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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신작시/정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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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칠
다랑쉬오름의 낮달
다랑쉬오름을 향해 셔터를 누르다가
얼핏 스치는 피사체에 눈길 머문다
저것,
오름을 비껴 뜬 낮달이다
어느 시대의 유물인데 끈질긴 고집으로
저렇게 녹슬지 않고 떠 있나
지구의 중심을 벗어난 불량기 하나로
칼날을 세우는
달의 오랜 침묵시위
무슨 상처를 곱씹는가
안내판 하나 가지지 못한 오름,
마음속에 새겨진 그 내력을 읽는다
4․3 당시 다랑쉬굴 안에서 죽은 11구의 유골이 1992년에 발견되었으나 유족의 품에 안기지도 못하고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다. 아직도 굴의 입구는 일반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커다란 바위로 봉쇄되어 있다.
언제쯤 내 가슴에도 녹슬지 않는
낮달 하나 품을 수 있을는지
달의 오랜 침묵시위 끝으로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산수국
산수국을 만나는 일은
산을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가 제격입니다
산허리를 휘어감던 안개의 입자들이
송글송글 솟은 땀방울과 섞여
꽃으로 피어났나요
잘 붉어지던 볼을 감추기 위해
꾹꾹 눌러쓰던 교모(校帽) 아래 송송 돋아
고백성사라도 해야 나을 것 같던 열꽃들이
여태 지지 않고 있었나요
길을 따라 수로가 생기고
수로를 따라 한라산자락 꽃이 피었습니다
물을 좇아 피어나기에 수국이라는 이름을 얻었나요
아니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좇아 피어서
수국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일까요
가파른 산길 급히 오를 때에도
넉 장의 꽃받침은 분명 물방울을 튕겼겠지만
귀로 듣지 못하던 물소리
비로소 들리는 듯합니다
산수국을 만나는 일은
산을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가 제격인 것 같습니다
정군칠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수목한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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