’라는 책이 출판되면서 환경호르몬이 세계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환경호르몬이란 ‘환경’에 노출된 화학물질이 생체내로 유입되어 마치 ‘호르몬’처럼 작용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환경호르몬은 호르몬수용체와 결합하여 정상호르몬보다 강하거나 약한 신호 강도로 내분비계를 교란하는 유사작용, 호르몬수용체의 결합 부위를 봉쇄하거나 차단함으로써 정상호르몬의 역할을 막는 봉쇄작용, 호르몬수용체의 결합하여 전혀 엉뚱한 작용을 나타내는 촉발작용 등으로 내분비계를 교란한다는 것이다.
“여보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고 있어?”
남편이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밀어 올렸다.
“잃어버린 미래야.”
“잃어버린 미래……. 그 책이 출판되면서부터 환경호르몬이 세계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지. 환경호르몬의 피해사례로써 70년대에는 합성에스트로제인 DES(diethyl-stylbestrol)라는 유산방지제를 복용한 임산부의 2세들에게서 나타난 불임사례가 있었고, 80년대에는 살충제인 디코폴 오염사고로 미국의 플로리다 악어의 부화율이 감소하고 성기가 왜소화되는 증상이 관찰되었으며, 90년대 들어서서는 인간의 정자 수 감소와 수컷 잉어의 정소 축소화, 그리고 가자미의 성기 왜소화 등의 문제가 등이 널리 알려져 있지. 이렇듯 환경호르몬으로 인한 부작용으로는 생식 기능의 이상, 성비 균형의 파괴, 호르몬 분비의 불균형, 면역 기능 저해, 유방암이나 전립선암 등의 증가 등을 들 수 있어.”
“다이옥신은 소각장에서 플라스틱이나 페인트 성분 등을 태울 때 주로 발생한다면서?”
“응, 다이옥신의 전체 발생원(發生源) 중 소각장이 전체의 59퍼센트를 차지한다는 보고서도 있어. 다이옥신은 대기의 흐름을 따라 이동하거나 토양에 침적하였다가 먹이사슬을 따라 이동되면서 농축되는데 청산가리보다 1만 배나 독소가 강하지.”
다이옥신은 채소 같은 식물, 소․돼지 같은 육류, 우유․요구르트 같은 유제품을 통하여 인체로 들어오는 대표적인 환경호르몬이었다. 다이옥신은 강력한 발암물질로, 폐암․간암․임파선암․혈액암 등을 일으키고 심한 생식계 장애가 일어날 수 있으며, 면역계를 손상시켜 여러 가지 전염성 질환에 걸리게 한다. 현재 다이옥신 평균 용량으로도 면역체계의 질환, 고환 크기의 감소, 혈당 조절 능력의 변화 등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커튼을 걷자 햇살이 방안으로 한껏 들이쳐 들어왔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가자고.”
남편이 아이들을 깨웠다.
승용차가 식당 주차장을 빠져나가자, 고층 아파트 뒤에 숨어 있던 커다란 무덤들이 차창으로 불쑥 솟아올랐다.
“저곳이 아라가야 지배계층의 묘역인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이야.”
남편의 손가락이 끝나는 곳에 나지막한 능선을 따라 거대한 무덤들이 열을 지어 앉아 있었다.
네거리를 지나 모롱이를 돌자 깔때기 위에다 옹기를 얹어놓은 것 같은 거대한 조형물이 차창에 나타났다. 포장길 양켠으로 상가와 빌라들이 늘어서 있었다.
“아빠 저게 뭐야?”
민규가 박물관 앞에 우뚝 서 있는 조형물을 가리켰다.
“저것은 5세기 안라국을 대표하는 토기인 화염형투창 굽다리 접시를 본뜬 것이야.”
“화염형굽다리 접시가 어떤 토기인데요?”
이번에는 민애가 물었다.
“응 그건……, 굽다리에 불꽃모양의 투창이 뚫려 있는 토기지.”
허우대가 큰 몸집의 남자가 박물관 정문 앞에 서 있었다. 남편의 후배였다. 그의 둥그스름한 얼굴에 피곤이 더께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형수님, 어제 제가 너무 늦게까지 선배님을 붙잡아두어서 미안해요.”
남편의 후배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미안해할 것 없어요…….”
내가 약간 웃어 보이며 말했다.
“우선 박물관 관람부터 하시죠.”
남편의 후배가 박물관 본관을 가리켰다.
제1전시실에서는 함안 지역의 고분군과 산성 분포 모형도가 눈길을 끌었다. 지금까지 함안 지역에서 확인된 안라국 시대의 고분군은 약 백여 개소이며 산성은 20여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분군 가운데 초대형 무덤으로 도항․말산리 고분군을 들 수 있으며, 고분군과 가까운 거리에 자리잡고 있는 산성들 가운데 성산산성이 주요 교통로 지역 또는 중심 지역에 자리잡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는 것이다.
제2전시실에는 무덤의 변천 과정과 무덤에 부장된 토기의 변천 과정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3전시실에는 고문문화의 이해를 돕는 안라국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눈길을 끄는 곳은 함안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들을 시기별로 전시해 놓은 코너였다. 4세기 전반부터 고식도질토기가 발생하였고, 5세기 대에는 불꽃무늬굽다리접시가 나타났으며, 6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굽다리접시와 뚜껑 등의 토기류는 그 형태가 조잡해지고 규모가 작아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눈길을 끄는 곳이 또 있었다. 성산산성 출토 유물 전시 코너였다. 성산산성에서 출토한 목간, 무경식암막새기와, 귀신얼굴막새기와, 연꽃문양막새기와, 뚜껑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 칸에 다량의 목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연리지 조각품이 여기 있네.”
남편이 두꺼운 유리 속에 갇혀 있는 연리지 조각품을 들여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유리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유리상자 바닥에 꽂혀 있는 전등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연리지 조각품에 은은하게 비쳤다. 가로 30센티미터, 세로 50미터 크기의 연리지 조각품은 위쪽에 있는 소나무의 굵은 가지 하나가 뻗어 내려와 아래쪽에 있는 소나무를 잡아당기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중국의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 동쪽의 바다에 비목어(比目漁)가 살고 남쪽의 땅에 비익조(比翼鳥)가 산대. 비목어는 눈이 한쪽에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두 마리가 좌우로 달라붙어야 비로소 헤엄을 칠 수가 있고, 비익조는 눈도 날개도 한쪽에만 있어 암수가 좌우 일체가 되어야 비로소 날 수 있대. 연리지라면 나란히 붙어 있는 나뭇가지를 뜻하잖아. 비익(比翼)이나 연리(連理)는 모두 그 말이 가져다주는 이미지와 같이 남녀간의 떨어지기 힘든 결합을 뜻하기도 해. 나아가서 사람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걸 말하기도 하지.”
남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물관 밖으로 나왔을 때 태양이 화염형투창굽다리접시를 본뜬 조형물 위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선배님, 복요리 잘 하는 곳이 있습니다. 가시지요.”
“복요리는 비쌀 텐데…….”
“아무리 시골 박물관에서 밥을 빌어먹고 있다지만…… 모처럼 만난 선배님께 점심 한번 못 살 정도는 아닙니다.”
남편의 후배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도 빨리 전임이 되어야 할 텐데…….”
남편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말했다.
“그게 어디 뜻대로 되어야지요.”
남편의 후배는 함안박물관의 학예연구사로 있었다. 이번 학기에 세 군데 대학에서 전임교수를 뽑는 공고가 났다. 같은 지도교수 밑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전임교수 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세 사람이나 되었다. 사전에 서로 대학을 한 군데씩 나누어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남편의 후배는 남도대학에 지원했다. 1차 서류심사 결과를 기다리던 그에게 남도대학의 사학과 학과장으로 있는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같은 과의 후배 둘이 모두 남도대학에 지원해 채용심사 자체를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 학교는 선후배 관계가 좋기로 정평이 나 있었는데……. 이젠 그 이야기도 전설이 되어버렸어요. 알고 보니…… ‘선배가 지원하는 곳에 저희들이 어떻게 지원하겠느냐’ 하던 후배들이 세 군데 모두 다 넣었더군요.”
남편의 후배가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좋은 인간관계가 전설이 되어버린 곳이 한두 군데인가…….”
남편이 천천히 핸들을 돌렸다.
도항․마리산 고분군 위로 햇빛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김종성․1952년 강원도 평창 출생
         ․1986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창작집 󰡔금지된 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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