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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초점/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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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유배지인 몸
―문인수의 시에 대한 일고찰―
강경희
(문학평론가)
1. 몸으로 지각한 세계
세계는 이해되기 이전에 감각된다. 인간의 몸은 감각의 원천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몸을 거치지 않고는, 즉 감각의 촉수에 닿지 않고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다이앤 애커먼이 말했듯이 “감각이란 세계와 나 사이에 놓인 창이며, 나는 창을 통해 세계를 보며, 세계와 만난다.” 세계와 나와의 관계를 파악하는 원천적 질료는 감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러한 감각으로 인해 나는 자신의 존재를, 나아가 세계의 모습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시인은 누구보다 예민한 감각을 소유한 자라 할 수 있다. 탁월한 시인의 시적 감수성은 곧 그 시인만이 지니고 있는 감각의 특별함에서 기인된 것이라 말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동일한 대상, 동일한 체험이라 할지라도 시인의 감각에 포착될 때 그 대상과 체험은 새로운 의미의 옷을 입는다. 그럼으로 시인은 자신의 온몸으로 그것도 아주 특별한 감각의 능력으로 세계를 감지하고 그 감지된 세계의 비밀을 언어로 풀어내는 말의 주술사이다.
문인수의 시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은 그가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가 본능적으로 특별한 시적 감수성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자신의 감각을 끊임없이 확장하고 심화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뜻하기도 한다. 흔히 그를 일컬어 ‘길의 시인’, ‘유랑의 시인’, ‘풍경의 시인’이라 말하곤 한다. 그는 끊임없이 이곳과 저곳을 떠도는 기행을 통해 세계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 자신의 존재의 거처를 마련한다. 그의 기행은 그의 시가 촉발되는 기점이며, 또한 그의 시가 안착하는 준거지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의 기행은 언제나 ‘몸’의 감각성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 ‘기행의 형식’은 ‘몸’의 지각성을 가장 정직하게 옮겨놓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떠돎의 의미는 정체되고 고여 있는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의 경계를 끊임없이 확장시키려는 의지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문인수는 몸에 이끌려 세상의 길로 나서며, 그 길 속에 마음을 열어 놓는다. 그리고 세상의 몸 속에 자신의 존재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한다. 이점이야말로 그의 시가 지닌 특별함일 것이다.
2. 자연과 나
그렇다면 과연 그가 마주하려는 세계는 무엇이며, 그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하려는 방식은 어떠한가. 단적으로 말해 그에게 있어 세계는 ‘자연’이며, 그 자연 속에 자신을 투사시키려는 반복적 행위가 그의 시의 본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인수에게 있어 자연은 자아와 세계가 합일되는 동화의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가령 “대가리째 뚝 뚝 떨어져/낭자”한 ‘동백’을 보면서 “와 참 붉디붉다 내 청춘,/비명도 없이 흘러갔다”(「동백」)라 말할 수 있는 것처럼 그는 미처 “시들지 않은 채” 져버린 ‘붉고 비린 동백’에서 자신의 서럽고 가여운 청춘의 흔적을 발견한다. 이때 자연의 동백과 지나간 내 청춘은 ‘붉고 비린 것’이라는 점에서 상응을 이룬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일치의 순간이다.
하지만 문인수에게 있어 자연은 또한 자아와 세계의 끝내 불일치되는 경험을 확인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는 자연에 다가가면 갈수록 세계 밖으로 끊임없이 튕겨져 나오는 자아의 단절과 소외를 경험한다. 때문에 그의 시는 전통적인 자연친화의 정서를 강하게 부각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화되지 않는 자연과의 심리적 거리를 보여준다. 그의 시에 깊게 각인되어 있는 허무주의적 색채는 이처럼 가깝지만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자연과 나 사이의 ‘틈’에서 촉발된다. 그의 세 번째 시집 ꡔ뿔ꡕ에 있는 「비」는 이러한 시인의 내적 심리를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흐린 날은, 바람 한 점 없는 날은 비,
젖은 것들의 몸이 잘 보인다 치잉 칭 감기는, 빗줄기의 한쪽 끝을 물고 새 날아간다. 건물과 건물 사이 세 뼘 잿빛 하늘 가로질러 짧게 사라진다 창유리 창유리들이, 나무 나무의 이파리 이파리 풀잎들이 모두 그쪽을 보고 있다 잘 보이는, 뇌리 속의 새 길게 날아가는 아래, 젖어 하염없이 웅크린
몸, 섬 같구나 그의 유배지인 몸.
―「비」 전문
“흐린 날”은 사물이 투명하게 보이지 않는 날이다. 투명하지 않다는 것은 대상을 분명히 인식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치잉 칭 감기는, 빗줄기”, “잿빛 하늘”은 모두 세계를 선명하게 볼 수 없게 만드는 장애물들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문인수는 그 ‘흐림’ 속에서 ‘선명한’ 세계를 본다. 그가 세계를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비’ 때문이다. ‘비’로 인해 “젖은 것들의 몸”은 자신의 형상을 온전히 드러낸다. ‘비’는 대상에게 씌워졌던 온갖 더러움을 씻어냄으로써 사물을 잘 볼 수 있게 만든다. 그런데 이때 그에게 “잘 보이는” 세계의 모습은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비로 인해 한없이 가벼워진 ‘새’의 모습이며, 다른 하나는 비로 인해 무겁게 가라앉은 자신의 형상이다. ‘비상’과 ‘가라앉음’의 동시성은 그에게 자연과 융합될 수 없는 존재의 한계를 직시하게 한다. ‘잘 보임’의 세계는 그에게 투명한 눈을 갖게 하지만, 그 투명성의 세계로 인해 그는 지상에 속박된 채 “하염없이 웅크린” 나를 발견하는 존재의 비애를 절감하는 것이다. “몸, 섬 같구나 그의 유배지인 몸.”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몸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몸의 속박이 강할수록 비상의 의지 또한 거세다. 이 ‘비상’과 ‘유배’라는 긴장된 자장 속에 시인은 자신의 삶의 맥박을 짚어낸다. 문인수 시인의 유랑의식은 이처럼 자아와 세계의 간극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된 의식에서 촉발한다.
문인수의 유랑의식의 본질을 무엇보다 잘 보여주는 시집은 ꡔ동강의 높은 새ꡕ(세계사, 2000)이다. ꡔ동강의 높은 새』는 이미 많은 평자들에 있어 자연시의 좋은 전범을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 시집이다. 이 시집은 앞서 출간된 그의 4권의 시집과 더불어 기행시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일반적인 기행시가 자연에 대한 과도한 감상이나 예찬에 머무르고 있다면, 문인수의 시는 대상에 대한 주관적 감상을 최대한 절제하거나 또는 자신의 감정을 자연에 투사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심리적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 즉 시인은 주체의 감정을 최대한 감춘 채 자연 자체에 대한 묘사에 치중한다. 이러한 시인의 시작 방식은 자연이 거느리고 있는 풍경과 쉽게 융합될 수 없는 시인의 의식을 보다 극대화한다. 이는 자연 앞에 놓인 인간의 넘어설 수 없는 원초적 단절감과 허무의식이 빚어낸 결과라 할 수 있다.
비 뿌리네 어떤 마을 앞에 서 있네 이 깊은 골짜기 거대한 귓속 같네 큰길에서 가지치고 가지친 샛길, 길 끝엔 한 채씩 집 매달렸네 찌든 허파꽈리 같네 발등에다가 이 마을을 얹고 있는 뒤엣산 몹시 험하네 비안개에 가려 다 보이지는 않지만 높겠네 더러는 팔 뻗어 밀쳤음직도 한 앞엣산, 그러나 끄덕 않았을 앞엣산, 그래서 또 호미 걸고 기어오른 비알밭 감자꽃 핀 앞엣산, 앞엣산 더 험하네 더 높겠네 다만 물소리 물소리 빠져 나가네 저 물소리 다 닳아빠지겠네 닳지 않겠네
―「다시 정선, 어떤 마을 앞에 서 있었네」 전문
이 시는 화자를 둘러싼 주변 상황에 대한 철저한 묘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시이다. 강원도 ‘정선’의 어떤 마을 앞에 선 시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몇 겹을 이루어 펼쳐져 있는 첩첩산중이다. 그 마을의 풍경을 화자는 섬세하고 세밀한 여성적 시선보다는 다소 둔탁한 남성적 필치로 전달하고 있다. 특히 이 시의 어조는 ‘귓속’ ‘샛길’ ‘뒤엣산’ ‘앞엣산’과 같은 사이시옷과, ‘뿌리네’ ‘골짜기’ ‘찌든’ ‘꽈리’ ‘빠지겠네’ 와 같은 경음, ‘가치치고’ ‘한 채씩’ ‘밀쳤음직’과 같은 격음을 통해 전체적으로 매우 거친 남성적 울림을 준다. 이는 곧 시인이 묘사하고 있는 풍경의 실체가 단아하고 매끄러운 자연이 아닌 거칠고 험한 역동적인 자연의 모습으로 투영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것은 ‘높고’ ‘험하고’ ‘끄덕 않았을’ 자연의 거대함 앞에 선 인간의 왜소함을 상대적으로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이처럼 거대한 자연 속에 산간벽촌 마을이 그려져 있다. 집은 길의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고, 삶을 일구는 터전은 기어오른 비알밭으로 일구어야만 하는 어렵고 힘든 노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는 가난하고 소외된 산간 마을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안타까워하는 시인의 내적 심리를 대상의 이면에 감춤으로써 오히려 시적 감동의 진폭을 확장시킨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그의 특유의 남성적 어조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시의 전경을 마치 카메라의 렌즈가 움직이듯 자유자재로 포착함으로써 대상을 조감해 낸다. 즉 마을 전체 풍경을 거대한 귓속으로 형상화하는 원근법을 사용하다가, 다시금 ‘발등’ ‘팔’과 같은 신체 이미지를 동원함으로써 마치 손에 잡힐 듯한 근거리의 풍경으로 환원시킨다. 이러한 문인수의 시쓰기 방식은 대상의 객관적 묘사를 통해 시인의 감정을 삽입시킴으로써 시적 울림을 보다 극대화하는 전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대상에 대한 객관적 묘사로 적절하게 풀어냄으로써 인간에 대한 눈물겨운 연민을 간접화의 방식으로 전이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주관을 개입시키는 묘사를 가능한 절제함으로써 그는 자연을 이념화하거나 도구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철저한 자연 묘사 속에서 자연이 단순한 제재로써가 아니라 주제로 존립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연이 시의 전면에 세워질 때 자연은 더 이상 감상의 대상이 아닌 시인의 삶의 본질로 환원된다. 그렇다면 이처럼 끊임없이 자연에 몰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ꡔ홰치는 산ꡕ은 그에게 있어 ‘자연’이 지니는 궁극적 의미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시집이다.
3. 존재 발원으로서의 고향
ꡔ동강의 높은 새ꡕ가 출간되기 1년 전에 발간된 ꡔ홰치는 산ꡕ(1999)은 그의 가족사적 내력과 성장사와 관련된 시들이 많이 눈이 띤다. ‘고향’과 ‘유년’에 대한 기억, 특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자신의 뿌리에 대한 근원적 탐색이라는 점에서 원형적이다. 누구에게 그러하겠지만 ‘고향’은 존재의 뿌리다. 그런데 그 뿌리가 현재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궁극적으로 삶의 비애다. ‘과거’는 흘러간 시간 속에 존재할 뿐이며, 다만 그 뿌리를 더듬고 추억하는 ‘기억’의 화법을 통해서만 고향은 의미론적 가치를 지닌다. 때문에 고향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문인수의 ꡔ홰치는 산ꡕ은 자신의 뿌리의 근원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시집 전편을 통해 무엇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방올음산은 북벽으로 서 있다.
그 등덜미 시퍼렇게 얼어 터졌을 것이다 그러나
겨우내 묵묵히 버티고 선
산
아버지, 엄동의 산협에 들어갔다
쩌렁쩌렁 참나무 장작 찍어낸 아버지,
흰내 그 긴 물머리 몰고 온 것일까
첫 새벽 홰치는 소리 들었다
집 뒤 동구 둑길 위에 아버지 우뚝 서 있고
여명 속에서 그렇게 방올음산 꼭대기 솟아올라
아, 붉새 아래로 천천히 어둠 가라앉을 때
그러니까, 이제 막 커다랗게 날개 접어 내리며
수탉, 마당으로 내려서고
봄, 연두들녘 물안개 벗으며 눕다.
―「홰치는 산」 전문
문인수에게 있어 ‘고향’은 ‘방올음산’이며 ‘아버지’이다. 즉 ‘고향=방올음산=아버지’는 등가를 이룬다. “겨우내 묵묵히 버티고 선” 방올음산은 곧 “동구 둑길 위에 우뚝 서” 있는 아버지의 모습과 조응하며, “등덜미 시퍼렇게 얼어 터”진 산은 다시 “쩌렁쩌렁 참나무 장작 찍어낸 아버지”의 모습과 겹쳐진다. 척박하고 거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지독한 삶의 시련 속에서도 강하게 살아남은 인간의 숭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홰치는 산」에서 무엇보다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서술어다. ‘북벽으로 서 있다’, ‘시퍼렇게 얼어 터졌을 것이다’, ‘묵묵히 버티고 선’, ‘산협에 들어갔다’, ‘장작 찍어낸 아버지’, ‘홰치는 소리 들었다’, ‘아버지 우뚝 서 있고’, ‘꼭대기 솟아올라’, ‘가라앉을 때’, ‘날개 접어 내리며’, ‘내려서고’, ‘벗으며 눕다’와 같은 동사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문인수는 솟아오름과 가라앉음의 활달한 생명성을 표출한다. 문인수는 비상과 하강의 이중적 모습을 서로 대비하면서 그려 넣고 있지만, 그가 보여주고 있는 비상과 하강의 이미지는 서로 대립하거나 충돌하지 않는다. 그것은 고향으로서의 방올음산과 방올음산으로서의 아버지를 하나의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써 선명하게 부조하는 방식이며, 융기로서의 존재(비상)이자 한없이 따뜻한 인간적 사랑의 끈으로 연결된 아버지를 부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했듯 ꡔ홰치는 산ꡕ에서도 몸의 감각화를 통해 자연을 드러내는 표현 방식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방올음삼」에서 “흰내를 흘려보내는” “저 산”을 보면서 그는 “저 산의 뿌리를 느낀 적이 있다”고 말한다. 산의 뿌리를 지각하는 것이 그의 독특한 시각이다. “저, 마음에 뚫린 구멍, 꼭 그만하다.//산의 뿌리가 다 만져진다”(「동강의 높은 새」)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나듯이 그는 자연 속에서 자신의 인간적 뿌리를 발견하고자 한다. 이는 그가 주조하고 있는 자연이 자신의 구체적인 ‘몸’의 문제로 환원되는 점을 의미한다. “오, 달빛 비린내가 난다. 이 달빛 언제나 청보리 냄새가 난다”(「매춘」), “그 해 여름 봉선화 유난히 붉어/그 해 여름 봉선화 다 지고 말아/물에 시린 가을이 왔다”(「봉선화」)와 같은 정서는 또한 비리고 여린, 시리고 아픈 인간적 서러움과 비애를 함의를 자연에 투사시키는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아버지, 고향, 유년의 모습들은 모두 공간적 묘사가 아닌 시간적 점층성으로 드러난다. 시인 스스로 ‘자서’를 통해 말하고 있듯이 그는 “자기 존재의 발원, 고향이란 그러나 멀거나 가까운 어떤 공간이 아니라 이제는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시간의 아득한 저편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구체적 실체인 고향은 물리적 시간으로 닿을 수 없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현재화 또는 미래화의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을 가장 직접으로 보여주는 시가 「씨름」이다. “나는 죽어 으스름 달밤을 입고 있다./나는 죽어 방올음산 꼭대기에 앉아 있다/혹은 고갯마루 돌무더기 속에 스며 있고/배다리들 곶집 속에 누워 있다/나는 죽어 써늘한 바람/저 부엉이 소리에 잘 묻어난다/그 언제 나는 죽고/그대가 더러 나를 지울 때/나는 그대 땀 냄새 속에다 코를 박고 싶다”라는 표현처럼 문인수에게 있어 ‘죽음’의 의미는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이다. 그것을 궁극적으로 자신의 뿌리 닿기의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지독한 고향으로의 회귀는 궁극적으로 유랑의 근거가 자신의 뿌리에 대한 그리움에 기인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고향의 모든 것들로 회귀하고자 한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고향의 모습과 향기와 온기와 소리 속에 그는 한없이 따뜻하게 침잠하고 싶은 것이다. 이 침잠은 끝내 “땀 냄새 속에다 코를 박고 싶다”라고 말하듯이 강렬한 인간애를 느끼고 싶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연과 인간이 일찍이 다르지 않았던 존재의 시원인 ‘고향’이야말로 그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 싶은 꿈의 낙원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살아있는 몸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는 죽음과 친화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운명을 동반한다. 그의 많은 시에 ‘죽음’의 문제가 제시되는 것 또한 이러한 맥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묘」는 소멸하는 자연과 인간의 풍경을 아름답게 묘사함으로써 소멸하는 것들이 지니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날카롭게 포착하고 시이다.
11월의 오후는 짧다.
그러나 어떤 죽음에도
제 몸의 반경을 지니는 억새의 춤,
여러 무덤 주변에 아직 환한 것처럼
또 다른 동작으로 주춤주춤 갈아입는 것처럼
사람들도 하산을 서두르고 있다
그 다음이 금세 일몰이다.
―「성묘」 전문
성묘라는 낯익은 풍경을 한폭의 그림처럼 담아내고 있는 이 시는 간결하지만 인간 존재가 거느리고 있는 죽음의 문제를 매우 집약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11월이란 계절적으로는 겨울로 향해 가는 마지막 순간이며, 오후 또한 하루의 일상이 마감되는 소멸의 시간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봄이 존재의 탄생과 시작을 의미한다면 겨울은 죽음과 소멸을 예고하는 시간인 것이다. 이처럼 기울어져 가는 계절과 박명(薄明)의 시간 속에 화자는 존재한다. 그것은 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는 점에서 물리적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환기한다.
한편 「성묘」가 지니고 있는 시적 묘미는 죽음이 임박해 오는 시간을 화자가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사라져 가는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삶을 온건히 지키고 있는 자연의 강한 생명력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것은 “그 어떤 죽음에도/제 몸의 반경을 지니는 억새의 춤”이라는 구절처럼 죽음 앞에서 결코 초라하거나 왜소해지지 않는 자연의 강인한 속성을 확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억새’란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강한 생명력을 상징하는데, 이 시에 나타난 억새의 생명력은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으로 인해 더욱 부각된다. 즉 완전한 죽음의 상징물인 ‘무덤’ 앞에서 화자는 오히려 생의 의지를 불사르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이다. 죽음의 현장에서 생명의 고결함을 경험하는 순간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존재의 의지를 드러내 주는 것이다.
하지만 밝음으로 인해 어둠이 가능한 것처럼, 태어남으로 인해 죽음으로 가는 것은 자연의 순리인 것이다. 즉 모든 존재는 탄생과 더불어 사멸의 길을 걸어야하는 숙명의 시간을 감당해야만 한다. “또 다른 동작으로 주춤주춤 갈아입는 것처럼/사람들도 하산을 서두르고 있다/그 다음이 금세 일몰이다”라는 표현처럼 존재는 거부할 수 없는 일몰의 시간을 향해 가야만 한다. 하지만 시인은 죽음을 대결과 집착으로써가 아니라 포용과 긍정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이 시는 삶과 죽음이 길항하는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포착하면서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존재의 미학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문인수의 여타 시가 표방하고 있는 것처럼 자연이란 은유를 통해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설득력 있게 묘사하고 있는 경우라 할 수 있다.
ꡔ홰치는 산ꡕ은 ꡔ동강의 높은 새ꡕ에서 보여주었던 시인의 끊임없는 삶의 여로가 발생하게 된 원인을 제공하는 시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ꡔ동강의 높은 새ꡕ가 지니고 있는 탄탄한 긴장성에 비하면 다소 느슨하다는 느낌을 자아낸다. 「방올음산 이야기」에서 방올음산을 개인적 신화로 신성화하는 방식은 좀 진부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며, 「오줌」 연작시 중 ‘겨울소’와 같은 시 또한 의식적으로 자신의 뿌리 찾기에 집착하고 있다는 느낌을 자아낸다. 즉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인 “밤중에도 소의 고삐는 이랴, 이랴, 아버지에게 닿아 있었던 걸까요-너 이놈, 또 소한테 오줌 눴구나, 아버지가 말했지만 나는 어느새 깊이 잠들곤 했습니다”와 같은 부분은 뿌리에 대한 집요성이 오히려 시적 미감을 떨어뜨리게 느껴진다. 또한 「풀뽑기」와 같은 시에서 병든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연상하고 있는 “어느 날 검불같이 남아있던 당신의 육신까지도 뽑아 던졌습니다. 그렇게 돌아가신……”이란 부분, 이후 아버지를 회상하는 시인의 감상을 드러내는 마지막 부분은 과잉된 정서의 유출이라는 느낌까지 들게 한다.
4. 리듬 속에 내재된 삶의 맥박
하지만 문인수의 시가 지니고 있는 장점은 무엇보다 한국적 정한을 고스란히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그가 구사하고 있는 확장된 몸으로서의 ‘자연’은 풍경이 풍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풍경 속에 드리워진 인간적 삶의 아픔과 비애와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정적이다. 특히 여성적 화자가 주조였던 한국 시사에서 정한의 감정을 호방한 남성적 언어로 분출하고 있다는 점은 그 자체로 의미가 깊다. 문인수는 자신의 고통과 울음을 과잉되게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 감상을 객관적 자연에 토로함으로써 누구보다도 유연하면서도 절제력 있는 시세계를 구축한다. 특히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리듬 의식은 몸의 감각성을 매우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리듬의 주요한 특질 중 하나는 반복성이다. 시에 있어서 동일한 낱말이나 어구의 반복은 크게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첫째는 반복을 통한 의미의 강조이며, 둘째는 규칙적인 리듬으로 인해 형상화된 독특한 정서의 표출이다. 언어에 있어서 리듬의 형성은 음악의 경우와는 달리 주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자연적이며 보편적인 리듬의식에 편승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시인의 의도적 방법에 의해 자연스러운 리듬감을 파괴하기도 한다. 여하튼 시의 반복은 이러한 두 가지 특질을 모두 드러내는 데 적합하게 사용된다.
고대 시가는 한국시의 전통적 리듬의식인 3음보나 4음보의 율격을 충실히 구사하고 있는 반면, 현대시에 올수록 이러한 율격은 파괴되거나 변형된다. 즉 전통 율격을 변형하여 소리와 의미에 충격을 주는 ‘낯설게 하기’가 대표적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시에 있어서 동일한 어구의 반복은 의미의 파장을 효과적으로 극대화하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섬이 섬을 구경하지 않듯이
파도 소리가 파도 소리를 구경하지 않듯이
갈매기가 갈매기를 구경하지 않듯이
수평선이 수평선을 구경하지 않듯이
통통배가 통통배를 구경하지 않듯이
일몰이 일몰을 구경하지 않듯이
별빛이 별빛을 구경하지 않듯이 또한
그 무엇도 다른 무엇을 구경하지 않듯이
바삐 바삐 漁具를 챙기는 어부들
한 팀 꽉 짜인 바다,
바다가 바다를 구경하지 않듯이
―「2박3일의 섬」 전문
문인수의 「2박3일의 섬」은 단순한 구절들의 동일한 반복으로 이루어진 단 연의 시이다. “~이(가) ~을(를) 구경하지 않듯이”라는 구절이 총 9번 반복됨으로써 이 시는 무엇보다 “~이(가) ~을(를) 구경하지 않듯이”라는 정황 자체를 강조하고 있다. 이 시는 형태적 측면에서 보면 마치 김수영의 「절망」을 차용해 온 느낌을 준다. “風景이 風景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速度가 速度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拙劣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바람은 딴 데서 오고/救援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絶望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라는 김수영의 「절망」은 숨가쁜 동적 리듬감을 통해 스스로를 반성하지 못하는 현실과 반성하려는 자아 사이의 정신적 갈등과 좌절을 절망적 아이러니로 표출하고 있다. 김수영의 「절망」이 반복된 리듬이 주는 속도감을 통해 구절 하나하나의 의미에 집중하기보다는 전체적인 시적 정황 자체가 지니는 아이러니적 효과를 부각시키고 있다면, 문인수의 「2박3일의 섬」은 시적 정황 하나하나가 시적 의미를 확대하고 집중하는데 기여한다. 즉 김수영이 동일한 어구의 반복을 통해 의미를 산포시키는 것과 대조적으로 문인수의 반복성은 시의 의미를 확대, 강조하고 있다.
「2박3일의 섬」은 생존과 씨름하는 어부들의 일상을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시이다. 치열한 생존의 장으로 설정된 바다에서 풍경은 더 이상 풍경일 수 없다. 때문에 ‘섬’, ‘파도소리’, ‘갈매기’, ‘수평선’, ‘통통배’, ‘일몰’, ‘별빛’은 더없이 아름다운 자연임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이러한 대상을 통해 자신의 감상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려고 한다. 즉 자연은 더 이상 관조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관조란 자연과 나 사이의 심리적 거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관찰자로서의 나, 감상자로서의 나가 배격될 때 대상과 나 사이에는 동일화가 이루어진다.
자연이 관조의 대상으로 시간과 거리를 지니지 않는 것은 ‘어부’들의 숨가쁜 현장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 무엇도 다른 무엇을 구경하지 않듯이/바삐 바삐 漁具를 챙기는 어부들/한 팀 꽉 짜인 바다,”라는 표현처럼 ‘2박3일’을 항해하는 어부들의 삶은 바다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다와 한몸이 되어 살아가는 치열한 삶의 노동력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모습을 시인은 “~이(가) ~을(를) 구경하지 않듯이”라는 동일한 구절의 반복을 통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반복의 효과는 생동하는 어부들의 생생한 노동력을 속도감 있게 형상화하는 동시에, 관념화된 바다가 아닌 땀과 혼이 묻어있는 삶의 건강성을 극대화한 역동적 바다를 그리게 한다.
그것은 대상을 구경하는 방관자로서의 태도가 아닌, 삶이 곧 자연과 하나 되어야 하는 순순한 몰입과 무아지경의 아름다움을 그린다. 따라서 문인수의 반복적 리듬은 바다를 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형상화하는 데 기여한다. 이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리듬감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리듬이 시의 의미를 보다 극대화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박3일의 섬」이 반복된 리듬으로 인해 시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면,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봄밤」과 같은 작품은 반복된 청각적 리듬 의식으로 인해 강렬한 시적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이렇듯 문인수의 리듬의식은 자신이 경험했던 구체적 감각을 증폭시킴으로써 현실의 풍경을 생동하는 현장성으로 재현하게 한다. 이는 뚜렷하고 미묘하게 체감되었던 몸의 감각성을 재현하는데 효과적인 장치라 할 수 있다. 문인수에게 있어 ‘몸’은 자신과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이며, 또한 끊임없이 세계를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즉 그는 감각의 창을 통해 세계와 나와의 관계를 인식하고 궁극적으로 나라는 존재의 심원에 닿고자 한다.
그에게 있어 자연은 ‘동화’와 ‘차이’를 동시에 인식하게 하는 대상이다. 몸은 결코 자신의 감각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그러한 몸의 한계로부터 끊임없이 일탈하고자 하는 욕망이야말로 그를 자신의 몸이 자연의 몸으로 확장될 수 있는 황홀한 순간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몸의 감각을 무한대로 확장시켜 놓으려는 그의 의지는 궁극적으로 몸의 한계에 부딪히지만, 또한 몸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숭고한 인간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문인수는 국토의 이곳저곳을 유랑하며 자연과 마주한 인간의 근원적 비애감과 허무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이때 그가 노래하는 자연은 관념적이며 피상적 자연이 아니라 구체적 몸의 감각성으로 인해 획득된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자연으로 거듭난다. 이 살아있는 자연의 몸을 응시하는 시인의 넋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강경희
․1967년 서울 출생
․200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숭실대, 선문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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