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15호 지난 계절 작품 읽기(소설)/임영봉
페이지 정보

본문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
―김인숙의 「감옥의 뜰」
(≪문학동네≫ 2004년 여름)
임영봉
(문학평론가)
‘훌륭한 작품’이란 과연 어떤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까. 어떤 작품은 환상스런 신기한 소재를 보여주고, 또 어떤 작품은 잘 다듬어진 우아한 문체의 묘미를 즐기게 하며, 다른 어떤 작품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구성의 완벽함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렇게 한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측면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감동’의 차원에 이르기는 쉽지 않다.
김인숙의 「감옥의 뜰」은 소설이 줄 수 있는 ‘감동’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한 편의 소설은 한갓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항상 그 자신이 진실이기를 희구하고 그 결과로써 독자의 감동에 이르게 된다는 것. 이때 한 작품이 가진 진실스러움이란 기교의 차원을 넘어서서 결국,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의 깊이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만약 「감옥의 뜰」이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면 그 진실스러움의 정체는 어떤 성질의 것인가.
「감옥의 뜰」이 가진 유별난 성격은 줄거리를 간추리는 일이 매우 힘들다는 데서부터 드러난다. 3인칭 시점으로 된 이 작품의 서사방식은 실로 교묘하다. 규상이라는 남자가 이야기의 한복판에 놓여 있고 그는 화선이라는 한 여자에 대한 기억을 돌이키고 있다. 규상과 화선은 서로에게 있어 과연 어떤 존재이고 또 어떤 관계인가. 이 작품의 줄거리는 그것을 드러내는 입체적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를 위해 작가의 서술은 현재와 과거를 뒤섞고, 중국과 한국이라는 공간을 가로 지르고 있다. 이야기의 첫 장면에서 주인공 규상은 심야의 시각에 북경에 살고 있는 형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있다. 형을 대신하여 한국에서 온 손님을 접대하라는 내용이었다. 규상은 나라시 택시기사 샤오친을 불러 호텔로 향한다. 그런데 심야 택시를 타고 하얼빈이라는 얼어붙은 이국의 도시를 가로질러 달려가는 규상의 마음은 착잡하다. 형의 전화를 받기 한 시간 전쯤에 화선의 죽음을 알리는 다른 한 통의 전화를 먼저 받은 바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이야기는 규상이 화선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돌이켜 나가는 과정을 따라 전개되기 시작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격인 규상의 삶은 문제적이다. 일찍이 아내로부터 이혼당했으며 비리에 연루되어 퇴직을 하고 주식에 손을 대었다가 집을 날려버린 이력의 소유자라는 것. 퇴직 후에 규상은 중국으로 건너와, 사업을 하는 형에게 얹혀사는 생활을 해왔다. 술과 여자에 의지하여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살아온 무기력한 삶의 주인공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화선은 어떤 여자인가. 하얼빈에서 그가 화선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남편과 일년 가까이 별거 중인 상태였고, 그녀 자신은 그것을 이혼이라고 믿고 있었다. 갑자기 몸이 좋지 않아 보름 예정으로 한국으로 돌아간 화선은 곧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규상에게 알려 왔다. 암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규상이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전화를 받았을 때 그녀의 죽음은 이미 한 달 전의 일이 되어 있었다.
규상에게 있어 화선이라는 여자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병상에서 그녀는 규상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규상은 그녀를 만나러 한국에 가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규상은 그렇게 그녀의 존재와 그녀와의 관계에 대해 무심하게 생각해 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 앞에서 규상의 마음은 미세하게 동요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에 접하여 어째서 그의 마음은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일까. 알고 보면 그 둘은 서로에게 결코 무연(無緣)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형에게 의지하여 무위도식하는 규상과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살고자 노력했던 화선의 삶은 그 진실을 따져볼 때 동류에 속하는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규상과 화선의 동류 의식-공통적 운명이란 “그들은 삶의 물결이 밀어낸 생의 가장자리에서 만난 사람들”로 요약될 수 있을 터이다.
규상과 화선은 각각 실패한 삶의 장본인들이었다. 삶이란 비루한 것이라는 위기의식 속에서 그들은 각자 위태롭게 자신을 지켜나가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지상에 홀로 남게 된 규상은 뒤늦게 그녀의 존재를 새삼 느끼게 된다. 규상의 처지에 서자면 화선에 대한 기억의 돌이킴이란 동시에 비루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행위에 다름 아니라는 점에서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 고통으로부터 「감옥의 뜰」은 빛나기 시작한다.
손님들과 호텔에서 밤을 보낸 규상은 이튿날 일행을 데리고 하얼빈 관광길에 나서게 되는데 그가 찾은 곳은 과연 어디였던가. 일본군의 악명 높은 세균전 부대, 731부대였던 것. 거기서 규상은 일제의 만행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는 전시물을 보고 화선이 했던 말들-‘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살아있음에 대한 냉소와 환멸’을 떠올린다. 그때 “선과 악은 어느 지점에서 구분이 되는 거 같아요?”라는 화선의 물음에 대하여 규상은 어떻게 대꾸했던 것인가. 분명한 건 그 모든 것이 ‘사람이 하는 일’이다,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삶을, 인간을 부정했던 것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규상은 화선과 함께 여순감옥에 갔던 일과 거기서 자신이 보았던 장면 하나를 떠올린다. 형틀과 고문실과 교수대가 있는 여순감옥에서 그를 사로잡은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감옥의 뜰에 쏟아지던 오후의 햇살이었고 거기에 깃들어 있는 어떤 소리의 존재였다. 어두운 복도에 둘러싸여 있는 감옥의 뜰에서 규상이 들었던 ‘깊은 우물 속 숨죽인 소리’란 다름 아닌 그 자신의 내부로부터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긍정을 거두어 버리고, 끝도 없이 나락을 향해 떨어지고 있는 자기 존재가 내는 힘겨운 목소리였던 것. 그날 저녁 손님들을 술집으로 인도한 규상은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언제나 그랬듯이 ‘엑스터시’를 주문하여 독주와 함께 삼켜버린다. 엑스터시가 만들어내는 환각 속에서 그는 여순감옥에서 보았던 ‘사형대 밑의 어두운 통들’을 고통스럽게 떠올린다. 그리고 그 고통스런 기억의 끝에서 마침내 규상은 화선의 존재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감옥의 뜰」에서 규상의 고통스런 기억 행위는 형체를 잃어버린 화선의 삶을 하나로 봉합하여 생명을 부여하는 의식에 다름 아니다. 동시에 그것은 세상과의 화해를 뜻한다는 점에서 규상 자신의 치유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작품의 말미에 에필로그격의 이야기를 덧붙여 이 결말의 의미를 인상적인 방식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감옥의 뜰」이 구사하고 있는 현재와 과거-현실의 시간과 내면의 시간을 오가는 플래시 백의 자연스러움과, 군데군데서 빛을 발하고 있는 삶에 대한 아포리즘, 이국적 배경과 이방인 의식의 결합이 빚어내는 기묘한 분위기 등 여러 가지 소설적 요소들의 조화로운 결합은 이 작품의 완결성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물론 작가의 삶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성숙된 시선이 그 배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 또한 오래 음미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임영봉
․경남 김해 출생
․1997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학술서 <한국 현대 문학비평사론>, 평론집 <늪에 빠진 언어의 표정>
․현재 중앙대 교양학부 교수
- 이전글15호 지난 계절 작품 읽기(소설)/오양진 06.11.20
- 다음글15호 연재-하이쿠 에세이①/김영식 06.11.2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