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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지난 계절 작품 읽기(시)/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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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빠져 살 것인가?
―최창균의 「개구리 울음 소리」
(≪현대시학≫ 2004년 5월)
강경희
(문학평론가)
개구리 울음 소리에다
나는 발을 빠뜨렸다
어느 봄밤
물꼬 보려 논둑길 들어서자
뚝 그친 개구리 울음 소리에다
나는 발을 빠뜨려
고요의 못을 팠다
한발 한발
개구리 울음 소리 지워 나갈수록
깊어지는 고요의 못에다
내 생의 발자국 소리 빠뜨렸다는 것
나는 등뒤에서 되살아나는
개구리 울음 소리 듣고는
불현듯 가던 길 잠시 멈춰 뒤돌아보니
내 고요의 못이 왁자하니 메워지는 소리 듣는다
비로소 내가 지워지는 저 개구리 울음 소리
나는 논배미에서
벌써 걸어 나와 집에 누웠는데도
개구리 울음 소리는 줄기차게 따라와
내게 빠져 운다
내 삶의 못에 빠져 운다
―최창균 「개구리 울음 소리」
최창균 시인이 최근 출간한 ꡔ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ꡕ(창작과비평, 2004)는 온통 자연의 빛깔로 가득하다. 시집의 목차만을 보더라도 그에게 있어 자연은 곧 시인 자신의 삶의 터전임을 말해준다. 그는 주머니 속에도 햇빛(「주머니 햇빛」)을 담을 수 있을 만큼 자연과 친하며, “말랑말랑한 흙 위로 걸어나오는 돌들의 신음소리”(「맨발의 흙길을 걸어요」)를 들을 만큼 자연과 가깝다. ‘친하다’와‘가깝다’는 말은 그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지니고 있다거나, 자연을 숭고한 것으로 인식한다는 말과는 사뭇 다른 뜻으로 쓰인다. 좀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자연과 벗하여 산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은 어떤 특별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연 속에 사는 것이 그저 평범한 그의 일상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그의 직업과 관련된 것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의 직업적 특수성으로 인해 자연에 대한 시인의 태도를 규정하기는 어렵다. ‘직업’은 그야말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삶의 업(業)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속도와 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일상화된 직업이란 길들여짐과 구속, 통제와 억압으로 인식되곤 한다. 반복되는 일상은 삶을 지탱해주는 울타리지만 동시에 맞춰진 틀에 갇히는 정형화된 삶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감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최창균에게 있어 일상은 이러한 고정화된 일상과는 빗겨나 있다.
최창균 시의 매력은 자신의 ‘업’을 삶을 속박하는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에게 있어 ‘업’은 삶을 연명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 자체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는 자신의 업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일상이 지겹고 힘든 일상이 아니거나, 혹은 그의 일상이 흔히 말하는 영속적이며 경이로운 ‘자연’으로 귀속되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표면적 일상을 넘어 자연 속에서 자신의 삶을 강렬하게 추동시키는 생의 미감을 발견하고자 한다. 그것은 그가 직업인이기 전에 시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창균의 일상화된 자연은 예찬의 대상이거나 숭고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자신의 삶 자체를 고스란히 투영할 수 있는 존재의 거울로 기능한다.
「개구리 울음 소리」는 시인으로서의 최창균이 어떠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라 할 수 있다. “어느 봄밤” 시인은 “물꼬 보러 논둑길 들어서”다 “개구리 울음 소리”를 듣는다. 물꼬를 보러 논둑길에 들어섰기에 그는 자연히 논에 자신의 발을 담근다. 그리고 다시금 생각해 보니 자신의 발이 실은 “개구리 울음 소리”에 빠졌음을 깨닫는다. 그런데 순간 그는 진동하는 개구리 울음 소리에서 고요한 침묵의 세계를 발견한다. 즉 그는 가장 소란스러운 삶의 현장에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응시할 수 있는 ‘고요의 못’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몸담고 살아온 삶의 현장이 실은 조금씩 “깊어지는 고요의 못에다/생의 발자국소리를 빠뜨렸던” 지난한 과정임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나는 과연 어디에 몸담고 살아왔는가?’, ‘내가 빠진 이 길은 과연 나에게 있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와 같은 진지한 물음은 곧 그 자신의 삶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을 의미한다. 그것은 개구리 울음 소리가 요동치는 삶의 현장이야말로 자신이 몸담아 왔던 현실이며, 그 현실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가장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인생의 거울임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걸어왔던, 그리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삶의 못’이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그의 고민은 “논배미에서/벌써 걸어나와 집에 누웠는데도” 계속된다. 이는 그가 거쳐 왔던 삶의 여정이 개구리 울음 소리만큼 아픈 울음 소리로 점철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그가 빠진 못이, 깊은 시름을 안고 살아야 했던, 또 살아가야 할 ‘수렁’이며 ‘늪’이기 때문이다. “내 삶의 못에 빠져 우”는 시인의 마음은 애처롭다. 그 애처로움은 “봄밤” 줄기차게 울어대는 개구리 울음 소리마냥 구슬프게 진동한다. 그러나 시인은 진동하는 개구리 울음 소리 속에 자신의 울음을 감춤으로써 자신의 슬픔을 넋두리로 떨어뜨리지 않는다. 이때 그의 시는 감상의 토로가 아닌 긴장된 시적 미감을 획득하게 된다.
최창균에게 있어 자연은 자신의 몸을 담그는 삶의 못이다. 그는 그 못 속에서 매일 햇빛과 달빛과 나무와 흙길을 건져 올리며, 또한 “되새김질하며 우엉 우엉 우는 소”(「소․3」)의 울음소리와 “푸른 멍이 드는 낙숫물 소리”(「비 듣는 밤」)와 같은 인생의 시름도 건져 올린다. 그것은 자연을 통해 그가 배운 고귀하고도 슬픈 선물들이다. 최창균은 자연과 가장 가까이 있는 시인이기에 자연에 대해 가장 아파할 줄 아는 마음을 지녔다.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자연에 내어줄 줄 아는 이러한 시인의 마음이야말로 그의 힘겨운 생을 아름답게 이끌고 갈 수 있는 힘이 아닐까.
강경희
․1963년 전남 광주 출생
․200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현재 숭실대, 호서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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