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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외국문학순례/김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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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적 침묵의 시
―John Ashbery의 시―
김동호
(시인)
1.
현존하는 미국시인 중 가장 대표적 시인 중 한 사람인 죤 애쉬베리가 우리나라 시단에 별로 소개가 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아마 그의 시의 난해성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좀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독특한 애매성, 바보스런 말투와 세련된 ‘말 아낌’이 조화를 이룬 묘한 재미,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믿음을 주는 듯한 논변 이면의 분위기,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쓰고 있는 망상과 상상의 뒤섞임이 시에 대담하게 도입되고 있는 듯한 기법, 논리적 접근이나 분석이 흔히 헛다리를 짚게 되는 황당함 뒤에 오는 별미스런 아름다움, 이런 특징들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러한 시풍은 그의 경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애쉬베리는 1927년 뉴욕 로체스터에서 태어나 온타리오 호수 근처의 농장에서 자랐다. 1949년 하버드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은 뒤 컬럼비아대학에서 영국의 소설가 Henry Green에 대한 석사논문을 썼다. 이 소설은 비개성적 대화체로 된 아주 독특한 소설형식의 작품이다. 대화자에 대한 설명이나 해설이 전혀 없이 재치 있는 대화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1955년 훌부라이트 장학생으로 파리에 갔을 땐 Henry Green보다 더 난해하고 비타협적인 Raymond Roussel의 소설에 심취하게 된다. Roussel은 ‘자기 소설은 경험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언어의 유희로 쓰여졌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실험적 작품을 쓰는 작가이다. 애쉬베리는 문학뿐 아니라 미술에도 깊숙이 관여하게 된다. 1958년부터 1965년까지는 New York Herald Tribune의 미술평 기자로 일하면서 초현실주의 계열의 미술작품에 대한 많은 섭렵과 연구를 하게 된다. 이런 작업은 1972년까지 Art News지의 편집을 맡는 일로 이어지고, 그 후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Newsweek지의 미술평을 맡으면서 Brooklyn College의 문학창작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의 시의 성장과 그의 미술 섭렵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프랑스 초현실주의 미술과 그의 시는 많은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2.
그러나 이런 형식은 그럴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다. 이러한 표출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내면적 고뇌와 갈등 진통이 있다. 표출된 것이 시의 몸이고 표출되지 않은 것이 보다 큰 정신의 몸부림과 춤이라면, 보이지 않는 몸부림과 춤이 그의 시 속엔 있다. 애쉬베리는 대부분의 큰 시인들이 그러하듯이 ‘큰 비움’에서 시를 시작한다. 본래 인간의 미(美)는 진(眞을) 인도할 수 있다, 구미(口味)가 영양을 인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나 오늘의 인간은 불가능하다. 유해한 향이나 감미가 우리를 오도할 뿐 아니라, 그 오도에 길들여진 우리의 감각과 정신이 제 기능을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은 더욱 일그러진 거울 같은 것에 가까운 것이 되었고 그렇게 굳어지는 메카니즘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때문에 최초의 자리, 미와 진이 일치하는 자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속을 비범하게 비워야 한다. 우리의 편견과 타성, 굳어진 각질을 치열하게 벗겨야 한다. 그곳에서만 본연의 미가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다.
에쉬베리는 주로 세 가지 방법으로 비움을 시도하고 있다. 첫째 일그러진 거울과 같은 시인 예술가의 눈을 자각하는 일, 비판하는 일, 끊임없이 형상화하여 우리 모두를 일깨우는 일이다. 장시(長詩) 「일그러진 거울 속 자화상(Self-portrait In Convex Mirror)」은 끊임없는 자기 투시로써 나르시즘의 본질을 꿰뚫고 의식의 경화를 막고 있는 구체적 예라 볼 수 있다
둘째는 언어적 방법으로 논리적 고찰이나 안이한 의미 결정을 피해 가는 일이다. 연상보다는 연상 해체를, 결정보다는 결정 유보를 좇으며 임의적 우발적 표현기법을 많이 쓰고 있다. 이해 이전의 상태에서 오히려 순수 언어가 소생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며, 그런 상태에서 생기는 언어적 오로라 현상을 한껏 살린다. 순수한 비움의 상태는 바로 말의 샘이기 때문에 ‘말할 것이 없을 때 오히려 말을 시작하고’, ‘짜는 것과 푸는 것을 동시에 하며’, ‘패러디와 의미 표출을 동시에 구사’한다. 그리고 역설과 넌센스를 즐겨 쓰지만 미적 목적에서라기보다는 ‘비움을 통해서 logos에 도달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연결 접속에 있어 ‘사이(between)’보다는 ‘을(of)’을 선택해서, 형이상학적 체계의 진리보다는 내재적 발견의 진리를 찾아간다.
셋째는 무(無)에 대한 사랑, ‘모성적 침묵’에 대한 사랑을 키워간다. 그의 시에 숱하게 나오는 ‘밤’, ‘공(空)’, ‘허(虛)’, ‘어둠’, ‘망각’ 등의 어휘들은 이러한 사랑을 입증하는 것으로써, 시적 온기뿐만 아니라 시적 에너지를 발전시키고 있다. 결국 그가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은 잡동사니 부스러기지만 정직한 인식과 근원애(根源愛)로 줍는 부스러기이기 때문에 큰 부스러기, 본질에 닿는 부스러기일 수가 있다. 그리고 큰 신진대사에서 오는 비움이기 때문에 담는 즐거움 못지않게 비우는 즐거움이 크며, 새로운 비움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그 자체가 잠재된 행복일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좀더 세밀히 살펴보기 위해 비움을 주제로 한 시 세 편을 조명해 보기로 한다.
3.
화가
바다와 건물들 사이에 앉아
그는 바다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흔히 눈감고 있으면 그것이 기도인 줄 아는 것처럼
그는 그냥 그렇게 그리면 주제가 모래사장으로 달려가 붓을 잡고
캔버스에다 자신의 초상화를 스스로 그려내는 줄로 알았다
그래서 그의 캔버스에는 아무런 그림도 그려지지가 않았다
빌딩 속의 사람들이 실제적 충고를 해줄 때까지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써 붓을 써보세요. 바다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바다보다 좀 덜 성난 것, 좀 덜 큰 것을 택하세요.
화가의 기분에 더 맞는, 또는 기도에 더 맞는 주제를 택해 보세요”
그러나 ‘기교가 아닌 바다 자체(nature)가 캔버스를 집어 삼켜주기를
바라는 것이 그의 기도임‘을 무슨 수로 저들에게 전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새 주제로 그의 부인을 택했다. 헌 빌딩처럼 그녀를 확대하며.
초상화가 스스로를 잊고 붓 없이도 자신을 그려낼 수 있는 양.
약간 용기를 얻은 그는 바닷물에 붓을 적시며 가슴 깊은 기도를 웅얼댔다
“나의 혼이여, 이번 새 초상화 그릴 땐 내 캔버스를 완전히 부수어 주소서”
이 소식은 들불처럼 빌딩들 속으로 번져갔다.
‘그 사람 다시 바다 초상화를 그리기로 했대’
상상해 보라. 주제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화가를.
너무 지쳐서 그는 붓을 들 수가 없었다. 그는 건물로부터 몸을
기대고 내다보고 있는 화가들에게 화를 돋궜다. 악의에 찬 즐거움으로.
“우리는 우리를 캔버스에 올리려는 올바른 기도도 안 돼 있어요.
혹은 바다를 우리의 초상화로 앉히려 하는 자세도 안 돼 있어요”
‘그것은 자화상일 뿐이야’ 그들은 외쳤다
결국 그의 주제의 모든 표식들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캔버스는 완전히 다시 백지가 되었다
그는 붓을 내려놨다. 그러자 고함소리가, 그들에겐 기도겠지만,
운집한 빌딩들로부터 솟아올랐다
그들은 그를, 그의 캔버스를, 빌딩들의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
밀어냈다. 그러자 바다가 그의 캔버스와 붓을 삼켜버렸다. 마치
그의 주제는 그냥 기도로만 남기로 한 양.
The Painter
Sitting between the sea and the buildings
He enjoyed painting the sea's portrait.
But just as children imagine a prayer
Is merely silence, he expected his subject
To rush up the sand, and, seizing a brush,
Plaster its own portrait on the canvas.
So there was never any paint on his canvas
Until the people who lived in buildings
Put him to work: "Try using the brush
As a means to an end. Select, for a portrait.
Something less angry and large, and more subject
To a painter's mood, or, perhaps, to a prayer."
How could he explain to them his prayer
That nature, not art, might usurp the canvas?
He chose his wife for a new subject,
Making her vast, like ruined buildings,
As if, forgetting itself, the portrait
Had expressed itself without a brush.
Slightly encouraged, he dipped his brush
In the sea, murmuring a heartfelt prayer:
"My soul, when I paint this next portrait
Let it be you who wrecks the canvas."
The news spread like wildfire through the buildings:
He had gone back to the sea for his subject.
Imagine a painter crucified by his subject!
Too exhausted even to lift his brush,
He provoked some artists leaning from the buildings
To malicious mirth: "We haven't a prayer
Now, of putting ourselves on canvas,
Or getting the sea to sit for a portrait!"
Others declared it a self-portrait.
Finally all indications of a subject
Began to fade, leaving the canvas
Perfectly white. He put down the brush.
At once a howl, that was also a prayer,
Arose from the overcrowded buildings.
They tossed him, the portrait, from the tallest of the buildings;
And the sea devoured the canvas and the brush
As though his subject had decided to remain a prayer.
약간 코믹한 터치로 이야기를 시작해 가지만 그 속에 든 암시는 너무나 진지하다. 여기서 화가는 시인을 의미하지만 시인의 창작작업은 결코 간단치 않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절대로 굳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바다와 굳은 기성세대를 은유하는 빌딩들 사이에 앉아서 영원한 진리를 그려야 하는 시인의 임무는 종교인의 그것만치나 어려운 것이다. 끊임없이 기존의 의미와 틀이 조여오는 가운데 기존의 그것을 벗어나서 진리를 그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려운 작업이다. 우선 바다그림을 안이하게 생각한 것부터 잘못이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눈감고 입 다물고 있으면 그것이 기도인 줄로 아는 것처럼, 그냥 푸른 물감 칠하면 그것이 바다인 줄 안 자신을 자책한다. 해서 그는 타협으로서의 그림의 유혹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큰 본질 세계보다는 손에 잡히는 작은 현실 실리 세계의 그림, 신의 큰 분노 같은 것보다는 작은 세속적 분노 같은 것을 그리기를 기성세대로부터 종용받는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기교로써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본성으로 그리는 그림임’을 어떻게 그들에게 전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굳은 언어 그물에 잡혀 그것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그 너머의 큰 세계(sea)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마침내 그는 폐허된 건물 같은 그의 부인을 그림의 주제로 택한다. 늙은 부인은 이해(利害) 미추(美醜)의 경계를 넘어선 비교적 ‘sea'에 가까운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어느 정도 기교가 아닌 본성으로써 초상화를 그리는 데 성공한다. 여기서 ‘기교가 아닌 본성으로 그린’ 그림이란 우리 자신의 보다 큰 모습을 보기 위해 아름다움까지도 버린 실재의 그림이다. 그야말로 본성으로 잡는 본질의 그림인 것이다. 약간 자신이 붙은 그는 ‘나의 혼이여, 이번 새 초상화 그릴 땐/내 캔버스를 완전히 부수어 주소서’ 기도하며 바다 초상화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렇게 큰 주제가 쉽게 그려질 리가 없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예(藝)를 완전히 뒤집는다는 것, 어쩌면 기존의 시단을 완전히 뒤엎는 그런 큰 시도가 성공할 이가 없다. 결국 그는 주제가 너무 커서 실패한 시인이 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자기를 비판하는 기존 시인들과 맞선다. ‘우리는 우리를 옳게 그릴 자세마저 안 돼 있어요/바다와 같은 우리 본래의 생명을 그릴 기도도 안 돼 있어요.’라고 외치는 그의 절규에는 단호함을 넘어 혐오까지 보인다. 그러나 우리 생명과 바다를 같은 크기로 보는 그의 거시적 예술을 기존 권위에 갇힌 시인들이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그것은 또 하나의 주관(a self-portrait)일 뿐’이라고 외치는 그들의 나무람 속에 그의 고독한 시도는 좌절되고 만다.
그는 붓을 내려놨다. 그러자 고함소리가, 그들에겐 기도겠지만,/운집한 빌딩들로부터 솟아올랐다//그들은 그를, 그의 캔버스를, 빌딩들의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밀어냈다. 그러자 바다가 그의 캔버스와 붓을 삼켜버렸다. 마치/그의 주제는 그냥 기도로만 남기로 한 양.
그러나 그의 주제가 끝내 기도로만 남아있을 주제일까. 그의 백지는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이 된다. 그는 바다 이외의 그림을 그릴 생각이 전혀 없다. 조금이라도 그 길에서 벗어날 경우 가차없이 중단할 것이다. 때문에 그의 자리는 그냥 침묵의 자리가 아니다. 실재를 지향하는 치열한 ‘가장 활기찬 침묵(brisk silence)’의 자리다.
4.
패킷 보트 속으로 취해 들어갈 때
각각을 시도해봤다. 몇만 불멸이고 자유일 뿐이었다
그 밖엔 햇살 조금씩 새어 들어오는 자리에 앉아
누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고작인 그런 형세였다
해가 단풍나무 초록을 누렇게 물들이는데도 거친 말 쏟으며.
이런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겨우내 낡은 책 목록 같은
냄새나는 책장 뒤지다가 새로운 감동의 호흡 희미하지만
맛보았다. 새로운 글귀들이 튀어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여름은 잘 지나가고 있었다. 절정 아직 지나지 않았고
풍요의 약속 가득해 있었다. 이젠 멀리 방황할 필요 없는, 무심한
사람들도 숨죽이며 일어나고 있는 일에 눈을 쏟는 시간이었다
거울 속 한 표정이 당신을 붙잡는다. 당신은 흔들리며 계속 걷는다
‘나, 이번엔 인지되었을까. 저들, 이번엔 나를 사실대로 알아봤을까
아니면 또 연기되었을까’ 아이들은 아직도 놀이에 빠져있고 초조한
구름자락이 오후의 하늘에 황급히 솟았다가 흩어진다. 짙은 황혼이
맑게 다가올 때. 가운데. 오직 저 아래 뚜 뚜- 뿔피리 속에만
잠시나마 격식 갖춘 큰 행사가 여러 색이 한 색으로 응집이 되며
교향 되어 시작되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온 세상을 빨아들이면서도
가볍게 아주 가볍게 그러면서도 넓은 권위와 예리한 감각을 지닌 민요로.
저 많은 회색 눈송이들의 나림은?
그들은 태양의 티끌들이다. 그대는 스핑크스보다도 더 오래 태양 속에서
잠을 잤지만 그것으로 해서 조금도 더 현명해진 것은 아니다
들어오라. 나는 한 그림자가 문에 걸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시 나타난 그녀일 뿐이었다. ‘들어오시겠는가.
들어올 생각 아직 없으면 서둘 것은 없다’ 고 말하러 온.
밤의 윤기가 깔린다. 시토 수도원의 달은 중천에 솟아올라
그곳에 앉아 마침내 어둠의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지상의 모든
작은 것들에선 한숨이 솟아오른다. 책들 논문들 낡은 훈장들 유니온服 단추.
하얀 종이 상자에 넣어 보관되어 있는 것들. 이보다 더 작은 것들은
모든 것을 균평화시키는 밤의 어둠 밑에 더욱 납작해지고 있다.
여름은 너무 많은 것들을 요구하고 앗아간다
그러나 밤은 앗아가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더 많았다. 유예도 그렇다.
침묵도 그렇다
As one put drunk into the packet-boat
I tried each things, only some were immortal and free.
Elsewhere we are as sitting in a place where sunlight
Filters down, a little at a time,
Waiting for someone to come. Harsh words are spoken,
As the sun yellows the green of the maple tree--
So this was all, but obscurely
I felt the stirrings of new breath in the pages
Which all winter long had smelled like an old catalogue.
New sentences were starting up. But the summer
Was well along, not yet past the mid-point
But full and dark with the promise of that fullness,
That time when one can no longer wander away
And even the least attentive fall silent
To watch the thing that is prepared to happen.
A look of glass stops you
And you walk on shaken: was I the perceive?
Did they notice me, this time, as I am,
Or is it postponed again? The children
Still at their game, clouds that arise with a swift
Impatience in the afternoon sky, then dissipate
As limpid, dense twilight comes.
Only in that tooting of a horn
Down there, for a moment, I thought
The great, formal affair was beginning, orchestrated,
Its colors concentrated in a glance, a ballad
That takes in the whole world, now, but lightly,
Still lightly, but with wide authority and tact.
The prevalence of those gray flakes falling?
They are sun motes. You have slept in the sun
Longer than the sphinx, and are none the wiser for it.
Come in. And I thought a shadow fell across the door
But it was only her come to ask once more
If I was coming in, and not to hurry in case I wasn't.
The night sheen takes over. A moon of cistercian pallor
Has climbed to the center of heaven, installed,
Finally involved with the business of darkness,
And a sigh heaves from all the small things on earth,
The books, the papers, the old garters and union-suit buttons
Kept in a white cardboard under the equalizing night.
The summer demands and takes away too much,
But night, the reserved, the reticent, gives more than it takes.
모성적 침묵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시가 바로 이 시일 것이다. 이 시속에서 ‘밤’, ‘어둠’, ‘침묵’, ‘그늘’ 등은 묘하게 어우러져 따스한 어둠을 이루고 있다. ‘그대는 스핑크스보다 더 오래 태양 속에서 잠을 잤지만/그것으로 해서 조금도 더 현명해진 것은 아니다.’ 태양 빛이 우리를 현명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인류는 스핑크스보다도 더 오래 햇빛을 보아왔지만 그 밝음으로 인해 더 현명해지지가 않았다. 아직도 밝음의 착각 속에 빠져 잠을 깨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오히려 어둠이 우리를 더 눈뜨게 했는지도 모른다. 너그러운 그늘이 오히려 우리를 움직인다. 최후의 죽음을 상징하는 듯한 이 어둠은 그의 품으로 들어오겠느냐고 나직이 묻는다. 그리고 이어서 아직 들어올 생각이 없으면 더 놀고 오라고 말하는 그 음조에는 어머니의 자애로움 같은 것이 들어있다.
‘시토 수도원의 달은 중천에 솟아올라/그곳에 머무르며 어둠의 큰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여름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앗아갔다/그러나 밤은, 유예는, 침묵은 앗아간 것보다는 준 것이 더 많았다’
여기서 ‘밤’이 은유하는 의미는 단순한 일몰 후의 안식 같은 어둠이 아니다. 어둠의 역사(役事)를 시작하는 어둠이다. 낮의 크고 작은 가치들을 밤은 모두 같은 크기로 만들어놓는다. 마지막 어둠에 한숨짓지 않는 가치들이 있을까. 그러나 이 허무는 균평화(flattening)라는 단어로 인해 비감에 싸였던 허무에서 유머러스한 허무로 모습이 바뀐다. 낮엔 그렇게도 크게 보였던 어떤 가치들이 이 어둠 앞에서는 그렇게도 우스꽝스럽게 작을 수가 없다. 사실 여름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고 너무 많은 것을 앗아갔다. 여름이 우리의 젊음이고 욕심이고 야심, 무모한 경쟁 등이라면 우리는 그간 이러한 것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시달림을 당했으며 정력의 낭비를 보았는가. 차라리 말이 없고 모든 것을 유보하는 침묵이 더 많은 것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두 행이 특히 우리의 마음을 잡는 것은 우리의 상식을 깨는 보드라운 역설 때문만이 아니라 비움의 깊은 울림이 우리의 허한 내부를 포근히 감싸안기 때문이다.
5.
어떤 나무들
이들 놀랍다
각각 이웃에 닿아 아직도 언어가
본연의 언어기능을 해낼 수 있는 양.
오늘 아침 우연히
세상과 동의하는 만치 세상으로부터 떨어져서
만나는 너와 나, 갑자기
나무가 일러주려고 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이웃해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곧 닿을 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 있고 설명할 수도 있는 존재
이러한 아름다움이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그냥 주어져서
이렇게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기쁘다
소리가 가득 찬 침묵
겨울 아침 미소의 합창이 가득한 화폭
어질어질한 빛 속에 감동되어 우리의 시간은
거룩한 침묵을 입는다. 웅변 같은 침묵을 입는다
Some trees
There amazing: each
Joining a neighbor, as though speech
Were a still performance.
Arranging by chance
To meet as far this morning
From the world as agreeing
With it, you and
Are suddenly what trees try
To tell us we are:
That their merely being there
Means something; that soon
We may touch, love, explain.
And glad not to have invented
Such comeliness, we are surrounded:
A silence already filled with noices,
A canvas on which emerges
A chorus of smiles, a winter morning.
Placed in a puzzling light, and moving,
Our days put on such reticence
These accents seem their own defense.
언어는 이웃을 잇는 고리이다. 모둔 생명적 통신을 가능케 해주는 고리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그 기능을 잃었다. 그런 이웃도 없게 되었거니와 언어 자체도 본래의 그 기능을 잃었다. 그러나 나무들은 아직도 다정한 이웃을 이루며 조용한 본래적 언어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조용한 수행(still performance)’으로 표현한 나무들의 삶, 그것은 어떤 것일까. ‘세상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져야 세상과 합의가 된다’는 그 거리는 또 무엇일까. 그것은 나무라는 상징물을 통해서 참다운 비움의 자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참다운 비움의 자리는 참 언어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들이 제거된 자리로써 일상의 굳은 눈에는 그저 놀라울 수밖에 없는 자리이다. 다시 말하면 나무들이 오히려 시인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이웃해있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금시 닿을 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 있고 설명할 수도 있는 존재‘
참다운 시란 그냥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닿음’과 ‘사랑’과 ‘통성’이 되는 활기찬 침묵의 언어이다. ‘소리가 가득한 침묵/겨울 아침 미소의 합창이 가득한 화폭’ 같은 침묵이 시의 본 모습이라고 그는 나무를 빌려 외치고 있다. 기교로 매질을 해놓는 듯한 이십세기 후반의 서양 시단에서 이런 큰 숨결의 시인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반가움이 아닐 수 없다.
김동호
․1934년 충북 괴산 출생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바다>, <꽃>, <피뢰침 숲속에서>, <시산일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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