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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호 특집/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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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203회 작성일 08-02-23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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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지난 세기말 한국문학의 비판적 반성․2
          페미니즘의 반성적 성찰

씨네 페미니즘 담론의 허와 실, 남겨진 문제들

서성희(영화연구가)


1. 씨네 페미니즘 담론으로 들어가기
‘씨네 페미니즘 담론의 허와 실, 남겨진 문제들’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원고 청탁이 들어 왔을 때 든 첫 생각은 참으로 난감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선 영화에서 페미니즘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영화에서 어떤 담론을 형성하는가에 대한 합의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이라는 지역적인 제한과 ‘영화'라는 매체적인 제한을 둘 경우 서구에서 유래한 페미니즘 담론의 이름표를 붙이고 거기에 옥과 석을 기입해 내는 일은 혼란을 일으키기 쉽다. 더 나아가 이 혼란 속에서 남겨진 문제들을 찾아내는 작업은 거대담론 속에서 미아가 되지 말고 주체로 살아 돌아오라는 일종의 비장한 주문 같은 것이었다.
어쨌든 요즘은 영화에서도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아무 거리낌 없이 자주 오르내릴게 될수록 적어도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페미니즘과는 점점 거리가 먼 오해와 편견으로 치닫고 있는 듯하다.
재미있는 현상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늘고 있는 반면, 여자들은 스스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여자를 만나면 “나도 알고 보면 페미니스트”라든지, 최소한 “나는 안티 페미니스트가 아니다.”(강성률, 씨네21, 2004/3/11)라고 입에 거품을 물며 우기는데, 여자들은 여성의 권리 주장을 하면서도 앞질러 “나는 페미니즘 평론을 하지만 페미니스트는 아니”(심영섭)라고 단서를 붙이곤 한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왜 그럴까?
단순 논리로 보자면 여성의 권리 주장을 의미하는 페미니즘에 대해 이처럼 남녀간에 역전된 현상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곧 여자나 남자 모두 서로 싸우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성의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 가운데 성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택한 것도 아닌 생물학적인 성을 근거로 전쟁을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영화를 읽어내기 위해 페미니즘이라는 도구를 선택한다면, 이 전쟁은 격렬하게 치러야 성과물을 건질 수 있다. 진정한 페미니즘 담론이란 끊임없이 모순에 저항하는 담론이기 때문이다. 저항 없는 페미니즘이란 없다. 한국사회에도 씨네 페미니즘 담론이 형성되어 가기 시작한 1990년 초반 이후 주기적으로 주목할 만한 저항의 성과물이 있어 왔다. 이 글은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저항의 성과물, 즉 씨네 페미니즘 담론의 지형도를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냄으로써 씨네 페미니즘 담론의 허와 실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 의미 있는 문제 제기를 하고자 한다. 이것이 이 기획의 아주 소박한 출발지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작업은 씨네 페미니즘이란 이미 고착화된 지형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의연히 자기 재생산의 운동을 이어가며 형성 중인 역사일 뿐이라는 점을 간파하는 혜안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페미니즘은 맹렬히 활동 중인 화산작용으로, 이 글이 씨네 페미니즘을 한눈에 조감하는 조감도라기보다는 어떤 의미로든 씨네 페미니즘의 조산(造山)운동의 중력장 안에서 함께 꿈틀거리는 또 하나의 의미 있는 몸부림일 뿐이며, 나아가 나의 편견어린 조산의 꿈틀거림이 독자에게로 뻗어나가기를 기대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2. 씨네 페미니즘 담론의 태동-영화 안의 텍스트 문제
1995년 통계청에 따르면 1985년을 기점으로 대학뿐 아니라 대학원, 고등학교, 초급 대학 등 각급 학교의 여성 졸업자 수가 10년 전에 비해 최고 200%까지 증가했다. 한국 사회에 여성학이 도입되어 여성 해방주의, 여성주의 등으로 번역되는 페미니즘이 대학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1980년대 초반이다. 1960년대 전후에 태어나 급격한 경제 성장기에 소년기를 지내고,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현저하게 높아진 시대이자 여성 운동이 본격화된 시대에 대학을 다닌 이 시기의 여성들은, 사회학자 조혜정의 분석대로 “전문화되어 가는 사회 구조의 변화와 남녀평등 사상의 대두를 피부로 느끼며 청년기를 보냈다는 점에서 전 세대와 크게 구별”된다.
성차별에 대한 현실적 인식과 이에 따른 정치적 의식화가 기반이 되어 나온 이와 같은 특징을 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여성의 정체성이라고 본다면, 유지나․김소영 등의 자의든 타의든 흔히 씨네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는 사람들, 그 실속이야 어떻든 씨네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이러한 정체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판단하기 어렵지 않다.
1990년대 초반, 한국 사회에 페미니즘 열풍이 불어 닥쳤다. 이 시기에 페미니즘이라는 전문 용어는 여성 운동 진영이나 여성학계라는 작은 영역에서 벗어나, 영화․연극․문학․미술 등 전체 문화 장르를 통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른바 페미니즘의 대중화, 페미니즘의 신드롬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페미니즘의 대중화가 여성들의 삶에 실질적으로 어떤 도움을 줬느냐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있다. 당시의 페미니즘 열풍을 장기적 전망 없는 센세이셔널리즘의 측면으로 비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성 운동의 대중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등장해 영화에서 페미니즘 담론을 형성해 나간 유지나는 일종의 개척자였다. 19세기 서구에서 일어난 여권 운동이 “여성도 인간이다.”라고 주장했던 것이 당시에는 혁명적인 발언으로 인식되었듯이, 씨네 페미니즘 담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던 때 유지나의 ‘이 영화는 이러저러해서 여성을 표현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라고 큰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당시에는 참신했다. 또한 그녀는 반여성적인 영화에 대해서 강도 놓은 비판을 하면서, 동시에 그가 보기에 ‘됐다’싶은 여성 영화에 대해서는 ‘홍보사절’을 자처하기도 하였다. 특유의 ‘튀는’ 말투와 글투, 그리고 그와 다른 이론적 기반을 가진 사람들과의 크고 작은 논쟁으로, 유지나는 1990년대 초반 이후 싫든 좋든 영화계의 ‘트러블 메이커’ 역할을 해 왔고 그로 인해 한국영화계에 많은 페미니즘 담론을 생성시켰다. 1990년대 초반 개봉된 영화 <그대 안의 블루>는 유지나의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유지나의 이런 태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반여성적인 영화에 대해서는 냉혹한 비판을 하면서, 그 반대의 경우에 있어서는 인색했던 당시 여성계와는 차별성을 보였다는 점이다. 사실 그때까지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여성 영화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색한 평가 기준으로 보면 여성영화의 범주에 넣기 꺼림칙한 영화를 ‘이것이 여성영화다.’라고 공론장으로 불러들인 평론가가 없었다. 그러나 유지나의 생각은 달랐다. 비록 완벽하지 않더라도 숨어 있는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그런 경향들이 발전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다음 작품의 완성도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결국 본격적인 씨네 페미니즘 담론은 텍스트에서 어떻게 여성을 표현하는가의 관점 차이로 형성되었다. 유지나는 <그대 안의 블루>가 화면 속에서 여성을 그리는 방식에 있어 전에 없는 탁월한 페미니즘 영화라고 평했지만, 이를 당시 여성주의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좌파 여성주의자들은 <그대 안의 블루>가 여성을 사랑과 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전통적인 이분법적 구도 속에 배치시켜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주는데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학평론가 김영혜는 계간 ≪창작과 비평≫1993년 봄호에 실린 「한국영화의 새로운 흐름-신세대의 결혼과 일」에서 <그대 안의 블루>의 감각적으로 잘 짜인 화면이 빈약한 주제의식 때문에 이내 공허해지고 있다며 사랑과 일 사이에 갈등하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는 두 주인공의 설정이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했다. 이 해 월간 ≪말≫지의 2월호에 서울영상집단의 남인영은 이 영화가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여성주의자들의 비평에 대해 유지나는 강하게 반발하는 글을 1993년 4월에 ≪사회평론≫에 「그대안의 블루를 둘러싼 텍스트의 오독」이라는 제목으로 김영혜, 남인영의 글을 “비영화인들의 비전문적인 영화비평”이라고 실었다.
유지나의 이런 주장은 다시 반박되었다. 여성학자 유현미는, 텍스트를 해석할 때 중요한 것은 누구의 해석이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을 기준으로 텍스트를 그와 같이 해석하는가에 있다고 지적했다. 󰡔씨네, 페미니즘, 꼼꼼히 읽기󰡕에 실린 논문 「90년대 이후 페미니즘 영화 비평 경향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유현미는, 김영혜에 있어 비평의 기준이 구체적인 여성의 현실이 여성 해방의 전망에 입각한 주제에 있다면, 유지나에 있어 비평의 기준은 미장센 효과와 작품의 내적 필연성․영화언어․영상 표현 등에 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비평 기준이 다르다고 말한다.
유현미는 그런 지적 끝에 유지나의 비평 기준에 동조하지 않는 듯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지나 씨가 의미하는바 영화적/비영화적이라는 기준은 여러 가지 의문을 갖게 한다. 만약 비영화적이라는 것이 텍스트 외부를 의미한다면, 페미니즘 비평이야말로 필연적으로 모든 영화에 비영화적 잣대를 갖다 대는 비영화적 비평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해석하기에 유현미는, 페미니즘 영화 비평이 될 수 있으려면 단순히 미학적인 차원이 아닌 영화 텍스트를 생산해 낸 사회적 조건과 그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이데올로기 작동 과정에 대한 해석까지 포함시켜야 한다고 보는 듯하다. 그래서 그에게 <그대 안의 블루>를 영화 텍스트 안에서 읽어내는 비평은 비정치적 행위로 여겨지는 것이다.
유지나와 다른 관점에 선 페미니스트들의 ‘다름’이 만들어낸 논쟁은 페미니즘을 한국 영화 비평의 중요한 이론으로 성큼 불러들였다는 점에서 여성계 전체가 <그대 안의 블루>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한 목소리를 낸 것보다 훨씬 효과적인 담론이었다는 평가를 내리고 싶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다름’의 내용이다.
3. 씨네 페미니즘 담론의 확대-영화 밖의 컨텍스트 문제
<그대 안의 블루>(92) 담론으로 촉발된 페미니즘 관점에서 영화 읽기는 스크린 속에서 여성이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느냐는 조산운동의 자기장에서 시작해서 ‘우리 사회의 어떤 맥락이 여성을 그러한 모습으로 스크린 속에서 재현시키고 있는가.’라는 새로운 가지치기를 하게 되었다. 시기적으로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95),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95), <301 302>(95) 등과 같이 여성의 문제를 제기한 일련의 영화가 등장하게 되고, 그에 따른 페미니즘 담론은 그들이 기반으로 삼았던 초기 씨네 페미니즘이 가지고 있던 이데올로기와 이론에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여성영화는 여성들의 문제 등에 초점을 맞추면서 긍정적인 여성 주인공을 대체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 된다. 여성영화가 의식으로 침투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혁명적 전략을 요구하며 특정한 문화적 시스템에서 하나의 매체로서 영화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분석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다.”(클레어 존스톤, Towards a Feminist Film Practice: Some Theses)
클레어 존스톤의 말대로 영화 속 여성 이미지 재현 문제나 서술 구조와 같은 문제에 천착해 여성상을 긍정적인 모습으로 대체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던 초창기 씨네 페미니스트들을 씨네 페미니즘의 1세대로 본다면, 이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하는 씨네 페미니스트들은  2세대로 분리할 수 있다. 서구의 씨네 페미니즘이 시대의 조류에 따라 제안과 비판을 거듭하며 세대를 구분하고 있는 것에 비해, 씨네 페미니즘의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에서는 1세대와 2세대가 공존하고 있다. 같은 페미니스트 영화평론가의 평론에서도 두 세대가 혼재해 있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다른 이론과 마찬가지로 씨네 페미니즘도 서구에서 발생한 이론이 시간의 차이를 두지 않고 한꺼번에 들어와, 문화 연구자인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표현대로 잔여적인 것, 부상하는 것, 지배적인 것이 섞여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서구와 같이 명확하게 세대를 나누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나라 여성 영화평론가들이 영화를 읽는 시각에서 차별성을 보이는 지점은 분명히 있다. 예컨대 호스티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1980년대의 여성영화를 읽는 시각에서 1세대와 2세대 여성 평론가는 구별된다. 1세대는 이 영화들을 가부장 사회 속에서 희생, 착취, 억압, 학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여성의 삶 그 자체에 초점을 두고 분석한다. 그에 반해 2세대는 같은 영화를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생업 현장으로 내몰린 여성의 삶을 사회구조적인 문제와 연결시키는 동시에, 이런 류의 영화가 정치적 암흑기였던 1980년대에 등장한 배경에 관심을 기울인다.
영화를 분석하는 데 여성의 시각을 도입하지 않았던 기존의 영화 평론계와 달리, 페미니즘을 영화 읽기의 수단으로 들고 나왔다는 점에서 김소영은 1세대로 분류해야 될 인물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밀려들어 온 이론의 홍수 속에 두 세대가 혼재되어 있는 한국의 씨네 페미니즘 상황에서 그녀는 1세대와 다른 차별화된 지점에 서 있다. 시기적으로 1세대인 유지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2세대의 시각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김소영의 차별화된 문제의식은 그의 영화평 곳곳에서 나타난다. 먼저 김소영은 <그대 안의 블루>,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등 여성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영화들이 중산층 이상의 여성, 특히 전문직 여성만을 페미니즘 영화의 대상으로 삼아왔다는 점을 우리나라 페미니즘 영화의 한계라고 지적한다.
또한 김소영은 페미니즘의 지평을 보다 진보주의적인 관점으로 넓혔다. 이때 진보라는 용어는 거대 권력에 대한 저항 운동을 함의하고 있다. 진보의 사전적 의미가 “역사적 법칙에 들어맞는, 앞으로 있어야 할 사회상을 지향하여 인지를 계발하고 사회를 개선해 나감.”이라고 했을 때 우리 사회에서 지배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진보의 개념은 지나치게 남성 중심적으로 축소되어 있다. 거대 구조에서만 권력과 억압, 그리고 저항이 일어나는가? 민주화 운동에 평생을 보냈거나 통일 운동에 앞장 선 사람이라고 해도 만약 그가 기가 막힌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답습자라면? 그래도 그는 진보적인가?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다.”는 페미니즘의 구호는 바로 일상의 억압과 차별에 대한 저항을 주장하고 있다. 가족․결혼․이혼․강간․성희롱 등이 여성계의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는 것은, 이러한 일상의 억압이 저항의 대상이 됐음을 알리는 것이다.
김소영은 그의 책 󰡔씨네마, 테크노 문화의 푸른 꽃󰡕에 실린 「여성의 언어와 욕망」이라는 글에서 여성영화에 담겨져야 할 점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비판적으로 현실을 관찰하고, 계급별․계층별․지역별로 다변화되어 나타나는 여성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면서 미래를 전망하는 작품들은 여성운동이 미처 건드리지 못하는 가부장제의 모호한, 때로는 법적인 장치로서도 보호할 수 없는 심리적 억압의 문제들, 그리고 정치적 담화에 채 담을 수 없는 안건들을 다룸으로써 진정한 해방의 순간, 여성 억압이 없는 사회적 유토피아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관객들, 독자들에게 억압적인 구조에 저항할 수 있는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김소영의 주장 중 눈여겨볼 대목은 ‘정치적 담화에 담을 수 없는 안건’들을 영화나 장르 문화가 다뤄야 한다는 부분이다. ‘정치적 담화’란 바로 여성 운동이 운동의 주제로 선택하고 있는 부분, 즉 정치․경제에 있어서의 여성 세력화나 여성 노동자의 권익 향상이라든지, 모성 보호․성희롱․성폭력 문제․여성 취업 문제 등등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드러나는 문제에 관한 것을 의미한다. 김소영은 이러한 ‘정치적 담화’가 담지 못한 부분, 즉 비공식적인 부분의 여성 문제가 영화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비공식적인 부분의 공식화란, 모녀․자매․친구 등으로 맺어지는 여성들 간의 관계나 동성애 문제 등 가부장제 속에서 은폐되고 누락되는, 그러나 그 체제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여성 문제들의 공식화를 의미한다. 이렇듯 김소영은 진보성이 일상의 문제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된다는 견해를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이는 영화를 분석하는 데 서구의 이론과 개념으로 뒤범벅하거나, 서구 중심의 사고를 비판적 검증 없이 수용하는 우리의 영화 읽기보다는,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지를 고민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된다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설명이 될 수 있다.
4. 씨네 페미니즘 담론의 심화-텍스트와 컨텍스트의 결합
4-1. 젠더 정치학의 진행
우리나라에서 페미니즘이 당대의 대중영화 비평에서 두드러진 흐름으로 등장한 것은 한국의 영화산업과 문화가 양적인 팽창과 질적인 전환을 기록하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 이후다. 이 개입을 통해 당대의 한국영화들을 젠더 정치학의 관점으로 배치하여 읽어내는 기념할 만한 성과가 이룩되었다.
<처녀들의 저녁식사>(98) 이후, <해피엔드>, <밀애>, <바람난 가족>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영화들은 성적으로 적극적인 여성 즉 ‘성애화된 여성 주체’의 재현에 몰두했고, 이들은 한국 영화사에서 전례 없는 전복적인 의미나 해방적인 제스처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처녀들의 저녁식사>는 여성성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을 주제로 한 거의 최초의 우리 영화였다. 이 영화는 은폐되었고 억압되었던 여성 쾌락과 섹슈얼리티를 드러낸다는 기본적 사실만으로도 여성을 위한 정치적 의미를 수행하는 첫발을 내디딘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또한 이 영화에서 눈여겨볼 점은 이들의 대화의 중심 소재는 섹스지만 그것이 단순히 성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정신적 충족과 주체성을 의미하는 섹슈얼리티를 아우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에 대한 페미니즘 담론은, 서인숙이 「여성 섹슈얼리티에 담긴 정치적 의미」를 1998년 ≪영화평론≫지에 실은 이후 잇달아서 <처녀들의 저녁식사>에 관한 비평문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이수연은 󰡔대중매체와 성의 정치학󰡕에 실린 「여성 관객과 시선의 정치학」에서 <처녀들의 저녁식사>가 여성의 욕망을 다루는 여성 영화지만 여성인물들이 관음적인 카메라에 의해 대상화되는 모순적인 측면을 지적했다. 주진숙이 1999년 ≪영화교육연구≫에 실은 「여성 관객/성에 대한 고찰:<처녀들의 저녁식사>에 대한 독해의 경우」는 영화를 본 미혼 여성 관객들의 반응을 토대로 한 수용자 연구를 통해, 이 영화에 대한 여성 관객의 반응이 긍정적 아니면 부정적인 대조적 입장을 취할 뿐만 아니라, 영화 속 인물들에 대해 이중적 혹은 양가적 감정을 갖는 모순된 반응을 발견한다. 또한 주유신이 󰡔문화읽기: 삐라에서 사이버 문화까지󰡕에 실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육체/자아에 대한 새로운 시선:<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단일한 해석이 적용되는 텍스트가 아니라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모순과 갈등의 과정을 담고 있는 텍스트로 분석하고 있다.
이들 논문들의 중심 논의는 각각 접근 방법과 독해 방식은 약간 차이가 있을지라도, 과연 여성 섹슈얼리티를 전면에 부각시킨 이 영화 텍스트가 여성성에 올바른 담론과 묘사를 담고 있느냐에 집중되었다. 네 여성 이론가들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견해는 이 영화가 처음으로 여성성을 담론화하였지만 이 담론이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올바른 묘사인지는 모호하며, 따라서 여성 섹슈얼리티와 여성성에 대한 다양한 반응과 논의를 이끌어내는 ‘모순과 갈등이 공존하는 텍스트’라는 결론이었다.
<처녀들의 저녁식사>가 벌린 담론은 뜨거웠던 토론 열기에 비하면 결론이 흐지부지 마무리되어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나는 이 논쟁에서 결론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이제 여성 관객에게도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한두 개의 잣대가 생겼다는 점에서 이 논쟁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이 논쟁이야말로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진리를 실감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페미니즘 담론들은 여성 영화를 영화 내적인 요소와 그 영화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는 외적인 요소를 통해 가려내는 작업이다. 이 말은 페미니즘 영화를 만드는 것은 결코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 혹은 배우의 몫만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페미니즘 영화는 관객이나 영화평론가의 입을 통해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나는 페미니즘 영화평론가라면 한 영화의 특정 부분을 페미니즘 논쟁의 대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페미니즘 영화냐 아니냐를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것의 논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여성들은 페미니즘 영화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논쟁에 더욱 목말라 하고 있다. 완벽한 영화를 만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너무 소극적인 자세가 아닌가? 나는 페미니즘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먼저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영화에서 여성적 담론과 주체성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흔적이라도 있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찾아내서 확장시키는 작업이 바로 페미니즘 비평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4-2. 젠더 정치학의 위기
영화에서 페미니즘의 목소리가 다양화되어 가고 심화되어 가고 있던 진보적 상황은 한국사회의 최대 위기였던 IMF를 겪으면서 결국 저항에 부딪치고 만다. 한국 영화 자체나 비평의 흐름은 1997년을 기점으로 해서 위기에 빠진 남성성을 필사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노력이 두드러진다. 이 와중에 여성은 여전히 타자와 무기력한 희생자에 머물면서 무력한 민족-국가의 알레고리로 작동하거나, 남성들의 관계와 액션에 가려진 채 부차화되거나 인지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전락하거나 사라진다(주유신, 씨네21, 2004/7/7). 결국 성적으로 적극적인 여성 즉 ‘성애화된 여성 주체’의 재현에 몰두했고 이들은 한국 영화사에서 전례 없는 전복적인 의미나 해방적인 제스처를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이를 봉쇄하려는 또 다른 힘들과 끊임없이 다투게 되었다.
이렇듯 ‘남성 중심적 패러다임’으로 퇴행하는 한국영화 비평의 현실을 ‘여자가 사라지는 영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로 권은선이 「‘김치 블록버스터’ 속에 그녀들은 없었다」에서 지적하고 있으며(씨네21, 2004/3/11), 김경욱도 「홍상수도 나쁜 남자다」라는 글을 통해 여성에 대한 ‘생략’을 반복하는 홍상수의 영화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씨네21, 2004/5/12).
젠더 정치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영화 담론은 <쉬리>에서 민족적 비극을 은유하는 분열체로, 여성을 나눈 한국영화는 <해피엔드>에서 중산층 가정 내의 여성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도 폐기처분한 뒤에, 드디어 여성을 향한 온갖 가학적인 환상들을 거침없이 풀어놓는 김기덕의 영화를 정전화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여정을 밟아 왔다는 주유신의 견해는 상당히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결국 최근 씨네 페미니즘 담론에 가해지는 반격이 거세지는 조산운동의 중력장 안에 김기덕의 영화가 정점을 이루고 있다. 씨네 페미니즘 담론에서 김기덕은 해명하고 넘어가야 할 도전적인 과제이다.
한국영화에서 성적 이데올로기 논쟁이 김기덕 영화를 중심으로 양극화되어 펼쳐지고 있다. 매체들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 <나쁜 남자>를 둘러싼 남성 평론가와 여성 평론가의 찬반 논쟁을 함께 실음으로써, 마치 남녀 양성간의 논란으로 이데올로기화시켰다. 즉 김기덕의 <나쁜 남자>는 그동안 남녀 평론가들의 엇갈렸던 평가에 불을 당겨, 명확히 남성/지지 여성/비난이라는 양분된 분열 현상을 초래하는 화약고의 역할을 한다.
김기덕 영화에 남녀 모두가 주목하는 이유는 정신적, 물리적으로 가해지는 강도 높은 폭력성에 있다. 남성 평론가들은 그의 영화가 “소재가 창녀라고 해서 무조건 비판해선 곤란”하다면서 “‘플라토닉 러브’라는 거창한 관념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는 몸과 몸의 부대낌 속에서 몸과 마음의 합일가능성을 추구”하는 영화로 평가하고 있다(김시무, 「좋은 영화다」, 동아일보, 2002/1/11). 그의 영화는 “종종 오해를 사는데 홍상수 감독과 유사한 죄의식을 다루지만 미학적 선택이 아닌 종교적 차원에서 폭력성은 등장인물에 대한 형벌(정성일, 「정성일이 말하는 김기덕」, 씨네21, 2002/5/27)”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따라서 ‘남녀 관계의 비정상적인 묘사와 여성 성기에 대한 집착, 퇴행적인 성격을 비난하는 시각에는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묘사에만 치중한 판단일 뿐, 그것과 포개져 있는 다른 맥락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김기덕은 남성 평론가에게는 “90년대 한국 영화계가 배출해낸, 토해낸 유일하게 ‘새로운’ 감독”으로 평가되고, “가치의 경계를 부수고 선악을 넘어서 유희를 즐기는 감독”의 반열에 그를 위치 짓는다(유운성, 내사 김기덕 영화를 지지하는 이유, 씨네21, 2002/5/27). 또한 페미니스트 영화 비평이 단점 못지않게 장점도 많은 김기덕 영화를 하나의 잣대로만 혹평한다며 ‘파시스트적 페미니즘’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기에 이른다(강성률, 페미니즘 비평 방법론을 쇄신하라, 씨네21, 2004/3/11).
그러나 여성 평론가들의 견해는 전혀 다르다. “<나쁜 남자>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나쁘다’고 보는 것은” 아니며, 그 폭력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며, 결국은 어떤 정치적 효과를 갖는”의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협박, 구타, 강간 등을 포함해 그녀에 대한 폭력적 지배는 그에게 보상과 치유, 자기 확증을 가져다주면서 ‘나쁜 남자의 자기 완성’과 ‘평범한 여성의 자기 절멸’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영화로 평가하고 있다(주유신, 나쁜 영화다, 동아일보, 2002/1/11).
“여성에 대한 이처럼 철저한 ‘성화’(sexualization)는 결국 남성의 지배를 가장 효율적으로 행사하는 방식이자 남성 주체의 확립을 위해 타자로서의 여성의 실존에 대한 부정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남성 주체에게는 성차별 이데올로기를 내면화시키는 효과를, 여성 주체에게는 사회적 무력감에 빠지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김기덕 영화가 갖는 호소력과 차별성은 여성에 대한 극도로 착취적인 상상력과 혐오증적인 태도, 그리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페니스 파시즘’에 기반”하고 있다고 본다(주유신, 내가 김기덕을 반대하는 이유, 씨네21, 2002/5/27). 이 페니스 파시즘이 가장 극대화된 지점이 <나쁜 남자>인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고통과 폭력을 경험하고 누군가와의 궁극적인 합일을 꿈꾸지만 김기덕의 주인공들이 꿈꾸고 실현하는 정체성의 합일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지배와 피지배라는 방식 외에는 소통하는 방식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타인과의 관계맺기는 강제적이고 어떤 자율성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한다. 그것은 진정한 소통이 아니”(심영섭, 심영섭이 말하는 김기덕, 씨네21, 2002/5/27)라고 평가한다.
이러한 남녀 평론가들의 엇갈린 평가와 상반된 견해는 영화가 결코 성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영역임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실례가 된다. 이미 성차에 있어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남성 평론가들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가학적 폭력에 민감하지 않다. 그들은 영화에서 묘사되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적 지배를 사회에 만연된 다양한 권력관계의 알레고리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여성 평론가들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남성/지배, 여성/피지배의 영화 구조가 실제 사회 내 약자인 여성의 위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판단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극단적인 여성 학대와 착취를 통한 영화적 과잉으로 인해 남성 이데올로기를 한층 강화시키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씨네 페미니즘 담론의 중력장은 남녀관계로 양극화시키는  경향을 띤다. 나는 이 지점에서 이런 한 경향을 띠게 만든 주체는 누구인가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그 저의를 파악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김경욱은 이 문제 제기에 대해 비교적 선명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김기덕의 영화를 둘러싸고 회자되는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가장 어이없는 말은 “김기덕 영화를 남자 평론가는 지지하고, 여자 평론가는 싫어한다.”라는 단언이다. 심지어 김기덕 감독조차 “여자 평론가들은 내 영화를 싫어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의 영화를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는 여자 평론가는 여자가 아니거나 평론가가 아니란 말인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분법적 환원이며, 총체적 모순을 전체적 대립으로 후퇴해서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유치하다고 해도 하나의 단언으로 나타날 때 그 뒤에는 어떤 법의 명령이 도사리게 된다. 따라서 김기덕 영화에 대한 단언은 은연중에 ‘김기덕을 지지하는 남자 평론가는 마초이고, 김기덕을 좋아하는 여자 평론가는 문제가 있거나 문제의식이 없다.’는 기의를 내포하게 된다. 또는 여자 평론가가 남자 평론가를 침묵시키고 싶을 때, 남자 평론가가 “그런데 나는 그렇지 않다.”며 예외적 자기 규정을 내세울 때, 편리한 방편으로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 페미니즘이 싸워야 하는 것은 이런 방식의 환원이며 단순화가 아닐까?
페미니즘이 남녀간의 전쟁을 의미한다면, 여성들은 절대로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남성들이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여성들이 남성들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여성들이 남성을 사랑하고 함께 살고 싶어하지 그들과 싸워서 남자를 박멸시키고 남자 없는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남녀 모두에게 심각한 변화를 요구한다. 페미니스트에 대한 잘못된 신화나 오해는 모두 사라져야 한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그 변화에 대한 방법론이지 양성간의 전쟁이 아니다. 페미니스트는 사랑하기 위해서 싸움을 거는 것이다.
5. 남겨진 문제들
여성의 투표권 획득이라는 단일 목표로 진행된 20세기 초의 여성 참정권과 달리, 21세기에 진행되고 있는 현대의 씨네 페미니즘 담론은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다각적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씨네 페미니즘을 단일한 목표나 논리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20세기 인류를 지배한 사회주의 사상과 심리학이 마르크스와 프로이드라는 위대한 아버지(The Great Fathers)를 가진 데 비해, 페미니즘은 그에 비견되는 위대한 어머니 절대자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항상 완결된 어떤 사상이나 이론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오늘도 변화하고 있는 동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지금까지 꿈틀거리는 페미니즘의 조산운동을 살펴보면서 결국 씨네 페미니즘 비평도 인간학이라는 당연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원론적인 이야기로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남성과 같은 권리를 요구하는 남녀 평등사상과 이론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러한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여성들의 조직된 사회 운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페미니즘은 남녀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현 사회의 억압 구조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민주화 운동이자, 남성 지배 문화가 초래한 인류의 위기를 헤쳐 나갈 새로운 가능성을 여성적 삶의 원리 속에서 찾는 대안 문화운동이기도 한다.
어떤 페미니즘‘들’도 가장 중요한 점은 그것이 사상이나 이론을 넘어서는 무엇이라는 데 있다. 페미니즘은 남녀관계의 변화를 통한 인간 삶의 변화와 그로부터 야기되는 세계의 변혁에 그 목적이 있다. 개인 삶의 변화와 사회 전체의 변화를 동시에 추구하며, 바로 그러한 특성 때문에 행동과 실천이 따르지 않는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자체를 부정하는 공허한 수사학에 불과하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실천을 전제로 한 사상이며 이론이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생각과 그 생각의 실천 여하에 따라서 누구든 페미니스트가 될 수 도 있고 또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여자라고 무조건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도 아니고, 또 남자라고 모두 페미니스트가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자로서의 삶의 경험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데 가장 중요한 물적 토대가 됨은 물론이다.
페미니스트는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에 대해 부당하게 느끼고 이의 시정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존재하는 한 페미니스트의 존재도 필연적이다. 일단 내가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내가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부터 따져보아야 한다. 그것이 페미니즘으로 불리든 또 어떤 다른 것이라고 불리든 이미 그 억압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가진 자는 페미니스트로 불릴 자격 조건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의 씨네 페미니즘은 더 이상 똑똑하고 이기적인 여성들의 권리 주장도, 백인 여성들의 한가한 담론을 번역하는 일도 아니다. 또한 전투적인 여성 투사나 상아탑의 전유물이 되어서도 안 된다. 페미니즘 ‘문젯거리 만들기’가 곪아터진 상처를 드러내 원인 처방을 해야지 성과 없는 ‘긁어 부스럼’이어서는 안 된다. 같은 맥락에서 일상에 매몰되어 있는 평범한 여성들에게 대리만족을 주던 페미니스트 스타의 시대도 종지부를 찍었으면 한다. 즉 소수의 깨인 여성들이 이끌던 선구자의 시대는 막을 내린 것이다.
씨네 페미니즘의 담론들은 상당부분 평범한 여성들의 자기 주장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개인의 사생활에서 사회의 공적인 영역까지 페미니즘이 스며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반 여성들이 왜 이렇게 되는지를 몰랐던 것, 혹은 그저 개별 의식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들을 씨네 페미니즘 담론이 공론화시켜 주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성 역할 고정관념과, 그런 문화 때문에 여자들이 그런 처지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큰 그림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여성 주체적 시각, 자립심, 남자와 대등한 존재라는 자각을 심어주고, 나아가 자기 실현에 대한 허위적 욕망, 결혼과 삶에 대한 신비화된 감정의 세목을 예리하게 파헤치는 혜안을 길러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페미니즘 담론은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 그래서 더욱 여성영화를 만드는 현장이 중요하다. 연구 성과만 놓고 보면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짧은 역사에 비해 발군의 저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현장과의 연계성을 놓고 누가 시비를 걸어오면 막막해진다. 강성률이 “페미니즘 비평가들이 말하는 주체적인 여성이란 무엇이며, 그런 여성이 그려진 영화는 어떤 영화인지,” 궁금하다면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영화형식을 깨고 살아 있는 주체적 여성을 그린 영화란 도대체 어떤 영화인가? 정의가 너무 추상적이며, 그것을 그렸다는 영화들도 손에 와 닿지가 않는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라는 질문으로 페미니스트들을 다그칠 때 사실 난 답답함을 느꼈다.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페미니즘은 태생이 실천적이고 운동적인 학문이다. 당연히 한국 사회의 여성의 현실을 제대로 아는 것부터 변화의 추동력까지 가려면, 외국 이론을 소개하는 수준을 넘어 한국 여성의 삶에 주목해 분석하고 대안을 담으려 고민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인간의 모든 진리는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만 실현된다.”는 김용옥의 말처럼, 자신의 위치를 자각한 이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바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한 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자각의 내용들을 실천하는 것이다. 실천 없는 자각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자각이 있다고 해서 섣불리 어떤 실천을 기대하기에는 사회 변동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약한 한국사회가 아직은 개인에게만 너무 많은 부담을 주는 사회임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다. 개인의 자각만으로 쉽게 깨고 넘어설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는 결국 자신의 발언 내용 못지않게 그 발언들의 효과지점을 제대로 짚어내는데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남녀는 성차에 관계없이 평등해야 된다는 주장에 멈춘 것이 아니라 과연 어떤 남녀가 평등한 관계인지 그 기준을 마련하고 실제 모델을 제시해야 할 시기가 한국 씨네 페미니즘에 도래한 것이다. 이 문제는 조혜정의 말처럼 계속적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풀어나가는 것을 연습하고, 자신이 연습한 것을 또 계속적으로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끊이지 않고 이러한 일들을 벌여 나가서 공적인 담론으로 형성해 나갈  때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의 문제는 조금씩 해결될 것이다.



서성희․1969년 출생
․경일대, 청주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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