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16호 신작단편/김문숙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32회 작성일 08-02-23 15:55

본문

[단편]

스위스파크 파티

김문숙



파티 장소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검붉게 그을린 낯에 분칠을 잔뜩 한 시골아낙처럼, 샛노란 페인트칠이 어색하나마 정성스레 단장한 5층짜리 건물은 그 골목에서도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는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통유리 사이로 실내가 환히 들여다뵈는 일식집을 지나고 여느 집 대문짝만한 간판을 내건 숯불갈비집을 거쳐 파티가 한창일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꽃을 피워 올린 서양란, 파키라와 벤자민, 행운목 화분 따위가 분홍색 리본을 매단 채 계단을 장식하고 있는 입구는 개업식 하는 곳답게 적당히 요란스러웠다.
지난주에도 그는 옛 직장 상사가 퇴직금을 털어 마련한 낚시점과 외사촌 형수가 새로 낸 아동복 가게의 개업식에서 고사상에 얹힌 삶은 돼지머리에 공손히 절을 하고 빳빳한 지폐가 든 흰 봉투를 바치고 온 터였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빠짐없이 부조를 해야 할 각종 경조사가 나날이 늘어간다는 의미 이상은 아닐지 몰랐다. 사람들은 경쟁하듯 달마다 결혼식을 올렸고 때가 되면 어김없이 아이를 낳았으며 최소한 한 번 이상은 크고 작은 사업을 벌이는 데다, 예순이나 일흔 번째의 생일을 맞지 않으면 병이나 사고로 죽는 가족 한둘쯤은 예사로 갖고 있었다.
“파티를 열까 해.”
반 년 만인가 회사로 전화를 걸어온 근재가 뜬금없이 내뱉은 첫 마디가 “개업식을 하려고 해”이거나 “내가 새로 일을 하나 시작했는데 말이야”가 아니라 “파티를 열려고 해”였기 때문에 그는 근재의 청첩에 모종의 긴장과 흥분조차 느끼며 덥석 응하기부터 하고 말았다. 영화에서 봤지 싶은 할로윈 파티 따위 즐거운 소요를 떠올리며 “근데 웬 파티?” 그가 물었을 땐 정작 녀석에게 꼭 참석하겠다는 다짐을 준 뒤였다.
“자식, 웬 파티긴. 더 이상 젊지 않은 서러운 청춘들을 위한 눈물의, 아니 광란의 파티다. 향기롭고 진한 술도 기막힌 음식도 넉넉히 제공된다. 놀라지 마라. 우리들의 파티는 물침대와 러브체어, DVD 플레이어가 딸린 평면TV, 티테이블과 화장대와 냉장고, 깨끗한 욕실까지 갖춘 예쁜 방이 스물네 개이고 초등학교 운동장만한 펜트하우스까지 있는 근사한 곳에서 화려하게 열린다. 원한다면 올나이트든 2박3일이든 얼마든지 계속될 굉장한 파티가 내일 저녁 7시, 그곳에서 시작된다구.”
전화기에 대고 한달음에 쏟아낸 녀석의 말은 악의 없는 과장은 있을지언정 괜한 허풍은 아니었다. 그것은 서러운 청춘들을 위한 광란의 파티를 빙자한 모텔 개업식일 따름이었다. 녀석은 그가 혹 길을 잃고 방황할세라 일주일 동안 머리를 싸쥐고 지었다는 이름 스, 위, 스, 파, 크, 를 음절마다 정성을 들여 또박또박 불러주곤 대중교통과 승용차 편으로 올 수 있는 길을 비교 설명한 후 모텔 근처에서 건너야 할 횡단보도의 수까지 일러주더니, 그래도 미심쩍었는지 아예 약도를 그려 팩스로 전송해 왔었다. 장님이 아닌 바에야 찾아가지 못할 수 없는, 정확하고 세밀한, 약도라기보다 그것은 하나의 완전한 지도였다.
그는 스위스파크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고 몸을 뒤로 젖혀 다시 한 번 모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후미진 골목 끝의 스위스파크는 주변 건물은 아랑곳하지 않는 샛노란 페인트 색 때문에 여전히 이물스러웠다.
“젊은 놈이 왜 하필 모텔이람.”
그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은 채 한쪽 어깨로 출입문을 밀치며 가볍게 혀를 찼다. 검은색으로 썬팅된 유리문 한켠에 부착된 노란색 스티커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최신형 러브체어 완비.’
그는 실소했다.
“어서 오십시오. 감사합니다.”
밀친 문 사이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억양 없는 여자의 목소리가 습격처럼 그의 뒤통수를 쳤다.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을 만큼 놀랐기 때문에 그는 녹음된 여자의 목소리가 아주 기분 나빴다.
등 뒤에서 유리문이 묵직하게 닫히는 소리와 함께 눈에 익기 전의 어둠, 마주칠 때마다 당혹스럽고 난감한 미지의 어둠이 그를 향해 와락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캄캄한 암흑이 아니라 붉디붉은 어둠이었다. 간신히 주위를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만 밝혀놓은 조명이었지만 그것은 정육점의 고깃덩어리에 싱싱한 핏기를 조작하는 불빛처럼 요사스러웠고, 좁고 가파른 계단에 두툼히 깔린 카펫 역시 검붉은 핏빛이었다. 문득 그는 비릿한 냄새를 맡은 것도 같았다. 줄담배 피운 새벽마냥 속이 울렁거리면서 폐가처럼 무서운 적요에 잠겨 있는 그곳이 소름끼쳤다.
“근재 이 자식 입구에서 손님 맞을 생각은 안 하고 어디 처박혀 있는 거야. 사람들은 또 어디 있는 거구. 아무래도 내가 너무 늦은 건가······.”
그는 일부러 소리 내 중얼거려 보면서 한발 한발 힘주어 높고 긴 계단을 밟아 올랐다. 2층으로 오르는 마지막 계단에 이르기까지 그는 제 발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끔찍하게 조용한 곳이었다.
‘내실’이란 표찰이 붙은 방의 손바닥만한 유리창에서 흘러나와 2층 입구를 밝히고 있는 불빛은 반갑게도 전혀 붉지 않았다. 새로 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형광등만 시리게 빛나고 있었을 뿐, 그러나 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법 구색을 갖춘 살림살이에 섞여 일회용 칫솔이며 면도기, 베갯잇과 수건 따위가 비닐 뭉치로 뒹굴고 있는 내실 유리창 안으로 집어넣었던 고개를 빼내고 그는 다시 창문을 닫은 뒤 오른편으로 길게 난 복도를 바라보았다. 그쪽은 어둡고 붉었지만 마주보고 있는 여덟 개의 방문 사이사이에 걸린 그림 액자며 액자 밑 작은 화분들까지, 여느 신장개업소 못잖게 치장에 정성을 들인 품이 역력했다.
역시 평범한 모텔이었다. 모름지기 모텔이란 마음 편히 쉬고 갈 수 있도록 조용해야 하므로 시시한 소음 따윈 흔적도 없이 흡수해 버리는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어야 하며, 조명은 얼굴에 난 땀구멍까지 비추는 보석상의 불빛처럼 쓸데없이 환할 필요는 없다. 어두울수록 좋은 것이다. 그리고 어둠은 필연적으로 고요를 내포하고 있다.
그는 소리 나지 않는 계단을 뛰다시피 밟아 3층을 지나 4층까지 한달음에 올라갔다. 흡, 4층에서 그는 잠시 숨을 멈춘 채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검은 형상 하나가 곧 덤벼들 듯한 태세로 그를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뒤로 주춤해진 몸을 바로잡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이름을 짐작할 수 없는, 아프리카쯤의 먼 나라에나 있을 동물을 본떠 만든 장식용 조각이었다. 살아있지 않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가짜라고 생각하니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검고 단단한 몸이며 공격적이면서 거칠 것 없이 늠름한 자태, 맹목으로도 느껴지는 집요한 눈빛까지가 썩 멋들어져 보였다. 그는 손을 뻗어 놈의 차갑고 매끄러운 등을 쓸어보았다. 처음 발견했을 때처럼, 그것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자세로 꼼짝 않고 선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녀석, 멋지단 말이야.”
엄지와 검지를 돌려 문지르듯 놈의 이빨까지 감촉하고 났을 때 머리 위에서 덩어리로 뭉뚱그려진 한 떼의 소음이 지나갔다. 뾰족하게 귀를 세우고 신경을 한 데 모았으나 한 번 지나간 소리는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구부렸던 몸을 펴고 짧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무릎을 폈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반갑습니다.”
5층에 들어서는 순간, 단정히 머리를 빗어 올리고 말끔한 검정 수트를 차려 입은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손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손을 맞잡고 흔들며 미소를 지어보였으나 그로서는 처음 보는 남자였다.
‘이 남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는 30년 삶의 어느 모퉁이에서 만났다 헤어진 숱한 사람들 중 남자와 비슷한 인상의 누군가가 있었던가를 떠올려보려 노력했다. 전체적으로 말끔한 인상이며 빠르고 경쾌한 말투,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있는 듯한 작위적인 몸짓이 그가 잘 아는 누군가를 쏙 빼닮긴 했다. 그렇다 해도 그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아니, 처음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저 기억해낼 수 없을 따름일지도. 분명한 건 남자가 그의 외사촌 형을 그럴듯하게 닮아 있다는 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타인을 대할 때 상대의 첫인상이며 특유의 언행 따위를 신선한 충격으로 각인하게 되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누군가와 닮은 점을 애써 찾아내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고 나이가 든 탓인가, 생각하곤 했다. 서른이 되고부터 그는 늘 나이 탓을 하는 것이다.
낯선 것에 대한 공격성을 자제하고 익숙한 것이 주는 안정을 구하느라 초면의 남자가 외사촌 형을 닮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말없이 서있었다.
“그럼, 이만.”
한쪽 손을 맡긴 채 멀뚱한 표정으로 대꾸 없이 서있는 그를 빤히 바라보던 남자가 고개를 숙여 보이며 곁을 뜨자 비로소 5층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사물을 겨우 분간할 수 있을 만한 어둡고 붉은 복도는 그가 본 다른 층과 다를 것이 없었으나 그보다 두 배 이상은 넓어 보였고 객실이 없는 쪽의 벽면을 따라 출장 뷔페일 요리들이 풍성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나비넥타이를 매고 음식 시중을 드는 젊은 남자가 둘, 접시에 먹을 것들을 담고 있는 이가 남자 여자 합쳐 모두 셋. 말끔한 검정 수트의 그 남자는 이제 음식을 덜고 있는 긴 생머리의 여자 곁에 바싹 붙은 채 무슨 말인가를 건네고 있었다. 엑스트라처럼, 존재감이 없어 보이는 그들은 각자 적당한 자리에 배치된 채 5층 정경의 복잡할 것 없는 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손님, 접시와 포크는 이쪽에 있습니다.”
이건 참 기분 나쁜 꿈같군. 이 모든 상황이 어쩐지 비현실적이라고 느끼면서 제자리에 꼼짝 않고 있는 그에게 나비넥타이 중 하나가 다가와 테이블 한켠을 가리켰다. 그는 식기가 어디 있는지 몰라 그동안 멍청히 있었다는 듯 나비넥타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접시를 집어 들고 무슨 요리인지 짐작할 수 없는 음식들을 되는 대로 주워 담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요리들. 도무지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검고 물컹물컹한 무언가를 접시에 담고 등을 돌렸을 때, 그는 말끔한 검정 수트의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그가 먼저 말을 붙였다.
“근재는 어디 있나요?”
“글쎄요, 어디엔가 있겠죠.”
“······저를 아십니까?”
“저를 모르십니까?”
“······.”
“식사를 하시지요.”
“하셨습니까?”
“물론. 아주 즐겁게 했죠.”
“어디서······?”
“504호에서요.”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이제 복도에는 나비넥타이를 맨 웨이터 둘과 말끔한 검정 수트의 남자, 그 이렇게 네 사람뿐이었다. 음식 담는 시늉을 하던 다른 엑스트라들은 501호나 502호 그도 아니면 503호로 제각기 퇴장해 버린 모양이었다.
검정 수트의 남자를 비껴 504호실 앞으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느닷없는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대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는 접시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가 깜짝 놀랐거나 말거나 나비넥타이는 벽에 걸린 인터폰으로 팔을 뻗었고 눈을 두 번 깜빡인 다음 “네”라고 짧게 한 번 말한 후 제자리에 인터폰을 걸어놓았다. 민첩하고 절도 있는 동작이었다. 나비넥타이가 다른 나비넥타이에게 말했다.
“303호에 맥주 세 병을 갖다 주게.”
3층에도 사람들이 있었나. 하긴 스위스파크는 신기할 만큼 방음이 잘 되어 있는 모텔이었다.
그는 문 닫힌 504호 앞에서 왼손엔 묵직한 사기 접시를, 오른손엔 포크와 스푼을 포개 든 채 노크를 해야 할지 하지 않아도 괜찮을지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면 어차피 한손은 비워두어야 했으므로 그는 노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포크와 스푼을 접시로 옮겨놓고 자유로워진 오른손으로 똑, 똑, 똑, 정확히 세 번 방문을 두드렸다. 안에서는 그의 노크에 대한 대답이 될 만한 어떤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
504호 안은 바닥뿐 아니라 물침대와 러브체어, 티테이블과 창턱에까지 걸터앉아 큰 소리로 웃거나 떠들고 있는 여자들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해 있었다. 짐작컨대 근재가 초등학교 운동장만한 펜트하우스라고 표현했던 그 방을 빼곡히 채운 젊은 여자들에 질려 그는 순간 방을 도로 나갈 뻔했다. 누군가 새로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하던 여자들 중의 하나가 얼른 자리 하나를 비켜주는 것으로 그의 존재를 알은체해 주었기 때문에 그는 수치심을 느꼈고, 그런 스스로에 대한 당혹감을 감추며 호의를 베푼 여자에게 목례를 하곤 티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런데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그 사람 친구가 대뜸 그러는 거야. 윤아 씨, 이 녀석이 자기 집에 가자고 할 땐 절대 따라가선 안 돼요.”
“왜?”
“그러게 말이야. 그래서 내가 물었지. 왜 안 되는 거죠? 그랬더니 그 사람 친구가 뭐랬는 줄 아니?”
“내가 어떻게 알겠니.”
“이 녀석 집이 여관이거든요.”
그가 들어오기 전부터 시작되었을, 티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스무 명은 됨직한 방안의 여자들이 까르르, 일제히 웃어젖혔다. 그는 전혀 우습지 않았을 뿐더러 생선초밥 위에 간장 소스를 끼얹지 않은 실수를 막 깨달았기 때문에 새우튀김만 묵묵히 씹어댈 따름이었다.
“여관에 관한 이야기라면 내게도 할 말이 있지.”
뭔가 비밀한 것을 말할 때의 한없이 낮고 은근한 목소리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접시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말끔한 검정 수트의 남자가 바싹 붙어 무슨 이야기인가를 건네던, 긴 생머리의 여자였다. 방안의 여자들 모두 벽에 등을 붙인 채 세운 무릎을 껴안고 앉아 있는 그녀의 나른한 얼굴을 주시했다. 채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공기 중에 미세한 파문이 일고 있었다.
“여관이 있었어. 도시의 후미진 골목에 자리한 아주 볼품없는 여관이었지.”
그녀는 천천히, 여전히 낮고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안은 금세 조용해졌고, 그는 여자들의 이상한 긴장과 침묵이 자신에게 전이되는 것을 느끼며 숨을 죽였다. 여자들은 그녀가 문득 닫아버린 입을 다시 열기까지의 짧지 않은 동안 눈 한번 깜박이지 않았다. 그 무겁고 질긴 침묵이 버거워 누군가가 부러 기침 소리를 냈다. 그녀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작진 않았어. 지은 지 오래돼서 낡고 허름했을 뿐 처음엔 반듯하고 깨끗한 여관이었겠지. 주말이면 스물네 개의 방마다 손님이 차고 장기투숙객도 심심찮게 드는 깔끔한 여관 말이야. 주인은 20년 동안이나 그곳을 지켜온 노파였는데 그 즈음엔 영감님도 죽어 출퇴근하는 침모만 두고 혼자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어. 아들 부부와 손자들이 함께 살고 있는 집엔 자주 들르지 못했지만 가끔 심성 고운 며느리가 개고기를 삶거나 밑반찬 같은 걸 만들어와 냉장고를 채워주고 가곤 했지. 노파는 식탐이 많았고 아직 건강했고 젊은이 못잖게 완력도 셌어. 돈 욕심도 그대로였지. 그런데 경기가 예전 같지 않은 거야. 토요일 밤에도 빈 방이 생기고 장기투숙객도 하나둘 떨어져 나갔어. 틈날 때마다 쓸고 닦았지만, 워낙 낡은 여관이라 표도 안 나는데다 어느 한 군데는 늘 망가져 있기 일쑤였어. 그러니 손님이 줄어드는 건 당연할 수밖에. 생기느니 시설 좋고 분위기 괜찮은 모텔인데 곰팡내 나는 노인네 여관이 당할 수가 있겠어. 노파는 그렇게 생각했지.
숙박료를 낮춰봤지만 손님은 나날이 줄기만 했지. 게다가 피곤한 여자들만 자꾸 찾아오는 거야. 영감님이 돌아간 후, 그러니까 노파 혼자 여관을 맡아 하기 시작한 때부터 간혹 그런 여자들이 있긴 했지만, 이젠 일주일에 한 번은 영락없이 여자가 내실을 찾아와 어젯밤 나와 같이 여관에 들었던 남자를 보지 못했냐고 물어대는 거야.
썩을 년들, 볼일 다 봤으니 처자식 기다리는 집이나 바쁜 일터로 서둘러 나간 게지, 사람이 나는지 드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자다 깨 왜 엉뚱한 데서 없어진 사람을 찾누. 노파는 귀찮은 기색을 감추느라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입가에 주름을 만들어 미소를 가장하며 능청스레 말하곤 했지. ‘이 늙은이도 세상모르고 자느라 댁의 남자가 나가는 걸 보지 못했다우.’
오래지 않아 노파는 여관에 대한 나쁜 소문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노파네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낸 남자들은 이튿날이면 어디론가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거야. 이제 그만 여관에서 손을 떼야 하나 보다고, 침모를 내보내야 할 만큼 매상이 줄고 있다고, 울상이 된 노파의 하소연을 들어주다 조심스레 소문 얘기를 꺼낸 이웃 식당 여자의 말에 의하면 노파는 소문을 전해 듣곤 한참을 키득거리며 웃었다지. 곧 끝날 것처럼 힘없이 잦아들다가도 뱃속에 오랫동안 가둬두었던 걸 토해내듯 격렬해지고, 그만 멈추는가 싶으면 다시 이어지기를 반복하는 키득거림. 밭은기침처럼 메마르고 가쁜 웃음이었다고.
그래, 소문은 끔찍했지. 식당 여자는 차마 거기까지 전해주진 못했지만. 여관에는 호수가 붙어 있지 않은 방이 하나 있었어. 창고로 쓰는 방이었거든. 그 방엔 전기톱과 드릴, 스패너, 망치 따위의 묵직하고 단단한 공구들과 쓰레기 담는 용도의 검고 큰 비닐 봉투, 욕실 청소용 소독약과 탈취제, 막힌 배수구를 뚫을 때 유용한 염산과 모든 객실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꾸러미 따위가 들어 있었어. 평범한 물건들이 뒹구는 평범한 방이었지만 소문이란 늘 그렇듯 무모한 상상력의 결정체 아니겠어.
어쨌든, 끔찍한 소문에 의하면, 남자들은 모두 그 방에 갇혀 있었어. 물론 죽은 채로 말이지. 창고에 비치된 도구만으로 모든 게 가능했지. 주인 노파는 소리 없이 객실 문을 열 줄 알았고 이젠 누구에게도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수 없을 만큼 늙은 여자였고 욕심이 많아 교활했고 힘이 아주 셌거든.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을 거야.”
스스로를 위한 낭독처럼 억양 없이 조용하게, 그러나 정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이어나가던 그녀의 이야기가 문득 끊어졌다. 그리고 가파른 숨소리. 타인의 숨소리란 언제나 거북하게 마련일 뿐더러 여자의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호흡이었다. 그는 가슴이 서서히 옥죄어 오는 듯한 불쾌감과 불안함을 같이 느꼈다. 용기 있는 자 나서서 이 침묵을 깨뜨려다오. 끈질긴 침묵 속에 그녀의 거친 숨소리만 막막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제발 무슨 말이든 해주었으면.
하다못해 누군가 물잔을 엎지르든지 포크를 떨어뜨리든지, 아니면 휴대전화라도 왔으면……. 그는 이제 짜증이 일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스무 명은 됨직한 방 안의 여자들 가운데 하나가 비로소 두꺼운 장막을 찢어내듯 날카롭고 짧게 한 마디를 던졌다.
“그게 다야?”
긴 생머리의 그녀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에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그러나 명백히 그것에 대한 대답일 말을 혼잣소리처럼 내뱉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그건 노파의 유일한 도락이었겠지……. 그런데 내 약혼자는 왜 여태 소식이 없는지 몰라.”
그는 음식을 가지러 가는 체하며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황급히 505호를 나왔다.

복도엔 붉고 음침한 빛 아래 턱없이 풍성한 음식 테이블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근재의 휴대전화로 연락을 취했지만 그를 초대한 친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근재를 찾아야 했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담배연기가 새어나오고 있는 501호가 반갑게 눈에 들어왔다. 저 방엔 남자들이 있을 거였다. 그가 501호로 들어갔을 때 그러나 안에는 나비넥타이 둘이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따름이었다. 빈 술병이며 종이컵, 접시 따위를 치우다 짬을 낸 모양이었다. 그가 물었다.
“504호에 사람들이 많던데…… 그 여자들은 누굽니까?”
“여기 사모님 고등학교 동창들이라고 하던데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근재, 아니 사장님은 어디 있는 거죠?
“303호에 친구분들과 같이 계실 겁니다.”
다른 나비넥타이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303호에 모여 있다는 근재의 친구들은 어쩌면 그의 친구들이기도 할 터였다. 근재와 그는 같은 대학을 다녔고 같은 고전음악 감상 동아리에 속해 있었다. 둘은 통계학과에 다니고 있으며 말러를 좋아한다고 자신을 소개한 신입회원 지희를 보는 순간 동시에 가슴이 뛴 적이 있었고 그 한 달 후, 석 달 간격을 두고 차례로 그녀를 사귄 적이 있었다. 지난 일이었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근재와 그는 단 한 번도 지희를 화제로 삼은 적이 없었다.
지희는 근재를 버렸고 결국은 그도 지희를 버렸지만 그들의 연애는 유난하고 요란했다. 다른 학교 학생들까지 섞인 동아리 모임에서 근재는 마시던 술병을 깨 거꾸로 치켜들고 그에게 덤벼들었었다.
“개새끼, 차버리기 위해 넌 내 여자를 뺏어갔어!”
의자가 넘어지고 테이블이 엎어지는 동시에 여자들의 외마디 소리가 들렸고 옆 자리에서는 거친 욕설이 날아왔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날의 술자리 이후로도 근재와 그는 점심을 먹고 난 후나 강의가 비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동아리방에 들러 말러나 바흐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동아리방뿐 아니라 학생회관 근처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건 한때 두 사람의 연인이었으며 나이 어린 후배였고 누구에게나 싹싹하고 잘 웃던 지희였다. 303호에 가면 그때 그 친구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그는 음식이 거의 전부 남아 있는 사기 접시를 나비넥타이에게 건네주곤 501호를 나왔다.

*
303호실의 문은 완강히 잠겨 있었다. 문을 몇 번 두드리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손잡이를 돌려보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는 호수를 재차 확인한 후 양 손으로 문을 짚고 조심스레 귀를 갖다대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런 제길, 이 자식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녀석을 찾기 위해 스물네 개나 되는 객실을 순회하며 일일이 문을 열어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해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절대로 오래 머물고 싶지 않은 곳임엔 분명했지만 근재를 만나기 전엔 나갈 수도 없는 곳이었다. 그는 이제 성인 남자였고 기성 사회에 편입된 당당한 사회인이었다. 그는 다 자란 어른으로서 손색없이 처신하고 싶었다. 광란의 파티건 모텔 개업식이건 청첩에 응해 여기까지 온 이상 부조금은 직접 전하고 돌아가야 했다. 그는 거친 발길질로 문짝을 냅다 걷어찼다.
“거 누구욧!”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는 순간 몹시 당황했으나 주먹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틈새만 겨우 남겨둔 채 다시 슬쩍 닫아버린 문 뒤, 사내의 충혈된 두 눈을 보자 이내 침착해질 수 있었다. 사내는 화를 내고 있다기보다는 경계하고 있었다. 사내는 짐짓 목소리를 높여 함부로 방문을 걷어찬 무례함에 분노하는 체하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요?”
“아, 나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이근재라구요, 여기 사장입니다.”
“그는 없소.”
“여기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는 목을 길게 빼고 발돋움을 해 눈이 붉은 사내의 어깨 너머로 방안을 넘겨다보았다. 그 안에 근재가 있는 게 분명하다는 확신을 갖고. 그러나 재빠르게 훑어본 방안 풍경에 근재는 속해 있지 않았다. 다만 그의 친구들이 아닌 것이 분명한 서너 명의 사내들과 그들 앞에 흩어져 있는 진 트럼프 몇 장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붉은 눈의 사내는 이제 밖으로 나와 문을 닫음으로써 그와 방 사이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그는 좀 전에 자리를 떴소.”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다른 방에 있겠지요.”
붉은 눈의 사내는 303호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
나비넥타이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이 가장 수월할 듯싶어 그는 다시 5층으로 올라갔다. 스위스 파크의 모든 객실과 연결되어 있을 복도의 인터폰으로 근재를 찾아달라고 부탁할 셈이었다. 나비넥타이는 마침 인터폰으로 통화 중이었다. 그는 나비넥타이가 통화를 끝내기 기다렸다가 이렇게 말했다.
“사장님을 찾아주시오, 인터폰으로.”
“저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손님들 시중을 들어야 하고 인터폰도 받아야 하고 사실은 몹시 바쁘답니다. 휴대전화를 해보시는 게 빠르지 않겠습니까?”
“받질 않아요.”
그때 505호 문이 열리며 고교 동창들 사이에서 그럴듯한 괴담을 엮어내던 긴 생머리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사모님께 물어보시는 게 어떨까요?”
505호에서 나오는 그녀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나비넥타이는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미처 그녀 쪽으로 가기 전에 그녀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나비넥타이는 계단 아래로 총총히 사라졌고 그녀는 그에게 말을 건네왔다. 여전히 낮게 가라앉은, 음울한 느낌의 목소리였다.
“땀을 흘리시는군요.”
“난방 설비가 잘 된 모텔이네요, 여긴.”
“차게 식힌 맥주 한잔 하시겠어요?”
여자는 음식 테이블 옆에 놓인 대형 아이스박스를 열고 맥주 두 병을 꺼내 들어 보였다.
“아, 네. 그런데 근재 와이프 되십니까?”
그녀가 맥주를 치켜 든 두 팔을 내리고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친구의 결혼식에 가질 못했습니다. 해외 출장 중이었거든요. 따로 인사할 기회도 없었구요.”
“근재 씨와는 각별하시잖아요. 그는 당신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각별하다면 각별하겠고, 어쨌든 우리는 오랫동안 알아왔으니까요.”
“그는 당신이 먼저 연락해 오는 법이 없다고 섭섭해 했어요. 늘 당신의 전화를 기다렸죠. 사진으로 많이 봐서인지 당신을 금방 알아보겠어요.”
“미안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둘이서 술을 마시기에 5층의 객실들은 너무 커요. 2층으로 가실래요?”
“전 아무 곳이나 좋습니다만, 근재는 어디 있나요?”
“어느 방에선가 손님을 접대하고 있겠죠.”
“근재를 만나야 하는데,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전화하시려구요? 뭐 하려구요. 그는 이 건물 안에 있으니 걱정 마세요. 천천히 즐기시다 만나고 돌아가세요.”

*
그녀의 안내에 따라 복도 맨 끝의 208호로 들어섰을 때 그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는 심정이 되었다. 그는 분명히 등 뒤에서 찰칵, 하는 금속성의 발랄한 소리를 들었다. 한순간의 머뭇거림이나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산뜻하게 똑 떨어지는 선명한 마찰음, 방문 손잡이 밑에 단단히 부착된 보조 잠금장치를 거는 것이 분명한 소리였다. 그 분명함이 그를 어지럽게 했다.
창가에 놓인 테이블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여자를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검은색 모직 재킷을 벗어 벽에 붙은 옷걸이에 걸고 있었다. 돌아서며, 그녀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이보리색의 얇은 실크 블라우스 위로 적당히 솟아오른 젖가슴의 곡선이 부드럽고 우아했다. 그는 구원을 요청하듯 자신을 향해 간절히 내밀어진 손을 움켜잡았고, 그대로 끌어당겨 무릎 위에 그녀를 앉게 했다. 그는 한 팔로 그녀의 어깨를 안고 다른 팔로는 놀랍도록 매끄러운 실크로 감싸인 상체를 다정하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어헤치고 레이스 천의 하얀 브래지어를 걷어 올렸다. 여자의 맨 가슴이 드러났다. 그는 손아귀에 알맞게 들어오는 살집을 찬찬히 느끼며 오랫동안 여자의 젖가슴을 애무했다. 매끄러우나 서늘한 젖가슴이었다.
“입술이 유난히 부드럽고 혀가 미끄러운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과는 키스만으로도 오르가슴에 오를 수 있죠. 당신은 손이 장점이군요. 부드럽고, 굉장히 따뜻해요.”
여자가 그의 무릎에서 내려와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길고 여윈 손가락들이 그의 허리께를 더듬기 시작했다. 단단히 얽혀 있던 버클이 분리되는 소리, 반듯하게 맞물려 있던 지퍼가 단숨에 해체되는 소리, 여자의 한숨 같은 탄성.
그는 여자의 입속에 사정했고 그녀는 입엣것을 뱉지 않았다. 다만 맥주를 달라고 부탁했을 따름이었다. 그는 소형 냉장고 문에 붙어 있는 병따개를 떼어내 맥주병을 따고 유리컵에 씌워진 종이덮개를 벗겨냈다.
“아니, 그냥 병째 주세요.”
“당신은 이상한 여자로군요.”
“적어도 지희 같은 여자는 아니죠. ······놀라실 거 없어요. 그는 내게 뭐든지 말해요. 나도 그에겐 숨기는 게 없죠.”
“태어나서 이토록 곤혹스러운 일은 처음입니다. 근재를 만나야 하는데······, 이만 나가봐야겠습니다.”
“그를 만나 용서라도 구할 작정인가요? 그가 안다고 해도, 아니 곧 알게 되겠지만 상관없는 일이에요. 우리는 지금껏 이런 식으로 서로를 견뎌왔으니까요. 그는 지금 남자와 함께 있을 거예요. 말끔하고 핸섬한 젊은이죠.”
“근재가 그럼······, 믿을 수가 없군요.”
“그는 여자와의 섹스에 심한 공포심을 갖고 있어요. 난 헤비페팅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죠. 중요한 건 클리토리스지 버자이너가 아니니까요. 프로이트가 듣는다면 미성숙한 여자라고 내게 호통을 치겠지만 난 프로이트를 신뢰하지 않으니까. 우리 부부는 페팅만 해요. 그는 여자의 질 속에 사정하는 행위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요. 그래서 무서운 거죠. 그는 수태 가능한 여자란 모두 마녀라고 생각해요. 지희의 죽음이 암컷에 대한 그의 본능적인 두려움을 의식의 표면 위로 끌어올린 셈이죠.”
수긍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더구나 근재의 아내에게서 지희의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제 그녀는 말없이 맥주만 들이켜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묵묵히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하지만 그때까지 그녀의 침묵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침묵은 밀도가 높았다. 게다가 치밀하게 엮인 침묵의 그물망 사이를 뚫고 들어올 수 있는 언어는 흔치 않을 거였다. 여자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져 가고 있었다.
아아, 이 불편함이라니.
없는 죄라도 만들어 고백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여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당신과 그는 한 여자를 사랑했고 그 여자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어요. 환부에서 흘러나온 고름의 독성이 그 여자를 죽게 했죠. 여자는 채 면역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요. 아시잖아요. 사랑에는 백신도 없다는 걸. 죽은 여자의 뱃속엔 죽은 아기가 들어 있었죠. 누구의 아이인지는 당신들조차도 알 수 없었어요. 당신들 또한 많이 상처받았죠. 그는 늘 당신을 생각했어요.’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누구든지 젊은 날의 상흔을 지닌 채 살아갑니다. 특히 사랑에 관한 한 그건 통과의례 같은 거죠. 지희의 일은 내게 그런 의미 이상은 아닙니다.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죠.”
“술을 더 하시겠어요? 내실 서랍장에 그이 몰래 숨겨놓은 레미 마탱이 있어요. 그는 내가 술 마시는 걸 싫어하죠.”

*
빈 술병들 사이에서 눈을 떴을 때 그는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나체를 보았고 그녀를 보자 아직 근재를 만나지 못한 생각이 나 이내 조바심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몇 번의 정사를 치렀는지, 얼마나 마신 건지 모든 게 도무지 꿈결 같기만 했다. 미처 분해되지 못한 알코올 때문에 의식은 여전히 탁했고, 다만 근재를 찾아야 한다는 의무감만이 명징할 뿐이었다. 그는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옷가지들을 챙겨 입고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그녀를 일별한 후 208호실을 나왔다.
어두운 복도는 숨이 막히도록 조용했고 손목시계의 야광 바늘은 세시 삼십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파티가 끝나고 사람들은 제각기 귀가했을 시각, 그럴 이유가 없었음에도 그는 자신을 둘러싼 고요함 속에서 수상한 기운을 느꼈다. 분명, 무언가 있었다. 피 냄새를 풍기는 비밀, 폭발 직전의 음해 욕구, 모종의 음모 같은 것들······.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건물 전체가 집요하게 침묵하고 있었다. 그저 덜 깬 술기운에 의해 턱없이 과장된 상상력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달래기에 그 적요는 지나치게 불길했다. 아무려나 근재를 찾아야 했다. 그는 멀리 있지 않을 터였다.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었다.
그는 207호실 문을 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눌러보았지만 불빛 아래 환히 드러난 객실 안에는 그 누구도 있지 않았다. 그는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가 욕실 문을 열어 보았다. 근재는 없었다. 같은 순서, 같은 방법으로 확인한 206호도 마찬가지였다. 205호, 204호, 203호, 202호, 201호, 그리고 내실······. 그렇게 2층 모든 방을 수색하듯 뒤졌다. 숨이 차고 땀이 솟았다.
근재, 너는 어디 있는 거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십대의 치졸하고 비루한 날들을 떠나보내고 이젠 삶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는 네 어른스러움에 자긍심을 갖지 않나? 이유가 뭐지? 왜 나를 기다렸지? 나는 지금 너를 찾고 있다.
3층에서, 그는 마치 원수를 찾아 헤매는 성난 복수자와 같았다. 숨을 몰아쉬며 거칠게 문을 열어 젖혔고 구둣발인 채 객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다시 근재에게 전화를 건 것은 4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고서였다.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며 그는 휴대전화의 번호판을 힘주어 눌러나갔다. 담배는 독하고 아렸다. 앉아 있었어도 현기증이 일었다.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다. 이상한 취기였다. 그는 가물거리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신호음을 듣고 있었다.
근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제 이유 따윈 없었다. 무조건 근재를 찾아야 했다. 그는 계속 통화를 시도하면서 4층 객실을 차례로 훑어 나갔다. 401호, 402호, 403호······. 문득 그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호수 없는 방문 앞에서였다. 그는 여전히 근재의 휴대전화에 접속 중이었고, 닫힌 문을 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녀를 깨워 열쇠를 달라고 해야겠어.
열리지 않는 문으로부터 몸을 돌리는 순간, 그는 무슨 소리인가를 들었다고 느꼈다. 문 가까이 귀를 가져갔다. 분명 전화 벨 소리였다


김문숙․1971년 서울 출생
․1999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추천1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