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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특집/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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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지난 세기말 한국문학의 비판적 반성․2
페미니즘의 반성적 성찰
여성연극의 뿌리와 줄기
김남석
(문학평론가)
1. 여성연극과 페미니즘연극
‘여성연극’이라는 말은 ‘페미니즘연극’이라는 말과 사뭇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페미니즘이 여성이 남성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남녀관계를 정립하려는 움직임과 정신에서 배태된 것이라 할 때, 그 근원적 동력은 대립과 투쟁이다. 물론 페미니즘 운동이 진행되면서 ‘여성’에 대한 정의와 개념이 달라졌으며, 그로 인해 투쟁과 대립의 방향과 상대가 달라졌다. 여성은 남성이라는 무자비한 가부장권의 희생자에서, 강자의 지배를 받은 사회적 약자(소외자)의 뜻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면서 신체적으로 남성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성일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반대로 신체적으로는 여성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남성에 가까운 부류도 생겨났다.
‘여성’의 의미가 인종적으로 약자인 흑인이나, 경제적으로 하위층인 빈민층 혹은 프롤레타리아, 문명의 피해를 입은 자연, 심지어는 같은 여성으로부터 억압당한 또 다른 여성 등으로 변화되면서 그 의미 범위가 확장 변형되어 왔다. 그에 따라 상대해야 할 적(敵)도 달라져, 그 진위를 헷갈리게 한 경우도 많았다. 자연이 여성과 동급이라면 페미니즘의 적은 남성이면서 동시에 문명(발전 논리)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위치와 여성의 위치가 동일하다면, 여성은 투쟁의 상대 속에 부르조아 계급과 자본주의도 포함시켜야 한다.
따지고 보면, 여성들이 참정권을 위해 투쟁했고 ‘로라’가 과감하게 떠날 수 있었던 시절은, 적어도 적의 정체가 명확했다. 그러나 상대가 여럿으로 늘어나고 안과 밖을 구별할 수 없는 상태에서 적을 맞이하게 된 요즘은, 어디까지가 ‘여성’이고, 누가 ‘여성’의 적인지 함부로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고민은 내면의 풍경을 응시하게 만들었고, 그 안에서 외부세계의 적들을 능가하는 적을 발견했다. 그것은 내부의 또 다른 자아, 자립적인 여성을 방해하는 자아이다. 그 자아가 남성인지 여성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오히려 그 구별을 무화시키는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 자아는 여성들의 수동성, 남성들에 대한 배타성, 그러면서 버릴 수 없는 여성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페미니즘의 시각은 적대자로서의 남성을 발굴해서, 그 남성의 정체가 생각보다 복잡하고 다양하다는 인식 단계를 거쳐, 여성 내부에 도사린 근원적인 적을 발견하는 데에서 잠정적 결론에 이른 것 같다. 이 자아의 모습을 더 이상 여성이라거나 남성이라고 지칭하지 않는 날이, 나는 페미니즘 연극의 일차 완성일이 아닌가 한다. 이 글은 이러한 간단한 구조적 도식을 바탕으로 여성연극의 흐름을 탐색하고 점검하고자 한다. 먼저 이를 위해 페미니즘이라는 다소 경직된 용어 대신 여성연극이라는 용어를 택하겠다. 이것은 나의 생각이 아니다. 이 글에서 집중적인 고찰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산울림의 연극은 페미니즘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여성연극이라는 관점 하에서 설명될 때 더욱 적확할 수 있다(여성연극에 대한 정의는 본론을 이용하겠다). 이것은 페미니즘 연극의 지향점이 대립과 투쟁의 장일지라도, 그 너머에는 조화로운 세상에 대한 ‘아주 멀고 먼 이상’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나의 소박한 생각의 반영이기도 하다.
2. '산울림‘ 소극장에 대한 개관
극단 산울림은 1970년 10월 3일 창립 공연을 올렸다. 작품은 임영웅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그러나 그 모태가 되는 공연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9년 6월 카페 떼아트르에 올려진 <덤 웨이터>, 그리고 그해 12월 한국일보 소극장에 올려진 <고도를 기다리며>가 그것이다. 적임의 배우를 모아서 필요한 공연을 한다는 임영웅의 프로듀서 시스템이 가동된 공연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공연 허가를 위해 극단 설립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극단 산울림이 발족한 것이다.
극단 산울림은 1985년까지 한국일보 소극장, 국립극장, 쎄실극장, 지방 시민회관, 엘칸토 예술극장, 문예회관 등에서 공연해 오다가, 1985년 신촌 서교동에 전용극장 산울림 소극장을 갖게 되었다. 임영웅과 그의 ‘동지 오증자’가 세운 이 극장은 개인 소유의 소극장으로는 최초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전용 공간을 마련한 임영웅은 독자적인 연극 만들기에 매진했고, 한편으로는 소극장 대표로 기획 운영을 총괄하며 산울림의 명맥을 창출했다. 지금까지 임영웅의 산울림이 올린 공연은 110회(창단 이전 두 작품 포함, 재공연은 별도 공연으로 취급)에 이르며, 이 중에는 상당한 사회적 파장을 형성한 작품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러다가 산울림 소극장은 여성들의 극장으로 인식되고 있다. 가끔 신문에서 산울림 소극장에 줄 선 여자(특히 주부)들의 모습을 대서특필할 때가 있다. 그것은 그녀들의 관심사를 이 극장에서 인정하고 그들에게 그러한 삶을 읽을 기회를 준다는 뜻이다. 그 이유와 흐름을 추적한다면 한국 여성 연극의 과거와 현주소, 그리고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지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3. 여성연극의 원류와 흐름
산울림의 대표적인 레파토리가 ‘여성연극’이다. ‘위기의 여자’나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등의 연극 제명은 우리에게 산울림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여성연극’이라는 비교적 낯선 조어도 이 극장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정작 임영웅은 ‘여성연극’이라는 조어에 대해 그리 찬성하지 않는다. 산울림 극단의 모토가 ‘좋은 연극을 열심히 하자’인데, 그의 논지를 따르면 연극은 여성연극과 남성연극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연극’과 ‘그렇지 않은 연극’이 있다는 것이다. 즉, 여성연극 역시 인간의 본질을 그리는 좋은 연극이 될 때에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고, 그렇다면 굳이 여성연극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식의 논리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필요는 끊임없이 ‘여성연극’이라는 조어를 불러내고 있다. 산울림이 공연한 많은 작품 가운데에서 이 범상치 않은 조어로 묶일 수 있는 작품들이 꽤 되며, 그 작품들은 일정한 맥락을 가지고 전개되고 있다. 이를 시간적인 추이에 따라 늘어놓으면 더더욱 그러하다. 여기서는 이러한 필요와 현실을 인정하고 ‘여성연극’의 탄생과 계보를 살펴볼 요량이다. 이를 위해서는 범박하게나마 여성연극의 정의가 필요하다. 나는 여성연극을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연극’이라고 일단 정리하고 싶다.
작품의 중심 모티프나 주제 의식이 여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연극은 ‘여성의 연극’이다. 이것은 ‘여성에 대한 연극’이다. 이러한 작품일수록 여성 연기자의 비중이 높아지기 마련인데, 이것 또한 여성연극을 구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연극계에서는 여성 연기자의 수명이 남성 연기자보다 짧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연극을 배우고 무대 체험을 확장하고 연기의 깊이를 심화시킬 수 있는 여자 역할이 상대적으로 남자 역할보다 적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여성 연기자가 성장하는 데에 여성연극이 일조하는 바가 크다. 이것이 ‘여성에 의한 연극’이다.
‘여성을 위한 연극’이란, 작가나 배우의 측면을 떠나 관객의 측면과 관련된다. 산울림 극장이 유명해진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그 중에서 여성 관객들이 대거 몰려드는 ‘기현상’도 단단히 한몫 했다. 많은 신문들이 여성 관객들이 몰려드는 산울림 소극장을 신기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것은 산울림의 레파토리 자체에 여성들이 공감할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꼭 첨가해야 할 사항이 있다. 아무리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연극이라고 해도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와 삶의 본질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좋은 연극을 만드는 조건인데, 이를 간직하고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여성연극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여성연극이란,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연극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보편적 성정과 삶의 본질을 추구하는 연극을 말한다.
2.1. <위기의 여자>, 여성연극의 모태
<위기의 여자>는 시몬느 드 보봐르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산울림 소극장 개관 1주년을 맞이하면서 관객들을 확보할 대책을 찾던 중, 과거 여대생이었던 여성 주부들을 다시 극장으로 불러 모을 수 있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그러자면 그녀들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작품을 골라야 했다. 마침 오증자는 <위기의 여자>를 번역하여 1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바 있었다.
임영웅은 캐스팅에 나섰다. 하지만 마땅한 배우가 물색되지 않았다. 임영웅은 박정자에게 그 물색을 부탁했는데, 박정자는 도리어 자신을 배역에 추천했다. 처음에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하던 임영웅이었지만 곧 생각을 바꾸었다. 박정자의 스타일은 임영웅이 바라는 우아한 모니끄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박정자의 열정과 연기력이면 다른 연출 방향을 찾을 수 있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더구나 남자 역시 우아한 이미지가 아니어도 괜찮아지면서, 박정자․조명남 연기 커플이 탄생했다.
<위기의 여자> 희곡 대본은 모니끄(44세)와 모리스(45세)를 중심으로 해서, 모니끄의 주변 인물들(주로 여자)인 이자벨(44세, 친구, 주부), 랑베르(50세, 상담 여의사), 뤼시엔느(18세, 둘째딸)가 등장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이자벨․랑베르․뤼시엔느는 한 배우가 연기할 수 있고, 실제로 연운경이 이 역할을 담당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산울림 극장은 몰려드는 여성 관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고, 공연은 장기 흥행의 조짐을 보였다. 임영웅은 박정자의 열정을 낮추고 냉정함을 촉발시키는 연출 방향을 지시했는데, 이것이 관객들의 공감을 얻는 데에 주효했다. 여성 관객들은 모니끄의 처지와 자신의 삶을 비교하면서 이 연극이 지닌 문제점을 공유했다.
<위기의 여자>는 모리스로부터 폭탄적인 발언이 흘러나오면서 그 동안 쌓여 있던 가정과 부부의 문제점이 불거지는 연극이다. 모리스는 아내 몰래 사귀는 여자가 있다고 털어놓고, 다음부터는 공식적으로 두 여자 사이를 오가면서 살겠다고 공표한다. 이러한 공표는 아내 모니끄를 충격으로 몰아가지만, 모니끄는 이에 대항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 남편이 떠날 것을 염려하여 거세게 거부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자신과 애인의 사이를 오가는 남편을 무한히 포용할 수도 없게 된다. 그러면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근본 원인도 드러난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서로에 대한 의존심과 집착을 가중시켰다. 특히 모니끄의 모리스에 대한 집착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모니끄의 기구한 처지는 가정 내에서 비슷한 위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여성 관객들의 문제 의식과 동질성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불평등하고 불균형한 현재의 부부 생활에 대한 반성을 이끌어내었다. <위기의 여자>에 대한 언론과 관객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당대의, 자신의, 이야기로 여겼다. 이러한 관객의 반응에는 감정적인 측면도 다분히 섞여 있었으나, 그것 역시 억압된 처지의 여성들에게 하나의 탈출구로 작용했다. 여성연극의 중요한 기준인 여성(관객)을 위한 연극이라는 목표가 분명하게 수립된 것이다.
<위기의 여자>는 박정자 주연으로 1986년 4월 1일부터 30일까지 공연되었고, 그 후 같은 해 6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이주실 주연으로 연장 공연되었다. 박정자는 극단 자유의 공연 참가로 이 작품에서 도중하차해야 했지만, 그녀가 몰고 온 ‘위기의 여자’ 열풍은 한때 대한민국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위기의 여자> 돌풍에는 분명 여성 문제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 공연이 문제적인 것은 여성 문제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 또한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모니끄의 주변 여성들은 한결같이 결혼을 헌신과 희생으로 알고 자신의 인생을 방기한 모니끄의 죄(?)를 간과하지 않는다. 모니끄의 문제를 무한정 연민의 시선으로 보지 않고 있다. 또 모니끄 역시 자신의 옆에서 자신의 편이 되어야 할 친구, 의사, 딸이 객관적인 비판을 하는 것을 보면서, 세상에 혼자 서야 함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위기의 여자>는 편협한 여성연극이 아니었다.
남성들의 반응도 눈여겨볼 만하다. 소설가 한수산은 박정자의 공연을 보고 공연평을 남기고 있다. 그는 연극을 보고 여성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감동적인 대사들을 기억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임영웅의 연출이 또한 관객을 편안하게 한다. 상식의 시각을 벗어나지 않는 진지함이 그것이다. 극중의 대사에 전위 예술을 시각적 새디즘이라고 하는 말이 나온다. <위기의 여자>에서 임영웅은 그러한 새디즘을 관객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모니끄로 하여금 소리치고 부수고 날뛰고 흐느끼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영웅의 연출은 이 모든 것을 절제하고 있다. 동서양이 다를 수 없고, 시대의 변화에도 무관할 수밖에 없는 이 문제―<위기의 여자>가 말하고자 하는 부부의 문제, 사랑의 문제, 자아와 각성의 문제를 임영웅은 깊게 가라앉혀서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생각하기를 바랐던 것일까. 이 이야기가 모니끄와 모리스의 것이 아닌 바로 이 땅의 우리들의 이야기로 환치될 수 있도록” 배려한 연출법에 대해 언급했다.
임영웅은 소리치고 날뛰는 위기의 여자가 아니라, 냉정하게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는 위기의 여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 서양만의 문제가 아닌, 남성의 문제일 수도 있고 우리의 문제일 수도 있는 연출법을 선택했다. 이러한 목표와 계획은 여성 연극이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삶에 대한 문제를 다루어야 함을 간접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위기의 여자>는 그 이듬해, 그러니까 1987년 4월에도 공연되었다. 1990년 5월에는 윤여정 주연으로 <위기의 여자>가 공연되었는데, 12월에도 재공연되었다. <위기의 여자>는 1995년에 손숙 주연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오증자는 1999년 11월에 1인극으로 <그 여자>(손숙의 일인극)를 각색했는데, 이 작품 역시 시몬느 드 보봐르의 소설 <위기의 여자>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개성 있는 배우들이 각자의 모니끄를 만들어낸 <위기의 여자>는 산울림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3.2. <위기의 여자> 이후, 다양한 모색
1987년에 각색된 <숲 속의 방>은 강석경의 동명 소설 <숲 속의 방>을 각색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여성연극에 포함시킬 경우, 논란을 부를 소지가 다분하다. 분명 이 작품은 소양이 가출을 하고 자살을 하는 원인을 사회의 문제와 연결시켜 바라보고 있고, 소양의 내적인 방황과 성장기의 좌절을 그리고 있어 여성적인 색채가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양과 미양 자매가 느끼는 ‘답답함’은 성 정체성을 제대로 찾지 못한 채 남성 위주의 권력 체제(특히 가부장권)에 짓눌린 여성의 삶을 이해하지 않고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즉, 소양은 사회와 개인 사이에서 방황하는 젊은이이기도 하지만, 남성적 질서와 여성적 억압 사이에서 상처 받는 소녀이기도 하다. 이러한 측면은 산울림의 공연에서도 부각되었다. 게다가 거시적인 관점에서 여성의 문제가 약자의 문제이며 그 문제는 사회나 남성이라는 거대한 체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여성 연극의 흐름 속에서 생각할 작품이 아닐 수 없다.
1988년 3월 8일부터 4월 3일까지 공연된 <웬일이세요 당신>은 여성에 의한 연극이라는 측면에서 여성연극에 근접한 경우이다. 이 작품을 제안한 이는 박정자였다. 박정자는 <위기의 여자>에서 중도 하차한 이후 임영웅과 다소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 작품을 기화로 다시 화해하게 된다.
정복근이 각색한 이 작품은 박정자의 자전적 요소를 깊게 담고 있다. 은퇴한 여배우가 과거의 배역을 돌아보면서 옛날 의상을 꺼내 입는 극중극 설정은 인상 깊다. 심정순은 이 작품이 지루하지 않은 일인극으로 전락하지 않은 것은, 극중극을 비롯한 다양한 장치(음악, 전화벨, 트렁크, 조명 변화 등)를 적절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라며 연출 의도를 높이 평가했다.________________
심정순, 「1인극으로 꾸민 일상」, ≪한국연극≫, 1988년 4월.
실제로 이 연극에서 임영웅은 박정자의 과거 모습을 상기시키는 극중극의 세련되게 연출하여 다양한 재미를 선사한 바 있다.
이제는 딸과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고 아들을 무한히 아끼는 가정주부가 된 여배우는,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남편과의 위기를 되돌아본다. 그녀의 남편은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운 적이 있고, 그녀는 젊은 여자를 찾아갔다가 그만 젊은 여자를 유산하게 만든다. 물론 그녀가 일부로 젊은 여자의 유산을 유도한 것은 아니다. 놀란 젊은 여자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저절로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이 일을 두고 그녀를 나무란다. 그것은 딸도 마찬가지이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혹은 피웠고) 딸이 어머니 편을 들지 않는 것은 다분히 <위기의 여자>의 설정을 닮아 있다.(두 작품의 대본은 정복근에 의해 쓰여졌다.) 다른 점이 있다면 <웬일이세요 당신>은 해피 엔딩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위기의 여자>가 남편이나 자식도 결국 자신의 의지처가 될 수 없음을 여자가 깨달은 후 새로운 가능성과 위기를 남겨둔다면, <웬일이세요 당신>은 딸의 화해와 남편의 식사 초대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의 이해와 포용으로 원만한 해결을 지향한다. 과거의 여배우는 남편 혹은 가족과 겪는 문제를 너무 쉽게 양보하고 해결하고 있다. 이로 인해 그 해결은 다소 낭만적으로 보인다. 미래에 대한 대안이나 문제 의식의 제기로는 부족해 보인다는 뜻이다.
1988년 10월 9일부터 17일까지 호암아트홀에서 <덫에 걸린 집>(정복근 작, 임영웅 연출)이 공연되었다. 출연 배우로는 이호재, 반효정, 정동환, 연운경, 이호성, 김순이 등이었다. 이 작품은 성적 피해자로서의 여성과, 이로 인한 가정 파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시작은 형사가 읽는 어둠 속의 조서로부터이다.
영재와 정원은 부부인데, 정원이 집안에 침입한 강도로부터 성폭력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부부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영재는 겉으로는 그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려고 하지만, 마음속의 껄끄러움마저 없애지 못한다. 둘은 잠자리를 갖지 못하고 떨어져 지내게 된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두 사람의 문제를 증폭시킨다. 시댁 식구들은 은근히 정원의 부정을 나무라기 시작하고, 정원의 어머니(장모)는 사위에게 비굴할 정도로 굽신거린다.
이것은 전통적인 성의식에서 여성의 정조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영재의 누나인 영숙은 올케의 과거가 드러나서, 진행 중인 딸의 혼사가 방해를 받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강간사건이 가정파괴로 귀결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영숙의 남편은, 영숙과 영재의 가증스러운 위선을 은근히 나무라고 있다.
그런데 영숙과 영재에게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그들의 어머니가 일제시대 때 독립군을 숨겨준 혐의로 일본 형사에게 강간당한 사실이 있으며, 이미 버린 몸이라는 이유로 정신대 가입을 집안 어른들로부터 강요당한 사실이 있다. 이미 몸을 버린 그녀만 희생한다면, 집안 남자들은 보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해방 이후 그녀는 숨겨진 존재가 되어야 했다. 그에 따라 그녀의 자식들인 영숙과 영재도 시골에서 갇힌 채 자라야 했다.
영숙과 영재의 어머니는 국가와 가문을 위해 한몸을 바쳤으나, 돌아온 것은 ‘부정한 여자’의 오명과 ‘정조를 훼손한 죄’에 대한 대가로써의 축출이었다. 이런 일은 임진왜란 때에도 일어났다고 작가는 강조한다. 즉, 여성이 입은 신체적인 피해를 정신적인 문제로 환치하여, 결국에는 사회와 가정에서 매장시키는 억압과 폭력이 이 사회에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오염원’으로 치부하며 은근히 자신들과의 관계가 단절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에 정원은 그들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정원과 영재의 집은 파괴되었고, 그들의 집은 정절이라는 덫에 걸린 셈이다.
이 작품은 이 사회에서 여성과 성을 보는 시각이 대단히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임을 보여준다. 즉, 여성은 남성의 시각에서 그 가치와 존재 의의를 인정받고 있다. 여성의 성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남성(남편)이 용납하기 어려운 여성의 정조 훼손이 일어날 경우, 이것은 가치의 하락이고 존재 의의의 상실로 이어진다. 이것은 대단히 교묘한 차별이고, 차별적 폭력이 아닐 수 없다. 여성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성의 문제를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대단히 문제적이다.
그러나 작품의 주제는 중첩된 이야기 구조로 인해 오히려 산만하게 흩어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일단 언어에 대단 지나친 의존감이 이 연극의 약점을 가져왔다. 반면 “자칫 흐트러지기 쉬운 주제를 연출의 임영웅은 고도로 다듬은 미학적 무대 구성을 통해 응집시키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우선 “각 삶의 현장―아파트의 거실, 형사실, 서재, 시누이의 집 등을 유리 칸막이로 처리하고, 이들을 조립해 유리병풍처럼 무대 위에 펼쳐 놓음으로써 삶의 단위들이 유리벽 속에 갇혀 있는 느낌을 강하게 만들”었으며, “‘극중의 극’의 연출기법은 특히 괄목할 만한 것”________________
신현숙, 「일상생활 속의 충격파장」, ≪한국연극≫, 1988년 11월호.
이었다는 평가를 들었다. 정복근의 강렬한 대사를 무대 위에서 표현할 수 있는 시각적, 미학적 방법을 찾은 것이었다.
그것은 임영웅이 작품을 가정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는 <위기의 여자> 이후 <하늘만큼 먼 나라>나 <숲 속의 방>, <유토피아를 먹고 잠들다>, <웬일이세요 당신> 등의 작품을 연출했는데, 이 작품들의 일관된 성향은 가정 문제라는 것이다.임영웅, 「왜 가정문제인가」, <<덫에 걸린 집> 공연 팜플렛>, 1988년 10월 9일~17일.
이러한 시각은 이 작품을 여성연극으로 보는 관점과는 궤를 달리하지만, 임영웅이 기존의 관점에서는 다소 소외되었던 여성과 가정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3.3. 여성 연극의 트로이카, 윤석화와 박정자와 손숙
1991년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는 윤석화의 발의에 의해 공연되었다. 윤석화는 끊임없이 여성의 문제를 이야기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현실에 대해 ‘홀로서기’의 욕구를 느꼈다고 한다. 그녀는 박완서의 동명 소설을 직접 각색하고 출연해서 이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혀 보기로 결심했다.
문경(윤석화 분)은 한번 이혼한 적이 있는 35살 독신녀이다. 그녀는 혁주를 만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 했지만 혁주로부터 배신을 당한다. 임신 사실을 알리지만 혁주는 부잣집 처녀와의 결혼 문제로 인해 그 아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문경은 아이를 낳아 혼자 기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고루한 사회적 편견과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혁주의 두 번째 배신은 아이로부터 일어난다. 혁주는 문경이 낳은 아들을 뒤늦게 찾기 위해 노력하고 결국에는 양육권 투쟁을 벌이게 된다. 문경은 혁주를 사랑했고, 혁주의 아이를 키웠고, 아이의 장래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지만, 혁주는 이기적인 욕심을 앞세워 이러한 문경의 노력을 짓밟는다. 이러한 작품의 메시지는 윤석화의 열연으로 여성 문제를 부각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박정자 주연의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역시 여성연극의 명맥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는 프랑스 여성 작가 드니즈 샬렘의 처녀작으로, 어머니와 딸의 숙명적인 갈등 관계를 그리고 있다. 1980년 파리의 오데옹 극장에서 초연되었고, 작가 스스로 딸의 역할을 연기해 화제가 되었다. 어머니의 주검을 옆에 두고, 어머니와의 지난날을 딸이 회상하는 형식으로 꾸며진다. 사랑하면서도 상처를 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모녀 관계를 감동적으로 표현해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 딸의 뒷바라지를 한다. 딸과 사소한 문제로 티격태격하지만, 어머니의 일생은 딸과 함께 하는 삶을 지향하고 있었다. 50이 되어서야 홀로 바다를 처음 발견할 정도로 개인적인 욕망을 멀리한 엄마의 삶은 이 땅에서 여성으로 그리고 어머니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 작품은 박정자의 대표작 중에 하나로, 임영웅의 깔끔한 연출로 여러 차례 호평을 받으며 공연되었다. 먼저 초연은 1991년 6월부터 그 이듬해 2월까지 장기 공연을 해야 할 정도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딸 역이 오미혜에서 오지혜로 바뀌는 변화가 중간에 일어나기는 했다.) 1995년에는 김용림 주연으로 재공연되었고, 1999년과 2003년에도 재공연되어 딸 역으로 우현주, 길해연이 캐스팅되기도 했다.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가 딸이 어머니를 회상하는 형식이라면,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어머니가 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한다. 아놀드 웨스커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92년 3월 20일부터 12월 6일까지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장장 9개월 간 공연되면서 무수한 화제를 뿌린 작품이었다. 특히 배우 윤석화의 신들린 연기, 뛰어난 춤과 노래 실력이 마음껏 뿜어진 무대로 평가되었다.
이 작품은 35세 가수인 어머니가, 가슴이 커져와 아프다고 호소하는 어린 딸에게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형식은 딸에게 편지를 쓰는 행위이다. 그러나 김성희는 딸에게 쓰여지는 편지에 드라마적 요소와 동기가 부족했다고 원작을 평하면서, 이러한 허약한 구조를 극복한 것은 연출자와 연기자의 힘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원작의 허약한 구조를 연출가와 연기자 윤석화는 소극장이라는 제의적인 탈일상적 공간에서 관객이 교감할 수 있는 하나의 축제로 변모시켰다. 심리적, 정서적 변화와 자기 모순을 리듬감 있는 연기와 조명의 변화로, 가벼운 희극적 스타일과 무거운 감상적인 스타일의 변화무쌍한 교차, 일상적 연기와 라이브 쇼의 생동감 등으로 다양한 볼거리를 만들어냈다.”________________
김성희, 「연극의 본질적인 드라마성과 감동」, ≪한국연극≫, 1992년 4월호, 34~35면 참조.
실제로 이러한 연출 방향은 웬만한 노래 실력과 연기 테크닉을 갖추지 못한 배우는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어려웠다. 그래서 2대 멜라니가 탄생한 것은 2004년에 와서야 가능했다. 임영웅의 음악적 소양(뮤지컬 연출)이 잘 반영된 소극장 연극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자, 윤석화와 함께 산울림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꼽히는 이가 손숙이다. 손숙은 산울림 창단 시절부터 산울림 공연에 참여해 왔고, 국립극장에 재직하면서 여러 차례 임영웅과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담배 피우는 여자>는 손숙이 산울림에서 공연한 1인극이다. 이 작품은 <웬일이세요 당신>에서의 박정자나 <딸에게 보내는 편지>의 윤석화처럼 철저히 손숙의 1인 연기에 의존하는 작품이다.
<담배 피우는 여자>는 본래 김형경의 단편소설이다. 오증자는 작품을 읽으면서 각색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고, 임영웅 역시 단숨에 읽고 그 감동을 무대 위로 옮겨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손숙은 옆집 여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나’의 역할을 통해, 평범한 가정주부의 소외된 처지를 대변한다. 객석을 채운 대부분의 관객은 여성들, 특히 주부들이었다. 여성이 겪는 삶의 문제에 대한, 여성 연기자에 의한, 그리고 이 연극을 보려고 몰려든 여성 관객을 위한 연극이 <담배 피우는 여자>였던 것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나’의 옆집에는 담배 피우는 여자가 산다. 그 여자는 신혼 첫날밤에 남자에게 흡연 습관을 들켜 고초를 치르게 되지만, 지금까지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다. 이웃집 남편은 그러한 아내를 때리고 심지어는 친정으로 보내기까지 하지만, 아내를 어쩌지는 못하게 된다. 이러한 이야기는 남편의 구타를 피해 베란다를 넘는 옆집 여자로부터 듣게 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웃집 여자는 흡연을 하러 ‘나’의 집에 오게 되는데, ‘나’는 여자의 비굴한 모습에 전처럼 살갑게 대해주지 못하고 결국 축출하고 만다. 남편과의 관계를 끊든가 혹은 담배를 끊든가, 양자 간의 결단을 미루는 여자의 태도가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한심한 삶과 선택은 결국에는 ‘나’의 삶과 선택과도 무관하지 않다. 가정을 위해 남편을 위해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하지만,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담배 한 대 허용하기 어려운 삶에 공허와 갈증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단순한 페미니즘 작품’으로 보는 것을 거부하는 시선들이 있다. 일단 ‘페미니즘 작품’이 보여주는 많은 한계성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작품의 보편성이 의외로 남성 아니 우리 일상인의 삶과 본질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옆집 여자가 흡연을 하고 그 흡연 습관을 끊지 못해 결국에는 비명에 죽게 되는 과정이, 우리네 일상이 가지고 있는 문제적 요인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통이 부재하는 현실이고, 욕망의 과잉된 억압이다. 그런 측면에서 <담배 피우는 여자>는 ‘단순한 페미니즘 작품’이 아니라, 여성의 삶과 본질을 넘어 인간의 보편적 삶과 본질에 닿아 있는 작품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밖에도 산울림의 여성 연극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들이 다수 있다. 가령 1998년 5월 19일부터 10월 18일까지 공연된 <엄마, 안녕>(마샤 노먼 작, 윤여정 역, 임영웅 연출), 2002년 10월 29일부터 12월 29일까지 공연된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김형경 원작, 전옥란 각색, 임영웅 연출)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윤석화가 주연하고 출연한 <프쉬케, 그대의 거울>(1990년 9월 14일~23일), 손숙이 주연한 연극 <메디슨 카운티의 추억>(2002․2003, 로버트 제임스 윌러 원작, 전옥란 각색, 임영웅 연출) 같은 작품도 여성의 삶을 전면에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에서 여성연극의 계보에 포함시킬 수 있다. 특히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나 <프쉬케, 그대의 거울> 등은 정신분석과 여성의 고통을 연결시키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사회적으로 혹은 가정적으로 억압 대상인 여성의 고통을 드러내는 방식 중에 하나로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은 일정한 모티프로 반복되고 있다.(<위기의 여자>도 동일.)
여성연극은 조심스러운 접근을 요구한다. 여성만의 문제를 주장한다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편협한 논리나 공소한 주장으로 추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연출가 임영웅은 여성연극을 전면으로 부각시키지 않는다. 어느 공연에서도 임영웅이 지향하는 바는, 여권 운동이 아니라 여성과 그의 주변부로서의 삶이 파괴되는 현실이고, 이를 복구시킬 수 있는 대안이다. 그런 측면에서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그러나 그 여성이 남성과 공존하고 인간의 보편적 진실을 담지할 수 있는 연극은 임영웅의 입장에 의해서 완성되는지도 모르겠다.
4. 여성연극의 뿌리와 줄기
이처럼, 산울림 소극장은 분명 한국 여성연극의 근간(根幹)이었다. <위기의 여자>가 본격적인 여성연극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그 이후 계속된 일련의 연극은 여성연극의 관점을 연극계에 이식시키고 사회적으로 부각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따지고 보면 우리 희곡 역사에서 문제적 여성의 삶을 다룬 작품이 이전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 문화적․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은 산울림이 처음이다. 김우진의 <이영녀〉가 1920년대의 문제적 현실과 여성에 대한 기념비적 출발을 신고했지만, 단발의 총성으로 끝나고 사회적 파장은 없었다. 그런데 임영웅의 노력과 산울림의 끈기는 이러한 단발의 총성을 길고 긴 파장으로 연결시켰다. 이 공은 무시할 수 없으며, 우리 연극사에서 중요한 시도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로를 뒤로하고,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러한 출발과 진행을 돕거나 뛰어넘는 그 이상의 성과이다. 임영웅 연출과 기획은 특유의 관점에 서 있기 때문에 보다 확장될 여지는 적다. 즉, 여성과 사회의 정면 대결 같은 구도는 찾기 힘들다. 이것은 산울림의 아쉬움이다. 그러나 그 책임을 산울림에 물어서는 안 된다. 여성 자신의 깊이 있는 고민도 부족하다. 이것도 산울림의 아쉬움이지만, 그 책임 역시 산울림에 물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산울림의 방향이 아니다. 산울림의 연극을 지켜 본 주변인들이 확장시키고 변화시키며 어떤 의미에서는 심화시켜야 할 지점이다. 여성연극에 이러한 문제점과 진로가 있을 수 있음을 알려준 것만 해도 산울림은 충분히 제 몫을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현재 우리 연극은 방향을 잃고 있다. 대학로의 연극을 보면, 왜 우리가 이 연극을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작품이 상당하다. 하나의 대안으로 여성이라는 ‘문제적 인간’은 어떨까 싶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여성이라는 문제의식으로 압축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산울림이 여성연극의 뿌리와 줄기가 되었다면, 이후의 후배들은 그 뿌리로 물을 끌어들이고 줄기로 기운을 움직여 만개한 꽃을 피웠으면 한다. 여성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과, 여성과 사회의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제기가 있을 법한 연극을 기대해 본다. 그때 여성연극은 지금보다 진일보한 차원으로 이동해 우리 눈앞에, 새로운 연극적 지평을 펼칠 것이다.
김남석
․1973년 출생 ․199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등단
․저서 『오태석 연극의 미학적 지평』, 『비평의 교향악』
․고려대, 서울예대,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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