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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문화산책/최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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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2,214회 작성일 06-11-20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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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석의 유토피아
―2004년 상반기 공연을 보고―


최승연


1. 잘 먹고 잘 살기
바야흐로 ‘웰빙(well-being)’의 시대가 열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웰빙에 관련된 정보들은 의식주의 차원을 넘어서서 사고방식의 웰빙까지 조장하는 듯하다. 지금까지 영위하던 삶의 방식은 대부분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웰빙의 기치 아래 탄생되는 것들은 ‘새로운 것’ 혹은 ‘가치 있는 것’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그 수많은 지침들을 일일이 따르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이지만, 사람들은 무방비상태로 각각의 지침에 머리끝까지 몸을 담그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마치 그 대열에 끼지 않으면 홀로 불편한 삶을 감수하겠다는 선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독해 보인다.
‘웰빙’의 어원은 만족, 안녕감(安寧感) 등의 의미망 안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 본래적 의미는 실제 현상 속에서 그 중립적 태도를 약간 벗어난다. 개인의 만족도는 저마다 편차가 있기 마련이나, 각종 정보들은 그 지침이 가리키는 대로 따르는 것이 웰빙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못 박는다. 이 표준화된 가치는 대부분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에 집중되어 있다. 즉 생존의 문제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이제 원자화, 파편화된 개인이 상대적으로 더 나은 삶의 질을 영위하기 위하여 표준적 삶의 가치를 ‘소비’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 화두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대를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일률적으로 제시되고, 그것에 폭넓은 동의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만큼 안도감을 선사하는 일이 또 있을까. 게다가 우리는 ‘소비’만 하면 그 대열에 쉽게 합류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에도 여전히 ‘만족’하지 않고 올곧게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노연극인이 눈에 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사회로 향해 있다. 연극이 가진 원초적 에너지를 믿고 있는 그에게, 연극을 통한 대사회적 전언의 전달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혀 온 의무였다. 웰빙 열풍으로 행복해 보이는 이 시대에도 오태석은 여전히 사회와 개인과의 길항적 관계를 의식한다. 그래서 목화 창단 20주년 기념작으로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이하 「심청이」, 2004년 1월 16일~2월 1일, 아룽구지/앵콜공연 2004년 5월 7일~5월 30일, 아룽구지)와 「자전거」(2004년 2월 13일~4월 4일/ 앵콜공연 2004년 6월 4일~7월 4일, 아룽구지)를 선정하는 데에는 조금의 주저함이 없어 보인다.
2. 밝음/어두움
「심청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조도(照度)는 밝고 화려하다. 이에 반하여 「자전거」는 어둡고 소박하다. 현사회의 병폐를 극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배경과 우리민족의 내밀한 아픔을 초논리적으로 추체험하기 위한 배경은 이렇듯 대비적이다.

밝음과 어두움의 교직
고전(classic) 속 효(孝)의 대명사인 심청이는 오태석의 손에 의해서, 초연 후 14년이 지난 2004년에 다시 현대로 끌어 올려졌다. 1990년 심청이가 경험했던 한국사회의 모습은 공중전화를 오래 건다고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이는 사회였다. 그것은 바로 세기말에 이른 성급하고, 메마르고, 냉정한 사회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컨텍스트는 「심청이」에서 정세명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으로, ‘꽃다운 처녀(창녀)’들이 빚에 허덕이다가 결국 옥쇄하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화재로 얼굴이 얽어버린 정세명이 ‘움직이는 백가면’이 되어, 분풀이의 대상이 된 채 손님의 공을 수없이 맞으면서 돈을 버는 모습은 매우 처절하고 극적이었다. 특히 공을 맞는 순간 몸에서 뿜어 나오던 물줄기는 피로 환치될 수 있기에 충격적인 느낌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다.
이것을 전부 목격하고 ‘다시 바닷물에 몸을 던졌던’ 심청이가 2004년에 또 다시 한국사회를 경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기말적 징후를 벗어버리고 밀레니엄을 맞이한 우리에게 환하게 다가오던 새로운 세계가 환상의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나서 내놓은 실체를 마주한 우리의 표정은 어떠했던가. 구세대와 신세대, 보수와 진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와의 갈등은 마치 빙하의 크레바스(crevasse)처럼 깊고 아득해져만 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그래서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다. 서울의 젖줄기라 불리는 한강은 긴긴 세월 속에서 역사의 부침을 고스란히 감내해 왔지만, 특히 2004년에는 위와 같은 갈등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자의로 생을 마감하려는 사람들을 맞이하느라 매우 바쁜 행보를 보여야 했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시선을 끈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표면적 이유로 내세우고 자신의 아이들에게 수면제를 몰래 먹여 한강 속에 던져 넣은 한 아버지의 행태였다. 한국사회의 한쪽에서는 건강을 위한 정당한 ‘소비’가 극단적인 웰빙 물결을 타고 번지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휴머니티가 완전히 거세된 말라비틀어진 내면 풍경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 바로 2004년의 한국의 모습인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이는 것과 자신의 아이들을 물 속에 던져 넣을 수 있는 심성은, 비록 양태는 다를지라도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인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요하는 극단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이유로, 「심청이」의 용왕은 저 고요한 바다 속 신화 세계에서부터 심청이와 함께 이 시끌벅적한 현대 사회로 다시 한 번 유람을 나오게 된다. 인간성 회복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살아온 우리는, 그들을 마주하면서 그 희망이 전복되다가 또 다시 부활하는 것을 감지한다.
2004년 「심청이」는 화려하면서도 떠들썩하다. 정세명이 부푼 꿈을 안고 서울에 올라와 허드렛일을 하며 연명하는 모습은 마치 시장통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전달하고(이 장면은 정세명이 후라이팬을 파는 상인에서, 앵콜 공연 당시 야채 써는 간단한 기계를 파는 상인으로 약간의 변모를 거쳤다), 유원지의 점멸하는 불빛과 보조원, 심청이의 춤은 호객행위에 정신없는 미니스커트의 홍보도우미들을 연상시키며, 오색찬란한 불빛 아래 검은 커튼을 젖히고 무대 상층에서 유유히 등장하는 창녀들의 모습은 관객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하다. 특히 힘찬 움직임을 나타내는 빠른 비트의 음악을 배경으로 하여, 유원지에서 선상(船上)으로 재빠른 무대 전환이 이루어진 후의 창녀들의 무대는 값싼 분 냄새가 진동하는 화려함으로 구석구석 칠해져 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어 보이는 정세명의 한 가닥 희망인 ‘소 사서 금의환향하기’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창녀들과 새우젓을 담자며 환호하는 장면은, 앵콜 공연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더 확장되어 이 자리에 창녀들의 군무가 삽입되기에 이른다. 무대의 상하층을 가득 메운 창녀역의 여배우들은 일제히 붉은 고무장갑을 끼고 유행가 반주에 맞추어 랩으로 새우젓을 담자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마치 한편의 CF를 보는 것 같은 이 장면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과장된 밝음’을 극점까지 끌어올린다. 현사회의 단면들을 형상화하는, 빠른 전환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장면들은 이렇듯 밝음과 화려함으로 겹겹이 치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 중심부에는, 극이 진행될수록 짙어져가는 쓸쓸함이 붉은 입을 벌리고 서 있음이 감지된다. 사이사이 ‘어두움’ 속에 갇힌 몇 개의 장면이 대비적으로 끼워 넣어짐으로써, 그 밝음은 어두움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된 전략이었음이 드러난다. 수평의 밝음과 수직의 어두움이 교직되면서 작품의 무게중심이 서 있는 지점을 알 수 있게 된다.
‘어두움’에 속한 장면은 인수와 세명이 화염병을 제조하는 장면, 화재로 얼굴을 다친 세명이 끔찍한 고통 속에서 거즈를 떼어내는 것을 심청이가 바라보는 장면, 세명이 창녀들에게 TV인터뷰가 임박함을 알리자 자신들의 쪽방에 들어가 화장을 고치는 장면, 창녀들이 다같이 선상에 올라가 옥쇄하는 장면 등으로 제시된다. 불법 화염병 제조 장면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장면은 작품의 중심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명이 소를 사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거즈를 떼어내며 행복했던 과거를 돌이키던 그의 모습에서 제시된다. 작품 안에서 가장 넉넉하고 여유롭고 행복한 미감을 선사하는 것이 바로 이 장면이다. 고향에서 소를 먹여 나름대로의 성공을 거두고, 나아가 핑크빛 미래를 꿈꿀 수 있었던 세명의 과거가 그의 긴 독백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의 과거 회상 장면은 세명과 심청이가 위치한 곳(무대 중심부)에만 조도가 낮은 조명이 사용되고, 나머지 부분은 어둡게 처리되어 집중감을 높이는 빛의 대비적 효과를 이용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 행복한 시절이 세명의 끔직한 고통 속에서 회상된다는 점이다.
2004년 「심청이」의 백미를 꼽는다면 창녀들이 쪽방에서 화장하는 장면이 선택될 것이다. 창녀들의 어마어마한 빚을 갚아줄 독지가를 기다리는 TV인터뷰를 위하여 그들은 조악하지만 곱게 화장을 한다. 무대를 가득 메운 종이상자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작은 방으로 변신하고, 그 안에는 홍등가를 연상시키는 조명이 알록달록 달려 있다. 오태석은 이 장면을 위하여 무대 전체의 조명은 어둡게 하고 쪽방에서 흘러나오는 색색의 빛으로 무대를 물들여 놓는다. 이때 관객은 각자의 방에서 치장하는 여배우들의 측면을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들여다보게 된다. 바로 이전까지 이어지던 떠들썩하던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무대는 스톱모션에 걸려 있는 듯 매우 느리게 움직인다. 배경음악으로 쓰인,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러시아 가수 이반 레브로프(Ivan Rebroff)의 높은 음색은 무대 전체를 음울한 기운으로 감싸고 돈다. 결국 이 장면은 우리에게 인간의 ‘비극적 숙명’을 깨닫도록 도와주고 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인간이 품고 살아야 하는 희망과 그것의 실현 가능성을 끊임없이 타진해야 하는 운명을 말이다. 창녀들이 화장을 위하여 움직이는 손놀림 속에, 그들의 순진한 희망이 담겨 있기에 그 비극적 미감은 더욱 고조된다.

마지막의 ‘어두움’은 “한 장 빛바랜 사진모냥 정지”된 창녀들의 옥쇄장면이다. 구원의 손길이 결국 닿지 않자 47명의 창녀들은 다같이 바다에 투신하기로 결정한다. 정세명과 첨예한 갈등을 보이던 왕길자도 운명을 절감하고서 치마를 들쓴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은 죽음이었지만, 이들의 죽음은 이러한 표면적 의미 외에 심층적 의미도 투사한다. 심청이가 창녀들을 위하여 다시 바다에 빠져 세계와의 교유를 시도하였지만, 남은 것은 “억십만 금”이 아니라 이 대열에 끼겠다는 14세 된 어린 창녀의 전화일 뿐 아무것도 없었다. 대속물에 이은 ‘구원자’로서의 효의 화신 심청이마저도 현 사회에서는 그 신화적 기능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여기에는 세계 속의 개인은 점점 더 고립되어만 가고, 세계는 그런 개인을 냉혹하게 바라본다는 작가의 비극적인 시선이 내재해 있다. 이후 이어지는 창녀들의 옥쇄장면은 이러한 작가의 시선을 강화시켜 준다. 그런데 빛바랜 사진처럼 정지한 그 장면에서 작품이 끝나면, 이상하게도 이면에서 은근히 배어나오는 작가의 희망 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꽃 같은 처녀들이 다같이 바다에 뛰어들면, 많은 사람들이 눈을 뜨고 세상을 다시 바라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오태석은 종종, 이 작품이 더 이상 공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알듯 말듯한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두움 속에 침잠된 것들
「자전거」의 윤서기는 어느 날 밤 잠시 기억을 잃는다. 밤길을 가다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고열에 시달리고 의식이 흐려지는 증상을 겪게 된다. 그래서 작품은 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윤서기가 동료 구서기에게 결근계를 작성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결근계를 작성하기 위하여 윤서기의 ‘접혀진 기억’을 구서기와 함께 펼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화려하고 밝은 분위기의 「심청이」가 작품에 방점을 찍기 위하여 ‘어두움’을 선택했다면, 「자전거」는 대부분 어두움 속에 묻혀 있다. 공간적 배경이 ‘시골 밤길’인데다가, 엉겨 붙은 윤서기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된다. 우리는 그 안에서 도깨비불처럼 반짝거리는 망자(亡者)들과 마을사람들(1983년의 초연과 달리 2004년 「자전거」는 경상도 말로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마을은 공연대본에서 ‘거창’으로 설정되어 있다), 몇 명의 여인들과 문둥이 부부를 만난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하나의 논리적인 인과관계로 묶여 있지 않다. 윤서기의 기억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이기에 구서기와 함께 다만 듬성듬성 마주칠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안에서 세 가닥의 이야기 줄기를 찾을 수 있다. 첫 번째는 윤서기의 당숙이 인공 때 등기소에서 불타 죽은 사람들의 제삿날만 되면 사금파리로 얼굴을 긋는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거위집 한씨 가족과 솔매의 문둥이 부부에 얽힌 이야기이며, 마지막은 ‘소가 뛴다’는 내용이다. 윤서기가 정신을 잃은 날은 공교롭게도 등기소에서 불타 죽은 선조를 모시는 마을 사람들이 다같이 제사를 지내는 날이었다. 인공 때 마을을 대표하는 127명의 사람들이 반동분자로 몰려 등기소에서 처형된 날이 바로 그날이었던 것이다. 이때 두 명의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윤서기의 당숙이다. 죽음의 공포를 내건 강압에 못 이겨 등기소에 불을 지른 사람이 바로 당숙이었고, 이 때문에 그는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제삿날마다 사금파리로 얼굴을 그어 자해하는 것은 그가 지녀온 죄책감의 정도를 보여준다. 당숙이 울부짖으면서 얼굴에 상처를 내는 이 장면은 매우 극적이면서 충격적이다. 2월 공연에서는 이 장면을 두 번 삽입하여 강조의 효과를 노렸으나, 의도에 비하여 그 효과는 사실 그리 크지 않았다. 앵콜 공연 당시 오태석은, 윤서기가 당숙을 설명하는 앞부분에 삽입되었던 자해의 장면을 삭제하고 결말부분의 장면만 남겨 놓았다. 이로써 당숙의 얼굴에서 떨어지던 검붉은 피가 말해주는 죄책감의 정도는 훨씬 크게 다가왔다.
문둥이 부부가 기거하는 공간은 무대의 가운데, 어두컴컴한 지하이다. 일상적 공간이 아닌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격리된 공간’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물리적으로 가장 어둡고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들이 ‘저’ 깊은 곳에서 ‘이’곳으로 나올 때는 거위집 한씨 집에 입적된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긴 시점에서이다. 간질로 고생하는 부인과 20년이 넘게 따로 지내는 한씨 집에 문둥이 부부는, 아이들을 전부 입적시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달라는 희망을 품는다. 그런데 아이들이 본인들의 출생 배경을 알게 되고, 11살짜리 아이는 천형(天刑)의 짐을 내려놓으라는 언니의 말을 듣고 기어이 집을 나가버린다. 문둥이 부부는 ‘이’곳으로 나와 아이의 마음을 돌려놓으려고 처절하게 몸부림친다. 집에 난 화재로 몸이 타버린 문둥이 엄마는, 심하게 훼손된 몸을 이끌고 아이를 목 놓아 부르지만 아이는 이런 엄마가 무서울 뿐이다.
이 두 줄기의 이야기는 나란히 병치되어 전개된다. 작품의 결말을 마주하기 전까지 두 줄기의 상호연관성은 전혀 발견하기 힘들다. 그러나 배우들의 등퇴장로인, 왼편으로 설치되어 있던 무대 위편의 막이 오른쪽으로 순식간에 옮겨지고 불이 타는 가운데 당숙과 문둥이 엄마, 그리고 등기소에서 죽은 사람들의 혼령이 등장하면 무대는 서서히 이들이 지녀온 ‘아픔’으로 소용돌이친다. 이데올로기의 차이 때문에 같은 태생의 사람들끼리 서로 죽고 죽여야 했던 지난날의 아픔은, 형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던 당숙으로 아픔으로 전해져 오고, 곧이어 그 아픔은 천형을 지고 살면서 인륜을 스스로 끊어야 했던 문둥이의 아픔으로 전환된다. 여기에 문둥이 엄마의 병을 낫게 한다는 명목 하에 스스로 부모 집에 불을 냈던 처녀(11살짜리 아이의 언니)의 아픔이 더해진다. 모든 비일상적․초논리적인 것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제삿날, 시골 밤길에서 소가 난데없이 뛰고 소의 광란이 끊어놓은 윤서기의 기억 속에는 이러한 아픔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체불명의 고열과 의식착란의 원인은 소에 받힌 물리적 상흔보다 근원적인, 천형처럼 지고 살아야 하는 민족전쟁의 상흔이었고, 구서기의 도움으로 윤서기는 스스로에게서 그 상흔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전거」의 어두움은 민족적 상흔의 모습이다. 세월의 흐름은 잠시 그 구체적 모습을 잊게 만들기도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천형처럼 그 아픔을 어깨에 지고 있다. 어두움 속에 침잠해 있는 그 기억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분단의 현실 속에서 다양한 양태로 부활한다. 어린 나이에 전쟁을 겪었던 오태석에게 ‘전쟁’은 활화산처럼 몸 안에서 타오르는 화두이며, 언젠가는 극복되어야 할 구세대의 유물이다. 2002년과 2003년에 올려졌던 신작 중 「내사랑 DMZ」와 「앞산아 당겨라 오금아 밀어라」도 역시 한국전쟁을 소재로 다루고 있는데, 두 작품 다 결말에서 ‘화해’의 포즈를 취하고 있어 「자전거」와 매우 상이한 모습을 보인다. 전쟁으로 인한 상처의 깊이는 절대로 치유될 수 없는 문둥이의 그것과 같다는 「자전거」의 시선은, 이제 그것이 극복되어야 할 때라는 작가의 미래지향적 목소리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3. 틈새와 여유
목화 20주년 기념작의 첫 시리즈인 「심청이」와 「자전거」는 모두 사회의 격랑에 휩쓸리는 개인을 다룬다. 그 개인은 개성적 주체라기보다, 대표성을 띠고 사회를 경험하는 주체이다. 순진했던 정세명이 도시의 반휴머니티를 경험한 후 그것에 물드는 모습이라든지, 윤서기가 전쟁의 상흔을 마주하고 그 아픔을 공유하는 모습은, 오태석의 작품에서 ‘사회’가 ‘개인’보다 우세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만, 전자에서 다루는 사회는 매우 시의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면, 후자는 사회가 부과한 근원적인 아픔을 감각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 차이점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오태석이 인식하는 당대의 모습은 분명히 비극적이다. 그것은 부조리극에 경도되어 있던 초기작부터 줄곧 나타나던 세계 인식 태도였다. 그러나 단순히 그를 한쪽으로만 몰아세울 수 없는 것은 그가 지향하는 이상적 세계의 편린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는 점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오태석은 우리네 정서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세계, 혹은 그 가능성이 노정되어 있는 세계로의 복원을 꿈꾼다. 문풍지의 틈새, 너덜거리는 소맷자락, 나무 위에 넉넉하게 달려 있는 까치밥, 조상들의 은덕을 기리는 손길 등이 그 구성요인이 된다. 말라서 붙어버린 가슴을 가진 할머니가 손자를 먹이려고 끓는 듯한 방바닥에 밥사발을 묻어놓는 그 마음이 편안하게 구현되는 세계의 모습을 희망한다. 바로 이것이 그가 항상성과 보편성을 지닌 우리의 고전에서 모티프를 취하여 사회에 경종을 울리길 원하는 생각의 근원이며, 우리의 뿌리 깊은 아픔이 감각적으로 인지되기 위하여 시골의 밤길과 제삿날이 그 배경으로 선택된 사고의 근본인 것이다.
이러한 편린들은 역시 바로 이전의 작품들에서도 엿보인다. 샤머니즘의 에너지로 갈등을 해소해 가는 「내사랑 DMZ」와, 제주도 민속놀이인 디딤불미를 하면서 원한을 풀어가는 「앞산아 당겨라 오금아 밀어라」의 양상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듯 우리 안에 내재해 있지만, 부지불식간에 잊혀진 듯한 그 내밀한 정서가 다시 살아 움직이길 그는 소망한다. 제시된 모델을 따라 먹지는 못해도 넉넉하고 여유로운 심성이 발현되면 잘 살 수 있다고, 그는 굳게 믿는 듯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근래에 들어 목화 배우들의 연기력이 평준화를 벗어난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점을 가리기 위하여 필요 이상으로 배우들이 무대에 꽉 차게 등장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20주년 기념작 세 번째 시리즈로 「백마강 달밤에」가 선정되어 그동안 목화의 무대를 빛냈던 배우들이 영화와 TV에서 귀향, 열연할 계획이다. 이 작품은 ‘연극열전’의 일환으로써, 목화가 아룽구지를 잠시 떠나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둥지를 틀 예정이다. 9월이 기다려진다.


최승연
․서일대, 동의대, 한경대 강사

추천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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