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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연재-속담으로 읽는 문화사①/고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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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담에 나타난 제주인의 삶과 문화
고재환
1. 잠녀(潛女)/잠수(潛嫂)
■년 애기 낭 사을이민 물에 든다.
(잠녀는 아기 나서 사흘이면 물에 든다.)
한국의 속담 가운데 ‘잠녀/잠수’ 속담은 제주도가 아니면 찾아보기 어려운 여성속담으로써 유별나다. 한데 요즘 사람들은 ‘해녀’라고 해야 잘 알고 ‘잠녀/잠수’라고 하면 낯설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옛 분들은 ‘해녀’라는 말은 안 쓰고 ‘녜/수’란 말을 즐겨 썼다. 지금도 어촌의 나이가 많은 분들은 여전히 ‘녜/수’라고 한다. 그런데 왜 ‘해녀’라는 말이 두루 쓰이고 있는 걸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일제 때 우리의 말과 글을 없애고 식민의식을 불어넣기 위한 책략에 휘말린 결과다. 그럼 ‘해녀’라는 명칭은 일제어(日帝語)란 말인가. 그렇다. 일제식민지 찬탈의 의도가 깔려 있는, 쓰면서도 떨떠름한 명칭이다. 그런데도 천연덕스럽게 ‘해녀’를 즐겨 쓰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혹자는 부인할지 모른다. 옛 기록에 ‘해녀’라는 명칭도 있으니까. 조선 정조 때 학자 위백규의 ꡔ존재전서ꡕ ‘금당도선유기’에 기재된 ‘해녀’가 그것이다. 찬찬히 검토해보면 그것은 개인의 자의적으로 붙인 명칭일 뿐, 실제 민간에서 두루 쓰이는 통용어는 아니었다. 그보다 앞서 영조 때 문신인 신광수의 ꡔ석북문집ꡕ ‘탐라록’에는 ‘잠녀’로 기재되어 있다. 특히 금오랑의 소임으로 제주도를 직접 돌아보고 물질의 실상과 고초를 사실 그대로 읊은 고체시 ‘잠녀가(潛女歌)’의 ‘잠녀’가 그것인데, 본연의 원명(原名)을 제대로 밝히고 있어 주목을 끈다.
바다와 여인! 아마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러브스토리의 영상 공간이거나 그 모델을 연상키 쉽다. 하지만 제주도의 ‘잠녀/잠수’에게 바다는 싱그러운 낭만의 율동이 출렁거리는 곳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몸을 내던져 아득바득 부대껴야 하는 삶의 텃밭이다. 갯바위에 부서지는 우람한 파도소리 역시 시정을 떠올리기는커녕 종아리를 아리게 휘감아치는 채찍일 뿐이다. 잠자리에 누워 있어도 물결 울렁이는 소리에서 날씨를 예감해 낼 수 있어야 밝는 날 물질을 할 것인지 밭일을 할 것인지 마음의 갈피가 잡힌다. 보다 더 가증스러운 일은 임신부가 몸을 풀었을 때 삼일이면 해산물을 채취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디 그런 비정한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거짓 같은 참말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가난의 무게를 가눌 수가 없었던 것이 엄연한 역사적 현실이다. 오늘날과 같은 산모의 몸조리는 고관대작의 가문이 아니면 감히 엄두도 못 내는 이만저만 호강에 겨운 일이 아니었다.
출산의 과정만 해도 그렇다. 여유가 있는 집은 삼승할머니격인 노파를 데리고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나, 대부분은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옆을 지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문제는 혼자서 감당해내야 하는 위태로운 때도 적지 않았는데, 잘못되는 날이면 두 생명의 심지가 끊기고 만다. 그래서 경각을 다투는 출산의 고충을 위험 부담이 큰 항해에 빗대어 “벳질, 애깃질(뱃길, 아깃길)”, “애기 날 땐 올이 새롭나(아기 날 때는 한 올이 새롭다)”는 말을 곧잘 했다. 아무튼 통과의례의 첫 관문을 여는 고충을 감내하기 위해서는 진통의 고비를 견딜 수밖에 없었다. 입던 옷을 주워 담은 대바구니를 끌어안고 버둥거리며 기진맥진 자기와의 지난한 혈투가 벌어졌다. 그래서 낳은 아기는 거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산모 자신이 직접 탯줄을 자르고 태반까지 챙기고서야 자리에 누웠다. 눕는 것이 아니라 나동그라졌던 것이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출산 때 방에 보릿짚을 까는 풍습이었다. 이유인 즉 딱딱한 바닥에 아기의 머리가 닿는 충격을 줄이고 방바닥을 더럽히지 않는 등 후유증을 최소화하려는 관습 때문이었다. 더 신기한 것은 아기가 어머니의 몸에서 나올 때 그 자세를 보고 남아인지 여아인지 알 수 있었다는 경험철학이다. 남아인 경우는 어깨를 왼쪽으로 틀고 나오는데 엎드린 자세가 되고, 여아인 경우는 어깨를 오른쪽으로 틀고 나와서 뒤집힌 자세가 된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지 검증 절차를 거치지 않는 상태에서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지는 의문이다. 옛 분들은 사실이라고 해서 “소나인 어퍼졍 나곡, 지집아인 갈라졍 난다(사내는 엎드려서 낳고, 계집애는 뒤집혀서 낳는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되뇐다.
또 신생아를 키우는 양육 문제만 해도 예사롭지 않았다. “녜 애긴 일눼만에 아귀것 멕인다(잠녀 아기는 이레만에 씹은 밥 먹인다).”, “녜 애긴 사을이민 체에 눅져 뒁 물질다(잠녀 아기는 사흘이면 삼태기에 눕혀 두고 물질한다).”고 했으니 육아의 고충도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너무 과장시켜 부풀린 것처럼 보이지만 이 또한 거짓말 같은 참말이다. 젖만 먹이고 키울 수 있는 여건이면 아기를 낳고 삼일 만에 바다에 들어갈 리가 있겠는가. 실제 젖을 먹이려고 해도 젖이 나오지 않으니 동네방네 젖 동냥질을 하면 모를까 별 묘안이 없었다. 꼭 같은 처지인데 남이라고 젖이 남아돌 리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어금니로 밥을 깨물어 묽게 만들어 먹일 수밖에. 지금도 고령의 할머니들은 식사 때 손자가 아장거리며 다가오면 그렇게 하려는 관습이 남아 있다. 또 어린애를 강보에 싸서 삼태기에 눕히고 물건처럼 바닷가 언덕 밑에 감춰둔 채 물질을 하지 않으면 목구멍에 거미줄이 치는 기막힌 삶도 마다하지 않았다. 모질고 질긴 것이 목숨이라고 했던가. 그들도 잔뼈가 굵어지면 여간 당차고 야무진 게 아니었다. 그 실상을 대변하는 한마디는 “소나인 족아도 콩레긴다(사내는 작아도 콩싸라기이다).”, “제물에 준 놈 거시지 말라(제물에 마른/여윈 놈 건드리지 마라).”이다. 체격은 왜소하지만 체력만은 돌덩이처럼 딴딴해서 어떤 환경에서도 제 몫을 다할 수 있는 자생력 만점이라는 말이다.
■베똥 알은 놈을 줘도 네착은 놈 안 준다.
(배꼽 밑은 남을 줘도 노짝은 남 안 준다.)
이 속담은 주도권 장악을 겨냥한 제주여인의 역동성을 대변하는 말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여인의 정조가 배를 젓는 노(櫓)짝만도 못하다는 말인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망발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이 말은 거짓 같은 참말이 아니라 부풀려진 거짓말이다. 그 정도로 삶에 대한 집념과 의욕이 치열해서 남성을 능가하는 극근극기(克勤克己)의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고자 함이다. 그럼 왜 남자도 있는데 여인이 그토록 힘에 부치는 험하고 고된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남자의 인력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 내력을 죄다 본풀이로 엮어내려면 대하소설을 써야 한다. 골격만 열거하면 이렇다. 부역과 병역, 해상표몰(海上漂沒)과 이민족의 침탈이 남자의 수를 감소시키고 만 것이다. 해서 ‘여자’가 ‘돌’, ‘바람’과 함께 제주도의 별칭인 ‘삼다도(三多島)’가 된 것이다. 그 실상을 살필 수 있는 삼다문화의 자료가 제주도 사이버공간(www.jejusamda.com, www.제주삼다.kr)에 ‘제주삼다관’, ‘돌문화관’, ‘바람관’, ‘여성관’으로 나눠 다양한 정보와 함께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오늘날 우먼파워의 위력과는 다른 차원이지만, 옛날 제주도의 여성들은 어린애의 보육문제에서부터 집안 일 처리, 생계해결을 위한 막일, 여차하면 가장 노릇까지 도맡아야 하는 일인 삼사역의 고달픔을 업보처럼 가눠야만 했다. 몸으로 부딪치는 고달픔은 문제가 아니었다. 빵이 해결되는 곳이면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거기에는 직업의 귀천이 있을 수 없었다. 그저 입에 풀칠만 할 수 있는 삶의 원초적 본능만 충족시킬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요즘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이지만, 3D 업종은 아예 등 돌리고 거들떠보지 않는 세태는 있을 수 없는 별천지에 해당했다. 땀방울이 묻은 밥알을 깨물면서 흐느낄망정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제주의 여인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제주도가 있게 된 것이다.
잠시 그들 ‘잠녀/잠수’들의 노를 저으며 물질을 떠날 때 불렀던 ‘잠녀노래’의 가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베똥 알을 놈을 준덜
요 네착사 놈을 주랴
젓이라 젓이라
뒤엣 섬이랑 멀어지곡
앞읫 섬이랑 디여 지라
(배꼽 아래를 남을 준들
요 노짝이야 남을 주랴
저어러 저어라
뒤엣 섬이랑 멀어지고
앞엣 섬이랑 가까워 져라)
―김영돈 ꡔ제주도민요연구ꡕ 876번
쑤무나문 설나문엔
요 네착을 버칠 것가
광풍아 불컹 불라
요 네착이 꺼꺼지카
이 지카 누게가
이기느니 여보게
(스무남은 서른남은엔
요 노짝을 부칠 것인가
광풍아 불테면 불어라
요 노짝이 꺾어질까
바람이 질까 누구가
이기느냐 하여보자)
―김영돈 ꡔ제주도민요연구ꡕ 884번
남성이 무색할 정도로 도사공이 되어 배를 부리는 역동적인 기백도 놀랍거니와 호연지기의 대담성이야말로 바다를 텃밭으로 일궈 온 ‘잠녀/잠수’들만이 가질 수 있는 울력이다. 하긴 전라남도 남해안의 다도해 지역에도 배를 능숙하게 다루는 여인네의 모습을 드러낸, “넘너리 큰애기 배 둘러댄다”는 속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주도 ‘잠녀/잠수’들이 활동반경에 못 미친다. 국내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중국의 ‘청도’․ ‘대련’까지 오갔는데, 머무는 기간은 길면 해를 넘기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봄철인 삼월을 전후해서 떠나면 추석을 전후한 네다섯 달이 넘어야 귀향길에 오르는 것이 예사였다.
특히 일본으로 건너간 경우를 보면 1903년 ‘삼택도’를 시작으로 1930년에 1,500명에 이르는데, 60~70세의 잠녀들이 하루 5시간 물질에 종사하는 것으로 돼 있다. 이 사실은 재일교포 2세 언론인 김영과 양징자가, 1983년부터 4년간에 걸쳐 천엽현 방총반도 일대에 거주하는 제주 출신 잠녀를 대상으로 조사한 보고서 「바다를 건너간 조선인 잠녀」에 드러났던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1937년 1월 7일과 12일, 2차에 걸쳐 북제주군 구좌읍 세화리에서 수천여 명이 들고일어난 항일운동이었다. 피땀 어린 해산물의 착취에 혈안이 된 일제관제조합의 횡포를 참다못한 구좌․성산 일대 6개 마을 ‘잠녀/잠수’들이 박차고 일어섰던 것이다. 이 항일운동은 집단으로 이뤄진 여성항일운동의 효시라는 데서 그 의의가 자못 크다. 선두에 섰던 부춘화․김옥련 두 잠녀는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일곱 여덟 살 때부터 체득하기 시작한 물질에 군살이 박힌 근력의 열기가 이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제주도의 ‘잠녀/잠수’들은 오늘의 미국을 떠받친 프런티어가 부럽지 않은, 동북아의 바다를 휘젓고 누빈 여장부였다.
■바당에 들땐 지애집을 일뢈직곡, 나 올 땐 똥막살이 암직다.
(바다에 들 때는 기와집을 이룰 것 같고, 나올 때는 오막살이 팔 것 같다.)
지금이니 제주도가 레저사업의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독립국이었던 탐라왕국이 고려에 예속되면서부터는 영토적 허울만 쓴 달동네가 돼버린 것이다. 선정을 편 목민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권좌를 악용한 무소불위의 권익만 챙길 뿐, 배가 등에 붙은 민초들의 목에는 가난의 멍에가 덧씌워질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활용할 줄 아는 슬기의 샘이 마르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왔다는 데 있다. 농자천하지대본의 생업관에 붙매인 당시로서는 음부만 가리는 ‘곰수견’1)만 걸치고 알몸으로 물질하러 바다에 든다는 것은 여간한 용단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천직으로 알고 썰물 때가 되면 물안경인 수경을 목에 걸고 ‘빗창’2)을 손목에 질끈 동여매고는 망사리3)가 달린 테왁4)을 어깨에 걸고 바다로 향했다. 그 채취물은 미역, 소라, 전복, 성게, 해삼 등 가리지 않았다. 작살인 ‘소살’을 가지고 가면 고기도 쏘아서 잡았다. 이렇게 해서 얻은 해산물은 가정경제를 좌우하는 소득원이 되었다. 그렇다고 기대한 만큼의 소득을 올릴 수 있다면야 오죽이나 좋으랴. 물질이란 젊은 패기만 믿고 덤벼든다고 쉽게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고도의 숙련된 기량과 노하우가 없이는 어림도 없었다. 갓물질이나 하는 애숭이 ‘하군(下軍)’5)인 ‘돌()파리’는 별 볼일 없고, ‘중군(中軍)’6)의 단계를 넘어 ‘상군(上軍)’7)이 돼야 물질한다는 말을 건넬 수 있었다. 바로 이 상군은 그들 사회에서는 물질의 달인으로 ‘불턱’8)에 앉을 때도 상석에 모셨다. 더구나 물질의 권역도 엄격해서 상군이 물질하는 장소는 범접할 수 없도록 관행화돼 있었다. 물론 상군인 경우도 하군의 영역인 갓물질을 삼갔다.
문제는 물질을 잘하는 상군이 되더라도 마음먹은 대로 소득이 보장되지 않는 불확실성이었다. 그날의 운도 따라야 하지만, 건져 올릴 해산물들이 있는 곳을 제대로 찾아야 했다. 바로 그 장소의 선택이 물질의 성패를 가늠하는 비결이었다. 또 두 다리를 쌍돛대처럼 곧추세우고 얕게는 5m, 10m 이상 곤두박질의 강한 체력도 절대적이었다. 모자반과 감태가 너울거리는 우툴두툴 음침한 돌바닥. 이때는 여인이 아니라 거친 돌바닥에 뱃살을 깔고 씨근덕거리며 어패류만을 골라 먹는 괴물로 변하고 만다. 부릅뜬 눈을 찡그리며 돌 틈을 더듬는 손가락마저 몇백 와트의 전류가 흐르는 촉수로 변하지 않고는, 내 여기 있으니 잡아가라고 손안에 걸려들 리가 없다. 숨을 죽여야 하는 시간도 짧아야 30초, 1분 정도는 견뎌내야 한다. 그러다가 물위로 솟아오르면 저절로 숨통에 찼던 공기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휴~ 휘파람과 같은 숨비소리9)가 파도를 타고 울려 퍼진다.
이런 과정을 수십 차례 반복하고 나면 혼백상자를 등에 지고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그 후유증으로 신병을 앓기도 일쑤였다. 장장 5시간의 버거운 물질이었지만, 많이 잡힌 날은 고된 줄을 몰랐다. 기와집을 마련할 밑천이 될 수 있으니, 이기양양 개선장군처럼 신바람이 절로 날 수밖에. 소득이 없는 날은 코딱지만한 오막살이를 팔아야 끼니를 해결할 것처럼 주눅이 들어 발걸음이 마냥 무거웠다. 근간에는 물질 때 입는 잠수복도 전신을 보호할 수 있는 고무제품으로 현대화돼 있고, 어촌계별로 권익도 신장되는 등 옛날과 같지 않다. 그래도 그들의 노고에 비하면 녹녹치 못해 물질을 그만 두는 잠수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잠녀/잠수’들의 삶의 생태는 현기영의 소설 ꡔ바람 타는 섬ꡕ에도 실감 있게 드러나 있다.
그럼 도대체 제주도의 ‘잠녀/잠수’의 시원은 언제부터일까? 선학들은 ꡔ삼국지ꡕ ‘위지동이전’의 마한․변한․왜인조에 문신을 하고 어패류를 잠획했던 것과 같은 원시적 잠수어업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구체적 문헌기록을 예로 들면, 1079년 고려 문종 때 탐라국에서 대진주 2개를 바쳤는데, 그 빛이 빛났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야명주(夜明珠)라 했고, 충숙왕 때는 원(元)에서 사람을 탐라에 보내어 진주를 채취케 하였으나 얻지 못해서 민간에서 소장하고 있는 100여 개를 거두어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미뤄볼 때 삼국시대 또는 그 이전으로 올려 잡아야 될 성싶다.
끝으로 2003년도 현재, 제주도 해양수산과에서 집계된 실제 물질에 종사하는 ‘잠녀/잠수’의 연령별 분포 상황을 제시하면서 잠수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기로 한다. 70대 이상 875명, 60대 2,261명, 50대 1,688명, 40대 744명, 30대 80명, 30대 미만 2명 등 5,650명이다. 1950년대에만 해도 제주도 인구의 1/4에 가까운 4만여 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감소세이다. 이대로 가면 수십 년 안에 두 자리 수로 줄어들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더욱이 30대 미만이 2명밖에 안 됨으로 그 보존책이 화급을 다투고 있다. 없어지기는 쉽지만 다시 되살리기는 어렵다. 제주인의 삶의 뿌리이자 세계적 유산으로 전승시켜 할 해양문화의 보배가 종말을 고할 날도 머지않았다.
1) 도곰수견: 잠수들이 물질 때 음부를 가리기 위해 입는 물옷
2) 빗창: 잠수가 전복을 채취할 때 쓰는 쇠로 된 30㎝ 내외의 도구
3) 망사리: 잠수가 채취한 해산물을 담기 위해 ‘테왁’에 매단 그물
4) 테왁: 잠수가 헤엄을 치거나 물질 때 붙잡고 쉬기 위해 속의 씨를 빼서 말린 박인데, 요즘은 플라스틱으로 만듦
5) 하군: 물질의 기량의 모자란 초보잠수
6) 중군: 하군의 단계를 넘었지만 아직 상군의 기량에 못 미친 잠수
7) 상군: 물질의 경륜과 기량이 최고조에 다다른 잠수
8) 불턱: 잠수들이 물질을 끝내고 바다에서 올라왔을 때 둘러앉아 불을 쬐며 몸을 말리기 위해 만든 자리(터)
9) 숨비소리: 테왁을 잡고 휴식을 취하는데, 그때 숨을 고르며 내는 소리
고재환
․1937년 제주 출생
․저서 <제주속담총론>, <제주도속담사전> 외
․제주교육대 명예교수 ․제주도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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