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15호 신작시/신지혜
페이지 정보

본문
신지혜
만월도를 말하다
말하자면, 저 하늘은 내가 푹 눌러쓴 모자인 것이다. 저 너울 같은 달빛 풍경은 내 옷인 것이다. 저 끈적끈적한 진흙땅은 내 신발인 것이다. 어디서 불어온 바람 스치는 소리는 내 곡조인 것이다. 아무런 냄새도 맛도 없고 빛도 화상도 없이, 제 홀로 흐드러져 피었다 지는 저 적막은, 내 꽃밭인 것이다.
내 빈 마음 부수어 탁탁 털어 버리면 “이 뭣꼬?”도 없이 겨울 눈 보푸라기 같은 생각들 우수수 일시에 흩어지는 것이다. 내가 둥그런 진공을 껴안고 거닐다 보면, 무심의 안뜰도 결국 단추 구멍만한 내 골방만 하구나. 투욱 일침을 놓으며 중얼거려 보는 것이다. 나 홀로 쓸쓸한 웃음만 둥글어져서 온 천지를 꽉 차 오르는 것이다. 엎드려 등 돌린 산도, 집도, 홀연히 일어서서 한바탕 어우러져 더덩실 어깨를 들먹이는 것이다. 단물 뚝뚝 흐르는 만월도(滿月圖) 한 폭 속, 내 생사의 궤적마저 모두 흔적 없이 지워지는 것이다. 다만 천지사방 허공의 네 귀에 걸려, 소리 없이 달빛만 나부끼는 것이다.
흑백필름
흰 것은 검게. 검은 것은 희게. 뒤바뀐 흑백필름을 형광불빛에 비추어본다 그렇게 검은 웃음 한입 베어 물고 왜 내가 거기 있나 몰라. 무슨 얼룩 같기도 하고 흔적 같기도 한 태양 한 점 무겁게 이고 있을 때, 흰 억새밭이 웃자란 채 허공을 마구 휘젓고 있었지. 그곳이 어딘지 모르는 나는, 조금 막막했던 것도 같고 운 것도 같은 데, 그때 적막을 갈래갈래 찢으며 달려가던 열차의 녹슨 바퀴소리가 아직도 리드미컬하게 내 귓가에 걸려있던가. 그때 짧은 시간이 정지됐을 때, 난생 처음 카메라 파인더 속에 붙박혔던가. 정적처럼 플래시가 번쩍, 터지고 내 캄캄한 슬픔들 모두 들켜버린 후, 내가 입고 있던 흰 저고리는 검게. 검정바지는 희게. 어쩌면 그때 유난히 검은 울음도 단말마의 반항 한마디 없이 눈부시게 탈색되었던가. 그때 이미, 한 생의 이면을 어렴풋이 예감했을까.
나는 오래된 흑백필름 속에서, 내 생의 알리바이 하나 찾고 있었다.
신지혜
․서울 출생
․2000년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 2002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현재 미국 뉴저지 거주
- 이전글15호 신작시/장성혜 06.11.20
- 다음글15호 신작시/이안 06.11.0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