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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초점/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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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2,467회 작성일 06-11-20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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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분단 영화는 무엇인가?


강성률
(영화평론가)


1. 질곡의 현대사와 분단 영화
한국 현대사는 질곡의 역사였다. 식민지로 시작된 조선의 근․현대사는 외세에 의한 해방, 이후의 분단과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을 겪으면서 크나큰 상처를 입었으며, 그 후, 제3세계가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남한에서는) 쿠데타에 의한 군부독재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영화는 이런 왜곡된 시기에 조선에 도래했는데,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했다. 일제에 의한 식민 지배가 시작되려는 순간 영화는 조선에 들어왔으며, 해방 후에도 독재와 반공의 틈바구니 속에서 잔뜩 눈치 보며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고유한 한국의 미의식과 서양의 양식이 절묘하게 결합하기보다는 신파(新派)를 비롯한 외세의 강력한 영향과 자국의 검열로 인해 제대로 된 문화로 성장하지 못했다. 한국 영화사의 불행은 이런 현대사의 질곡과 그 궤를 같이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상황이 아무리 가혹하다고 하더라도 ‘한국’영화 속에는 굴곡된 한국 현대사의 상처가 녹아 있다. 적어도 그것을 감싸려는 애달픈 시선이 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한국영화를 연구할 때 가장 주의 깊게 바라봐야 할 분야가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한국영화 속에는, 어떤 형태로든, 백 년의 질곡 동안 함께 해온 슬픔과 기쁨이 녹아있는 것이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큰 상처를 남긴 것은 무엇일까?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개는 일제의 의한 지배와 분단(과 한국전쟁)을 들 것이다. 그런데 일제에 의한 지배는 외세에 의한 강점이므로, 아무래도 동족상잔의 비극인 분단과 한국 전쟁보다는 그 상처가 적을 수 있다. 당장 우리(남한)를 보더라도, 일본과는 수교를 맺어 자유롭게 오가지만, 북한은 여전히 반국가 단체이며 왕래는커녕 교류도 여의치 않은 사정 아닌가. 해방과 전쟁 이후 남북이 공히 민족주의에 기댄 독재로 갈 수 있었던 것도 그 일차적 원인은 분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 독재가 가능하고 박정희의 쿠데타와 군부독재가 가능했던 이유도 따지고 보면 분단이라는 준(準)전시 체제 때문이었다. 근대사에서 식민지를 겪지 않은 제3세계는 그리 많지 않지만, 우리처럼 식민에 이어 분단과 전쟁을 겪은 나라는 극히 드물다. 한국 현대사만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눈 여겨봐야 할 분야도 바로 분단을 다룬 영화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분단이 민족에 끼친 영향, 그것이 어떻게 영화로 드러나는지, 그것이 시기에 따라 어떻게 변해 왔는지 알아보는 것은 분단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을, 무엇보다 지배자의 의식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분단 영화를 보는 것은 우리의 과거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며, 동시에 현재를 보는 것이며, 또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분단된 이 시대의 상처가 어떤 식으로 영화에 드러났는지, 그것이 지금까지 어떻게 남아있는지 살펴봄으로써 미래의 통일을 준비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분단 영화를 다루는 것은 바로 이런 중요성 때문이다. 정말이지 분단 영화 연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2. 분단이 초래한 모든 문제는 분단 영화가 된다
글을 시작하면서 먼저 분단 영화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타당한 순서일 것 같다. 모든 논의의 시작은 개념 정의를 명확하게 하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던가. 그런데 한국 영화학계에서는 분단 영화라는 개념은 아직 생소하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별로 진척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필자는 상대적으로 많은 연구가 되어 있는 문학계에 기대고자 한다. 이는 무분별한 개념의 도용이 아니라 문학 연구의 성과를 차용하겠다는 것이다. 1970년대 이후 민족문학론에서 계속적으로 등장했던 분단 의식을 토대로 한 분단 문학의 연구는 민중의 시대라고 할 수 있었던 1980년대에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그 연구 성과를 높이 쌓아왔다.
분단 문학에 대한 정의는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는 일치를 보고 있는 듯하다. 평론가 임헌영은 “8․15광복 뒤 분단 시기에 우리 민족이 겪는 모든 갈등과 고뇌를 극복하고자 올바른 민족의식에 입각해서 창조하는 일체의 문학 행위”로 분단 문학을 규정함으로써, 분단으로 인해 일어나는 민족의 갈등과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문학을 분단 문학으로 보았다. 즉, 남북 분단이 일어난 원인, 분단으로 인한 상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다룬 모든 문학을 분단 문학으로 총칭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분단 문학의 정의는 대개 이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일부에서는 분단 문학과 분단 극복 문학을 따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이는 개념을 세분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분단으로 인한 모든 문제를 다룬 문학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하여 필자는 이 글에서 분단 영화를 규정할 때에도 “해방 이후 분단 시기에 우리 민족이 겪는 모든 갈등과 고뇌를 올바른 민족의식에 입각해서 창조하는 일체의 영화 행위”로 규정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 규정에 따르면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반공 영화 때문이다. 반공 영화를 분단 영화로 볼 것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보는 이(특히 반공주의자)에 따라 반공 영화 역시 분단 시기의 민족의 갈등과 고뇌를 올바른 민족의식에 입각해서 창조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분단 영화는 분단을 극복하려는 올바른 민족의식에 기원을 둔 영화가 되어야 함으로, 반공 영화는 분단 영화라고 할 수는 없다. 많은 반공 영화는 분단 문제를 냉철하게 다루기보다는 북한보다 우수한 체제를 선전하는 수단에 불과하며, 제작자에게는 외화수입쿼터를 따서 쉽게 돈을 버는 전략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영화들은 무엇보다도 그 시대 관객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때문에 이런 영화를 두고 분단 영화의 한 분야라고 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필자는 반공 영화 역시 분단 영화 범주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 역시 분단이 불러온 문제이기 때문에, 즉 체제 대결 속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영화이기 때문에, 아니, 오히려 반공 영화가 분단의 한 측면을 증거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내용 전개나 캐릭터 창조에 무리가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 분단 영화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요약하자면, 분단 영화는 “해방 이후 분단 시기에 우리 민족이 겪는 모든 갈등과 고뇌를 올바른 민족의식에 입각해서 창조하는 일체의 영화 행위”로 규정하지만, 반공 영화는 이런 규정에서 좀 벗어나더라도 넓은 의미로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분단 문학의 연구로 돌아가 보자. 분단 문학 연구는 개념 정의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세대간의 문제를 거론한다. 즉 분단 시대를 살았던 세대의 특징에 따라 그들 문학의 특성까지도 세분했다는 것이다. 흔히 분단을 경험한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로 세분하는데, 이를 좀더 자세히 논하자면 다음과 같다.

성인으로서 그 시대를 겪은 세대(제1 세대), 어린 아이로서 그 시대를 겪은 세대(제2 세대), 6․25가 끝난 후에 태어나 전연 그 시대의 경험이 없는 세대(제3 세대) 등 세 부류의 세대가 뚜렷하게 갈리는 것이다. 이를 조금 더 세분하면, 다 같이 성인으로서 그 시대를 체험한 집단(제1 세대) 가운데서도 그때 이미 완숙한 30대 이상의 나이에 도달해 있었던 부류와 그 아래의 부류가 나뉘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이동하, ꡔ문학의 길, 삶의 길ꡕ(문학과지성사, 1987), p.52.

영화 연구에서도 위와 같은 세대 의식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 먼저 연구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것이 매우 복잡하게 얽히는데, 그것은 전쟁을 겪든 아니든 그들이 한국전쟁을 다루는 데 있어서 많은 부분 원작 소설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상기해야 한다. 때문에 감독의 경험이 아니라 원작자의 경험이 많이 묻어난다. 물론 이를 두고 원작자의 분단 의식을 감독이 자기 식으로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체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단 영화가 원작의 힘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런 점에서 원작과 영화에 나타난 분단의식을 원작자의 작가론과 감독의 작가론으로 각자 연구한 후 두 예술가의 차이점을 비교 연구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다. 이렇게 분단 영화 연구는 많은 숙제를 안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전쟁을 겪은 감독의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지독한 검열 때문에 제대로 그리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가령 임권택의 <낙동강은 흐르는가>나 <증언>은 영화진흥공사에서 만든 국책 반공 영화였다. 이런 영화에서, 전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기는 무척이나 어렵다. 때문에 1980년대 말까지 분단 상황을 다루는 영화들은 정부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실정이었다. 영화라는 매체가 다른 매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중적이라는 점 때문에 유난히 검열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반공을 국시처럼 여겼던 독재 정권에서 전쟁을 다룬 영화가 반공영화의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처럼 세대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좀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조심스럽게’ 감독의 세대간의 문제도 다루고자 한다.
3. 시대 변화에 따른 네 편의 분단 영화, 우리 의식의 변화
어떤 글을 쓸 때 텍스트의 선정은 매우 중요하다. 텍스트 선정에서 이미 글의 성격이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텍스트 선정이 영화 내용을 이미 포괄하기도 한다. 때문에 분단 영화를 다루는 본고 역시 수많은 텍스트 가운데 분단 영화에 맞는 주제를 다룬 영화를 찾느라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분단 영화에는 분단에 대한 인식, 즉 그 원인과 변화 양상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하고, 분단으로 인한 민족의 비극이 드러나야 하며, 무엇보다도 분단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보여야 한다. 가급적 이런 요소를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시대적 변천사까지 고려해서 텍스트를 선정했다.
필자는 선택한 텍스트는 <피아골>(이강천, 1955), <오발탄>(유현목, 1961), <길소뜸>(임권택, 1985), <공동경비구역 JSA>(박찬욱, 2000) 등이다. 이 영화들은 전쟁의 실상을 보여주기도 하고, 전쟁의 폐해로 인해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며, 이별한 지 30년이 지난 이산가족의 아픔을 냉철히 응시하기도 하고, 분단 5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북한군을 따뜻한 인간으로 그리기도 한다. 본고에서 필자는 전쟁 직후인 1955년에서부터 전쟁 50년이 지난 2000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기의 영화를 통해 분단으로 인한 우리의 모습을, 그런 영화를 지켜보는 우리의 의식을 살펴보고자 했다.
먼저 <피아골>을 보기로 하자. 영화학계에서 <피아골>에 대한 평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 원로 평론가 김종원은 이 영화를 두고 “피상적이고 관념적이기 쉬운 분단 영화에 대한 설득력 있는 사실성을 부여함으로써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영화라고 했는데, 이는 현 평론계의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한국전쟁을 빨치산의 시각에서 다룬 거의 최초의 극영화이기 때문이다. 휴전이 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아직도 빨치산이 지리산에 잔재해 있던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로서, 이후 만들어진 분단 영화, 그 중에서도 반공영화에 나타난 인민군의 형상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영화이다. 즉 1960년대 이후에 등장한 분단 영화는, 이미 빨치산에 대한 재현의 컨벤션을 유지하고 있었음에 반해 195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피아골>은 아직도 빨치산에 대한 형상화가 굳어지지 않은 때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후 제작된 영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물론 그만큼 리얼리즘 측면에서 많은 논란이 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피아골>은 1954년 봄에 제작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하여 가을에 촬영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가을, 지리산 공비 토벌이 거의 끝날 무렵 개봉되었다. 이 영화의 소재를 제안한 이는 당시 전북 도경의 김종환 공보주임이었는데, 촬영 당시 전북도경과 내무부 치안국에서는 총기류를 지원해주는 등 시종일관 협조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당시 이 영화를 두고 설전이 오갔다는 것이다. 당시 국방부 정훈실에서는 이 영화를 반공 영화로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대한민국에는 군대도 경찰도 없는 나라인 것 같이 묘사된 점, 다시 말해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은 전원 빨치산이고 토벌대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따라서 토벌대의 활약상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둘째, 빨치산 공비의 생태가 지나치게 실감적으로 그려진 것이 선전성의 역효과를 가져온다. 셋째, 빨치산을 영웅화하였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나치게 단선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러나 당시에는 이 지적 때문에 마지막 부분에 태극기 장면을 넣는 등 부분적으로 삭제와 재편집을 해야 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피아골>은 지리산에 머무는 빨치산의 모습을 그린 영화이다. 전쟁은 끝났는데 북이 내려올 기미가 없는, 그렇지만 토벌은 점점 다가오는 매우 절망적인 상황이 그들이 처한 현실이다. 보급 투쟁을 간 마을에서 다른 대원의 어머니를 죽이고, 그걸 슬퍼하는 대원마저 죽이며, 여기서 한발 더 나가 토벌대의 공습을 피해 온 여대원을 겁탈해서 죽이는 악랄한 빨치산의 모습을 그렸다. 물론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지식인 출신의 김철수(김진규 扮)와 그를 연모하는 여 간부 애란(노경희 扮)을 그리긴 했지만, 김철수와 애란은 자수하러 내려오다가 김철수는 죽고 애란만 자수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맺는다. 결국 이 영화는 반공 영화가 되었다. 이것은 반공을 이념적으로 선전하는 영화라는 것이며, 당시 민족의 현실을 제대로 그리지 못한 영화라는 의미이다. 이 영화 속에는 빨치산의 생활을 현실과 비슷하게 표현하려 했거나 또는 지식인 빨치산, 고뇌하는 빨치산을 그림으로써 리얼리즘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 영화는 빨치산을 지나치게 잔혹하고 동물적인 광기의 집단으로 그리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함으로써 객관적인 시선의 균형을 잃어버렸다. 당시 시대적 상황이 빨치산을 제대로 그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현실이라는 점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안타까운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산으로 들어가서까지 이념을 위해 투쟁해야 했던 이들의 목소리는 <남부군>이 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다음으로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을 보기로 하자. 유현목이 만든 문예영화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제는 “신과 인간의 구원 문제”(<순교자> <사람의 아들>), “현실에 대한 지성적 해석, 영상적 표현”(<오발탄> <김약국의 딸들> <잉여인간> <막차로 온 손님>), 이념의 문제(<불꽃> <카인의 후예> <장마>) 등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러한 분류의 기준을 없애면서 모든 영화에 교집합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분단 문제로 인한 상처, 그 상처로 인한 고통일 것이다. 분단이 만들어 놓은 고통은 한반도의 반세기를 암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그 기간 동안은 누구도 그런 상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것은 유난히 예민하게 현실에 반응하는 유현목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떨칠 수 없는 책무와도 연관되리라.
유현목에게 있어 분단 의식은 <오발탄>(1960), <순교자>(1965), <카인의 후예>(1968), <불꽃>(1975), <장마>(1979) 등에서 주로 나타난다. 물론 그의 문예영화를 제외한 다른 영화, 특히 반공 영화에서도 나타나지만, 그것은 치열한 작가의식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외화수입쿼터를 따기 위한 수단이거나 반공 영화상 수상을 위한 시대적 흐름의 산물로 봐야 하므로 제외하기로 하자. 유현목은 1925년, 지금은 북한땅인 황해도 사리원읍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에 해방을 맞았고, 스물다섯에 6․25를 맞았다. 파란 많은 그 시대를 몸소 겪은 세대인 셈이다. 자신이 몸소 겪은 것을 토대로 시대의 정서를 반영하는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혹독한 검열 때문이었다. 여기에 유현목의 딜레마가 있으며 연구자의 딜레마가 있다. 그의 작품을 평할 때는 항상 시대와의 긴장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모든 작품을 같은 잣대로 평할 수는 없다. 가령 4․19 직후 감독한 <오발탄>과 독재의 칼날 아래 만든 세 편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미 어느 정도 평가가 났듯이 유현목의 영화 정점은 1960년대 초․중반이다. 이 시기에 그의 대표작이 산출됐다. <오발탄> <김약국의 딸들> <순교자>가 그러하다. 한국영화의 양적 황금기가 이후 저물어 갔듯이 그의 영화의 질적 황금기 또한 그러했다. 아직도 평자들은 그의 최고작으로 <오발탄>을 꼽고 있으며, 그의 영화 연구 역시 <오발탄>에 집중되어 있다.
<오발탄>은 이범선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이다. 줄거리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겠다. 단지 이 영화는 1960년대 초의 짧았던 봄이 가져다 준 영화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말단 계리사인 가장(家長, 김진규 扮), 틈만 나면 “가자, 가자”를 반복하는 실성한 모친, 상이군인이지만 결국 은행강도가 되는 동생(최무룡 扮), 양공주가 된 여동생, 신문팔이 막내동생, 만삭의 아내(문정숙 扮)와 딸이 구성원인 한 가족이 있다. 그들에게 현실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뒤돌아보면 아찔하고 앞을 보면 막막하다. 이 작품이 분단과 관계 맺는 방식은, 이 영화에 드러난 서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이 분단의 비극에 그 원인을 둔다는 데 있다. 분단이 초래한 동족상잔의 비극과 그들의 모습은 인과 관계이다. 노친이 가자고 소리치던 것도 피난 때 폭격으로 입은 정신적 상처 때문이며, 여동생이 양공주가 된 것도 한반도에 상주하는 미군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생은 어떤가. 그가 술로 방탕하다가 결국 은행강도가 되는 것도 전쟁과 뗄 수 없는 관련을 지니며, 이 모두를 이끌어야 하는 가장 역시 마찬가지다. 분단은 평온할 수 있는 가정을 이처럼 산산조각 내 버렸다. 열악한 서울 빈민의 삶이 분단으로 인해 발생한 것임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머무는 곳은 피난민들이 모여 살았던 해방촌이었다. 그래서인지 영화에는 전후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이 도처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오발탄>은 분단이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얼마나 사람들을 황폐화시켰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며, 여러모로 분단 영화의 수작임에 분명하다.
이제 임권택의 <길소뜸>을 보자. 이 영화에 나타난 분단 의식은 이전의 그 어떤 영화보다도 날카롭고 차갑다. 그것은 철저하게 현실 원칙에 입각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매우 드물게, 이 영화는 분단으로 발생한 이산가족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실 이산가족 문제는 한국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그리 즐겨 다루는 소재는 아니었다. 단지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같은 몇 영화에서 다루었을 뿐이며, 그나마 <길소뜸>처럼 정면으로 다루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영화가 정말로 무서운 것은 이산가족이 만나서 그 동안 살아온 고통을 화기애애하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이산이 어떻게 세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렸는지, 그래서 지금 그것을 도저히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냉철하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
임권택은 유현목과 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유현목이 이북 출신이면서 남한으로 내려왔다면, 임권택은 이남 출신이면서 아버지의 좌익 경력 때문에 고통을 받았던 사람이다. 대한민국에서 좌익 아버지를 둔 이들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임권택 역시 평생을 주눅 든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런 그가 분단에 대한 발언을 마음대로 하기는 쉽지 않다. 데뷔작에서부터 반공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그는 1970년대에는 국책 반공(대작)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 그가 1970년대부터 현실에 뿌리를 둔 분단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짝코>(1980) <길소뜸> <태백산맥>(1994)은 그런 경향을 보여주는 영화들이다. 임권택은 정말로 어려운 길을 걸어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던 것이다. 세 편 모두 거론할 여지가 다분하지만, 그 가운데 <길소뜸>은 여러모로 반드시 거론해야 할 영화이다.
약간의 과장을 하자면, 임권택은 <길소뜸> 한 편만으로도 충분히 한국영화사에 남을 감독이다. 이 영화에 드러난 그의 분단 의식은 너무도 냉철하다. 평생을 연좌제로 시달린 그답게 어떤 감정적 개입도 없다. 그렇게 보고 싶던 가족을 만난 순간 오히려 고통이 시작된다는 이 역설은 분단이 우리에게 만들어 놓은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을 확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국 전쟁 기간 동안 서로 약속이 엇갈려 헤어져야만 했던 동진(신성일 扮)과 화영(김지미 扮)은 이산가족 만남이 한창인 방송국 앞에서 거의 30여 년 만에 재회한다. 그들의 기쁨도 잠시, 둘은 이제 잃어버린 자신들의 아이를 찾아 춘천으로 떠난다. 그러나 춘천으로 떠나기 전 둘 사이에는 이미 하나가 될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을 실감해야 했다. 그들은 각자 가족을 구성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들의 생활 수준이 너무도 차이가 났던 것이다. 평생 화영을 그리워하던 동진은 가난한 변두리 삶을 지탱하고 있었고, 새 삶을 시작한 화영은 좋은 남편을 만나 부유하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30년을 헤어졌던 그들은 하나가 되기 어렵다. 춘천에서 만난 (거의 아들인 것이 확실한) 석철(한소룡 扮)의 생활은 더욱 엉망이다. 고아로 어렵게 자라난 그의 생(生)은 거의 밑바닥 수준이다. 여기서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차라리 아니 만났으면 좋았겠다는 말이 절로 나옴직하다. 결국 화영은 가족과의 재회를 거부한 채 자신의 길을 걷기로 한다. 동진과 석철을 뒤로한 그녀는 그녀만의 길을 간 것이다. 분단 때문에 발생한 이산가족의 문제를 감정을 걷어낸 채 들여다본 <길소뜸>은 한국 리얼리즘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박찬욱의 <공동경비구역 JSA>을 보자. 이 영화에 나타난 분단 의식은 전후 세대라는 특징에 맞게 드디어 북한군을 온전한 인간으로 그렸다. 이 영화가 나오기 이전에 북한군을 이처럼 따뜻하게 그린 영화는 단연코 없었다. 대개의 영화에서 북한군은 잔혹한 공비의 무리이거나, 국군의 총 한방에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쓰러지는 힘없는 무리이거나, 사람이기를 거부한 추악한 괴뢰 집단일 뿐이었으며, 이런 형상화는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드디어 그런 인식이 바뀐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몇몇 영화, 가령 <간첩 리철진> 같은 영화에서 북한군을 인간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 영화에서는 우리와 맞서 싸우는 북한의 정규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정치적 상황이 알게 모르게 작용했다. 이 영화가 개봉될 때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평양에서 손을 마주 잡은 뒤였다.
박찬욱은 1963년 생으로, 한국전쟁이 끝나고서도 10년이 지난 시점에 태어난 감독이다. 때문에 위의 세 감독과 달리 그는 전쟁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세대이다. 공교롭게도 위의 세 감독, 이강천, 유현목, 임권택은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들이다. 그런데 박찬욱에게는 그런 상처가 없다. 더군다나 어린 시절에라도 전쟁을 겪지 않았기에 전쟁의 문제, 이념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런 세대들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박찬욱이 감독한 <공동경비구역 JSA>에는 북한군이 남한군과 똑같은 인간으로 그려져 있다. 아니 오히려 남한군보다 더 따뜻하고 포용적인 인물로 그려져 있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 휴전 이후 50년이 지나서야 재현된 것이다. 박찬욱과 같은 세대이지만, 냉전적 현실을 그만의 스펙터클과 멜로로 그려내는 강제규와 비교하면 박찬욱의 존재는 돋보인다.
이 영화의 배경은 판문점이다. 그곳에서 경비를 서는 남한 병사와 북한 병사의 우정과 비극을 미스터리 기법으로 그리고 있다. 수색을 나갔다가 지뢰를 밟게 된 남한 병사를 북한 병사가 구해주면서 둘 사이의 우정이 싹트게 되고, 다시 이들의 우정은 넷의 우정으로 싹트게 된다. 나이에 따라 형 아우 하던 그들 사이에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다. 그 가운데 잊을 수 없는 것은 초코파이를 먹던 오경필에게 이수혁이 남으로 내려가자고 제의하는 긴장된 순간이다. 이때 오경필은 자신의 꿈은 공화국이 이보다 더 맛있는 초코파이를 만드는 것이라며 위기를 모면한다. 이것은 남한으로의 흡수통일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국력이 북한보다 훨씬 커진 남한으로의 통일을 이런 작은 에피소드로 그린 것인데, 북한의 자존심이 살아난, 그것을 존중해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아직도 분단 상태라는 것을 알려주면서 끝을 맺는다. 북한 초소에서 놀고 있던 그들에게 우연히 순찰 돌던 고참이 오게 되고, 그 순간 예기치 못한 총격전이 벌어진다. 아직도 평화를 꿈꾸기에는 우리의 상황은 분단의 엄혹한 현실이다. 결국 동생을 죽였다는 자책감에 이수혁 병장도 자살하고 만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2000년대에도 여전히 분단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이다.
4. 분단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분단 영화의 개념과 함께 분단 영화 네 편을 분석해 보았다. 빨치산을 다룬 영화에서부터 분단과 전쟁 때문에 발생한 문제, 이산가족의 문제, 현시대의 휴전 상태까지 돌아보면서 분단이 우리 영화에 어떤 식으로 그려져 왔는지 살펴보았다. 각 영화는 나름의 인식을 통해 분단이라는 문제를 깊이 고민하면서 영화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었다. 반공 영화로 그린 <피아골>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 편은 분단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매우 리얼하게 그리고 있는 편이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빨치산이나 북한군을 직접 그린 영화가 아니란 점도 있었지만(<공동경비구역 JSA>는 시대적 문제가 크게 작용했지만), 감독의 의식이 뛰어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한국 영화사에서 분단 문제를 냉정하게 인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학에서도 그 문제를 제대로 다룬 것이 1980년에서야 가능했는데, 문학보다 엄청난 대중성을 지닌 영화야 말해 무엇 하랴. 이 점에서 볼 때 분단 영화의 한계는 명확해 보인다. 더군다나 어두운 현실을 그리지 못하게 했던 검열 때문에 분단의 고통을 그릴 수도 없었던 통제적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조건 속에서도 분단의 고통과 현실을 냉혹하게 그려낸 영화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었다.
우리에게 분단 영화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모습이다. 분단은 해방 이후 50년을 넘게 남한과 북한을 얽어맨 유령이다. 남한과 북한은 이 유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이제 우리는 분단을 극복해야 할 시점에 서있다. 아직도 미국의 공격에서 자유롭지 못한 북한의 상황, 그것 때문에 전쟁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반도의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빨리 분단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분단 영화는 분단이라는 현실을, 때로는 국책 대결의 수단으로써, 때로는 민중의 절절한 생활 현실로서, 또 때로는 한 핏줄의 형제로서 그려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분단은 지금도 진행형이라는 것이며, 때문에 반드시 평화적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성률
․1970년 경북 안동 출생
․2000년 ≪민족예술≫에 영화평을 쓰면서 평론 활동 시작
․호서대, 한국기술교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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