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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특집/정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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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 위에서 만드는 이야기
정재림
(문학평론가)
1. 여성소설, 이제 충분한가?
1990년대 두드러진 문학현상의 하나로, 여성문학의 약진을 꼽을 수 있다. 이전까지 주변이나 예외로 취급되던 여성소설가들이 문학의 중심으로 진입한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문학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은 여성소설가의 양적 질적 팽창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들의 소설이 베스트셀러 상위 목록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의미도 되고, 각종 문학상을 휩쓸었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어떻게 해석되든 여성소설가의 호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게다가 여성소설가의 대호황이라는 현상은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페미니스트이건 반페미니스트이건, <여성주의와 소설>이라는 주제를 검토해야 할 필요를 절감하게 된다.
여성소설가가 대거 등장한 시기, 즉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의 정치사회적 현실에 민감한 비평가들은, 당대 현실과 여성소설의 등장이 맺고 있는 밀접한 관계에 주목한다. 거대담론이 붕괴되면서, 내면이나 일상 환상과 같은 주변적인 것과 더불어 여성이라는 주제가 문학의 중심으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틈새시장을 노린 여성문학의 전략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바로 이전 시대에 여성작가의 한계로 지목되던 항목들이 1990년대에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여성작가들은 자신의 여성적 기질이 창작의 유리한 토양이 되는 행복한 시대를 살게 된다. 가령, 여성은 <광장>의 문제보다는 <방>이나 <밀실>의 문제에 더 친숙했고, <환상>이나 <내면>이라는 것도 여성과 깊은 관련을 맺던 항목들이었다. 바야흐로, 여성의 특장(特長)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여성문학의 호황에 대한 문단의 반응이 곱지만은 않은 것 같다. 거대담론에 짙은 향수를 느끼는 평론가들이 여성문학에 불편한 심기나 노골적 불쾌감을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여성문학을 하나의 명백한 현상으로 수용하려는 평론가들도 여성소설과 상업주의의 교묘한 결탁에 대해서는 다소간의 혐의를 갖고 있으며, 여성소설을 꼼꼼히 읽고자 하는 평론가들도 여성소설의 매너리즘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반면 여성주의 비평 진영에서는 여성문학이 아직 충분치 꽃 피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여성의 삶이 정당하게 대접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과, 여성의 해방이 아직도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을 요구하며, 다양한 여성주의 비평을 수행한다. 프랑스 페미니즘에서 비롯된 정신분석학과의 연계, 사이버 페미니즘, 신식민주의의 페미니즘, 모성성의 탐색 등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먼저 현단계의 여성소설이 안고 있는 몇 가지 딜레마를 살펴보자.
2. 여성소설이 답해야 할 몇 가지
남성/여성의 단절된 대화
참신하던 여성소설가의 소설이 이제 슬슬 지겨워지는 것은 왜일까. 어디서 한번은 마주친 듯한 인물,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설정, 고만고만한 고민과 대사들 때문은 아닐까. 여성이 처한 상황이란 게 워낙 비슷하다보니 저절로 공통점이 생기는 것일 수도 있지만, 여성소설가들이 팔릴 만한 소설로 적당히 재생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완전히 지우기 힘들다. 다음과 같은 항목을 여성소설의 공통 특징으로 지적해 볼 수 있다. 남/녀 이분법적 구도, 낭만적 사랑으로의 도피, 섬세하고 감성적인 문체, 1인칭의 자전적 서사의 경향. 20, 30대의 여성이 주인공인데 그녀는 전문적인 직종에 종사하고 있다. 남편은 그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파렴치한에 가깝거나, 설령 남편에게 문제가 없을지라도 어떤 결여감에 때문에 그녀는 행복하지 못하다. 그래서 그녀는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진정한 자아를 찾아 집을 나가거나 혹은 집에 살면서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다. 이런 점에서 현단계의 여성소설은 <집 나가는 노라 이야기>의 반복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남성/여성> 혹은 <남편/아내>는 왜 적으로 설정되느냐는 점이다. 그것은 그들 사이에 대화가 부재하기 때문, 즉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 주인공들이 가진 고민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점이다. 즉, 그녀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한다. 하지만 남성은 그 질문을 치기어린 소녀의 감상으로 비난하며 그 질문을 공유하려 하지 않는다. 때문에 여성의 정체성 탐색을 방해하는 남성에게는 악역이 주어진다. 남성은 여성에게 “너는 누구냐?”라는 식의 질문을 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가 없다.
대표적인 여성성장 소설로 알려진 오정희 「유년의 뜰」(1980)의 인상적인 서두를 기억해 보자. “유년의 뜰”은 “나”의 성장이 이루어지는 장소인데, 그곳에는 항상 영어책을 줄줄 외우는 오빠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오빠의 암기는 항상 다음 문장으로 시작된다. "What are you doing?" 생각해 보건대, "What are you doing?"이라는 의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 문제를 해결한 이후에 가능한 질문이다. 그러니까 "What are you doing?"은 “여성이 무엇이다.”라는 전제를 내포한 질문이란 뜻이다. "What are you doing?"이라고 묻는 남성은 여성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여성이란 <작은 남성>, <결핍된 남성>, 혹은 <남성의 거울>인 것이다. 그러므로 "What are you doing?"이라는 남성의 질문에는, 부여받은 정체성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은근한 질책과 힐난이 포함되어 있다. “작은 폭군”인 오빠는, 어머니답지 못한 자신의 어머니에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추궁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대리인인 오빠는 "What are you doing?"으로 시작되는 영어문장을 “끝없이 반복되는 단조롭고 긴 소절의 노래”처럼 외워야만 한다. 그러므로 "What are you doing?"이라고 묻는 남성과, “Who am I?”라고 자문하는 여성 사이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다른 전제와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보자. 남성의 입장에서 살펴보건대, 아내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폭력적이거나 무관심하거나 나빠서만은 아니다. 여성의 질문에 알은 체를 하는 것 자체가, 남성이 이룩한 세계의 모순을 용인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남편들은 “나는 누구인가?”라고 의문하는 아내의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침묵이나 독백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각기 자신이 맡은 배역을 묵묵히 연기할 뿐이다.
가출과 낭만적 사랑의 문제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남편, 아니 알고도 모른체할 수밖에 없는 남편과의 아내의 대화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면, 아내는 집에 머물 것인가 혹은 집을 나갈 것인가 결정해야 한다. 진정한 자아를 찾기 원하는 여성들은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분연히 집을 떠난다. 가출 이후의 거취가 어떠하든 간에, 여성인물의 자아 정체성 탐구가 집을 버려야 할 만큼 절실하고 진지하다는 것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남성인물의 가출을 진지한 자아탐색으로 간주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여성인물의 가출을 무책임하고 충동적인 것으로 폄훼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자아탐색을 위한 가출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전경린의 「염소를 모는 여자」(1996)를 꼽을 수 있다. ‘윤미소’는 전형적인 주부이다. 서른세 살의 그녀는 무료하지만 평온한 일상을 살아간다. 그녀는 삶에 대한 회의가 들 때쯤이면 낮잠으로 도피한다. 그러던 그녀가 낯선 남자의 부탁으로 ‘염소’를 돌보게 되면서부터 자신이 머물고 있는 집이 “이미 오래 전에 훼손된 집”임을 깨닫고는, 자기의 운명을 찾아 염소를 몰고 가출을 감행하게 된다. 무모해 보이는 가출이 진정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자신의 본질을 찾고 말겠다는 그녀의 단호하고도 열정적인 태도 덕분이었다.
장편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1997)는 「염소를 모는 여자」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작품이다. ‘이나’와 ‘태인’, ‘이나’와 ‘서현’, ‘태인’과 ‘정수’의 관계가 얽혀들며 한편의 소설을 만든다. ‘이나’ 옆에는 두 남자가 맴돈다. 혁명의 꿈을 버리지 못해서 노동자의 삶을 살아가는 옛날 애인 ‘태인’과, ‘이나’에게 무조건적 호의를 품고 있는 직장 상사 ‘서현’. 그런데 ‘태인’도 ‘서현’도 ‘이나’에게 구원이 될 수 없고, 때문에 <남자>는 아무 곳에도 없게 되고 만다. 그런데 장편 『내 생에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1999)에 오면 작가의 입장이 많이 달라지는 듯하다. 서두부터가 수상쩍은데, 작가는 남편과 여직원 사이의 불륜을 그리는 데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이것은 남편을 “훼손된 집”의 원인 제공자로서 지목하기 위한 장치이자, 이후에 벌어질 ‘나’의 로맨스를 합리화하기 위한 포석이다. “자신의 숲을 향해 가는 구름처럼 가벼운 구름의 다리”를 믿으며 염소를 몰고 나가던 ‘미소’, ‘태인’이나 ‘서현’이 자신의 구원이 될 수 없음을 깨달은 ‘이나’와 비교한다면, 남편의 외도를 핑계삼아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을 꿈꾸는 ‘미흔’은 상당히 통속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그래서인지 통속의 플롯을 그대로 밟아가는 이 소설은 <밀애>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애인을 만들었다고, 새로운 연애를 꿈꾸었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남편 이외의 남성을 욕망했다고 윤리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다. 여성의 말을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던 남편과 반대되는, 여성의 모든 말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이상적 남성을 설정하는 것이 문제적이다. 가출을 중요 모티프로 설정하는 여성소설이 진정성이 인정될 수 있었던 것은, 남성/여성의 대화나 타협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전제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정 바깥에서 이상적 남성을 만나게 된다는 식의 설정은, 여성의 정체성 탐구가 가까스로 얻어냈던 진정성을 일순간 무너뜨리게 된다. 성적인 자유, 혹은 남편 이외의 진정한 남성과의 결합을 자유의 획득으로 간주하는 태도 역시 문제적이다. 물론 여성의 자유에는 성적취향이나 성적 파트너의 선택의 자유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지나치게 주목하다보면, 여성의 자유를 성욕이나 남성의 선택 문제와 동일시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정치적 역사적 측면을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비난을 감수하며 집을 나와서, 결국 이상적 남성과 새로운 집을 이루는 형국이 되고 만다. 즉, 여성인물의 가출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명되고, 하여 여성의 가출은 그 진정성은 다시 의심받게 되고 만다.
줄타기의 운명
그렇다면 누군가 볼멘소리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럼 여성에게 어쩌란 말이냐?’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이에 대한 한 대답을 제공할 것이다. 아이가 언어를 획득하면서 ‘상징계’에 진입한다고 주장한 라캉의 이론을 수정하면서, 크리스테바는 ‘기호계’라고 불리는 전오이디푸스 단계를 설정한다. 상징계는 사회적으로 의사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반면, 기호계는 고정적인 의미를 끊임없이 와해시킨다. 크리스테바는 기호계의 언어가 갖는 혁명적 잠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상징계로부터 완전히 이탈하면 정신병자의 발화가 되고 만다고 경계한다. 때문에 크리스테바의 이론에 ‘문턱’이나 ‘경계’라는 비유가 자주 등장하게 된다. 크리스테바는 오이디푸스 단계에서 여자아이가 취할 수 있는 입장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아버지에 대한 상징계적 동일시를 이루는 것, 상상계적 기호계, 즉 모성적인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 마지막으로 상징계와 기호계라는 두 극단을 모두 거부하는 것. 크리스테바는 세 번째 길을 선택할 것을, 즉 “상징계와 기호계의 불가능한 변증법, 다시 말해 그 둘의 끊임없는 교체”를 요구한다.
전경린의 「메리고라운드 서커스 여인」(1999)은 <경계>적 삶을 암시하고 있어 흥미롭다. 남편과 아이들을 버리고 집을 나온 여자는, 서커스를 배우기로 하고 유폐된 섬을 찾아간다. 서커스를 배우기로 한 것은 여자에게 “공중에 뜨”는 재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중에 뜬다>는 말은, 아버지(남편)의 법에 저항하는 여성인물들의 처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해주는 표현이다. 아내의 자리도 어머니의 자리도 빼앗기고, 말 그대로 붕 떠버린 것이다. 집을 떠남으로써 상징 질서에 흠집을 내는 데는 성공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박탈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집, 남편의 집을 깨부수고 나온 여성들은 자기의 집을 만들어야 한다. 달팽이의 집이든, 거미의 집이든. 여자가 찾아가는 “폐쇄된 섬 유원지”는 그녀의 내면 풍경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여자는 섬에서 ‘줄타기’를 배운다. 줄타기란, “몸을 공중에 띄우고 동시에 몸 전체에 그물추를 달아매듯 전체의 중량을 고루 배분하여 한 걸음씩 나아가기란 흡사 산을 옮기듯 힘겨운” 일이다. 힘겨운 줄타기는 여성의 운명 혹은 여성소설가의 운명에 대한 암시로 읽힌다. 여성소설가는 기호계와 상징계의 양 극단을 모두 거부하고, 둘 사이의 협착한 경계를 가로지르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3. 거미여인의 교훈
거미여인들과 직조(織造)의 상상력
각 부족의 창조설화에는 “여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맨 처음에 없던 여자가 중간부터 느닷없이 등장하기도 하고, ‘판도라’처럼 재앙을 불러오는 골칫덩어리로 취급되곤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북미 뉴멕시코 한 부족의 이야기에서, 여자가 창조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어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거미여인 <치치나코>이다. 그녀의 창조 방법 또한 상당히 기발한데, 무언가를 생각하며 이름을 붙여주면 만물이 생겨난다.________________
도정일, 「거북이 밑에는 무엇이 있는가?」, ≪문학동네≫, 1998년 가을호.
이 흥미로운 창조설화에서 하나 더 유의할 점은 그녀가 <거미>이자 <여성>이란 사실이다. 치치나코는 상상하며 이야기함으로써 세계를 창조했다. 뱃속에서 뽑아낸 실을 원료삼아 자신의 집을 만드는 거미의 모습과, 자기의 머릿속 상상과, 그것에서 비롯된 이야기를 재료삼아 세계를 만드는 여인의 모습 사이에는 겹쳐지는 부분이 많다. 실을 잣는 것(spinning)과 이야기를 만드는 것(weaving)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실잣기에서 베짜기로 이어지는 자연스런 상상력 때문에 치치나코에게 여성의 성별이 부여된다.
생각해 보면, 이야기 속에 여인들은 베짜기의 달인들이었다. 오딧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가 시간 죽이기의 방편으로 선택한 것이 베짜기였고, 형부에게 강간을 당하고 설움에 겹던 ‘필로멜라’가 언니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수단으로 삼은 것도 베짜기였으며, 견우를 기다리며 364일을 기다려야 하는 ‘직녀’ 역시 베짜기를 자신의 업으로 택했었다. 약간의 편차가 있긴 하지만, 그녀들은 직조(織造)를 통하여 폭력적 상황을 견디거나 고발했으며, 그 작업을 통해 고통을 창조적으로 승화시키고자 했었다. 천을 짜는 대신 매일 밤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생산해야 했던 ꡔ천일야화ꡕ의 ‘셰헤라쟈데’의 운명 역시 이들과 비슷하다. 몸속에서 뽑아낸 연약한 실로 정교한 집을 짓는 거미와, 베틀에 앉아 천을 짜는 여인들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여인들이 오버랩되는 것은, 그만큼 거미-베짜기-여성으로 이어지는 직조의 상상력이 자연스럽다는 증거일 것이다.
거미줄로 만드는 이야기
아라크네는 평범한 염색업자의 딸이었는데 베를 짜는 데는 놀라운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라크네’에게 자신을 파탄시킬 만한 운명적인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신에 대한 존경과 겸손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 아라크네의 오만은 방적(紡績)과 기직(機織)을 관장하는 ‘아테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고, 신과 인간의 한판 승부가 벌어진다. 아테나의 작품이 신들의 권능과 위엄을 강조한 반면, 아라크네의 작품은 신들의 만행과 비행을 풍자하는 데 주력한다. 아테나는 아라크네의 작품을 보며 속으로는 완벽한 솜씨에 탄복하지만, 불경스런 내용물을 두고 볼 수 없어서 베폭을 찢어버린다. 아라크네는 들보에 목을 매어 자살을 기도하지만, 아테나 여신은 “네가 누구 마음대로 네 목숨을 끊으려 하느냐? 목숨을 보존하라. 보존하되 늘 이렇게 매달려 있어야 한다. 이것은 벌은 벌이나 겁벌이어서 끝이 없을 것인즉, 네 일족, 네 후손들까지 이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아라크네를 거미로 변신시킨다. 아라크네에게 부과된 형벌은 자신의 죄에 대응될 만한 것이다. 베짜기로 대항한 자에게 베짜기의 형벌을 내린 것. 베짜기란 과연 거미에게 즐거운 형벌일까.
거미의 실잣기란 창조 활동의 은유이다. 그런데 즐거운 창조만은 아닌 것 같다. 거기에는 저주와 파탄의 냄새가 짙다. 거미가 뿜어내는 분위기부터가 그로테스크하다. 몸통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비대한 배와 지나치게 기다란 발들. 자기 몸에서 뽑아낸 가느다란 거미줄과 거기에 매달린 거대한 몸뚱이의 대조, 먹이를 기다리는 잔인한 침착성. 그렇지만 거미는 힘이 세다. 아테나의 저주로 머리카락이 빠지고 귀와 코와 입이 사라지면서 인간의 언어를 잃었지만, 그녀는 전혀 외부의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도 자기의 내장과 자신의 신체만을 이용해서 여전히 말하고 있다. 아라크네가 거미줄로 적어놓은 것은 눈물의 회개문도 아닐 것이며, 자신의 경솔을 뉘우치는 반성문도 아닐 것이다. 아라크네는 촘촘한 거미줄 위에, 여자를 꾀어내기 위해 황소로 백조로 황금 소나기로 변신하는 제우스의 비행을 그리면서, 여전히 신들을 조롱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아라크네의 저항은 현재진행형이 된다.
‘필로멜라’의 베짜기 역시 유사한 역할을 하지만, 그것은 훨씬 더 파괴적이다. 테레오스와 결혼한 프로크네는 남편에게 간곡한 부탁을 한다. 동생이 보고 싶으니 아버지의 양해를 얻어 동생을 데려와 달라는 것. 그런데 테레오스는 필로멜라를 보는 순간 욕정에 휩싸인다. 욕망의 화신이 된 테레오스는 필로멜라를 아내에게 데려오는 대신, 그녀를 낯선 곳으로 끌고 가 강간한다. 필로멜라가 저주를 퍼붓자 칼을 꺼내어 혀를 잘라버린다. 프로크네는 동생이 죽었다는 남편의 말만 믿고 동생의 죽음을 애도한다. 벙어리가 된 필로멜라는 흰 바탕으로 천을 짜고, 붉은 색으로 글자를 짜 넣어서 자신의 상황을 언니에게 알린다. 베짜기를 이용하여 테레오스의 만행을 알린 데 성공한 필로멜라는 언니와 함께 놀랄 만한 복수극을 준비한다. 프로크네의 아들이자 필로멜라의 조카인 이튀스를 잡아 죽여 요리를 만들어서 테레오스에게 먹인 것. 억압당하는 자의 분노를 되갚아주는 것이긴 하지만 테레오스와 필로멜라의 이야기는 끔찍한 구석이 있다. 테레오스는 남근적 <칼>로 필로멜라의 <혀>를 자르고, 필로멜라는 남근적 <글자>로 테레오스를 고발하고, 프로크네와 필로멜라 역시 <칼>을 들어 이튀스를 찔러버린다.
필로멜라에 비하면, ‘페넬로페’의 방법은 훨씬 온건하고 지혜롭다. ‘페넬로페’는 천짜기와 풀기를 반복하며 무례한 청혼자들을 피해간다. ‘페넬로페’는 하루 종일 짠 천을 밤에 풀어버림으로써 완성을 유예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폭력적 상황을 하루하루 연기한다. 하일브런의 말처럼, 페넬로페는 여성작가에 대한 가장 적절한 은유인 듯하다. 페넬로페가 공들여 짠 천을 밤마다 다시 풀어버리는 것과 같이, 여성작가는 자신이 만들 이야기를 다시 부정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여성작가들이 아무리 공들여 이야기를 만들더라도, 완성된 작품은 남성 텍스트의 또 다른 판본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남성 판본의 섣부른 반복은, ‘필로멜라’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피를 부르는 비극으로 귀결될 뿐이다. 허지만 페넬로페의 대응이 폭력적 구혼자를 물리칠 만큼 지혜롭고, 분노를 창조력의 근원으로 승화시킬 만큼 생산적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여성문학의 전범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여성문학은 처음과 끝이 구별되지 않고, 앞도 뒤도 없는 퀼트에 가까운 어떤 것일 것이다. 혹은 영원히 과정으로서만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ꡔ거미여인의 키스ꡕ와 ꡔ거미여인의 집ꡕ
벨라스케스는 아라크네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The spinners」(1657)라는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부제(The Fable of Arachne)에 유념하지 않으면, 이 그림이 아라크네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지조차 알아채기 어렵다. 전면에는 물레질을 하는 여인들이 있고, 뒤쪽의 밝은 중앙에는 아테나와 아라크네로 추측되는 여인들이 경쟁을 벌이고 있고, 전면과 후면 사이에 다시 두 여인이 서 있다. 세 그룹의 여성들은 각각 아테나와 아라크네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허지만 그림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이 그림 속에 티치아노의 그림(「Rape of Europa」)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테나와 아라크네 이야기를 이중삼중으로 배치하고, 또다시 흠모하던 선배 화가의 그림을 슬쩍 끼워 넣은 티치아노의 욕망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신에 도전했다가 패가망신한 아라크네를 그리면서, 혹시 벨라스케스는 남몰래 아라크네적 삶을 욕망한 것은 아닐까. 궁정 화가였던 벨라스케스에게 자신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신화와 선배 화가의 그림을 재치 있게 짜깁기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몇 겹으로 숨겨지고 억압되었다는 것은 그 욕망이 얼마나 질기고 은밀한지를 증명해 준다.
거미여인의 이야기는 현대에도 계속된다. 마누엘 푸익의 ꡔ거미여인의 키스ꡕ에서 진정한 여자가 되기를 소원하는 거미여인 몰리나를 만나게 된다. 남성 몰리나는 현대판 ‘거미여인’이다. ‘셰헤라쟈데’가 밤마다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몰리나는 좌익 게릴라 발렌틴에게 여섯 개의 영화와 한 개의 볼레로를 들려준다. 몰리나의 입에서는 거미줄처럼 끈끈한 이야기가 풀려나온다. 몰리나를 거부하고 경멸하던 발렌틴은, 몰리나가 촘촘히 쳐놓은 이야기의 거미줄에 걸려들고 마침내 무릎을 꿇는다. 발렌틴은 말한다. “넌 거미여인이야. 네 거미줄에 남자를 옭아매는…….” 거미여인 몰리나 역시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지는 못한다. 몰리나는 대중문화, 특히 영화텍스트를 적극적으로 끌어온다. 영화 중에서도 이류영화를 끌어들이는데, 그나마 자신의 목적에 맞게 뒤섞어 사용하는 몰리나의 기술은 거미여인다운 것이다. 문제는 남성적이며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자부하는 발렌틴이 몰리나의 거미줄에 걸려들고 결국 사랑에 굴복한다는 점이다.
류가미의 ꡔ거미여인의 집ꡕ(2003) 역시 거미여인의 신화를 차용한다. 이 소설은 글쓰기가 어떻게 구원의 길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강제와 타율이 지배하는 제도 교육, 화염병과 최루탄, 군홧발이 난무하는 거리에서 절망을 느끼면서도 ‘중국’이란 단어로 상징되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제도와 이념에 실망을 느끼면서는 사랑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지만 사랑마저도 ‘나’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리고 ‘중국’이 실체 없는 추상명사에 불과한 것처럼, 결국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다락방으로 올라가 글을 쓰면서 글쓰기를 통해 중국에 이르는 ‘지도’를 만들고, “중국에 다가갈 방법”을 찾게 될 것이라고 암시한다. “일곱 개의 산을 넘고 일곱 개의 강을 건너, 구름도 멈추어서고 바람들도 숨을 죽이는 세계의 끝에 작은 집이 있었다. 절벽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그 집에는 거미여인이라고 불리는 한 여자가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미여인은 자신의 외로움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영원이라는 잉크를 찍어 시간이라는 종이 위에 이름들을 써내려갔다. 그녀가 종이 위에 물고기라고 쓰자 바다에서 물고기가 헤엄치기 시작되었다.” 류가미의 ‘거미여인’ 역시 세계의 창조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에게는 저항의 몸짓보다는 외로움이 짙게 배어 있다는 점이다. 거미여인은 외로워서 피조물을 만들고, 외로운 피조물은 다시 글쓰기를 통해서 자기의 창조자 거미여인과 만난다. 창조자와 피조물이 글쓰기를 통해 만나며,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4. 문학은 더 ‘여성적’이 되어도 좋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여성소설을 수용하고 소비하는 독자와 비평가의 반응과 불만은 지나친 과장이 아니다. 면밀히 관찰하지 않더라도, 여성소설가들이 소비가 될 만한 작품들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게 어렵지 않다.
허지만 아직도 여성소설은 충분치 않다고 말해야겠다. 여성주의는 더 논의되어야 하고, 여성소설가들은 더욱 다종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유를 말하라면, 원래 문학은 ‘여성적’이기 때문에. 여성은 항상 <타자>였고 <이방인>이었다. 국가라는 상상적 단일체에 흠집을 내는 이방인은 항상 낯설고 기괴할 수밖에 없다. 이 낯선 타자는 정체성과 체제, 질서를 무너뜨리고 구분 자체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방인이 아니고서야 우리가 주체인 내국인임을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되돌아와 경계를 문제삼는 타자처럼, ‘여성적인 것’은 항상 ‘남성적인 것’을 위협하고 뒤흔든다. 문학이 불온한 현실에 대한 안티테제로 존재해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문학은 ‘여성적’이어야만 한다는 주장에도 고개를 끄덕여야 할 것이다.
때문에 여성소설을 재검토하는 마당에서, 우리는 거미여인들에 대해 묵상해 보았다. ‘여성적’ 글쓰기는 허공에 터를 잡고 집을 짓는 위태로운 작업이다. 공중에 지어진 거미줄은 집처럼 튼튼해야 하고, 동시에 훌륭한 덫과 함정으로 쓰일 수 있을 만큼 정교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거미여인이 만든 이야기는 ‘남성적’ 질서에 대한 효과적인 저항이 되어야 한다. 거미여인들은 이야기를 만들면서 폭력적 상황을 견디기도 하고, 고통을 창조적 예술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예술가는 ‘거미여인’이며, 문학 담당자는 더욱 ‘여성적’이 되어야 한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이 세계가 완전해질 때까지, 세상은 더 ‘여성적’이 되어야 하고, 문학 역시 더욱 ‘여성적’이어도 좋다는 뜻이다.
허지만 ‘여성적/남성적’이란 말은 ‘여성/남성’과 동의어가 아니다. 오히려 ‘남성적/여성적’이란 표현은 성차를 제거하기 위한 수사에 가깝다. ‘여성적’ 문학을 긍정하는 순간, ‘여성’을 소외시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허여성과 포용성을 긍정적 여성성으로 내세우는 여성주의라면 ‘여성/남성’의 성차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재림
․1973년 출생
․200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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