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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지난 계절 작품 읽기(소설)/임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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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쿨한’ 웃음의 미학
―박민규의 「배삼룡 독트린」
(≪동서문학≫ 2004년 여름)
임준서
(문학평론가)
1.
지난계절작품읽기(소설)|임준서․
언제부턴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쿨하다’란 말이 유행이다. 쟤, 쿨하지 않니? 쿨하게 살고 싶어. 오늘 패션이 쿨한데, 등등. 말끝마다 쿨이다. 그런데 막상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꿀 먹은 벙어리다. 쿨한 게 쿨한 거지 뭐예요. 대답 또한 지극히 쿨하다. 결국 별로 쿨하지 않은 필자로서는 쿨하지 않은 방식으로 쿨하다의 뜻을 번역해볼 수밖에. 아마도 성격이 시원스럽다, 외모가 세련되었다, 언행이 유머러스하다 정도의 뜻일 듯싶다.
이 세 가지 내포 중에서 마지막 것은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신세대 문화의 가장 민감한 성감대이기 때문이다. 웃음은 긴장이나 몰입의 태도에서 나오지 않는다. 적당한 이완과 거리의 태도를 요한다. 심각한 포즈를 사양하고 유희적인 기분을 즐기기. 무겁고 답답하고 어두운 고뇌 대신 가볍고 유쾌하고 즐거운 웃음에 대한 선호. 이 잠자리 날개처럼 한없이 얇은 웃음이야말로 ‘쿨하다’로 정리되는 젊은 세대 특유의 문화적 코드이다.
2.
박민규의 소설은 지극히 쿨하다. 그의 소설이 젊은 독자들을 사로잡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근작 「배삼룡 독트린」(≪동서문학≫ 2004년 여름)은 그의 이러한 개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경쾌한 웃음을 유발하는 그의 유머 전략은 작품에서 다양한 형태로 구사된다.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발상의 재치다. 작품은 3년 전 어느 날 ‘나’의 아버지가 배삼룡 흉내를 내기 시작하면서 시작된다. ‘꽉 끼는 양복’, ‘용서가 안 되는 체크무늬’, ‘부스스한 머리칼’의 아버지 모습은 여고생인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아버지의 이 이상한 행동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해프닝이 서사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사건의 모티브를 이루는 것은 ‘코스프레’이다. 코스프레는 ‘costume play’의 약칭. 대중스타나 만화 주인공의 외모를 흉내내는 청소년들의 새로운 풍속이다. 이 코스프레의 향유층을 살짝 뒤집어 어른들로 설정함으로써 작가는 웃음을 유발한다.
코스프레는 청소년들의 발랄한 감수성과 정신적 미성숙을 동시에 드러낸다. 때문에 어른들로부터 유치하고 퇴행적인 놀이문화로 간주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어른들이 실은 코스프레의 중독자인 것으로 폭로된다. 아버지는 자신의 배삼룡 흉내를 인생의 ‘독트린’이라고 선언하며, 정신과 의사 또한 이를 ‘국민 대다수가 선택하는 일종의 정신적 생활권’이라고 말한다. 특히 정신과 통계자료에서 코스프레의 모델이 모두 코미디언으로 설정된 대목은 시사적이다. 진지하고 엄숙한 체하는 어른들의 인생 자체가 실은 유치한 장난질이요, 어설픈 코미디 아니냐고 작가는 비꼬는 듯하다.
다음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시점 이동’의 기법이다. 이 작품의 서술은 여고생인 ‘나’의 시점에서 출발하지만, 이러한 시점이 일관되게 유지되지 않는다. 나로부터 오빠로, 어머니로 끊임없이 시점이 이동하면서 서술된다. 장면의 전환에 맞춘 이러한 시점의 건너뜀은 서술의 보조(步調)를 경쾌하게 만듦으로써 속도감과 박진감을 조성한다. 아울러 아버지의 행동을 바라보는 가족 개개인의 심리상태를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함으로써 웃음을 일으킨다. 어느 날 갑자기 배삼룡이 되어버린 아버지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좌충우돌하는 가족들의 심리적 갭이 다각도로 조명됨에 따라 코믹한 분위기는 강화된다.
십대들의 화법을 반영한 문체 또한 주목된다. 이 작품은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 모두의 시점으로 서술되고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나와 오빠의 시점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청소년들 특유의 언어적 관습이 그대로 서술의 주된 화법을 형성하며 경쾌한 웃음을 생산한다. 아버지의 배삼룡 흉내에 대한 나의 반응은 ‘뭐야, 웃기고 자빠졌잖아.’이다. 아버지가 문을 소리나게 닫았다는 이유로 ‘쾅, 이라니! 이건 너무 가혹하잖아.’라고 내뱉거나, 이를 ‘아빠는 안방 콕’으로 묘사한다. 순정만화의 말풍선을 연상시키는 발랄한 화법은 독자들에게 츄잉껌을 씹을 때와 같은 상쾌한 쾌감을 선물한다.
아울러 말 뒤집기를 비롯한 말장난(fun) 역시 코믹한 분위기를 강조한다. 팬클럽 모임에 참석했다가 패싸움에 휘말린 나는 경찰서에서 무죄를 항변하며 ‘S’그룹의 노래를 부른다. 이때 경찰관의 반응은 ‘이거 참, 어이가 없…을 만큼 좋은 가사로구나!’이다. 오빠는 나에게 청순가련형의 포즈를 버리라고 충고하고, 왜?라고 묻는 나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청순한 건…말이야. 가련하니까 하는 얘기야.’ 이처럼 십대들의 화법을 통해 유발되는 웃음은 지극히 가볍고 싱거운 것이다. 순간적인 재치와 순발력에 의존한, 속이 텅 빈, 순수한, 말장난이다. 이 조금은 허탈한, 무색무취의 유머가 바로 젊은 세대의 ‘쿨한’ 감성을 대변한다.
3.
박민규의 유머는 이처럼 재치 있는 발상과 다성적인 플롯, 그리고 유희적인 화법에 의해 지탱된다. 때문에 젊은 독자들을 쉽게 사로잡는다. 반면, 나이든 독자들로부터 공격받기 쉽다. 하지만 그들의 우려처럼 박민규의 유머가 단순히 실없는 장난질인 것만은 아니다. 현실에 대한 적절한 성찰이 내장되어 있다. 주인공은 나이가 들면서 점차 아버지의 코스프레에서 묘한 슬픔을 감지한다. 구조조정과 실직이 횡행하는 살벌한 현실은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폐건전지’처럼 무기력하게 만든다.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끊임없이 배삼룡이나 구봉서와 같은 광대로 변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아버지의 어설픈 코스프레는 웃음과 함께 눈물을 자아낸다. 젊은이들의 코스프레는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의 산물이지만, 어른들의 그것은 체념과 자포자기의 산물이므로. 결국 아버지의 슬픈 광대짓을 통해 나는 인생이 한 편의 희비극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분리되었던 아버지와 나의 세계는 만나고 화해한다. 이제 나는 ‘평범한 인간들의 길은 대충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고, 오빠는 ‘분위기가 그런데 어쩌겠어.’라고 말한다. 속으로는 앓으면서도 겉으론 짐짓 명랑한 척하는 이 희비극적인 긴장. 박민규 소설이 진짜 ‘쿨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임준서
․1969년생
․200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등단
․현재 고려대, 숭실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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