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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신작시/박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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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호
온풍기
절정으로 너를 데려가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네 귀에다
뜨거운 숨결을 불어 넣어야만 한다.
그러나 달아오른 네 정신의
온도계 눈금을 떨어뜨릴 수 있는
한 줌의 냉정을 간직하기 위해 나는
스스로 뜨거워져서는 안 된다.
얼음 도시를 지나느라
꽁꽁 언 네 육체의 심지에
불을 당기고 기름을 부어
네가 너의 힘으로 타오르게 할 뿐, 나는
너를 태우려는 게 아니다.
불꽃의 칼날 아래서
너를 건져내야 할 순간을 위해 나는
정신 한가운데
얼음의 結晶을 품고 있어야만 한다.
노을
弔燈을 켠 차들이 안개에 무장해제 당한 도시의 새벽을 가로지른다. 行人들 한 줄로 늘어서서 달려갈수록 점점 가까워지는 燈을 향해 창백하게 손을 흔든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사람들은 서로를 문상한다. 안부를 묻는 혀가 실험용 개구리처럼 천천히 굳어가고, 지나친 시간이 무감각하게 모래시계 속에 쌓인다. 너무 늦게 저무는 生은 불안하다고, 고속질주의 생애를 달려온 입술이 중얼거린다. 그의 머리 위에 동그라미가 떠 있다. 키보다 한두 뼘쯤 높은 공중에 동그라미의 꽃밭이 펼쳐져 있다. 나비를 불러들이지 못하는 꽃들의 모가지를 바람의 칼날이 한차례 휩쓸고 간다.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할 때 갑자기 출구가 급습한다. 차들은 출발과 함께 종점에 다다르고 문은 보이지 않는다. 태어나면서 죽어가기 시작하는 신생아의 울음 가득한 분만실의 문이 열렸다. 닫히는 사이 붉은 비린내를 풍기며 세상이 서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박완호․
충북 진천 출생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안의 흔들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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