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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지난 계절 작품 읽기(소설)/정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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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2,152회 작성일 06-11-20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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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균등한 욕망, 정치성의 배제

―정이현의 「어두워지기 전에」
(≪작가세계≫ 2004년 여름)


정문순
(문학평론가)


근대 소설에 넘쳐나는 낭만적 사랑의 찬가는 시민계급과 자유연애의 뗄 수 없는 관계를 잘 말해준다. 봉건세력의 완고함과 하층민의 궁핍으로부터 둘 다 놓여난 부르주아들에게 자유로운 사랑은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의 구현이기도 했다. 과연 이 연애의 신봉자들이 꾸리는 가정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모범적인 것일까. 존중과 신뢰에 기반한 평등한 부부가 이들에게 기대하는 모습이나, 그것이 허위에 불과하다는 것은 진작부터 거론되었다. 엥겔스에게 부르주아의 자유연애는 무산 계급의 ‘평등’한 이성 관계에 주도권을 내주어야 할 운명이었다. 무산 계급 배우자들이 평등하다는 주장에는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시민 계급의 연애를 평등하지 않다고 본 그의 안목은 분명 타당하다. 남편은 바깥일, 아내는 집안일을 분담하는 것을 이상으로 치는 부르주아 가정은 남자의 경제적 활동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으므로 평등한 부부 관계를 기대하기는 애초에 무리일 것이다. 생산 노동에서 밀려난 여성에게 하루 일과는 가족의 안정적인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고스란히 바쳐져야 한다. 가족에 대한 사랑도 주부에게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노동’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 점을 감안할 때 여성 작가들에게 사랑과 평등으로 포장된 연애와 근대적 가족 제도의 모순을 다루어줄 것을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봇물처럼 쏟아진 여성 작가들의 작업이 그 점을 충족시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산층 여성의 내면과 갈등을 다룬 작품은 부지기수지만 여성의 목소리가 배제되다시피 한 이전 시대 문학적 경향에 대한 반사적 측면이 강할 뿐 성정치적 관점에 접근한 경우는 드물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여성 작가들 자신이 중산층 의식을 넘지 못한 점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중산층 가정을 지탱하는 연애와 사랑의 허구성을 경쾌하게 묘파하는 데 주력하고 있는 신인 작가 정이현이 눈에 띄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작품집 ꡔ낭만적 사랑과 사회ꡕ는 가족 제도에 대한 발랄하고 거침없는 풍자와 함께 성차에 대한 인식을 조심스럽게 가미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느껴진다. 그에게 과제가 주어져 있다면 속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일 정도의 강한 풍자와 그것과 대조적인 은근한 정치성이라는 둘의 어긋남이랄까 불균형을 보완해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어두워지기 전에」는 이 작가의 후속 작업의 진척 정도를 가늠하게 해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은 전작들의 경향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중산층 가정. 남편은 출근하고 아내는 쇼핑과 채팅으로 하루 종일 혼자만의 시간을 누린다. 여느 여성작가들이라면 아내의 방향 감각 없는 삶에 눈을 돌렸을 것이나 정이현은 그렇지 않다. 여자는 자신의 일상에 전혀 불만이 없다. 섹스리스 부부이고 아이가 없다는 점에서 평범한 가정과는 다르나 여자는 그것에도 개의치 않는다. 동침을 하지 않지만 남편에게 ‘동지애’를 느낀다고 믿는 여자. 그러나 부부간의 대화가 텔레비전 연속극의 대사를 닮아간다고 하는 아내에게 ‘동지애’는 남편에 대한 어떤 정서적 신뢰는 아니다. 그건 자신들의 가정이 무난히 굴러가도록 성별 분업 체계를 각자 잘 지킨다는 생각에서 나온 타산적인 인식일 뿐이다. 남편을 사랑한다는 아내의 믿음 또한 결혼 제도를 지탱해내기 위한 ‘노동으로서의 사랑’의 측면을 스스로 실토하는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 윗집 아이가 포함된 유아 연쇄 살인이라는 잔인한 범죄가 소설 중반에 얼굴을 내민다. 뜬금없기도 한 유아 대상 범죄의 등장은 오로지 물질적 여유만으로 지탱해 온 도시 중산층의 안락한 삶을 흔드는 불안한 기류를 소설에 드리운다. 삶의 안정성을 조여 오는 불안감은 엉뚱한 결과를 빚는데, 아내는 우스꽝스럽게도 남편을 사건의 용의자로 의심하고 남편은 감쪽같던 외도 행각을 더 이상 숨기지 못하게 된다. 남편의 비밀이 들통남으로써 평온함에 가려졌던 두 사람의 동상이몽은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아내는 남편과 동침하지 않아도 치명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남편에게 그건 애정 없음의 표시였다. 삶이 단순한 아내에게 “진실은 자명했다.”(268쪽)면 두 얼굴을 가진 남편은 “진실이라는 건 (……) 간단한 게 아니야.”(289쪽)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내가 외도 사실을 실토하는 남편과 언어 게임을 하듯 주고받는 동문서답은 두 사람의 소통 불능을 실감나게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당신이 죽인 거야?”
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남편이 나를 멍하니 건너다보았다.
“왜 그랬어? 아직 아기들이잖아. 불쌍하잖아.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진정해, 여보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 제발 정신차려.”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왜 그랬어.”(269쪽)
                            
그러나 서로 딴전을 피우고 있더라도 두 사람은 결혼이 계약이라는 통념에 충실한 영악한 중산층답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공동의 이익을 향해 자연히 합류하게끔 되어 있다. 여자에게 놓인 과제는 남편의 일탈 따위의 외풍에 끄떡하지 않는 단단한 가정을 일구는 것이다. 아이를 잃은 윗집 여자가 다시 임신한 것에서 힌트를 얻어 아내는 자신도 아이를 가져 “완전한 가정”(270쪽)을 이루어야겠다고 결심한다. 아내의 말대로 “훼손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270쪽) 모든 것은 제 자리로 돌아갔고 이들의 삶을 위기로 몰아넣는 일은 쉽사리 닥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는 것보다 가정의 울타리 안에 안주하려는 중산층 여성의 모습은 경기 불황기에 생활 전선으로 내몰리기 쉬운 여성들에게 안정적인 가정이 어느 때보다 절박해질 수밖에 없는 사정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특정 계급이나 세태를 풍자하는 데 주력하는 소설이 흔히 간과하기 쉬운 성정치적 측면을 이 소설 역시 비껴가지 못하고 있음은 지적해야겠다. 노골적으로 희화화된 남편에 비하자면 아내의 태도는 석연치 않은 점이 적지 않다. 아내는 정말 결혼 생활에 아무런 불만이 없을까? 대체로 만족하지만 불현듯 치솟는 공허감 때문에 가정 밖으로 곁눈질을 해볼 마음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 기존 여성 소설에서 그려진 중산층 여성들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마음을 스치고 간 건 남편의 ‘열정’이 잠깐 부러웠다는 것 정도이다. 어쩌면 얄팍한 허위의식에 자족하며 사는 아내보다는 외도를 감행한 남편이 속물적일망정 자신의 내면적 욕구에 더 충실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외도를 변명하는 남편이 아내에게는 더없이 유치해 보이지만 그 나름의 진실이 있다는 건 간과하기 어렵다. 결국 욕망은 두 사람에게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경제적 안락함이 남편에 의해 성적 욕망이 부정된 대가로 주어진 것임을 깨닫게 되어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여성의 내면은 소홀히 다루어져도 좋은 것인지 의문으로 남는다. 전작들에서 미약하게나마 제기되었던 정치성이 한층 뒤로 물러난 점이 아쉽게 다가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점은 비단 이 작가한테만 해당되는 사안은 아닐 것이다.



정문순
․1969년생
․여성문화동인 <살류쥬> 편집위원

추천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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