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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신작시/이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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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승
태풍은 북상 중
1.
나는 어제와 오늘 담배를 한 다섯 갑 피우고
머리가 조금 지끈거리고, 숨이 차고
또 몇 편의 시를 읽었을 뿐인데
입추가 지났어도 오늘은 말복인데
어느 틈엔가 쌀쌀해진 저녁의 공기와 한낮의 아스팔트 위로 바싹 다가서는 그림자들과 대로변까지 뻗친 가게의 파라솔들과 파라솔에 앉아 저녁의 한때를 술추렴하는 사내들과 사내들의 애인과 친구들과 불콰한 얼굴과 격앙된 목소리들과 또한 오늘로 끝나지 않을 행․불행과 흥에 겨운 노랫가락과 자동차들의 경적과 무관하게,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해가 뜨고 지고, 해가 뜨고 지고,
어쩌면 오늘 하루 천 명의 아들딸들이 가출 직전에 있고 사실로는 단 한 명이 가출을 감행했을지라도 국회의사당을 지나던 비둘기들이 똥을 찍 갈겨대더라도 새똥을 맞은 의원님이 국회의사당 위의 새들에게 경범죄를 묻는 법안을 통과시키더라도
냉정을 가장한 무관심과 열정을 사칭한 폭력이 귓전을 뚫고 눈을 쑤시는 밤의 거리에
바람은 불어오고 아직은 폭풍 전야의 고요 속에서
연인들은 상대적이고 다원적으로 포옹하지
포옹의 조건이 호러무비가 되는 것처럼
내일이면 태풍이 몰려올 것이므로
점령군처럼 몰려들 것이므로
티브이와 신문들은 안전시설의 허약성을 역설하지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와 북한의 아이들과
전쟁으로 불구가 된 이라크의 시민들의 안녕과
시민들의 무장봉기와 반미 감정보다도 거세게
지금은 태풍이 북상 중이지
모든 지형도 위를 현실적으로 태풍이 불어닥칠 것이지
2.
오늘은 금요일 밤
바람이 불지
온다고만 하고 번번이 방향을 바꾸는 태풍이 북상 중인지
바람은 이 골목의 남쪽과 동쪽 벽을 후려쳐대고 있지
이런 밤이면 우리는 어디로든 떠날 수 있지
언젠가 폭주족들이 수십 대의 차량을 이끌고
도로 이편과 저편을 점령한 채 질주할 때,
진정한 폭주족인 이 도시의 택시들과 승용차들은
점잖게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는데
손가락 사이로 물줄기들이 빠져나가듯
멈춰선 차량들을 기만하며 유유히 빠져나갔지
그것도 반드시 자정을 넘어 새벽 1시를 향해 가는
금요일도 토요일도 아닌 밤 사이에, 금요일 밤에
모든 그로테스크한 표정 너머로
안전하게 감춰진 이러한 역주행주의자들을 데리고
우리는 언제라도 떠날 수가 있지
가까운 슈퍼마켓이라도 털어 몇 개의 술병처럼 비틀거릴 수 있지
비어 가면서 또는 채워져 가면서 중심을 잃는 거지
개중의 몇은 대단히 실험적으로 눈을 감고 핸들을 놓아버렸을 수도 있겠지
그들이 록큰롤주의자가 아니듯 나는 조금 걷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인지도 모르는데 이러한 밤에, 그것도 금요일 밤에
나나, 너나, 또 다른 불특정 다수가 너무나도 주저 없이
권총 한 자루를 탈취할 수도 있는 밤에
바람 부는 밤에
태풍이 북상 중인 밤에
모든 것을 멈춰 세울 수 없는 밤에
무정부주의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태풍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
터널구간을 지나다
오랜만의 안부를 묻는 전화통화에 덜컹거림이 흘러든다
급한 볼 일이 있어 서울 들렀다가 밤손님처럼 내려간다고
친구를 태운 열차는 서대전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전화기 저편에서 군데군데 잘려진 채 들려오는 소리
내가 앉아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한때는 뜨겁게 타올랐던
나뭇잎들이 낯선 지상을 배회하는 동안
알 것 같다 벌써부터 세월 탓을 하고 바쁜 일상을 탓하는 것은
뜨겁던 시절로 되돌아가고픈 향수병이라는 거
그러므로 끊겨진 말들 사이로 끼어드는
아이 칭얼대는 소리와 덜컹거림 차내 안내방송 같은,
안도할 수 있는 거리 안도할 만한 인사법 그렇고 그런 안부들
혼자 끓어올랐던 열기가 또한 혼자서 가라앉을 때의 쓸쓸
왜 우리의 안부가 ‘어디에 있느냐?’를 먼저 궁금해 하는지를
너는 지금 터널 구간을 지나고 있다
컴컴한 굴 속을 홀로 파들어 가는 갱부처럼
약속된 것들보다 약속해야 할 것이 더 많은 부채의 안녕이
자주가 한달이고 가끔이 일년인 연락일지라도
들려오는 목소리, 찻소리, 또 무슨무슨 소음들이
나는 좋다 그때마다 환기되는 현장 부재의 증명
네 목소리가 뜸한 것은 그 때문
지금 숨 가쁘게 터널을 지나고 있기 때문
객차칸에 신문지처럼 구겨져 잠든 누구처럼,
집도 절도 없이 썰물져 가는 막막한 또 누구누구처럼
우리가 지금 터널 위에 놓여 있는 까닭은
구석진 어디에 신문지를 깔고 한없이 흔들리며
도달해야 할 그 무엇, 어디가 있기 때문이다
피곤에 절은 너의 눈동자가 다 퇴색한 낙엽마냥
노랗게 풀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안녕
이현승․
1996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2002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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