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15호 연재-하이쿠 에세이①/김영식
페이지 정보

본문
짧은 시, 긴 울림
김영식
들어가는 말
짧은 시는 독자에게 무례한 형식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많은 것을 독자의 몫으로 넘겨주기에 매우 겸허한 것이기도 하다. 짧은 시를 마음이라는 연못에 던지는 하나의 돌이라고 할 때, 그 돌이 연못에 빠져 퍼지는 동심원은 독자의 몫이 된다. 이 17자의 짧은 시가 만들어내는 동심원의 모양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개인에 다를 것이나, 사람이기에 공유할 수 있는 느낌을 나름대로 가볍게 글로 옮겨보고자 한다. 따라서 나의 글은 하이쿠 연구의 글이 아니라 그저 감상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고, ‘하이쿠 에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품의 선정 및 번역은 다음과 같은 원칙에 의한다.
1. 계간지의 발행 계절에 맞추어 가급적 계절에 맞는 하이쿠를 선정하여 올린다.
2. 하이쿠에는 계절을 나타내는 단어가 있어 이를 계어(季語)라고 한다. 예를 들면 매미는 여름이고, 개구리는 봄을 나타내는 계어이다. 지금은 자연에 익숙하지 않은 현대인을 위한 계어사전까지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사전을 찾아가면서 시를 읽거나 짓는다는 것은 이미 시의 본질을 벗어나 정형이라는 껍데기에 얽매이는 본말전도의 작업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어느 단어가 어느 계절을 나타내는 단어라고 써넣는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3. 하이쿠는 5. 7. 5의 17자로 이루어진 시인데, 이를 한글로 번역할 때 가급적 5. 7. 5가 되도록 노력하겠지만, 시의 본맛을 옮기기 위해서는 자수에 얽매이지 않기로 한다.
4. 일본어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 영어로 발음을 써놓기로 한다.
5. 하이쿠가 무엇이냐에 대한 입문 강의는 생략한다. 요즘은 인터넷에서도 쉽게 찾아 읽어볼 수 있다.
◈
秋深き隣は何をする人ぞ (芭蕉*)
あきふかき となりはなにを するひとぞ
(aki-hukaki tonariwa-naniwo suru-hitozo)
깊은 가을 밤
이웃은 무얼 하는
사람일까
이 하이쿠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자살하기 얼마 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쓰여 있었다 한다. 바쇼가 죽기 얼마 전의 것이기도 하다.
가을이 깊어가고, 밤도 깊어간다. 시인이 아니더라도 가을에는 쓸쓸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더구나 깊어가는 밤이니 깊은 가을+깊은 밤으로 이중적으로 깊이를 더하고, 나아가 만년에 생의 깊은 곳에 이른 시인의 심정이 더해지면, 쓸쓸함은 더욱더 깊어만 간다.
늦은 밤, 정원의 나무들은 바람에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다. 나의 마음에도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문득 친구가 사람이 그리워진다. 이웃집을 쳐다보니 누군가가 뭘 하는지 아직도 방에 불이 켜 있다. 나는 나그네, 외지의 한 여관방에서 바라다보는 저 이웃집의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그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진다.
사람을 만나 그가 어디 살고 뭐하는 사람인지 묻는 것이 유치하다고 생각하여 묻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도 해도 좋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오래전 잠시 만났다가 헤어지게 된 어떤 여자에게 마지막 날 내가 미처 듣지 못해 간절히 원했던 것은-유치하게도-그녀가 어디 사는 사람이고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등이었다. 나는 그녀를 기억할 단서가 많이 필요했다. 주고받은 말은 시간이 지나면 허공에 흩어져 없어지고 얼굴도 가물가물해지지만 끝까지 잊히지 않는 것은 건조한 데이터뿐이다. 바꿔 말하면, 데이터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 무엇을 하는지 알고자 함은 사랑의 시작이 되고, 상대를 내 안에 영원히 심는 작업이 된다.
이웃이 무얼 하는지 알고 싶어지는 것은 이웃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한다.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미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사람이 사랑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사랑은 지독한 고독에 처해 있을 때, 죽음의 그림자가 비칠 때 더욱더 간절히 솟아난다.
‘내 님의 사랑은'(양희은 노래, 이주원 작곡/작사)이라는 가요의 마지막 가사인,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가 생각난다. 말의 순서를 바꿔 써보자.
외로움이 깊으면, 사랑도 깊어라.
◈◈
この道や行く人なしに秋の暮 (芭蕉)
このみちや ゆくひとなしに あきのくれ
(kono-michiya yuku-hito-nashini akino-kure)
이 길
지나는 이 없는
가을의 저녁
이 하이쿠는 앞에 나온 ‘깊은 가을 밤 이웃은 무얼 하는 사람일까’(秋深き隣は何をする人ぞ)와 거의 같은 시기에 쓴 것이다. ‘깊은 가을 밤……’이 사람에 대한 그리움, 사랑으로까지 나아간 것과 같이 여기에서도 ‘사람이 없다'라는 부분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절실히 표현해주고 있다. 아무도 없는 것이 당연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면 ‘지나는 사람 없다’고 굳이 말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나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람 사이[人間]를 걸어가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외로움 그 자체를 좋아서 즐기는 사람은 없다. 살아가다가 사람 속에서 생긴 번뇌 때문에 고독을 찾게 되는 것이고, 자기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어 혼자가 되는 것이다.
바쇼는 기존의 시단이 가진 언어유희적인 하이쿠를 탈피하여 진정한 예술적 미의 영역을 구축해 나가는 자신만의 외로운 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바쇼 그 또한 영원히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버릴 수 없는 한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지나는 사람 없는'이라고 했지만, 그의 제자 부송(蕪村)을 비롯한 후세의 많은 사람이 바쇼의 뒤를 따라 걸어갔으며, 지금도 많은 이가 그 길을 찾고 있다. 상징적인 길의 추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길을 찾는 사람이 많다. 그의 여행시집 ꡔ오쿠노호소미치(奧の細道)ꡕ에 나온 여행길을 그대로 순례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바쇼는 자신이 간 ‘이 길에’ 이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들이 찾아올 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고, 이웃나라의 내가 이런 글을 쓰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이런 사실을 예측했다면 아마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지 않았을까.
この道や行く人なくも見えぬだけ
이 길 지나는 이 없지만 보이지 않을 뿐
*芭蕉(바쇼, 松尾芭蕉, Matsuo Basho, 1644~1694): 하이쿠를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린 일본의 대표적 하이쿠 시인(俳人)
김영식
․1962년 부산 출생
․2002년 ≪리토피아≫ 수필 등단
․‘일본문학취미’ 사이트 운영자(http://hobbian.netian.com)
- 이전글15호 지난 계절 작품 읽기(소설)/임영봉 06.11.20
- 다음글15호 연재-속담으로 읽는 문화사①/고재환 06.11.2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