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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신작시/김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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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39회 작성일 08-02-23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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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인


듣는 사람


당신은 불 꺼진 밤거리처럼 꼭 닫혀 있습니다. 당신의 입술은 폭발직전 대합실의 창문인 듯 부르르 떨고 있군요.

이제 곧 당신을 부수고 당신이 걸어온 골목들이 터질 것입니다. 골목을 지날수록 자라나는 그림자와 그림자로 만든 집과, 집 마당에 도사린 사나운 개들이 소용돌이치듯 흘러나올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단정히 앉아 가까스로 당신을 끌어당기고 있지만, 한순간에 골목을 활활 살라버릴 불길처럼 혀는 유연하고 위태롭습니다.

당신에게서 흘러나온 그림자들이 저마다 구깃구깃한 길들을 끌어내 당신을 가둘지도 모르죠. 누군가는 달아나고, 누군가는 죽고, 지워지고, 절대 사라지지 않고, 그렇게 당신에게서 흘러나온 것들이 당신을 포위할 때,

당신의 혀는 유연하고 매끈하지만 당신을 단단히 묶을 수는 없습니다. 당신에게서 흘러나온 말 속에 잠겨 당신이 허우적거리고, 나를 바라보는 두 눈만 남기고 휩쓸려 눈물 속으로 사라지는 동안,

나는 도금한 어금니처럼 차갑고 단단하게 당신의 입구에 앉아 있습니다.
나는 영원히 듣는 사람입니다.



테라스


우리의 계단은 좀처럼 사십 개를 넘지 않아요. 계단 너머 테라스는 활짝 핀 식충식물처럼 부드러운 촉수로 우리를 부르고, 우리는 까맣게 빛나는 모자와 긴 머리를 흔들며 꿈결인 듯 스며들죠.

떨어지는 모자와 마주친 날도 있었어요. 모자는 무성하게 자라나는 머리카락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달아나려 했던 거지요. 날마다 뻗어나는 어둔 길에 사로잡힌 그녀의 모자가 폭발하고, 뒤엉킨 길들이 파리 떼처럼 흩어지고,

꽃 속으로 사라진 벌레들은 다 어디로 갔나요? 계단에 앉아 나는 잠시 위를 올려다보죠. 어디선가 증발한 여자들의 목소리가 언뜻 들리기도 했어요. 오를 듯 미끄러지고,

미끄러져 움푹 패는 동안, 긴 머리 소녀가 한 다스의 모자를 낳고, 너덜너덜한 웃음을 뒤집어쓴 채 계단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동안,

비명은 들리지 않아요, 이런 날이면. 사라진 여자들이 빽빽이 걸린 햇살, 테라스는 더욱 도도한 자세로 반짝입니다. 당신은 내일을 이야기하겠지만,

텅 빈 테라스에 올라가면 우린 문득 배가 고파져 또 다른 입 속으로 발을 넣을 뿐, 우린 먼지보다 가벼워졌어요.


김경인
․1972년 서울 출생․2001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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