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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지난 계절 작품 읽기(소설)/김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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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에서 상생으로 가는 성찰의 문법
―김남일의 「중급 베트남어 회화」
(≪실천문학≫ 2004년 여름)
김동윤
(문학평론가)
1.
「중급 베트남어 회화」? 오호, 김남일의 베트남이라! 이 소설의 제목을 보고 나는 김남일 식 베트남 담론은 어떨까 하는 기대를 잔뜩 갖고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이 작가가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의 주역이라는 것, 베트남에 대해 상당 수준의 탐구를 해온 작가라는 것 등을 얼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같은 모임의 작가 방현석이 「존재의 형식」․「랍스터를 먹는 시간」 등을 통해 이른바 ‘방현석 현상’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터여서, 김남일의 「중급 베트남어 회화」도 그런 차원에서 읽어보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베트남 담론으로만 엮어낼 소설이 아니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 사회현실을 포월(包越)하는 본질적인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하고 있었다. 21세기 첨단 자본주의 논리로 완전 무장되어 가는 분단국 백성의 삶에 진중한 성찰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2.
이 소설의 바깥이야기는 베트남어 회화를 화제로 꾸며져 있다. ‘나’(이하 ‘화자(話者)’)는 2년 가까이 베트남어 수업을 받아왔다. 그런데 화자가 달포 전부터 수업에 빠지고 있어서 회화를 가르치는 벙 선생(서울 모 대학에 유학하면서 한국문화를 공부하는 베트남 처녀)이 나오라는 전화를 걸어온다. 이때 달포 동안에 있었던 사연이 떠올려지는가 하면, 사연과 관련된 사람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벙 선생과 통화한 일주일 후 화자가 중급 베트남어 회화 책을 꺼내는데, 모임의 회장으로부터 수업 출석을 독촉하는 연락이 온다. 알았다며 유쾌하게 전화를 끊는 순간, 벙 선생의 예쁜 미소가 떠오른다.
내부 이야기의 사건은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탈북자 김강철과 얽혀진 사건이 그 하나요, 화자의 모임에서 공동 주최하는 베트남전쟁 관련 심포지엄 때 벌어진 사건이 다른 하나다. 전자가 주된 사건이라면, 후자는 전자에 끼인 또 하나의 내부 이야기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바깥 액자에 베트남어 회화가 있고, 가운데에 탈북자의 삶, 다시 그 속에 베트남전쟁 관련 심포지엄이 있는 구조다. 그런 문제들이 하나의 축으로 절묘하게 엮어짐으로써 힘을 얻고 있는 소설이다.
수업에 나오라는 벙 선생의 전화를 받고서 화자는 이내 김강철을 떠올린다. 그와의 첫 대면은 달포 전 일요일 새벽에 자동차로 인해 이뤄졌다. 차를 빼달라는 큰 목소리에 나갔더니, 화자의 새 차는 이미 김강철의 트럭에 의해 찌그러진 상태였다. 김강철은 되레 화자가 차를 잘못 대어 놓았기 때문에 사고가 났다며 배상해 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완강하게 버티던 그는 화자가 경찰을 불러 해결하자는 말에 태도가 돌변하여 고분고분해진다. 화자는 결국 그가 입금해 준 배상금으로 차를 수리한다.
그런데 화자는 그렇게 ‘완벽한 승리’를 했건만 개운치 못하고 답답하다. ‘치사한 복수극’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무엇에 대한 복수이고, 왜 치사하다는 것인가?
심포지엄은 그야말로 춘사(椿事)였다. 베트남전쟁 참전자들의 단체와 공동으로 가진 심포지엄은 원만히 진행될 수 없었다. 해병전우회며 고엽제전우회 사람들은 베트남전쟁 당시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발제하는 모 교수에게 고함치며 야유를 해댄다. 발제는 중단되었고 고함과 야유의 아수라장에서 화자의 후배 명우도 끌려 나간다. 명우는 파월 용사였다가 유골로 돌아온 막내삼촌 덕택에 큰 화는 면했지만, 앉아 있기만 했던 화자는 그와 막차 시간까지 술을 마시면서 부끄러움에 고개 숙인다.
바로 그 이튿날 새벽에 차 사고가 났기에, 화자는 전날의 봉변에 대해 김강철을 대상으로 치사하게 복수했다고 여긴 것이다. 자신의 쫀쫀한 행위로 인해 답답증으로 시달리던 화자는 엊그제 김강철의 가게를 방문한다. 의정부의 허름한 ‘함흥분식’에서 라면과 김밥을 시켜먹고 나서 함께 술을 마시면서 그의 사연을 듣는다. 굶주림에 못 견뎌 탈북한 김강철은 중고 트럭을 장만해서 채소․과일 행상을 하며 살아가던 중 보험설계사 여인을 만나 사기당했다고 했다. 그 여자의 제의로 음식점을 차렸더니 두어 달 만에 가게 권리금과 살림집 전세금을 훑어 달아나더라는 것이다. 화자는 그가 이 ‘대단한 나라’의 영악한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는 한편 그러한 거대한 질서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3.
김남일은 이 소설에서 여러 차례 ‘배제의 언어’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 사회가 온통 배제의 언어로 점철되어 있음을 예리한 메스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배제의 언어에 대한 인식과 성찰이야말로 이 소설에서 짚어낼 가장 중요한 문맥이다.
심포지엄은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 삼십 년 만에 전쟁의 숨겨진 진실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는 두 집단이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77쪽)였기에 매우 큰 의미를 부여할 만했다. 허나 역시 쉬운 자리가 아니었다. 행사장에 내질러지는 배제의 언어 속에서 발제한 교수와 화자의 모임과 명우 등은 혼쭐이 났다. 해병전우회․고엽제전우회 사람들은 발제 내용을 듣고자 했던 게 아니라 “오직 적을 때려잡을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77쪽)었으니 처음부터 예견된 사고였다. 하나같이 검거나 알록달록한 군복 차림인 외양부터도 그렇거니와 “너 빨갱이 아냐?” “너도 빨갱이야?” 하는 매카시즘의 언사로써 그들은 다른 모든 것들을 배제해 버린다. 그들의 의식은 “똥구멍이 찢어지는 가난과 거의 유전자에까지 각인되었을 생체험으로서의 반공정신,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눈앞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간 전우에 대한 복수심”(75쪽)에서 생성된 것이었기에, 그것을 거스른다고 판단되는 심포지엄이 ‘또 하나의 전쟁’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배제의 언어로는 삼십 년 만의 만남이든 삼백 년 만의 만남이든 싸움판이 되게 마련이다. 배제의 언어는 그만큼 폭력성이 수반되는 것임을 그들이 여실히 보여주었고 화자는 공포 속에서 꼼짝달싹 못한 채 침묵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화자 자신도 피해자로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배제의 언어가 가하는 폭력성에 대꾸조차 못했던 화자는 자신이 당했던 방식을 다른 데서 되돌려준다. “이 땅에서 양심적인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재 정권과 맞서 싸우다가 감옥까지 갔다 온”(73쪽) 처지에서 불쌍한 탈북동포 김강철을 대상으로 말이다. “당신 살던 데서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자, 경찰을 불러서 여기 식대로 해결하자”(73쪽)고 윽박지른다. 화자가 ‘당신 살던 데’를 무시하고 ‘여기 식’을 내세운 것, 그것이야말로 김강철을 완벽하게 따돌린 배제의 언어였다. 화자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데만큼은 더없이 제격인 인간을 아주 쉽게 끄집어”(71쪽)냄으로써 “삼수갑산 솔부엉이처럼 우둔한”(84쪽) 김강철을 녹다운시켜 버린 것이다.
답답증에 시달리던 화자는 벙 선생의 전화로 인해 김강철을 찾아가고 자신이 내뱉은 배제의 언어를 성찰하는 계기를 만든다. 베트남 처녀 벙 선생이야말로 배제의 언어를 뛰어넘어 대화할 줄 아는 인물이라고 하겠기에, 적개심에 연연하지 않고 함께 어우러짐을 실천하는 인물이라고 하겠기에, 화자는 벙 선생을 통해 자신의 과오를 포착할 수 있었으며 의정부행 버스를 타기에 이른 것이다.
김강철은 아직 남녘 사회에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다. ‘떡뽁이, 김치찌게’(78쪽)처럼 맞춤법에 어긋난 메뉴를 덕지덕지 내붙여 놓은 것은 차치하고라도, 억센 억양의 관북사투리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인민, 앙이 국민들”(70쪽)이라고 하는 것에서 보듯이 용어 선택의 혼돈은 더욱 곤혹스럽다. 배제되는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셈이다. 언어는 곧 삶이기에 “그의 삶 자체가 이곳에서 하나의 방언”(82쪽)이라고 할 만하다. 이해하기도 어렵거니와, 아무도 이해하려들지 않는 방언과 탈북자 김강철의 삶은 동일한 맥락이다. 그러니 그의 함흥분식은 “현란한 주변의 점포들 속에 외롭게 떠있는 섬”(84쪽)일 수밖에 없다. 섬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진짜원조 천하제일 왕솥뚜껑 생삼겹살집’, ‘돼지가 양념에 빠진 날’, ‘오매 단풍 들겠네’ 같은 지랄 같은 세계를 배워야 한다. “그가 동경해마지 않았던 ‘공화국 남반부’의 문법”(86쪽)을 익혀야 한다.
화자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다른 언어로 사는 법’의 필요성을 비로소 체득한다. 배제의 언어를 경멸하면서도 자신 또한 그러한 언어의 폭력에서 자유롭지 않은 처지임을 탈북자와 베트남 처녀와 극우반공주의자들을 통해 확인했다. “그 우락부락한 참전용사들의 협박조차 어떻게든 이해해 보고자 애쓰는 언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배제의 언어가 아니라, 배제의 언어조차 끌어안는 새로운 상생의 언어”(86쪽)로 의사소통해야 함을 다짐하기에 이른다. 결국, 제압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그것을 딛고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해야 하는 변증논리를 이 숨막히는 시대의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4.
일찍이 I. A. 리처즈는 배제와 포괄의 논리로 시를 설명하면서, 시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충동을 두루 포괄해서 수용한 시를 ‘포괄의 시(inclusive poetry)’, 원하는 충동만을 택하고 그 밖의 것은 제외하는 시를 ‘배제의 시(exclusive poetry)’로 일컬은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는 응당 ‘포괄의 시’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남일은 포괄이라는 말 대신에 ‘상생’이라는 단어를 택했다.
상생(相生)은 물론 원칙 없는 양시론 같은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묻어두고 망각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찾아내 기억하고 따지되 그 지향점은 함께 사는 길이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런 지향을 위해서는 우선 너나 할 것 없이 이 사회에 만연한 프로크루스테스적인 인식에서 하루빨리 탈피하는 것이 급선무임은 물론이다. 아울러 승리는 맞부딪쳐 때려눕혀야만 이뤄낼 수 있는 것이 아님도 인식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남일의 「중급 베트남어 회화‘는 배제에 익숙해진 우리들의 삶에 상생의 원리를 절묘하게 드러내 보인 수작이 아닐 수 없다.
김동윤
․1964년 제주 출생
․2001년 ≪리토피아≫로 등단
․저서 <우리 소설의 통속성과 진지성>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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