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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신작단편/맥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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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맥 리
친애하는 독자들이시여! 여러분께서는 어떤 기대를 갖고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텐데. 하필 허구 많은 이야기들 중에 또 홍길동의 이야기를 하게 돼서 짜증을 내거나 그렇담 이건 별 볼 일 없는 소설이군, 하는 독자들이 계실 겁니다. 아아, 사실 필자도 홍길동 얘기를 쓰는 게 썩 내키지 않습니다. 얼마나 자질이 없으면, 이야깃거리가 그렇게도 없나, 하는 흰소리를 듣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요 얼마 전에 필자가 두 눈으로 홍길동이를 봤습니다. 그것도 필자 앞에서 도술을 부리고 있는 홍길동이를 말이죠. 이러니 홍길동 얘기를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 그럼 잔소리는 이쯤에서 그만두고 오늘의 주인공인 홍길동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으흐흐……흐흑…….”
어디선가 처절한 듯하면서도 처량하기도 하며 어떤 슬픔이 알알이 밴 듯한 울음소리가 지금 한창 책을 읽고 있는 길동에게 들리기 시작했다. 홍길동이 처음 이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독서삼매경에 빠졌는지 책만 읽고 있었다. 하지만 한쪽 한쪽 넘어갈수록 희미하게 들리던 그 구슬픈 울음소리는 점점 선명하게 들리는 것이었다. 홍길동은 옆집에서 비디오 볼륨을 크게 틀어놓은 것으로 단정 짓고 계속해서 책을 읽어 나갔다. 시간이 얼마쯤 지나서였을까? 홍길동은 책장을 넘겨가며 읽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형식이었을 뿐 그의 신경은 온통 기괴묘묘한 울음소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어디서 듣던 목소린데, 누구더라……?’
홍길동은 처음엔 탤런트나 영화배우를 떠올렸으나 곧 생각의 방향을 바꿔버렸다. 그 소리는 자신의 주변에서 듣던 목소리 같았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홍길동은 방에서 나가 그의 어머니 이영란 여사가 계시는 부엌으로 갔다. 여기서 잠깐 홍길동의 어머니 이영란 여사에 대해서 몇 마디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영란 여사는 여느 여자들이 꿈꾸는 꿈을 갖고 있었다. 부자가 돼서 큰 집에서 살기를 꿈꾸며, 기사가 딸린 차를 타고 동창회에 참가하여 자신의 부를 자랑하며, 심심하면 백화점에 가 쇼핑이나 하며, 부잣집 사위나 며느리가 들어와 집안의 위세를 더욱 떨치기를 바라는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참 표준적인 여자였다. 하지만 그런 삶은 누구나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영란 여사는 어떻게 해서든지 부자가 되고 싶었지만 그건 바람일 뿐 실제로는 정반대로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점점 몰락해가는 집안에서 그녀가 가진 유일한 희망은 그녀의 아들 홍길동이었다. 그녀는 길동이가 무너져가는 가문을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독자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일단 한 집안에 불행이 생기거나 또는 궁핍에 빠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삶의 냉혹한 법칙이기 하지만. 이 여사 역시 이런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녀는 눈앞에 놓인 현실을 당당히 외면했다. 왜냐면 그녀는 그녀의 아들 홍길동을 하늘처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암약할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단 하나였다.
“어머니, 울음소리 들리지 않으세요?”
“아니.”
이 여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잘 들어보세요. 분명히 울음소리예요.”
“아니다. 니가 공부하느라 피곤해서 그런 겔 거다. 잠시 나가서 산책이나 하렴. 머리도 식힐 겸 말이다. 아니다, 머리 식히는데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게 최고지. 자, 이 돈 받아라. 가서 영화나 보고 와라.”
홍길동은 돈을 받았다.
“그런데 어머니 분명히 울음소리 같은 것이 났어요,"
바로 그때였다. 홍길동은 울음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아냈다.
“맞다. 이 목소린 영철이 어머니예요. 어머니, 제가 한번 갔다 와 볼게요.”
홍길동은 현관 쪽으로 갔다. 그 순간 이 여사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이 여사는 얼른 얼굴 표정을 바꾸고 대문을 열려하는 길동이를 급히 불렀다.
“길동아, 내가 가볼 테니, 넌 산책을 하든지 영화를 보든지 해라.”
이 여사는 서둘러 길동이를 내보냈다. 길동은 하는 수 없이 아파트 5층에서 터벅터벅 내려갔다. 이 여사는 길동이 아파트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후 영철이네 집으로 갔다.
햇살이 좋았다. 아, 좋다! 이 시간에 다른 곳에 있었다면 이 따스한 햇살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길동은 한낮이 주는 정취를 누리면서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낮의 정취를 얼마 누리지 못했다. 혹시나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거나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었다. 되도록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어느샌가 낮을 두려워하고 밤에 산책하기를 좋아하는 바퀴벌레 체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얼마 걷지 않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잠시 집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은 것이었다. 그것은 그 구슬픈 울음소리 때문인지, 평소답지 않은 이 여사의 행동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길동은 일단 자신이 살고 있는 동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테니스장 위 언덕으로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동네 아줌마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 영철이네 집일 것이다. 길동은 언덕에서 내려와 9동으로 갔다.
길동은 1층 현관으로 들어섰다. 빨리 5층으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1층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에 1층으로 이사 온 새내기부부가 있었는데 바로 그 새댁이 1층에서 홍길동을 5층으로 못 가게 막아서고 있었다.
“왜 이러세요?”
“저 오층 이 집사님 아드님이죠?”
“예, 그런데요.”
“죄송하지만 올라갈 수 없어요. 미안해요.”
말뿐만이 아니었다. 새댁의 행동에는 고지를 사수하겠다는 병사의 결연한 의지 같은 것이 느껴졌다.
“왜요?”
“이건 우리 아줌마들만의 일이거든요. 왜 남자들도 남자들만의 일이 있잖아요.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죠. 정 올라가겠다고 하면 할 수 없지요. 하지만 그 때문에 아줌마들의 세계가 깨지는 거죠.”
도대체 이 여자는 무슨 뚱딴지같은 말을 하는 거지?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이유다, 내가 내 집에 가겠다는데. 길동은 무슨 이유에선지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길동은 5층 쪽을 한번 쳐다보았다. 궁금하기도 했지만 정말로 여자들만의 문제인 것 같아 신경 끄기로 했다. 길동은 영화관으로 향했다.
고속버스는 금강휴게소에 정차했다. 많은 사람들이 볼 일을 보러, 간식거리를 먹으러, 버스에서 쏟아져 나왔다. 도착지가 ㄷ라고 쓰인 고속버스 안에 길동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길동도 사람들의 행렬에 동참했을 것이다. 게다가 첫차를 타느라고 아침도 못 먹었는데 말이다. 하긴 지금 그의 앞에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하더라도 그는 먹지 않았을 것이다.
ㄱ이라, ㄱ에 사는 사람들한테 미안한 얘기지만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다. 처음 들었을 때 ㄱ이 우리나라가 아니라 중국에 있는 도시 이름인 줄 알았다. 지도에서 찾아보니 서울에서 엄청나게 먼 곳이었다. 정말이지 이런 구석까지 가서 취직시험을 봐야하는 내 처지가 맙소사였다. 맙소사! 도대체 어머니는 연고도 없는 ㄱ에서, 그것도 ㄱ에 있는 어떤 조그만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는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게다가 이 원서는 어떻게 구한 것이지? 아무래도 요전에 본 취직시험에서 떨어진 게 어머니에게 큰 충격을 준 것 같다. 아, 나도 거기만은 붙을 줄 알았는데. 아, 취업재수가 벌써 몇 년짼가. 지겹다, 지겨워. 월급을 안 줘도 좋으니 취직만 됐으면 좋겠다. 그래, 서울도 아니고 ㄱ인데 설마 떨어지겠어. 나 웬만한 증이란 증은 다 있고 게다가 토익, 토플 점수도 좋잖아. 게다가 이번엔 서류전형에 합격해서 이제 면접만 무사히 치르면 되잖아. 아무리 연고가 없는 ㄱ라지만 어머니도 뭐 믿는 바가 있으니까 ㄱ에 가서 시험을 보라고 그러는 게 아니겠어. 그래, 이번에는 분명히 취직이 될 거야. 되자마자 유리한테 가는 거다. 아직 시집은 안 갔겠지. 그때 취직만 됐어도 유리랑 결혼할 수 있었는데. 유리야, 난 널 원망하지 않는다. 계속 떨어져 백수로 지내는데 어떤 여자가 같이 살려고 하겠니. 그래, 잘 떠나갔다. 하지만 나 홍길동, 이대로 주저앉지 않는다. 이번에 꼭 취직해서 너를 놀라게 해 주겠어. 서울도 아니고 ㄱ인데. ㄱ이면 어때. 취직해서 잘 살면 되지. 기회를 보다가 나중에 서울로 올라오면 되잖아. 이번에도 어머니를 실망시키면 안 돼. 그래, 난 분명히 합격할 거야……. 만약 떨어지면 어떡하지? 재수없게 이런 불길한 생각을 하다니. 합격한다. 합격! 어머니,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유리야, 이번만은 꼭 붙어서 너에게 청혼을 하겠다. 만약 니가 결혼을 했으면 할 수 없는 거고. 대신 난 결혼중매회사에 회원으로 가입할 거다. 비록 지금은 회원으로 가입하고 싶어도 취직을 못 해서시리 가입을 못 하지만 말이다. ㄱ이라, 왠지 느낌이 좋군.
어느새 고속버스는 ㄷ터미널에 도착해 있었다. ㄱ은 정말 먼 곳이긴 먼 곳이군. 서울에서 바로 가는 차편은 없고 ㄷ에서 내려 일반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더 가야 하니. 홍길동은 시계를 보았다. 면접까지는 아직 시간이 충분했다. 밥을 먹고 버스를 타도 늦지 않았다. 하지만 홍길동 안심이 안 되었는지 얼른 버스를 탄 게 아니라 택시를 탔다. 버스를 타도 충분한데 말이다.
ㄱ에 도착하고 몇 걸음 가지 않아 길동은 새로운 풍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방팔방에서 스쿠터를 타고 커피를 배달하는 어여쁜 아가씨들 때문이었다. 이들은 마치 거미줄을 엮으려는 듯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왔다. 그 중 어떤 아가씨가 길동에게 윙크를 했는데 그 때문인지 몰라도 길동은 잠시 넋을 놓았다.
‘앞으로 커피 많이 먹게 생겼군.’
길동은 또 얼마 걸어가지 않아 대추를 파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가 있었다.
‘대추 좋지!’
길동은 무엇이 좋은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잠시 후 길동은 시간을 확인한 후 중국집을 찾아 들어갔다.
“아줌마, 여기 간짜장이요. 저 아줌마 짜장 최선을 다해서 볶아주세요.”
길동이 유머를 구사하는 것을 보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총각, 서울에서 왔나보지?”
중국집 아줌마는 그 지방 특유의 사투리로 물었다.
“그래, 무슨 일로…….”
“취, 친구 보러요.”
큰일 날 뻔했다. 하마터면 취업하러 왔다고 말할 뻔했다. 길동은 아줌마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면접까지는 아직도 세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길동은 시간을 어떻게 때워야 하나 고민했다. 다방을 갈까하다 왠지 부정 탈 것 같아서 그건 합격 이후로 미루기로 했다. 주변에 공원도 안 보이고, 길동은 이리 둘러보고 저리 둘러보고 요마당으로 가보고 저마당으로도 가봤지만 마땅히 시간 때울 곳이 보이지 않았다. 길동은 하는 수 없이 좀 전에 점 찍어둔 만화가게로 들어갔다.
얼핏 훑어보아도 2백 명은 넘는 것 같았다. 길동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당연한 얘기지만 모두 정장을 했고, 머리와 얼굴화장에 신경을 쓴 게 눈에 확 들어왔다. 길동은 대기표 순서가 붙은 곳으로 가는 중에 몇몇 멋진 남자들과 이쁜 여자들, 그러니까 자신의 경쟁자들을 봤는데 그만 주눅이 들고 말았다. 그들 때문에 자신이 떨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길동은 곧 주눅을 떨쳐낼 수 있었다. 그건 그들의 입에서 사투리가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이 길동에게는 얼마나 웃겼는지 그만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순간 경쟁자들의 눈길이 길동에게로 쏠렸다. 길동은 무안한 나머지,
“죄송합니다. 여러분.”
“저, 혹시 서울에서 오셨습니까?”
“예, 그런데요.”
길동에게 물어본 자가 주위 사람들에게,
“서울에서 시험 보러 왔대요.”라고 강력한 어투로 말했다.
갑자기 경쟁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몇몇의 경쟁자들은 길동에게 다가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길동은 점점 자신이 넘쳐흘렀다. 사투리로 말하는 그들이 얼마나 촌스러워 보이는지. 게다가 그들은 대부분 그쪽 지방대 내지 전문대 출신이었다. 그러니 길동은 자신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확신까지 갖게 되었다.
길동의 면접 차례가 되었다. 10명씩 면접실에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에 설명들은 대로 그들은 준비된 10개의 의자에 대기번호 순서대로 앉았다. 길동의 위치는 중간, 그러니까 정 가운데였다. 면접관은 5명이었다. 가운데 앉아 있는 대머리의 늙수그레한 사내가 계급이 제일 높아 보였는데 길동은 바로 그 사내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번호 순서대로 자기 소개가 시작되었다. 어느새 홍길동 차례였다.
“안녕하십니까, 저의 이름은 홍길동입니다. 저는,”
“잠깐만 홍길동 씨.”
대머리 면접관이 잠시 면접을 중지시키고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홍길동 씨, 왜 자기 소개서를 안 냈습니까? 분명히 내라고 했을 텐데요.”
몇몇의 면접관이 큰 소리는 아니지만 웃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위기였다.
이럴 수가.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분명히 자기 소개서를 넣어서 보냈는데.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길 수가 있단 말이야. 이건 뭔가 잘못됐어. 분명 자기네들이 정리하다가 실수한 걸 거야. 어떻게 자기 소개서를 안 보내다니, 이게 말이 돼? 난 이래 뵈도 취직시험에는 산전수전공중전지하전, 전이란 전은 다 겪은 몸이란 말야. 큰일이다. 뭐라고 대답을 한담? 정말 믿어지지가 않아. 이건 음모야, 음모. 뭐라고 말해야 하지? 저들의 눈빛을 봐, 심상치가 않다. 아니다, 홍길동. 잘 생각해 봐. 멋진 대답을 말이야. 저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멋진 대답을 말이야. 정말 기가 막힌 대답을 해서 이 위기를 탈출하는 거다. 아니지,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거다. 아암, 그렇고 말고. 홍길동, 너라면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이런 어쩌다가 내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지? 아, 아, 어떻게 한담?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되지. 떠오르지가 않아. 으, 으……으, 으, 에이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와하하하하하…….”
홍길동은 별안간 일어나서 면접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큰 소리고 웃었다. 면접관과 다른 응시생들은 화들짝 놀란 눈으로 길동을 쳐다보았다.
“자신 있어서 안 썼습니다. 그깟 글자 몇 자로 깨작깨작거려 날 소개하는 게 싫었습니다. 이렇게 면접관님 앞에 서서 당당하게 나를 밝히고 싶었습니다. 와하하하하…….”
이어 길동은 열변을 토하는 정치가처럼 자기 소개를 했다.
“어머니, 웬일이세요? 만두국 싫어하시잖아요.”
“그래도 이 집 만두국은 맛있잖니.”
“하긴 그렇죠. 어머니 잘 먹었습니다. 종종 사주세요. 하하.”
길동은 그의 어머니와 오랜만에 만두국을 먹었다. ㄱ에서 취직시험에 떨어진 후 기분이 계속 우울했었는데 어머니와의 외식으로, 그것도 그가 제일 좋아하는 만두국으로 인해 모처럼 쨍하고 해뜬날이 되었다.
“길동아, 손 좀 이리 줘봐라. 손 좀 만져보자.”
“참 어머니도. 자아, 여기 손 대령했습니다.”
어머니는 손을 처음 잡아보는 사람처럼 길동의 손을 더듬거렸다.
“너는 사내아이 손 치고는 고운 편이지. 길동아, 넌 막노동 같은 걸 하면 안 되는데…….”
길동은 가슴이 뜨끔했다. 사실 정 안 되면 몸으로 때울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이번엔 꼭 취직할게요.”
길동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빈약해 보이는 손이었다. 그는 안타까웠다. 이렇게 재수에 삼수에 사수에, 계속해서 취직시험에 떨어지는 자신이 안타까웠고, 자기에게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지 않는 이 사회가 안타까웠으며, 어머니를 호강시켜주지는 못할지언정 이렇게 만두국까지 어머니에게 얻어먹어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안타까웠다. 어머니는 길동의 두 손을 꽉 쥐고 걸어갔다. 길동은 손이 아프고 걸음걸이가 불편했지만 아무 말 없이 어머니의 걸음에 자신의 걸음을 맞추어 나갔다.
“그런데 어머니. 요즘 이상한 울음소리 들리지 않아요? 여인네들 울음소리 같은데.”
“아니. 니가 잘못들은 거겠지.”
“아니에요. 요즘 자주 여인네들 흐느끼는 소리 같은 게 들려요.”
“니가 취직 때문에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환청이 들리는 겔 거다.”
“그런가? 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요.”
“좀 쉬면 괜찮을 거다. 이참에 절에 가서 공부하는 게 어떻겠니?”
“또요?”
아파트 4층 층계참에 어머니와 아들은 다다랐다. 아들은 문을 열려고 먼저 뛰어갔다. 그러고 문을 열려는데 어머니는 무엇에 놀랐는지 길동이가 직접 문을 여는 것을 막았다.
“안 돼, 길동아. 문에 손대지 마라. 내가 열게.”
“예, 그러세요.”
길동은 어머니가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뜻에 따랐다.
“길동아, 차 한잔 할래.”
“차요? 좋지요.”
잠시 후 어머니와 아들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쯤 지나서였을까. 길동의 어머니는 그만 황소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물론 제일 놀란 건 길동이었다. 그렇게 서럽고 서글프게 우는 울음은 세상에 태어나고 난 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울지 마세요. 어머니…….”
길동 어머니는 울고, 울고, 울고, 울었다. 세상이 망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울지는 않을 것이다. 길동은 어찌해야 하는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길동은 어머니의 계속되는 처절하게 구슬픈 울음소리에 그만 뜨악하고 말았다. 어머니의 울음소리는 맙소사, 어디선가 듣던 울음소리와 같았다. 길동에게 요즘 자주 들리던 여인네들의 울음소리와 많이 닮은 것이었다. 길동은 소름이 끼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어떻게 알았는지 영철이 어머니를 필두로 한동네 아줌마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길동 어머니를 달래고 위로하는 것 같기도 했으며 때론 두 패로 나뉘어져 서로 언쟁하는 것도 같았다. 어쨌거나 그들은 뭔가를 알고 있는 듯했다.
“아주머니, 우리 어머니가 왜 우는 거죠?”
길동은 영철이 어머니에게 물었다. 영철이 어머니는 길동을 노려보았다.
“방에 가서 거울을 보라구.”
영철이 어머니는 포달지게 악을 썼다.
“예?”
길동은 영철이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방에 가서 거울을 보라구!”
영철이 어머니는 확인사살을 하듯이 큰 소리를 질렀다. 그제서야 길동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거울을 본 길동은 경악했다. 두 손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고 몸이 반 이상이 점점 투명하게 사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길동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꿈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현실일 리가 없다. 이건 꿈이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길동은 분명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홍길동의 노래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고 싶지만
차비가 없어요
도술로 부정부패한 연놈들을 혼내주고 싶지만
나 먹고 살기도 바빠요
섬에 가서 율도국을 건설하고 싶지만
누가 백수를 따르겠어요
아, 어쩌다
제가 이렇게 됐지요
옛날이 그리워요
그런데 잠시 후 이상한 현상이 생겼다. 길동의 몸이 사라지다가 복원되다가 사라지다가 복원되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절박한 길동은 그 이유를 곧 알아챘다. 새댁이 “아줌마, 포기하지 마세요. 힘내세요. 아드님, 반드시 취직할 거예요.”라고 말하면 길동의 사라진 몸이 서서히 복원되고, 영철이 어머니가 “길동 엄마, 이제 그만 잊어버리라구. 됐다구. 그만하면 할 만큼 한 거야. 나를 보라구.”라는 식으로 말하면 길동의 몸이 빨리 사라지는 것이었다. 길동은 부르짖었다.
“어머니, 절 포기하지 마세요. 이번에는 꼭 취직할게요.”
홍길동은 갈등하고 있는, 아니 갈등이 거의 끝나가려 하고 있는 어머니를 설득하러 방을 뛰쳐나갔다. 그런데 우리의 홍길동은 자신이 방문을 열고 뛰쳐나간 게 아니라 방문을 그냥 통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맥 리(본명:옥노욱)․2003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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