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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초점/장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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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2,707회 작성일 06-11-20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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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용 시의 실존주의와 초현실성


장종권
(시인)


1. 김구용 시와 실존주의의 시대
이상(李箱)의 계보에 속하는 김구용이 李箱과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점은 바로 김구용이 전후 실존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었다는 데서 찾아야만 할 듯하다. 여기서 전후 실존주의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인 ‘사상’으로서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격정’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기실 하나의 실존철학은 존재하지 않고 심각한 차이를 지닌 다양한 철학들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 철학계의 일반적인 학설인 듯하다. 독일의 실존철학, 프랑스의 실존주의, 이탈리아의 실존주의 등은 그 형식과 내용에서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주의가 데카르트적인 코기토의 원리에서가 아니라 인간, 우주, 신과의 삼중 관계를 갖는 ‘주체’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실존주의는 현대인의 ‘소외’라는 위기의식의 소산으로써 언제나 국가적 재난과 함께 출현했다는 점도 실존주의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으로 생각된다. 프리츠 하이네만(Fritz Heinemann)은 실존주의와 관련하여 현대인의 소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소외’라는 표현이 나타내는 사실은 ‘객관적으로는’ 인간의 본질과 그 대상 사이의 다양한 분리와 균열이다. 이 대상은 인간 세계, 혹은 자연, 혹은 헤겔의 객관정신이라는 영역, 곧 예술, 학문, 철학, 혹은 사회에 속할 수도 있다. ‘주관적으로’ 소외라는 표현은 상응하는 평충장해(平衝障害)의 상태, 생소하다는 느낌, 불안감과 관계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소외에 대해 거론하자마자 분명한 해석이 미리 마련되어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해석은 사람에 따라서, 또한 사상가에 따라서 달라지는 어떤 가정에 의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해석에 공통되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곧 근원적 통일과 조화가 불일치와 부조화로 변했다는 신념이다.________________
프리츠 하이네만, 황문수 역, 「문제」, ꡔ실존철학ꡕ, 문예출판사, 제2판, 2002, 17면.


소외는 결국 부조리에 이른다. 소외의 지배하에서는 개인과 집단의 행동은 그 내적 관련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부조리란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알베르 까뮈가 ꡔ시지프스 신화ꡕ에서 요약한 것으로써, 까뮈가 인간의 현상을 환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존재, 목적이 없는 존재로 판정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Arnold P. Hinchliffe, 황동규 역, ꡔ부조리 문학ꡕ, 서울대학교출판부, 1978, 1면 참조.

한국전쟁은 인간소외와 부조리의 극한 상황으로 점철된 국가적 재난이었다. 1950년대의 한국시는 어떤 방식으로든 전쟁이 야기한 문제에 대해 반응해야만 했던 것이 아니었나 한다. 김구용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김구용은 전쟁의 비정성을 ‘나’와 ‘너’의 구별이 없는 상태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던 것 같다.

너는 나와 다르지 않다. 나는 너와 다르지 않다. 너는 지금에 있으며, 나도 지금에 있다. 네가 노래를 부르면 나는 춤을 추었다. 나는 네가 울기에 아팠다.
웬일인가. 우리는 무섭지 않으면 괴롭다. 살아야 하기에 괴롭고 죽을까봐 무섭다. 사람은 사람을 없애버린다. 사람을 사람이 없애버린다. 사람을 없애야 한다던 사람과 사람에게 없어짐을 당하라던 사람도 없어진다.
송장만이 쌓인다. 썩는 냄새가 흩어진다. 지구는 뼈만 남고 흐른다 별처럼 떨어진다 무한으로 조각도 없이……
생각하고 고쳐 생각해도 그럴 리야 있습니까. 한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겁」 전문

인간이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에 대한 고발이 이 시에는 드러나 있다. 부조리한 전쟁터에서 시적 자아는 인간의 존엄이 훼손되는 것에 대해 전율을 느낀다. 이와 같은 상황은 그야말로 ‘가공할 만한 현실’로 보이는데, 시적 자아는 송장만이 쌓여가는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또한 “생각하고 고쳐 생각해도 그럴 리야 있습니까.”라는 부정에는 인간성 상실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한 항의가 숨어 있다.
김구용 시를 논하는 연구자들은 김구용 시의 특징을 논하기 위해 흔히 그의 수사적 기법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는 실존주의의 영향하에 있었던 시인의 시 세계를 논하는 방법으로는 그리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실존주의는 문학에서는 기교로부터의 소외에 대한 반발로 이해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________________
프리츠 하이네만, 앞의 책, 24~26면 참조.
김구용 시를 논하는 데는 그의 기교보다도 그의 태도에 초점을 맞추어볼 필요가 있다. 위에 인용한 「겁」(1951)은 물론 휴머니즘적이다. 그런데 김구용은 전쟁의 비정성에 대한 항의를 위해 “너는 나와 다르지 않다.”라는 말로부터 허두를 꺼내고 있다. 이는 ‘너’와 ‘나’의 인간 존재에 대한 탐색으로 여겨지거니와, 이러한 태도에서 김구용 시의 실존주의적 성격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에서는 한국전쟁을 전후한 김구용의 시에서 전쟁에 대한 김구용의 태도를 살펴봄으로써 그의 시에 실존주의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쟁의 비정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그의 실존적 노력이 다름 아닌 초-현실적 태도로 이어지고 있음을 해명하는 작업 또한 병행할 것이다.

2. 휴머니즘과 결합된 실존주의 시의 양상
전쟁 중에 씌어진 김구용의 시들은 대개 짧은 줄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________________
이것은 전중의 복잡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산문시로밖에 스스로를 소화할 수 없었던 데서 기인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김구용․김종철 대담 「나의 문학, 나의 시 작법」(≪현대문학≫, 1983, 12), 128면을 참조할 것.
그와 같은 경향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그의 시에도 나타나기 때문에, 그 점이 특별히 강조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전쟁 중에 씌어진 그의 시들은 전쟁 이전의 시들과 그 내용 면에서 확연히 구분되는 것 같다. 말하자면 「회고」(1936), 「부여」(1938), 「청류정」(1939), 「고려자기부」(1943) 등 전쟁 이전의 시들에서 보이는 전통 정서가 자취를 감추는 한편 인간의 실존, 인간의 위의에 관한 물음들이 시의 주제의식으로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 이는 전쟁 체험의 절대성을 감안할 때 당연한 결과로도 볼 수 있지만, 1950년대 시인들이 전부 그와 같은 경향을 보이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김구용 시의 한 개성으로도 볼 수 있을 듯하다. 전쟁 중에 씌어진 김구용의 시들은 1950년대의 다른 시인들과 비교하여 볼 때 전장(戰場)의 풍경을 제법 많이 다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전봉건의 시에서처럼 총알이 빗발치는 현장은 아니지만, 김구용의 시에서는 인간이 인간을 죽여야 하는 비정한 전장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나는 죽었다. 또 하나의 나는 나를 弔喪하고 있었다. 눈물은 흘러서 호롱불이 일곱 빛 무지개를 세웠다. 산호뿔 흰 사슴이 그 다리 위로 와서 날개를 쓰러진 내 가슴에 펴며 구구구 울었다. 나는 저만한 거리에서 또 하나의 이러한 나를 보고 있었다.
―「희망」 전문

1951년작인 「희망」은 주검 천지인 전쟁터에서 역설적으로 ‘희망’을 발견하는 시적 자아의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시는 “나는 죽었다.”라는 부조리한 선언으로부터 시작된다. 죽은 사람에게 시점이 있을 리 없으나, 김구용은 죽은 사람의 시점을 빌려 말하려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런데 ‘또 하나의 나’가 ‘나’를 조상(弔喪)한다. 이것은 ‘유체이탈’ 현상을 연상시킨다. 즉 나의 영혼이 나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또 이 시가 유체이탈과 같은 현상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는 것은 이 시의 제목에서도 암시되어 있다. 이 시의 시적 자아는 ‘산호뿔 흰 사슴’이 무지개를 타고 내려오는 초-현실적 비전에서 희망을 본다. 흰 사슴은 그 자체로 상서로운 영물인데, 거기에다가 날개까지 달린 이 세상에는 없는 상상의 동물로 형상화되어 있다. 김구용은 이 상상의 동물을 사슴과 비둘기의 종합을 통해 만들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흰 사슴이 ‘구구구’ 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영물은 평화의 상징으로 볼 여지가 있다. 시적 자아는 ‘평화’에서 희망을 본다. 그런데 ‘평화’는 ‘무지개’를 건너서 온다. ‘무지개’는 ‘내’가 ‘나’를 조상하면서 흘린 눈물이다. 이 점에서 「희망」에 등장하는 ‘나’는 단순하지 않다. 특히 이 시의 마지막 절은 도처에 ‘내’가 존재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전장의 모든 인간이 ‘나’와 같은 실존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김구용은 모든 인간을 ‘나’ 자신으로 여기는 차별 없는 상태에서 희망을 찾고자 했던 셈이 된다. 차별 없는 상태에 이르러 전쟁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너’와 ‘나’의 구분을 부정하고 ‘우리’를 강조하는 시로 「양지」(1951)를 더 거론해 볼 수 있을 듯하다.

누가 흐느껴 우는가. 우리의 아픔임을 알아야 한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으려는가. 서로는 만나야 한다. 우리는 역사책보다도 더한 체험을 하였다. 목숨이 쓰러지는 사람을 밟는다. 바퀴가 죽어가는 사람들 위로 지나간다. 그들은 어쩌다가 죽었는지를 모른다. 그들은 어쩌다가 살았는지를 모른다. 서로가 지옥의 불사조들이었다. 나에게서 너를 찾아야 한다. 정신이 더 해부되기 전에 핏줄을 따라 손이나마 만나야 한다. 거절하는 까닭이 믿어지지 않는다. 鐵들이 왜 불을 뿜는지 아는가. 너의 울음은 서로의 아픔임을 알아야 한다. 시체들만이 만나서 양지에 다정히 누워 있구나.
―「양지」 전문

이 시에서 김구용은 전쟁의 아픔이 ‘나’와 ‘너’ 어느 한쪽의 것이 아니라 ‘서로’의 아픔임을 몇 번의 설의법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시적 자아는 목숨이 쓰러지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는 ‘체험’의 절대성에 입각해서 다소 직설적인 화법을 취한다. 즉 “서로가 지옥의 불사조들이었다.”는 메타포보다도 “나에게서 너를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좀 더 부각되어 보이는 것 같다. 이 시에서도 김구용은 아군․적군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시체들이 양지에 다정하게 누워있다는 말로써 차별 없는 인간애를 강조한다. 시체를 통해 인간의 조건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양지」의 아이러니가 드러나는 듯하다.
한편 「양지」에는 ‘철(鐵)’의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다. ‘불을 뿜는 철’과 같은 표현은 시대적 상황을 대변하는 상투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의 차가운 속성은 전쟁의 비정성을 나타내기에 적합하거니와, ‘철’의 이미지는 「인간기계」(1951)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난다.

마음은 철과 重油로 움직이는 機體 안에 囚禁되다. 공장의 해골들이 핏빛 풍경의 파생점을 흡수하는 眼底에서 암시한다. 제비는 砲口를 스치고 지나 벽을 공간에 뚫으며 자유로이 노래한다. 여자는 골목마다 梅毒의 웃음으로서 웃는다. 다리[橋] 밑으로 숨는 어린 餓鬼의 표정에서 식구들을 생각할 때 우리의 自性은 어느 지점에서나 우리의 것 그러나 잡을 수 없는 제 그림자처럼 잃었다. 시간과 함께 존속하려는 기적의 旗가 바람에 찢겨 펄럭인다. 최후의 승리로, 마침내 命令一下! 精油는 炎熱하고 순환하여, 機軸은 돌아올 수 없는 방향을 전류 지대로 돌린다. 인간 기계들은 잡초의 도시를 지나 살기 위한 죽음으로 정연히 행진한다. 저승의 광명이 닫혀질 눈에 이르기까지 용해하는 암흑 속으로 금속성의 나팔소리도 드높다.
―「인간기계」 전문

김구용은 「인간기계」에서 전쟁에 대한 좀더 비관적인 전망을 드러낸다. 이 시에서 인간의 마음은 기계 안에 수금되어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시적 자아를 둘러싼 세계는 ‘핏빛 풍경’을 대량 생산하는 ‘공장’으로 알레고리화하여 나타난다. 식구들과 함께 살기 위해 매춘을 하는 여성을 보면서 시적 자아는 스스로에게 ‘자성’을 요구하지만, 시적 자아를 비롯한 세계는 이미 ‘자성’을 그림자처럼 잃어버렸다. 전쟁은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장은 염열하고 순환하여, 기축은 돌아올 수 없는 방향을 전류 지대로 돌린다.”라고 하는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인간은 소외되어 있다. 거기에는 인간기계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살기 위한 죽음’이라는 부조리만이 전쟁의 결과로써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인간기계」의 묵시록적인 비전은 그대로 「腦炎」(1952)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나름대로 그 의미를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희망」, 「양지」 등에 드러난 약간의 희망은 「인간기계」를 거치면서 점점 옅어진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와 같은 절망은 「腦炎」에 이르러 다분히 완성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________________
「腦炎」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김윤식 교수의 「「腦炎」에 이른 길」(ꡔ시와 시학ꡕ, 2000, 가을)을 참고할 것.


인류의 智腦는 균에 의하여 정복되었다. 균들은 그들의 主調를 보이지 않는 舞踊과 소리 없는 歡笑로 교차하며 精을 이루었다. 균들의 신, 균들이 발생한 사람 몸은 가속도로 백골이 되다. 감미로운 腐肉도 공기로 변하고, 枯血마저 맑은 빗발이 되어 폐허를 씻고, 매몰된 문화의 파편을 축일 때 병균은 멸망할 것이다. 언제인가 사람은 頭骨을 집어들고 아내에게 말하겠지. 보라, 이것은 우리가 古文書에서 흔히 읽을 수 있는 그러한 뇌염으로 사망한 자는 아니다. 구멍이 여기에 증거로 있다. 이것은 彈穴이다. 사람이 사람의 智腦에 의하여 사람을 서로 죽인 생명의 투쟁이었다. 炎菌은 그 腐腦에서 퍼졌을 것이라고. 순수한 빛의 영역에서 검붉은 파장을 일으키며 헤엄을 치는 세균들은 그들 각자의 순수한 빛을 완성하려는 志向이었다. 생명이 생존하는 생명을 침식하며 번식하고 있다. 싸움은 熱麗한 승리의 斑旗를 펴는 동시, 그것은 그대로 腐爛하는 형국의 壽衣였다.
―「腦炎」 중에서

「뇌염」은 전쟁에 휩쓸린 세계에 대한 문명 비판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기계」에 이어져 있다. 이 시의 시적 자아는 사람이 ‘사람의 지뇌에 의하여’ 사람을 죽이게 된 원인을 ‘뇌염균’에서 찾고 있다. 그러니까 ‘뇌염균’은 전쟁의 광기에 대한 메타포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전쟁의 광기가 ‘지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분석이 특이하다. ‘광기’는 이성의 상실로도 바꾸어 말할 수 있을 듯한데, 김구용은 전쟁의 광기가 ‘지뇌’, 즉 ‘마음이 없는 이성(理性)’에 의해 추동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와 같은 반이성주의, 혹은 ‘마음’의 강조 역시 「인간기계」의 “마음은 철과 중유로 움직이는 기체 안에 수금되다.”에 이어져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뇌염」이 김구용의 시 세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은 이상의 맥락과는 다소 다른 관점에서이다. 「뇌염」은 「희망」, 「양지」, 「인간기계」보다 난해하다. 그것은 얼마간 한자 조어 때문으로 여겨진다. ‘지뇌(智腦)’라든지 ‘부란(腐爛)’과 같은 한자어는 일반적인 한자 용례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이 시 마지막 문장의 메타포는 한자어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싸움을 통해 얻은 뜨겁고 화려한 승리의 깃발은 그 자체로 얼룩진 것[반기(斑旗)]인 동시에 썩어 없어질 죽음의 옷이라는 것이 마지막 문장의 의미일 것이다. 김구용은 전쟁의 승리마저도 결국 죄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죽음으로 이어진 것일 따름임을 비판한 셈이다. 그런데 김구용의 전쟁 비판은 독자의 마음에 호소한다기보다는 독자의 ‘지뇌’에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난해한 한자 조어의 사용과 메타포의 중첩이 바로 그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뇌염」의 중요성이 있는데, 김구용은 ‘마음이 수금된’, 뇌염균에 의하여 정복된 ‘지뇌’의 현실에 대면하는 태도로써 그와 같은 방법을 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김구용은 난해한 현실을 형상화하기 위해 스스로 훼손된 방식을 취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김구용이 한국전쟁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방식은 전중과 전후에 다소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전후 김구용의 시에는 전쟁에 대한 역사적 의미 부여에의 의욕이 자주 발견된다. 「화관」, 「항상 未知에만」(1958), 「절단된 허리」(1960) 등이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절단된 허리」에서 김구용은 “어머니들은 어둠과 피로 뒤덮인/도덕의 葬送을 바라본다./겨울 가로수는 獻詞하였다.//아픔이 상처를 안다면/끊어진 허리에 기도하라./괴로움은 이르기 전에 사랑이었다.”라는 비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김구용 시에 대한 전쟁의 영향은 비단 역사의식을 수반한 시작으로만 부각되었던 것은 아니다. 전후 김구용 시의 가장 큰 특징은 시의 장형화와 함께 분열증적 양상의 시적 개입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한데, 여기에도 한국전쟁으로 인해 물질적․정신적으로 피폐해진 현실이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3. 실존적 각성과 초-현실적 결말 처리 방식
전후의 김구용 시는 점점 길어지는 경향을 보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김구용은 이 점에 대해 시를 압축적으로 쓰지 못한 것은 자신의 한계라고 겸양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나 김구용 시의 장형화는 전후의 각박한 현실에 대한 시인의 재현 욕구가 강하게 반영된 결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김구용의 「꿈의 이상」(1958)에는 “목욕탕, 관청, 형무소, 군부, 아편굴, 외국기관, 은행, 불량소년, 사기배, 매육녀 등 도시 내부에서도 태양은 시간을 어기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손금 위를 걷고 있었다. 그는 이성의 현미경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기계를, 꼬무락거리는 자기 자신을 확대시켰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김구용은 「피곤」(1950)에서도 “과일집, 이발관, 구두점, 극장, 다방, 은행, 골동상, 포목전,(……)” 하는 식의 열거법을 사용한 바 있거니와, 「꿈의 이상」의 나열은 「피곤」에 비해 더욱 의식적으로 어두운 도시 풍경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피곤」의 열거법이 시적 자아의 보행에 따른 풍경의 변화와 관련이 있는 반면, 「꿈의 이상」의 그것은 시적 자아의 보행에 따른 풍경 변화로만 치부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물론 이것은 E. H. 곰브리치(E. H. Gombrich)가 ‘기타 등등의 원리(etc. principle)’라고 부른 재현 방식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즉 우리가 현실에서 지니기 마련인 몇몇 개의 나열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둘러싼 현실 전체를 그대로 재현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________________
E. H. 곰브리치, 차미례 역, 「환영의 조건」, ꡔ예술과 환영ꡕ, 열화당, 2003, 212~214면 참조.
김구용은 ‘관청’, ‘형무소’, ‘군부’와 ‘불량소년’, ‘사기배’, ‘매육녀’를 같은 문장 내에서 나열하고 있다. 이를 통해 김구용은 그들이 모두 서로 모종의 관련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암시함으로써 전후의 현실을 제도에 의해 악이 양산되고 또 악이 제도를 지탱하는 악순환의 연쇄로 묘사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꿈의 이상」의 주인공인 ‘그’는 그와 같은 현실 앞에서 자기 분석적인 포즈를 취한다. ‘그’가 ‘이성의 현미경’으로 자기 자신을 분석하려 하는 것은 이성이 통용되지 않는 전후의 각박한 현실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지식인의 모습을 표상하는 것으로 이해됨직하다. 이와 같은 장면은 자의식 과잉의 이상 시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실존주의․부조리파의 절망적 포즈와 좀더 근접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스스로를 현미경 대물렌즈 아래에서 ‘꼬무락거리는’ 세균과 같은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꿈의 이상」은 여러 모로 전후 김구용 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시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시에 등장하는 ‘그’는 자신의 실존을 찾기 위해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의 서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알 수 없다. 그것이 나의 모습이다. 무엇의 노예인가. 그럼 주인은 누구일까. 누가 어떠한 증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나 이외의 신을 인정하여서는 안 된다.” 신을 부정하면서까지 ‘그’가 추구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꿈의 이상」은 결국 ‘나 자신’을 찾아 나서는 긴 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의 결미에서 김구용은 다음과 같은 장면에 이르고 있다.

“세 여인 중의 누구인가가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날은 둘이서 오렌지를 먹기로 하자. 그리고 구혼하자.” 그것은 미신도 과학도 아닌 심경이었다. 잊지 못했던 흰 옷차림의 여자는 염두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버리면 버릴수록 몰랐던 것이 나타나는 듯하였다. 그들은 봄․여름․가을․겨울처럼 여러 가지로 회전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변하지 않는 실상을 그들에서 보았다. 그는 전부터 불변에 의해서 동작하던 그대로였다. 몸과 마음은 책상의 한 오렌지였다. 그는 새벽을 향해 “이유는 원래부터 없다”고 발성하였다.
―「꿈의 이상」 중에서

여기서 세 여인이란 ‘미혼여성 좌담회’에서 우연히 만난 여의사, 여교사, 여대생을 말한다. 이 세 여인과 ‘그’는 연애에 대해 토론하게 된다. 그 토론은 진정한 인간관계에 대한 모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토론을 계기로 세 여인과 ‘그’는 번갈아가며 데이트를 하는 등 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세 여인 중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터놓지 못하는데, 그것은 ‘그’가 이미 ‘흰 옷차림의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흰 옷차림의 여자는 ‘그’가 실직자로 전전할 때 굶주린 ‘그’에게 오렌지를 선물한 여자였다. ‘그’는 가게에서 오렌지를 훔치다가 주인에게 들켰는데, 흰 옷차림의 여인이 그를 대신하여 오렌지 값을 물어주었던 것이다. ‘그’는 흰 옷차림의 여자를 관세음보살과 동일시한다. ‘그’는 흰 옷차림의 여자를 찾아 헤맨다. 그것은 진정한 인간관계, ‘사랑’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흰 옷차림 여자의 자선은 ‘이유 없는 행위’일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 차츰 알아 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세 여인의 마음에 대해서도 그 나름의 진정함이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 순간 ‘그’는, ‘흰 옷차림의 여자’는 ‘꿈’일 따름이고 ‘세 여인’은 ‘현실’이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흰 옷차림의 여자를 좇는 행위는 그녀의 관음보살을 연상하게 하는 사랑, 자비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그와 같은 관념에 얽매여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관계는 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관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가 “이유는 원래부터 없다”고 발성하는 것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이유’에 의해 사람을 만나거나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한 깨달음을 발설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이로써 「꿈의 이상」의 줄거리에 대해 조금 살펴본 셈이다. 시를 감상하는 자리에서 시의 줄거리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사뭇 생소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구용의 시는 자주 소설적 양상을 띠기 때문에 이와 같은 작업을 피하기 어려운 것 같다. 김구용 시가 소설적 양상을 띤다는 것은 등장인물이 있고 스토리가 존재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사건이 있고 시가 사건의 해결을 향해 전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면밀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김구용의 소설적 양상을 띠는 장시들의 결말은 자주 어떤 ‘깨달음’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김구용은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부조리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으로 설정해 놓음으로써 시를 지리하고 난해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시가 소설적 양상을 띤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시에 흥미를 주는 것일 수도 있을 텐데, 김구용의 시들은 소설적 재미와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었다. 그것은 김구용이 소설의 한 요소로써 사건 자체보다도 주인공의 각성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시가 관념적으로 흐른 데도 한 원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깨달음’에 이르기 직전에 김구용 시의 주인공들이 겪는 혼란의 강도(强度)이다. 김구용 시의 소설적 양상은 소설 일반의 사건 해결 방식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김구용 장시에서 사건의 해결은 주인공의 내적 각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 같다. 그 내적 각성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김구용은 그의 주인공들을 극도의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꿈의 이상」의 주인공은 병에 걸리기까지 한다. “그는 마침내 발병하였다. 문은 닫히자 벽으로 변하였던 것이다. 정신이 비바람에 비둘기처럼 시달린 결과였다.”라는 구절은 그 적절한 예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김구용의 장시에서 극도의 혼란, 극도의 회의, 극도의 긴장감 없이 주인공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김구용 시의 주인공들은 자주 ‘자기 내면에 수금된 존재’로서 자의식 과잉인 데다가 자폐증적인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분열증으로도 비쳐지는 면이 있다.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김구용의 시로 「消印」(1957)을 거론하는 데 주저할 필요는 없으리라고 본다. 이 시의 주인공 ‘나’는 늦은 시간 밤 전차에서 차표 한 장 때문에 운전사와 실랑이를 벌이는 녹빛 외투의 여자 대신 차삯을 치러준다. 녹빛 외투의 여자는 ‘내’가 목적지에서 하차하자 따라 내렸고 차삯을 갚겠다며 연락처를 달라고 한다. ‘나’는 이름과 직장 주소를 적은 쪽지를 그녀에게 건넨다. 그런데 이 쪽지로 인해 ‘나’는 그날밤 돈암교 근처에서 피살당한 녹빛 외투 여자의 살해 용의자로 체포된다. ‘나’는 수금된 채 취조를 받는다. ‘나’는 취조관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취조관은 이를 묵살한다. ‘나’는 점차 ‘내’가 진짜 녹빛 외투의 여자를 죽였는지도 모른다는 혼란에 휩싸인다. 그것은 이 시의 서두 부분에서 시적 자아가 ‘거미’를 죽이는 장면과 결부되면서 더욱 심화되는 것 같다. 이 시의 주인공은 감옥에 수금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내향적인 데로 흐를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수금’ 모티프는 부조리한 세계 속에 구속․감금당한 실존의식에 대한 표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________________
홍신선, 「시의 논리 현실의 논리」, ꡔ문학과창작ꡕ, 2002, 2, 142면 참조.
주인공 ‘내’가 수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수금 상태는 일종의 한계 상황으로써 ‘나’의 실존을 짓누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와 같은 한계 상황이 아니라면 ‘내’가 ‘나’의 실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다시 말해 「꿈의 이상」에서 주인공의 깨달음은 주인공의 수금, 주인공의 한계 상황에서 궁극적으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녹빛 외투 여자는 부활하였다. 그녀는 웃음의 가면을 쓴 범인과 손을 서로 맞잡고 춤을 추었다. 나는 “그들은 둘이 아니라”고 속삭이었다. 운전수는 半獸神처럼 고장난 전차를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다. 바다가 한편으로 보이는 그늘에 여자의 고무신들이 하숙집 소년에 의해서 어떤 것은 꽃잎으로, 신라 曲玉으로, 나비로, 반달로, 거미로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수목 뒤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흩어진 것들은 ‘착각’이 아니었다. 한 여인의 나체가 문득 불 속에서 실내로 들어왔다. “나는 당신만을 사랑해요.” ‘나의 인형’은 한 번도 말한 일이 없는 소리를 비로소 하였다. “내가 바로 너다” 하고 대답하자 눈물이 웬일인지 흘러내렸다. 녹빛 외투 여자와 운전수와 ‘나의 인형’과 살인범이 종렬로 직립하여, 보기에는 한몸 같으나 각각 얼굴을 좌우로 내놓고 ‘同’ ‘異’를 일시에 구성하였다. 취조관의 지휘를 받고 경관과 의사와 중절모와 간호부와 택시 운전수와 다방 레지들이 겹겹으로 둘러앉아 나에 대한 ‘찬송’을 연주하고 있었다. ‘고오’, ‘스톱’의 삼색 신호등이 비치자 그들은 나를 축복하는 천사로 화하였다. 나는 ‘본질’이었다. 동시에 모든 ‘因子’였다. 나는 그들과의 ‘전체’였다. ‘세계’였다. 그들은 동시에 인간 심령 현상론처럼 꺼져버렸다. 날이 새자, 감방 바깥 복도의 석유등 불은 나의 출발을 고하듯 꺼졌다. 강간범은, 끌려나가는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나는 남고 하나는 떠나건만 우리는 ‘同形’이었다. 나는 비로소 모든 애정을 죽인 살인자가 되어 강간범에게 미소를 주었다. 나는 녹빛 외투 여자가 현실로 죽기 전에 이미 녹빛 외투 여자를 마음으로 죽였는지 모른다. 흰눈이 바라던 외계에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볼 때 橫道, 曲道할 것 없이 거리를 걷는다거나 차를 몰며 왕래하는 데 불과하지만 누구나 각기 정면을 향하고 가듯이 자동차를 탄 나는 흰눈이 쏟아지는 무한 대로에 호위되어 주검에 쫓기며 질주하였다. 변호사를 댈 만한 돈도 없으려니와 벌써 적용에 의해서 자격이 상실되었는지 모른다. 사실 이상의 변명은 예심 판사 앞에서 할 수 없을 것이다. 앞날은 어디까지나 미지수였다. 이제는 존재와 공간의 일치에서 평화로운 호흡을 찾을 수밖에 없다. 철창 속에서 확대될 세월의 영역이 나를 기다린다면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에게 필요한 생명은 ‘무필요’였다. 그러면 나는 내포할 뿐, 무엇도 나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나는 녹빛 외투 여자가 무엇인지 모른다. 영원히 모른다. 우연의 역할을 그녀와 마찬가지로 한다 하여, 욕하거나 동정할 수는 없다. “囚人은 그날그날을 노동으로 소일하며, 철창 너머 구름과 벗하며, 붉은 벽돌담을 등지고 서 있는 수목과 대화하며, 밤이면 등불과 별들을 기다리며, 저 눈바람에서 음악을 듣는다면 내 지상의 안정은 아무나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消印」 중에서

인용한 「消印」의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 ‘나’의 내적 갈등, 즉 ‘내’가 녹빛 외투의 여자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혼란스러운 감정은 사라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주인공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사라지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은 이 시에서 유감스럽게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주인공의 갑작스러운 깨달음에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의 주인공은 인용한 부분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꿈’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김구용은 ‘꿈’ 장면에 이 시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심지어 ‘거미’나 ‘나비’와 같은 상징들도 다시 등장시키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재등장은 사건을 정리하는 차원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김구용은 이 한편의 미스테리가 지닌 비밀을 ‘꿈’이라는 환타지를 통해 더욱 신비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시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손에 손을 잡고 원무(圓舞)를 추는 장면을 통해 김구용은 ‘내’가 본질이자 세계이며 각각의 인자(因子)이자 부분이기도 한 ‘무차별의 사상’이라고 부를 법한 깨달음에 이르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사유 체계에서 ‘거미’를 죽인 것이나 ‘녹빛 외투의 여자’를 죽인 것은 결코 다른 행위라고 볼 수 없다. 기실 이와 같은 깨달음은 보편적 인간의 존재 조건에 대한 깨달음으로 볼 수 있다. 김구용은 살인 사건도 수금도 모두 하나의 인간 존재 조건에 대한 ‘내포’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 이 시의 주인공의 입을 통해 김구용은 “그러면 나는 내포할 뿐, 무엇도 나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드러낸다.
「消印」의 주인공 ‘나’는 꿈을 통해 자신의 존재 조건, 부조리한 세계 속에 수금된 실존에 대해 깨닫게 됨으로써 수금 상태의 위협으로부터 오히려 빠져나오는 계기를 마련한다. 즉 그는 “수인은 그날그날을 노동으로 소일하며, 철창 너머 구름과 벗하며, 붉은 벽돌담을 등지고 서 있는 수목과 대화하며, 밤이면 등불과 별들을 기다리며, 저 눈바람 속에서 음악을 듣는다면 내 지상의 안정은 아무나 빼앗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믿게 된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인간의 존재 조건으로부터 빠져나올 수는 없으나[수금 상태의 지속], 그 조건이 ‘나’의 안정을 더 이상 위협할 수 없다는 말이 되겠다. 주인공의 깨달음을 통해 인간 실존의 한계 상황을 넘어서는 그와 같은 「消印」의 결미부 처리 방식은 1950년대 김구용의 장시들이 얼마간 공유하고 있는 시작(詩作)의 공식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여기에서 「꿈의 이상」의 ‘그’ 역시 흰 옷차림의 여자가 거울 속에서 관음보살로 현현하는 ‘꿈’을 통해 “이유는 원래부터 없었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을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김구용 장시의 초-현실적 결말 처리 방식은 김구용 시가 소설적 양상을 띠면서도 개연성보다는 시적 자아의 각성을 강조함으로써 시로서의 장르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장치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전후의 물질적․정신적 피폐 상황, 인간 실존의 한계 상황으로부터의 초월이라는 주제의식 역시 ‘초-현실적 결말 처리’를 통해 구현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김구용 장시의 결말 처리 방식은 그의 시 세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4. 김구용 장시의 장르적 정체성 문제
1950년대 김구용의 장시는 시로서의 장르적 정체성 문제를 불러일으킬 소지를 다분히 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유종호가 「消印」을 읽고 “산문에의 무조건적 항복”(「不毛의 圖式」)이라고 평가한 데에는 이와 같은 문제도 고려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김구용의 장시에는 두 명 이상의 등장인물이 있고 사건이 있으며 시상의 전개가 사건의 해결 과정과 일치하는 양상을 띠었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김구용 장시를 구성하는 사건들은 추리 소설적이거나 부조리 소설적인 성격을 띠었는데, 이는 전후 실존주의 소설의 유행으로부터 얼마간 영향을 받은 현상으로 보인다.
물론 김구용 장시는 그 언어 면에서 외연(外延)보다는 내포(內包)를 중시하고 메타포와 상징이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으므로, 그것을 곧바로 산문과 동일시하는 것은 설득력이 별로 없다. 그런데 김구용 장시의 장르적 정체성은 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는 문제로 생각된다. 그것은 시의 개성이라는 관점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김구용의 장시는 당대 시단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전후시가 전반적으로 길어진 측면이 없지 않았지만, 김구용만큼 극단적으로 시를 길게 쓴 경우도 드물지 않나 싶다. 전봉건 역시 장시를 많이 쓴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성격상 김구용의 산문시와는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전봉건의 장시는 전장을 다루기는 했지만, 유별나게 산문적이거나 소설적 양상이 개입되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김구용의 장시는 전후의 피폐한 현실에 대한 구체적 재현 욕망, 산문 정신으로부터 출발해서 종국에는 그와 같은 현실의 초월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시의 영역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어느 면에서 그와 같은 김구용 장시의 개성은 관념적이고 부조리하게 비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전후 현실과의 대응 과정에서 취해진 시인의 태도라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취급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고 본다.



장종권
․198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아산호 가는 길> 등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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