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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지난 계절 작품 읽기(시)/최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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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2,280회 작성일 06-11-20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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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이랑 밭고랑 사이로 오는 통일

―김준태 「통일-북한기행․16」
(≪현대시학≫ 2004년 5월)


최서림
(시인)


통일은, 어디로
오는 것일까요

-- 가만히 생각해 보면

통일은 고속도로로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경부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향산고속도로
남포청룡고속도로로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고려민항기나 대한항공, 아시아나가 날아다니는
저 하늘 흰구름 뭉게구름 길로는 오지 않을 듯싶습니다

그럼
통일은, 어디로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 가만히 생각해보면

통일은 우리들이 맨발로 흙발로 걸어다닌 고향길로 올 듯싶습니다
옥수수 밭 사잇길로, 넘실넘실거리는 벼이삭 물결 사이로, 고추밭 마늘밭 콩밭
수수밭 심심삼천에 백도라지 밭 그 길로 통일은 걸어서 올 것 같습니다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들이
마려운 오줌 누고 나서 흙으로 덮어버린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자강도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밭고랑 사이로 통일은 맨발로 촉촉한 흙발로 걸어올 것 같습니다

-- 참, 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황소 암소 쟁기질로 한 평생 몸 바쳐 가꿔온 저 광막한 평야의 논이랑 밭고랑 넘어
그동안 정말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무슨 자랑이 아니란 듯이 걸어와서

통일은, 그래요, 통일은 우리들의 부끄러운 두 손을
마치 어린아이의 손처럼 감싸쥔 후 참으로 오래오래 흔들어줄 것입니다  
―김준태 「통일-북한기행․16」

요즈음 통일이란 말은 매우 촌스럽고 시의적절하지 않은 말처럼 들릴 때가 많다. 남북간 교류는 어느 때보다 활발하고 많지만, 냉전 논리도 거의 사라졌지만, 오히려 통일이란 말이 지니는 공소함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통일이란 말만 그런 게 아니다. 민족, 민중, 역사 등이 구체성을 얻지 못한 추상명사로 이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겉돌 뿐이다.
1990년대 이후 문단에서도 이런 것들을 가지고 시를 쓰는 사람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내기 힘들 지경이다. 그것은 통일이 불필요해서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서도 아니다. 그냥그냥 하루하루 벌어서 먹고사는 게 급선무인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통일이란 그리 다급한 사안도 아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통일이 이루어지기는 할 텐데, 그 통일 이후를 생각하면 오히려 답답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천문학적 통일비용을 생각하면 나와 같은 샐러리맨은 한숨부터 나오기 마련이다.
그보다도 통일 이후 한국사회가 과연 바람직한 상태로 발전해갈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면 꼭 그렇게 낙관할 것만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진정한 바람직한 통일은 남한의 대통령과 북한의 주석이 만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북한 김정일을 만나기 위해 편법으로 엄청난 돈을 갖다 바치고, 그로 인해 남한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고 빨리 오는 것도 아니다.
시인의 말처럼 통일은 남북한 정치가들이나 군장성들이 타고 오가는 비행기나, 관광객들이 타고 가는 고속버스로 오는 게 아니다. 그렇게 빨리 와서도 안 된다.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북한에다 뇌물처럼 이것저것 마구잡이 갖다 바쳐서도 안 된다. 남북간 교류에도 원칙이 무너지면 안 된다. 그런 식으로 편법으로 불법으로 통일이 앞당겨지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1956년에 태어나서 나의 세대는 통일이란 말을 정말 지겹도록 들었다. 그래서 요새 먹고사는 데 쫓기는 생활인들은 그 신성스런 통일이란 말에 심드렁해지는 것이다.
시인의 말대로 통일은 우리들이 맨발로 흙발로 걸어다닌 고향길로 온다. 그렇게 와야 진짜 통일이 이루어진다. 옥수수밭 사잇길로, 넘실넘실거리는 벼이삭 물결 사이로, 고추밭, 마늘밭, 콩밭, 수수밭, 심심삼천에 백도라지밭, 그 길로 통일은 걸어서 와야 한다. 비행기 타고 고속버스 타고 장성들의 보따리 속에서 급히 오는 통일은 위험한 것이다.
이렇게 진정한 통일은 우리들의 생활 현장, 노동 현장, 일상사를 통해서 와야 한다. 통일은 <통일이여 어서오라>고 선언적으로 외치는 시인의 절규, 공허한 외침에서 아니라, 아름다운 부부관계에서, 일반 회사의 소망스런 상하관계에서, 창조적인 노사관계에서 온다. 도시 빈민 문제, 농촌 문제, 신용불량자 문제, 청년 실업자 문제, 노숙자 문제, 결식아동 문제 등을 지혜롭게 해결하는 데서 온다. 다른 모든 것은 깽판 쳐도 남북문제만 잘 해결되면 된다는 논리가 아니라, 다른 모든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때 남북문제도 잘 해결될 수 있다는 논리로 가야 한다. 더군다나 남한 내부의 산적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생각은 않고 북한과의 정치적 선언으로 얼렁뚱땅 해치우려는 사기적인 행각은 진정한 통일을 뒷걸음질치게 만든다.
참으로 우리가 바라는 통일은,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들이 마려운 오줌을 누고 나서 흙으로 덮어버린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자강도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밭고랑 사이로 맨발로 촉촉한 흙발로 올 것이다. 그렇게 와야 한다. 김정일이 서울로 답방하는 깜짝 쇼처럼 와서는 절대 안 된다. 통일은 어느 계층이 배타적으로 주도해서도 안 된다. 어느 정파, 어느 지역 사람들이 독선적으로 주물러서도 안 된다.
시인의 말처럼 전국 방방곡곡에서, 삶의 현장에서, 우리 내부의 삶이 개선되는 데서부터 와야 한다. 먼저 남한 자체에서부터 소외 없는 삶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있을 때 그것은 온다. 우리가 우리 사회를 우리 국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 그것은 온다. 우리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황소 암소 쟁기질로 한평생 몸 바쳐 가꿔온 저 광막한 평야의 논이랑 밭고랑 넘어, 필부필부의 진실된 삶을 통해 온다. 역시 시인의 말처럼, 그동안 정말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무슨 자랑이 아니란 듯이, 조용하고 겸손하게 걸어와서 통일은, 우리들의 부끄러운 두 손을 마치 어린아이의 손처럼 감싸쥔 후 참으로 오래오래 흔들어줄 것이다.
요새 많은 젊은 시인들의 시는 엉망으로 구겨지고 해체된 내면을 비비적거리는 데 바쳐지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역사가 괴물처럼 비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이해는 가지만, 건전한 부정정신, 창조적인 비판정신을 상실하고 해체를 위한 해체를 거듭하고 있는 시인들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한다. 시를 왜 써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마치 수음하듯이 쓰는 답답한 시들을 보다가, 오랜만에 스케일이 크고 시원시원한 느낌을 주는 시를 읽었다. 통일을 주제로 쓴 작품이지만, 그 구체성과 진실성이 우리의 삶 밑바탕에 닿아 있어서 상투적이지 않고 감동적이다.




최서림
․1956년 경북 청도 출생
․1993년 ≪현대시≫ 등단
․시집 <이서국으로 들어가다>,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등
․저서 <말의 혀>, <서정시의 이데올로기와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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