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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지난 계절 작품 읽기(시)/엄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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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2,271회 작성일 06-11-20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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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과 비파 사이

―박정대의 「11시 53분」
(≪리토피아≫ 2004년 여름)


엄경희
(문학평론가)


오늘은 또 영원의 그 하루
지금은 또 그 어느 날의 11시 53분
파도처럼 밀려오는 시간의 해안에서
맨발의 나는 또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었으나
살아가야 할 날들 앞에서
살아온 날들이 무릎 꿇는 이 비참
삶이 더 이상 삶이 아닌 날들 앞에서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고
속삭이며 불어오는 바람의 참담
인생의 어느 봄날 내가 무심히 보았던 비파나무 세 그루
아직도 비파를 연주하며 잘 있을까, 궁금해지는
오늘은 또 영원의 그 한 하루
지금은 또 그 어느 날의 그 한 子正
―「11시 53분」

11시 53분에서 자정에 이르는 이 7분간의 시간은, 7분간의 기록은 박정대의 미뢰가 고요하고도 서럽게 떨고 있는 영원의 한 지점이다. 이 시간을 누가 기억할 것인가. ‘오늘은 또 영원의 그 하루/지금은 또 그 어느 날의 11시 53분’으로 인식되는 이 현존성은 무궁무진하게 넘쳐나는 영원의 무시간성과는 다른 시간의 질을 내포한다. 시간은 변화를 의미하는 추상명사다. 그러나 그 하루, 그 어느 날로 인식되는 시간성은 변화를 배반한 채 잠겨버린 막막한 현존을 뜻한다. 따라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시간의 해안’은 한 고독한 행려의 맨발이 딛고 가야할 막막한 길의 지표이다. 거기에는 ‘살아가야 할 날들 앞에서/살아온 날들이 무릎 꿇는 이 비참’이 가로놓여 있다. 이런 ‘영원’이란 무거운 것이며 또한 가혹한 것이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고/속삭이며 불어오는 바람’은 차라리 참담함인 것이다. 박정대의 시는 바로 이처럼 비참과 참담이 지속되는 영원 속에서 출발한다. 이 7분간의 몽상은 바로 비참과 참담을 딛고 그의 맨발을 어디론가 몰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생의 한때를 드러낸다.
박정대는 소월시 수상 소감에서 “숨 쉬는 것조차도 정치적 행위가 되어버리는 이 땅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시인으로 산다는 것이 하나의 ‘고요한 혁명’임을 깨닫는 아침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번잡과 분망에 몸과 마음을 빼앗기고 이악스러운 현실에 휘둘리며 되풀이되는 일상으로부터 그는 ‘고요한 혁명’을 이루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번잡과 분망과 이악스러움에 시의 언어를 내주지 않는다. 현실 자체를 말로 표현하는 것을 과감하게 제어함으로써 그의 시의 언어는 “황칠나무 군락지가 황금빛 천막으로 환’(「은둔사」)한 세계에 헌신한다. 번잡한 일상과 꿈을 분리시키고자 하는 욕망, 정확히 말해 일상과 꿈이 함께 동거할 수 없다는 생각 이면에는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강렬한 혐오가 내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때 그는 절망할지언정 절망에 묻히지 않는다. ‘삶이 더 이상 삶이 아닌 날들 앞에서’ 그는 자신의 맨발 앞으로 밀려드는 저 무도한 시간을 넘어 어디론가 가고자 한다. 여기가 아닌, 이 비참과 참담이 아닌 곳을 향해, 낭만주의자의 촛불을 들고, 끊임없이 돛배를 띄우며.

거기 ‘인생의 어느 봄날 내가 무심히 보았던 비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시인에게 세 그루의 비파나무는 희망이 아니라 꿈이다. 다시 말해 현실에서 이룩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라 몽상하고자 하는 실체이다. 이처럼 희망을 말하지 않고 꿈을 말하는 철저한 낭만적 근성에 대해 나는 매혹을 느낀다. 섣부른 희망, 섣부른 낙관이야말로 기만이고 허위이기 때문이다. 박정대의 세 그루의 비파나무는 딱딱한 시간을 뚫고 가는 추운 음악이며, 여행자의 마음속에서 울려나오는 서러운 동력이다. 그것이 스스로 궁금해지는 ‘오늘은 또 영원의 그 한 하루/지금은 또 그 어느 날의 그 한 子正’이다. 비참과 비파 사이에서 그의 생의 7분이 떨며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간을 누가 기억할 것인가. 시인은 “아직도 나는 내가 읽으면서 몽상할 수 있는 그런 시를 쓰고 싶다”고 했던가. 나는 이 7분을, 덧없음을 넘어 비파나무 세 그루를 향해 맨발로 가고 있는 이 생의 7분을 몽상하고자 하는 한 사람이다. 거기에 내 비파나무도 있길.




엄경희
․1963년 서울 출생
․200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저서 <빙벽의 언어>, <未堂과 木月의 시적 상상력> 등
․현재 숭실대 및 이화여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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