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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대학생의 독서 일기/김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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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2,325회 작성일 06-11-20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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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의 『살인자의 건강법』(김민정 옮김, 문학세계사, 2004)


존재의 불행


김은영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나를 지금 여기서부터 벗어나게 해주게. 그리고 내게 존재 이유들을 주게나. 나 자신은 더 이상 그것을 찾아낼 수가 없네. 내가 해방되었다는 것. 그건 가능하지.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 있나? 난 쓸모없는 이 자유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네.
―지드의 「배덕자Immoraliste」에서

  해마다 태풍이 밀려올 때마다 수많은 비늘들이 날아오는 것 같다. 제각각의 이야기를 간직한 비늘들은 바람과 함께 바다 냄새를 풍기며 날아와서는 온 피부에 문신을 새기듯 자신들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저 멀리 바다 가운데에 숨어있던 섬의 이야기에서부터 가장 가까이에서 증발되었던 물방울 하나의 이야기까지, 팔딱거리는 듯한 은비늘을 내 피부에 가득 붙여가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퍼붓는다.
  그런데 이 사람, 비곗덩어리 같은 이 사람은 자신을 구성하는 세포들이 모두 이야기를 위해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듯 그 수많은 비늘들을 내뿜고 있는 듯하다.
  이 책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은 단지 프레텍스타 타슈라는 한 작가의 일생의 마지막 부분이다. 1층 아파트 구석에서 단지 인터뷰를 하는 방식으로만 기술되어져 있는 이 소설은 그 짧은 시간과 제한된 공간 가운데서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식생활 습관에서부터 인생 전반에 이르기까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들이 보여지는 광경은 독자에게뿐 아니라 주인공과 작가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그저 알고만 있던 것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옮겨져 오는 광경들은 육중한 주인공의 모습과 달리 재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로 인해 살아가는 나를 발견하면서도 혼자 있다는 그 느낌 하나만으로도, 외로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슬퍼할 때가 있다. 사람에게 있어서 실존이란 혼자로는 불가능한 것인 듯하다.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와 존재가 맞부딪쳐야만 일어나는 현상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저마다의 ‘너’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것은 거칠고 괴팍한 주인공에게도 같았다. 그의 연약하고도 비참한 실재의 모습은 저마다의 우리를 닮아 있었다.
  이 책의 주인공 프레텍스타는 자신의 비참함에 더불어 자신의 위치를 모순적으로 극상승시켜 위대함을 더하고 만다. 파스칼의 말대로 인간은 비참하기 때문에 비참한 존재이다. 하지만 인간이 이를 인식하기 때문에 인간은 참으로 위대하다. 마치 이 모순의 법칙의 시작이 자신이었던 것처럼 그는 그 자신의 비참함으로 인해 자신에게 몰두하며 의미를 더해간다.
  그 비참함에 근본이 되는 것은 어릴 적 영원을 약속하였던 사랑의 죽음이었다. 자신이 창조한 ‘너’의 부재는 프레텍스타에게 심각한 비참함을 안겨주었다. ‘너’의 부재는 자신의 부재와 동일했던 것이다. 한 여성으로 인하여 존재하고 있었던 프레텍스타는 그 근원을 잃게 된 것이다.
그의 허영심, 교만 등 또한 모든 비참함을 상쇄시키기 위한 방편 중 하나에 불과했다. 우리 또한 구역질을 하면서 같은 방법들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의 모든 비참함을 인지하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억제할 수 없는 우리를 상승시키는 본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기자 니나에 의해 겹겹이 쌓아둔 그의 성곽이 무너지기 전 그의 내면과 일생의 모습은 고래 뱃속과 같다. 어둡고 더럽고 무섭고 답답하고……, 그러나 숨어있던 진실들이 드러날 때 가장 악한 것이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래 바깥의 모양을 보인다. 물 흐르듯이 부드럽게 빗겨져나가는 고래의 피부처럼 그의 생은 원래 부드럽고 연약한 것이었다. 단지 수많은 이야기들로 비늘을 입히고 치장했을 뿐 그의 모습은 착각을 하고 자신의 방황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는 단 하나의 위험 밖에 없는, 바람에 따라 흔들거리는 가벼운 존재일 뿐인 것이다. 다만 한 시절이 한 인간을 비참하고도 위대한 존재로 만들었던 것.
프레텍스타는 어린아이의 아름다움으로 영원을 살겠다던 약속을 어쩔 수 없이 어기게 된 레오폴딘을 죽임으로 사랑과 맹세를 지키고 그로 자신의 존재를 지켜낸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자유함은 그에게 있어 너무나도 괴로운 것이었다. 레오폴딘, ‘너’가 있어야만 했던 프레텍스타에게 그 존재가 사라진 것이다. 레오폴딘이 생의 이유가 되었듯이 레오폴딘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과 마찬가지였다.
  주인공은 ‘너’의 부재를 채우기 위해서 온갖 느끼한 음식과 자신의 모든 세포에서 발생한 듯한 수많은 이야기들로 자신을 채워간다. 인터뷰 도중 프레텍스타가 말하듯. 문체니 주제니 줄거리니 수사법 같은 것들을 통해서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오로지 작가자신인, 세상에서 제일 뻔뻔한 직업을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으로도 자신을 채울 수는 없었다. ‘나’에게 있어 ‘너’의 존재는 실존하게 하는 것이었고 그 서로로 이루어지는 관계로 인해 비어지지 않은 자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너의 부재는 존재에 위협을 가하는 것이다. 프레텍스타는 연골을 조이며 살인을 저질러 레오폴딘을 영원으로 되돌리긴 했지만 사라진 ‘너’는 자신에게 경험되어질 수도 작용되어질 수도 없었다. 끝내 그는 어린 아이의 종말이었던 열여덟 살 이후 육십여 년이 지나서야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한 여기자 니나에 의해 레오폴딘과 같은 길을 걷게 된다.
한 사람의 존재와 그 것이 이루어지기 위한 그 무엇, ‘너’와의 만남.
한 남자의 생과 죽음을 통해 내 삶 안에 동일하게 자리 잡은 ‘너’의 부재를 바라보며, 거센 태풍 속에 있던 비늘 하나를 피부에 새겨놓으며 나는 또 내내 깊은 심연에 침잠하게 되었다. 그 것은 유리처럼 투명하지만 암록색에 하얀 얼룩까지 더해진 차가운 호수였다.
  레오폴딘의 마지막 모습처럼 새파란 입술을 하고서 책장을 덮으며 그림 하나를 떠올렸다. 수면과 수면 아래와 수면 위의 모든 것들이 그려져 있는 이 세계에서 어두침침한 수면 아래를 지나가는 저 물고기의 모양이 꼭 주인공의 모습과 닮은 것으로 여겨졌다. 수면 위로 연상되는 하늘의 풍경과 수없는 나뭇잎들을 수면 위에 새겨보았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슬그머니 어두운 수면 아래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물고기의 모양은 한 사람의 부재를 자신의 전 생애의 비참함으로 여겨 끝내 가라앉고 마는 프레텍스타 타슈, 혹은 인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책갈피 사이에 두었던 노란 꽃잎이 초라해 보일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부는 저녁이다.

추천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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