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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신작시/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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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본을 들춰보다
우물이 부서진 장롱 문짝으로 덮여 있다 씨암닭 물어 죽여도 지킴이로 칭송 받던 먹구렁이가 마당을 가로질러 텃밭으로 기어간다 들에 나간 식구들 대신 마당 쓸던 옥수수들도 콩깍지 털어내던 소리도 대청마루 너와 깊숙이 흙먼지로 쌓여 있다 풀숲에 넘어진 포돗빛 생채기까지 기어이 찾아내 삭은 서까래 끝에 매달아 놓는 거미줄 깨진 기와 끝에 잦아드는 노을만 바라보고 있다 별똥별 하나 떨어지자 용마루가 지그시 눈을 감는다 그 누구도 이 집에 대하여 입을 대지 않았다 가끔 귀뚜라미 몇 마리 찾아와 이 집 물맛이 그만이었다고 수근거리다 갈 뿐, 늙은 감나무 똬리 틀고 있는 밤만 우물만큼 깊어갔다 낡은 문패 살살 문지르며 문지방에 걸터앉아 있는 달빛
대청마루 건너가는 모습이 할아버지를 닮았다
홍어
삭힌 홍어에서 애인의 냄새가 난다
낡은 신발 때문에 까진 뒤꿈치
퇴근길 텅 빈 지하철에서 남몰래 주무르던
붉은 살 냄새 물씬 풍긴다
초경의 바다에서 바라보던 노을은
항상 사치였다고 틀어막은 울먹거림이
목젖을 치받으며 올라온다
이른 새벽 실려 온 궤짝 같았던
서울에서의 첫날밤
물 좋은 것만 골라 찝쩍대는
낯선 사람들의 손길 피할 재간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북적한 시장판 구석진 곳에
눈요깃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봄비 추적거리다 지친 파장 무렵
처음 그녀와 소주를 마시던 날
굳은살 같은 홍어를 씹으면서
그 냄새로 인해 한 사람을
항아리처럼 껴안는 법을 알았다
환하게 웃으며 방문을 여는
그녀의 브래지어를 풀듯
홍어의 껍질 벗길 때마다
누릿한 바닷물 건너온 냄새가 난다
붉어진 뒤꿈치로 내 마음에다
더 붉은 발자국을 찍는다
이 공
․2004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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