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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초점/정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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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서정시의 새로운 진전
정우영
(시인)
1. 소통에 목마른 시인들
등단 16년 만에 첫 시집 ꡔ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ꡕ를 펴낸 최창균 시인은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 발표에 연연해하지 말자 했습니다. 시를 쓴다는 인식만 돼 있다면 시는 시집으로 말한다는데 주안점을 두고 소의 마음처럼 천천히 가자 했습니다.” 누군가는 그의 말에서 혹 대기만성(大器晩成)을 떠올릴지 몰라도 나는 그의 말에서 만시지탄(晩時之歎)을 읽는다. 발표 기회가 주어지고 평단의 관심이 모아졌는데도 그가 첫 시집을 내는 데 16년까지 걸렸을까 싶은 것이다. 지금이 아니라 그 전에, 그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힘겹게 들어올리기 전에 문예지에서 좀 부추겨줄 수는 없었을까. 저 단내나는 노동의 수고로움을 위로해주는 문학평론가의 시선 좀 있어야 되지 않았을까.
내 문제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 놓인다. 문득 둘러보니 내 주변에도 최창균 시인처럼 때를 기다리는 가인(歌人, 혹은 佳人)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마음의 골방에서 독자와의 소통을 바라며 글쓰기에 골몰해 있는 시인들의 뒷모습이 어른거리는 것이다.
나는 미력하나마 그 중에 네 시인을 이 자리에 불러들인다. 이들을 대상으로 삼은 것에 특별한 이유는 없다. 내가 보기에 이들의 현실 인식이 남다르고 시를 향한 순정이 애달픈데도 사람들 관심이 그리 크지 않았던 게 이유라면 이유랄까.
물론 포괄적인 의미의 공통점은 분명 있다. 이들 시의 기반이 그 흔한 ‘생활’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자기 삶을 시로 쓴다. 거창한 담론이나 관념을 좇아가지 않는다. ‘못나고 모자라고 하찮은 것들’을 시 속에 끌어들여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파편화한 감성을 붙잡고 씨름하지도 않고, 황폐한 정신세계를 탐구하지도 않는다. 계몽의 기치를 세우는 것도 아니다. 물론 저 80년대의 거친 음성과 울분을 그대로 담고 있지도 않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들 시인의 ‘예각(銳角)’이 공통이라는 이름 아래 두루뭉술해졌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이들은 각기 개별적 세계의 존재로서 우뚝하다.
표성배, 이안, 신용목, 김태정. 우리에게 그리 익숙지 않은 이름이지만, 나는 이들에게서 우리 시의 빛나는 성취를 본다. 불출(不出)을 무릅쓰고 섣불리 언급하자면, 시의 울림이 맵차고 깊다.
2. 표성배, 공장과 살다
80년대를 대표하는 두 시인, 박노해와 백무산을 배출한 곳은 공장이다. 공장은 80년대 내내 민중문학의 중심에 서 있었다. 공장을 통해 우리는 삶의 문학을 배웠고, 또 그 길에 한동안 동참했다. 하지만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공장은 우리 문학의 중심 자리에서 사라졌다. 노동 소외와 자본 독점, 비인간성의 착취는 여전한데도 공장은 문학의 주요 축이 되지 못했으며 사람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졌다. 자연히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사회에서도 밀려나는 이중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도시는 캄캄하고 무뚝뚝하고 잿빛 콘크리트 벽과 무덤덤한 아침이 있을 뿐, 민들레 같은”(「도시엔 사람이 없다」) 노동자들은 사라졌다.
물론,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엄청난 성과를 이루어냈다. 역사 발전의 흐름인지 아니면 일시적 선택인지는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노동자 당이 국회의사당에 진입한 것은 역사의 물굽이를 바꾸는 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공장의 삶이 시민들의 삶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문학작품은 드물다. 백무산과 박노해 등의 성과를 넘어서는 작품이 나오지 않고 있다. 이면우 시인을 비롯한 몇의 성과를 빼면, 지금 노동문학에서 80년대 문학의 아픈 상처인 ‘거친 호흡과 설익은 구호, 서툰 감성’을 벗었다고 보기 어렵다. 아하, 슬프게도 여전히 노동문학은 ‘각성’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럴 즈음 표성배 시집 ꡔ저 겨울산 너머에는ꡕ(갈무리, 2004)를 만났다. 노동문학에 대한 내 우려는 상당히 잦아들었다. 그의 시에서 보이는 공장 현실과 노동자 생활은 더 이상 ‘각성’을 향해 열려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시집에는 소외된 공장 노동자의 현재적 삶이 흘린 땀방울과 아픈 눈물로 낭자하다. “공장과 함께 키가 자랐고/공장과 함께 사랑도 익었”던 그에게 공장생활은 곧 공생(共生)의 공간이다. 그는 공장을 통해 세상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웠던 것이다. “남모르는 그리움에/가슴 태울 때는/공장이 나를 위로해 주었고/밤새도록 벌건 눈으로 서 있는/가로등의 마음도/공장에서 엿볼 수 있었다.” 밤샘 일을 하면서 비로소 “초롱초롱한 별도/새벽녘이면/나처럼 힘들어 한다는 것을”(「공장」) 알았다. 이처럼 그에게 공장은 그의 식구이자 동료이다. “쌕쌕거리며 돌아가는 기계”마저도 그에게는 한 식구와 다름없다. 창원대로를 달리다가도 그가 듣는 것은 쌩쌩 스쳐가는 차 소리가 아니라, 쿵쿵거리는 기계소리다.
공장이 아프면 그도 아프고 공장이 슬프면 그도 슬프다. 이제 공장은 그에게 더 이상 투쟁의 대상이 아니다. 마땅히 지켜야 할 소중한 생명이며 삶터인 것이다. 그에게 공장은 농민이 땅을 대하는 마음과 다를 게 없다. 농민이 땅과의 내밀한 교감을 통해 생을 드러낸다면 그는 공장과의 진실한 교감을 통해 생의 진실한 울림을 다소곳하게 펼쳐 놓는다. 그는 노동시가 부여잡고 있었던 공장의 외피-선진 노동자의 각성만이 의미 있는 것처럼 비쳐졌던 관념성-를 티나지 않게 깨뜨리고 있다.
문득 돌아보라, 가슴 벅차지 않는가, 우리 머리 속에 각인된 노동시의 잘못된 전형을 조용히 쿡쿡 찔러 해체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노라면.
급하게 넘긴 점심밥
소화야 되든 말든
커피 한 잔 담배 한 대 물고
햇볕 잘 드는 잔디밭에
몸을 누인다
스르르 잠든 몸을
누군가 콕콕 찌른다
점심시간
밥 먹고 나면 남는 삼십 분
조금이라도 눈 붙이려고
김 형도 송 씨도 필사적으로
밥을 넘겼는데
달콤한 잠을 방해하려는 듯
누군가 콕콕 찌른다
실눈을 하고 살며시 둘러보아도
여기저기
시체처럼 쓰러져 있는
몸뚱이들 뿐
따뜻한 봄날 바람 한 점 없는데
누군가 콕콕 찌른다
―「누군가 콕콕 찌른다」 전문
마음과 정신까지 지배하려는 자본의 속성이 예리하게 그려져 있다. 부조리한 노동 현실이 통렬하다. 자본가들에게는 시체처럼 쓰러져 있는 몸뚱이들에게서도 더 짜내야 할 게 있는 것이다. 뒤틀려 마지막 기름을 다 짜 바치기 전까지 노동자에게 휴식은 없다. 파리한 목숨을 찔러대는 음험한 착취와 감시의 촉수, 섬뜩하지 않는가.
3. 이안, 상생에 눈뜨다
우리에게 농촌은 단순히 농촌이 아니다. 언제나 농촌생활을 동경하는 우리의 유전자 덕분에 농촌은 영혼의 자리를 차지한다. 들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영혼에 차오르는 벅찬 두근거림에 젖는다. 평화의 안식을 얻는다. 마치 어머니의 품안 같다. 바로 이 점이 개발과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농촌이 파헤쳐지거나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영혼이 피폐해지는 자본주의 사회를 정화시키는 생명 에너지는 농촌에서 나온다. 우리가 꿈꾸는 삶의 바람직한 형태인 상생(相生)은 그 생명 에너지를 키워가는 과정의 산물이다.
이안의 시집 ꡔ목마른 우물의 날들ꡕ(실천문학사, 2002)에서 나는 그런 상생의 기운을 듬뿍 받는다. 그는 나에게 부처의 연꽃을 물어 나르고, 나는 가섭의 미소를 입가에 노랗게 물들인다. 그러면 숨죽이고 있던 사물들도 교감하여 깨어나 자연의 비의(秘儀) 속으로 빠져든다.(“한쪽이 부처의 연꽃을 부지런히 물어 나르면 한쪽은 가섭의 미소를 입가에 노랗게 물들이면서, 처마 한 귀퉁이가 풀숲으로 총총 뛰어내린다”「교감」에서 차용.) 이와 같이 충일한 생명 에너지는, 어쩌면 적대적일 대상끼리도 상생케 한다. 비록 밭에서 베어내거나 내몰아야 할 “바랭이 쇠비름 명아주 개망초”조차 “누대로 정든 이름들”이어서 “참 다정히도 부르며 어루만지며/손목 잡아당겨 끌어안으며” 최대한 살갑게 치우면 또 그것들도 기꺼이 응대해 온다. “비알밭 떠메고 입산하는 환삼덩굴이/하산길의 칡넝쿨 개망초가”(「몸길」) 밭골 사이 길을 내어주는 것이다. 밀쳐내는 게 아니라 서로 끌어당겨 품어안는 상생의 기쁨이 벅차다. 이렇게 하여 자연과 인간은 서로의 존재를 긍정하면서도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상생의 질서가 깨어지기도 하는 것이니, 이렇게 어긋난 삶을 견뎌야 했던 발자국은 “자기가 끌고 온 삶을/허공 속에 꽁꽁 처박아버린다.”
새하얀 눈밭을 잇던
새의 발자국 급히 끊겼다
새는 전후좌우
어디로 마음을 낮추고 갔나
오도 가도 못하는 마음은 걸어서
얼룩만을 남겼으니
발자국도 화가 나면 자기가 끌고 온 삶을
허공 속에 꽁꽁 처박아버린다
―「성난 발자국」 전문
이 시에서 시적 긴장이 정점에 이르는 곳은 “발자국도 화가 나면”이다. 활인화된 발자국은 전후좌우 살피며 오도 가도 못하다가 얼룩만을 남기고 사라진 수많은 변절자들(새에 비견되는)의 삶을 “허공 속에 꽁꽁 처박아버린다”는 것이다. 통렬한 자기 부정이다. 자기 삶의 존재를 스스로 부정한 자들을 향해 쏘아대는 시의 눈매가 참으로 매섭다.
마음과 족적이 함께 어우러진 얼룩 없는 삶을 꿈꾸는 그의 세계도 자본주의사회라는 삭막한 현실 앞에서는 조금씩 흔들린다. 그가 아무리 “화목으로 잘려나간 아까시나무/잘린 자리는 살아 있다”, “검은 상처는 살아 있다”, “나뭇가지는 타오르며 살아 있다”, “한 그루 없는 몸의 바람 소리는/웅웅거리며 살아 있다”(「物이 있던 자리․1」)고 외쳐도 잘린 아까시나무라는 실체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처럼 끊임없이 준동하는 자본증식의 반생명은 그를 힘겹게 한다.
함에도 그가 끈질기게 상생의 기운을 펼쳐낼 수 있는 것은 누대로 이어져온 유전자 속에 각인된 잡초 같은 생명력의 손바닥밭이 있기 때문이다. 잡초 우거진 손바닥밭에서 나는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아버지의 양순한 어린 자식이 되기도 하며, 누대로 친하여 온 잡초家의 잡초가 되기도 한다.” 이 순간 작은 손바닥밭은 시공간을 초월한 우주로 전화되는데, 물론 그 힘은 잡초와 인간, 아버지와 나의 상생 에너지이다.
아버지의 외출은 자주 잡초에 걸려 넘어졌다 가르칠 자식들이 많아 논밭을 점점 넓힌 탓이다 아직 아들 하나뿐인 내 밭은 있다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작은데, 잡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잡초 우거진 손바닥밭에서는 자주 아버지를 뵙는다 잡초 하나하나가 젊은 날 아버지를 뵙게 하여, 내 마음을 그날의 아버지 것이 되게 하는 탓이다
손바닥밭에서는 내가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아버지의 양순한 어린 자식이 되기도 하며, 누대로 친하여 온 잡초家의 잡초가 되기도 한다
―「잡초 우거진 손바닥밭」 전문
4. 신용목, 부조리와 대결하다
자연과 만날 때 우리는 누추해진다. 인간이 부리는 해악이 큼을 실감한다. 살기 위해 애쓰는 농사마저도 자연에게는 훼손일 터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자연을 되돌아보지 않는다. 끊임없이 탐욕스럽게 자연 질서를 무너뜨리며 전진할 따름이다. 자본의 노예가 되어버린 현대세계에서 그 탐욕은 더욱더 증폭된다. 신용목은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여 신용목에게 “사는 일은 산수유꽃빛만큼 아득”하다. 이 어질거리는 아득함은 그의 삶을 “천한 만큼 흉터를 늘리”도록 이끈다. 이제 ‘나’라는 존재는 어쩔 수 없이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처럼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갈대 등본」)이 될 수밖에는 없다.
이처럼 신용목의 시집 ꡔ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ꡕ(문학과지성사, 2004)의 현실 인식은 비관적이다. 이미 부조리를 체득한 자의 시선이 곳곳에 박혀 있다.
햇살이 비듬처럼 내리는 오후,
차창에도 다방 풍경이 비쳤을 터이니
나도 그녀의 얼굴 속에 앉아
마른 표정을 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당신과 나는, 겹쳐져 있었다
―「소사 가는 길, 잠시」 부분
“햇살이 비듬처럼 내리는 오후”라는 표현이 묘하게 비관적이면서도 강렬하다. 내 얼굴에 부어지는 게 햇살이 아니라, 비듬이라 가정해 보라. 세상이 온통 잿빛이지 않을까. 거기에 다방에 앉아 손톱을 다듬는 여자와 마른 표정을 다듬는 내가 차창에 오버랩된다. 소통 가능할 것처럼 보이나 허상인 차창이라는 매개를 통해 겹쳐지는 현실이 참으로 메마르다. 현실보다도 훨씬 더 비현실적이다.
나는 이 점을 주목하고 싶다. 신용목이 갈파하는 시적 진실은 현실이어야 마땅할 것들이 놓이는 비현실성에 있다. 그의 열정은 이 전도된 가치의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모색과 탐구에 오롯이 바쳐진다. 현실 소외의 비감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최근에 씌어지는 시들 가운데 현실 소외의 통찰이 이만큼 예리한 경우도 드물다.
통찰이 예리한 만큼 그의 시로(詩路)는 어쩔 수 없이 지난한 몸부림의 연속이다. 부조리한 현실이 뿜어내는 불길에 휩싸인 채 살아온 그의 기억들의 “데인 자리는” 쉽게 아물지 않을 것 같고 흉터는 오래 갈 것 같다. 우리 현실이 천박한 자본주의의 마수에서 벗어나 자연과 호흡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아 보인다.
물론 그도 한때는 자연과의 눈부신 교감을 꿈꾼 적이 있다. “저 산을 다 안아보고 싶었”으며 “저 능선에 소나무야 못 오른 하늘에 멍든 슬픔인 셈 치더라도/저 산을 다 안아 저 산으로 바라보면/연기 오르는 마을에 저녁도 깊고/저녁마다 깊어버린 이들에겐 고운 흙도 내어주며/살아서도 가면서도 묵묵하고 싶었”던 것이다.(「봄꿈 봄 꿈처럼」) 하지만 그의 꿈은 한갓 “몸에 가둔 시간”인 “물집”이 되고 만다. 그가 이렇듯 터뜨리자니 덧날까 두렵고 놓아두자니 고통스러운 자기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은 심안을 통해 “자신의 해골을 너무 자주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이 같은 뼈저린 자기 성찰은 「아파트인」에서 통렬하게 드러난다.
천년 뒤에 이곳은 성지가 될 것이다
아파트
이 장엄한 유적에 눕기 위해
고된 노동과
아픈 멸시를 견뎠노라고
어느 후손은 수위실 앞에서 안내판을 읽을 것이다
관광 책자에 찍혀 있을 나의
유골을 구겨 쥐고
관리비 내러 갔던 관리소
종교인들이 층층이 잠들었다는 로마의 카타콤
성스럽게 북벽을 차지하고 걸린 사진처럼
하루는 아침 변기에 앉아
몇 미터 높이와 몇 미터 간격으로
차곡차곡 손을 늘어뜨리고 볼일을 보고 있을
아파트 주민들을 생각했다
박해의 축복처럼 뿌려지는 태양 가루
돌의 사막을 나서는 숫낙타의 갈라진 발톱과
마른 혓바닥을 닮은 여인의 얼굴
모래알을 씹는 아이들이 몸마다 칸칸이
멸망을 분양하고 사는 카타콤에 밤이 온다
구름과 구름 사이에 만찬이 차려지고
간곡함을 거룩함으로 옮겨놓는 시간의 낱장들이
창문마다 아름답게 내걸린다 이대로
한 시대가 끝난다면
나는 순교자가 될 것이다
―「아파트인」 전문
그가 보기에 현대생활의 주거지인 아파트는 무덤이며 유적이다. 그에게 아파트는 곧 “멸망을 분양하고 사는” ‘카타콤’인 것이다. 그러나 아파트에 카타콤의 순기능은 없다. 박해를 피해 숨어든 것이 아니라, 편리한 삶의 무덤을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아파트 한 동을 창문 쪽으로 칼을 대어 위에서 아래로 자른 단면을 상상해 보라. 그곳에서 나는 누군가의 머리 위에서 밥을 먹고 똥을 누고 사랑을 나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내 머리 위에서 “차곡차곡 손을 늘어뜨리고 볼일을 보고 있”다. 문득 오스스 살 떨리지 않는가. 자연을 역행하여 생활하는 저 아파트가, 콘크리트 벌집인 카타콤 무덤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현실인가, 생의 공간이 무덤이 되어버리는 카타콤은. 하여 그도 카타콤에 갇혀 유적이 되어버린 사람들처럼 순교자가 될 것 같은 것이다.(아니, 엄밀한 의미에서는 배교자일 것이다. 자연이라는 질서의 신을 배신한 배교자.)
그는 어쩌면 너무 버거운 존재의 짐을 걸머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30대 초반의 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조리의 실존이 무겁고 비판의 눈매가 매섭다. “마음의 절벽을 긁어내리는 손톱자국”(「목련꽃 지는 자리」)이 그어놓은 시적 긴장도 팽팽하다. 부디 초심대로 밀고가기를 바라지만 혹 지쳐버리지 않을까 기우(杞憂)를 걸어둔다. 믿건대 신용목은, “언젠가 꽃이 진 허공, 그 맑은 높이에” 그의 빛나는 “영혼을 띄워둘 것이”(「화분」) 분명하지만.
4. 김태정, 골동의 정서로 빛나다*
김태정이 사물과 만나는 방식은 사뭇 다정하고 나긋나긋하다. 잔잔하고 찬찬하게 다독거린다. 마치 서로가 서로에게 물들 듯이 그렇게. 그는 세상과 대결한다기보다는 감싸안으려 애쓴다. 그의 이 같은 순정(純情)은 참으로 맑아서 익숙지 않은 사람은 일순 당황하기도 한다. 탁한 마음에 그의 맑은 기운이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물푸레나무」) 스며듦을 견뎌내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와 같은 순정을 순수서정시에 빗대지는 말 일이다. 그가 「시의 힘 욕의 힘」에서 선언한 대로, “순도 백 퍼센트를 내세우고도 모자라/순, 진짜만을 부르짖는 예술순교주의파 시인들이/점잖게 경멸을 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의 순정은 공허한 순수서정은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돌올한 서정시들을 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그의 성취를 민중서정시의 진경이라고 부르고 싶다. 80년대의 저 억센 민중시는 구현하지 못했던 유현하고 아름다운 민중의 삶을 애잔하고 넉넉하게 품어 안고 있는 것이다.
시집 ꡔ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ꡕ(창비사, 2004)에 실린 「내유리 길목」, 「사방연속꽃무늬」 등도 빼어나지만, 나는 「달마의 뒤란」의 징글징글한 아름다움에 폭 빠진다. 시인의 감성과 시 세계의 어울림이 최고조에 달한 느낌이다.
어느 표류하는 영혼이
내생을 꿈꾸는 자궁을 찾아들듯
떠도는 마음이 찾아든 곳은
해남군 송지하고도 달마산 아래
장춘이라는 지명이 그닥 낯설지 않은 것은
간장 된장이 우리 살아온 내력처럼 익어가는
윤씨할머니 댁 푸근한 뒤란 때문이리라
여덟 남매의 탯줄을 잘랐다는 방에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모처럼 나는
피곤한 몸을 부린다
할머니와 밥상을 마주하는 저녁은 길고 따뜻해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지 않고
개밥바라기별이 떴으니
누렁개도 밥 한술 줘야지 뒤란을 돌다
맑은 간장빛 같은 어둠에
나는 가만가만 장독소래기를 덮는다
느리고 나직나직한 할머니의
말맛을 닮은 간장 된장들은 밤 사이
또 그만큼 맛이 익어가겠지
여덟 남매를 낳으셨다는 할머니
애기집만큼 헐거워진 뒤란에서
태아처럼
바깥세상을 꿈꾸는 태아처럼 웅크려 앉아
시간도 마음도 놓아버리고 웅크려 앉아
차랍차랍 누렁이 밥 먹는 소릴 듣는
해남하고도 송지면 달마산 아래
늙고 헐거워져 편안한 윤씨댁 뒤란은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지 않고
오늘밤이 오늘밤 같지 않고
어제가 어제 같지 않고
내일이 내일 같지 않고 다만
개밥바라기별이 뜨고
간장 된장이 익어가고
누렁이 밥 먹는 소리
천지에 꽉 들어차고
―「달마의 뒤란」 전문
뒤란의 평화와 태곳적 고요의 아름다움으로 충일하다. 그는 “해남군 송지하고도 달마산 아래”에 “피곤한 몸을 부리는”데 “떠도는 마음이 찾아든” 이곳이야말로 그에게 선험적인 공간이다. 이미 예정된 곳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달마 선사의 부르심인지?) 뒤란은 그야말로 김태정에게 딱 맞는 공간이다. 그것에 맞대응하는 심상을 달리 찾기 어렵다. 나는 김태정 시의 아름다운 근거지를 하나 찾으라면 뒤란을 들고 싶다. “여덟 남매를 낳으셨다는 할머니/애기집만큼 헐거워진 뒤란”, “늙고 헐거워져 편안한 윤씨댁 뒤란은”, “시간도 마음도 놓아버”린 곳이며,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지 않고/오늘밤이 오늘밤 같지 않”은 신비의 공간이다. 그곳은 이를테면 우리 원형의 곳집이며 태곳적 자궁이다. “느리고 나직나직한 할머니의/말맛을 닮은 간장 된장들은 밤 사이/또 그만큼 맛이 익어가”는 뒤란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그늘의 생성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뒤란은 박지원이 말하는 것처럼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황홀한 정취가 빚어지는 곳이다. 이 법고창신의 기조는 김태정 시 곳곳에서 변주되어 나타나는데, 나는 그것을 ‘빛나는 골동의 정서’로 풀어보고 싶다(‘골동’을 부디 자질구레함으로 해석하지 말기를. 여기서의 ‘골동’은 희소가치가 큰 오래된 것의 의미이니만큼). 사실 김태정만큼 잃어버린 옛것 혹은 낡은 것들의 심상을 현존재로 뚜렷이 부각시켜 내는 시적 경지를 이룬 시인도 드물다. 이쯤에서 그의 시 도처에서 숨쉬고 있는 그에게 익숙한 옛것 혹은 낡은 것들을 한번 불러내 보자.
‘호마이카상, 286컴퓨터, 실밥따기, 여수 14연대 구빨찌, 쌀 한줌 두부 한모 사들고 돌아오는 저녁, 최루가스, 늘어진 카세트테이프, 뒤란, 실밥먼지 뒤집어쓴 봉두난발, 솜틀집, 달맞이꽃 핀 돌담, 루핑지붕, 아이롱,……’ 등등.
그는 이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잃어버린 심상’들을 시집 곳곳에서 살게 하는데 그것이 결코 낯설지 않다. 오히려 향기롭고 정겹다. 낡은 기억을 헤집고 나와서는 아주 귀한 무엇이라도 되는 듯이 은근슬쩍 우리 맘속 양지뜸에 자리잡는다. 예컨대 김태정 기억 속에 부려진 이 같은 심상들은 「달마의 뒤란」에서 보듯 더 이상 음지것들이 아니다. 양감(量感, 또는 陽感) 있는 현존재인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나는 「나의 아나키스트」를 주목한다. 이 작품이야말로 ‘빛나는 골동의 정서’를 승화시킨 탁월한 성취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원고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겐 뭐니뭐니 해도 컴퓨터의 장점은 속도와 정보와 통신이라지만
정보와 통신이 두절되고 속도를 아예 잊어버린 그의 자폐적 태평세월이 흔적을 남기지 않는 그의 신중함이 열받을 땐 백매든 천매든 미련없이 날려버리는 그 화끈함이 내겐 무엇보다 믿음직스러워서
어떤 사상이든 어떤 정견이든 어떤 욕설이든 내뱉어도 발설하지 않는 나의 286은 외계와의 교신을 버린 아나키스트라서
흔적을 사냥하는 광견의 시대 팔공년대를 통과하면서 천기누설공포증이라 해도 좋을 풍토병을 다만 아웃사이더였을 뿐인 나까지 덩달아 앓았으니
볼펜을 쥐는 것조차 두렵던 시절 시도 편지도 머릿속으로만 쓰는 습관이 들었으므로 전화번호를 씹어삼키는 버릇이 생겼으므로
―「나의 아나키스트」 부분
6. 겉핥기를 넘어서
제대로 소개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나는 이렇게 마감한다. 겉핥기에 불과한 내 소회를 넘어서 누군가가 이들 시인 각자가 구축한 시세계를 본격적으로 다루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허술히 지나치기에는 이들 시인이 쌓아둔 내공이 정말 탄탄하다. 각기 다른 거리두기로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웅숭깊다. 나는 감히 민중서정시의 새로운 진전이 이들 네 시인으로부터 이뤄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못내 찜찜한 것은 이런 생각이 드는 탓이다. 잘 익은 과실을 물정 모르는 까치가 깍깍 소리 지르며 콕 찔러버린 것 아닌지 하는.
정우영
․1960년 전북 임실 출생
․1989년 ≪민중시≫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
*김태정 시집 해설, <어둠 속의 불빛 한점>> 중 일부를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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