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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지난 계절 작품 읽기(시)/백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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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가 되어버린 ‘퇴진출신(退陳出新)’
―이승희의 「오래된 집」
(≪시와사람≫ 2004년 여름)
백인덕
(시인)
이 집은 낡고 오래된 악기와 같아서 같아서
소리를 냈다 냈다. 낮잠처럼 햇살이 흘러드는 마당은 깊어서, 아 너무 깊어서 깊어서 어머니 등뒤의 세월처럼 눈물나, 눈물나 배냇저고리 같은 옷을 입은 풀들, 아기들, 녹색으로 몸 물들이며 마당 가득, 지붕 가득 피어올라, 동굴 같은 눈으로 노래 부르네. 노래 부르네.
햇감자를 숟가락으로 긁을 때마다
공중에도 둥글게 우물이 피어나며 무지개로 꽃피던 시절
아직도 뒤란에선 살구냄새 행복한지
다시 고욤나무로 돌아간 감나무 한 그루가 지키는 집
이젠 덜 아프니?
꽃으로 뒤덮인 폐허의 우물이여.
―이승희 「오래된 집」
시인들이 다 그렇겠지만, 내게는 몇 권의 시론집과 몇 권의 시작법 책이 있다. 서가 한 귀퉁이에 나란히 꽂아두었는데 지난 학기에 쓸 일이 없어서였는지 먼지가 두텁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렇다고 지난 반년 간 내가 ‘시’를 한 편도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결국, 시를 쓰면서도 참고하지 않는 책이 바로 시론이나 시작법 책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물론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그 책들이 지시하는 방향에 내가 너무도 충실하게 따라왔던 탓에 더 이상은 조력이 불필요한 수준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물론 어불성설이다. 다른 하나는 매너리즘에 빠져 기본적으로 ‘시는 무엇인가’라는 고민 없이 글재주나 부렸다고 할 수 있다. 후자가 훨씬 설득력이 있고, 무엇보다도 도움이 된다. 따라서 후자에 대한 생각을 짧게 밝히는 것으로 ‘지난 계절 작품 다시 읽기’를 대신하고자 한다.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고 했는데, 그 고민이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용’과 ‘형식’에 대한 고민이라는 기본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이때 ‘내용’을 흔히 일컫는 소재나 주제라 한다면, 우리 시에서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상상력의 다양성이라는 문제와 맞물려 항상 모색되어 왔던 터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형식’에 대한 고민만이 남는다. 여기서 말하는 형식이 과격한 실험시적 양상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님을 밝혀두고 싶다. 오히려, 시적 발화라는 특이성을 염두에 둔다면 시가 시일 수 있는 것은 결국 시라는 형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번 호에서 읽게 되는 이승희의 「오래된 집」은 내용상으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하기는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사람살이 모습이야 변하겠느냐 하는 의미로 읽는다면 그 또한 아무런 흠도 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가 이러한 작품은 우리 시의 전통적인 정서, 이를테면 고향과 유년에 대한 동경을 무난하게 형상화했으므로 그 또한 문제가 없다. 내가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된 것은 오히려 내용이 아니라 형식의 새로움(?) 때문이었다. ‘같아서 같아서’, ‘냈다 냈다’, ‘깊어서 깊어서’, ‘눈물나 눈물나’ 등과 같은 반복이 다분히 시의 리듬을 위해서 배려되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시가 산문과는 다른 발화 형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바로 의미론적인, 혹은 인과론적인 이유보다는 리듬과 이미지를 위해서 강제적인 행과 연 배열을 한다는 것쯤은 이제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시가 시답다라는 말은 시가 일반적인 발화나 시가 아닌 여타의 발화 형식과 다르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시가 리듬감을 조성하기 위해서 반복과 대구라는 기본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음도 잘 알고 있다. 바로 이렇게 일반화된 시 개념에 대하여 가장 충실한 시가 이승희의 이번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충실함이 특이하게 느껴지게 된 것이 우리 시대의 아이러니일지도 모른다. 사족일지 모르지만 이승희의 작품의 또 다른 미덕은 그 반복되는 시어들이 단순히 리듬감의 성취라는 목적에만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이미지의 이행을 동시에 성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깊어서 깊어서’는 ‘어머니 등뒤의 세월’이라는 이미지를 끌어오고, ‘눈물나 눈물나’라는 부분은 ‘풀들, 아기들’ 같은 새 생명의 이미지를 견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자세한 작품 분석보다는 이 작품을 다시 한번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으로써 시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조금 덜어보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도 내 자신에 대한 반성의 기회가 될 테지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시로부터 멀어지면서 역으로 진부해져버린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시어, 화자, 리듬, 이미지, 거리, 그런 너무나 익숙하다고 믿는 것들을 익숙하게 대접하면서 우리들 자신도 너무 익숙한 시인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제는 문제다.
백인덕
․1964년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한밤의 못질>, <오래된 藥>
․한양대, 한양여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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