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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특집 디지털시대, 시의 두 가지 면모/윤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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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3,279회 작성일 05-10-19 16:51

본문

디지털시대, 시의 두 가지 면모

윤지영(시인)

1.
우리나라에서 문학, 특히 시의 위기를 운운한 지 어느새 10년이 훌쩍 지났으니 그 논의는 이미 식상할 대로 식상해졌다. 더구나 그토록 무수한 문학의 위기‘설’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어떤 식으로든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간 문학 내부와 외부에 일어난 크고 작은 변화들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또 그것을 생존을 위한 문학의 자기 보호 시스템의 가동으로 보거나 고사절멸의 위기에 처한 시한부적 생존 양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되었건 문학이 이렇게 사지 멀쩡하게 살아남아 있는 것을 보면 정말 따져 물어야 할 것은 디지털시대와 문학의 위기, 혹은 대중문화와 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문학 위기설이 한 시대의 담론을 지배해 온 현상과 그 배후이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토록 무성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문학의 위기를 진단하고 위기에서 구해내야 한다고 외쳤는데도 불구하고 문학은 아직도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는 영상 매체의 후발주자인 정보 기술과 디지털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영상 매체의 위협을 한 번 겪고 난 터인지 어느 정도 내성이 생긴 듯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디지털 기술과 문학의 관계는 영상 매체와의 관계가 그러했듯, 적대적인 대립 관계를 기본 구도로 하여 논의가 이루어진다. 생산품의 질적 저하와 소비층의 양적 감소라는 경제 논리에 근거한 문학 위기설의 뻔한 근거와, 이기느냐 지느냐, 살아남느냐 소멸하느냐 하는 양자택일의 뻔한 질문은 문학정신, 시정신, 진지성, 반성적 사유 등이 문학의 유일무이한 존재 이유라는 관점이 지배하는 한, 문학을 코너에 몰아넣고 있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뻔한 대답만을 마련할 뿐이다. ‘위기는 곧 기회다.’ 궁지에 몰린 약자가 패배 일보 직전에서 극적인 반전을 꾀하게 되는 프로레슬링의 각본처럼 말이다. 심판관은 마지막에 구사일생으로 승리한 문학의 손을 치켜들며 외칠 것이다. 문학이여 영원하라!
그러나 이 글은 문학의 위기설이 문학의 위기를 주장하는 담론의 주체들에게만 의미가 있다는 어느 논자의 입장을 거들거나 어쩌면 문학의 위기 담론이야말로 거대 담론이 사라진 1990년대 이래 우리 문학을 버티게 해준 자양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입증하려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이 글의 시작은 문학의 위기설이 영화, 애니매이션 등과 같은 대중화된 영상 매체의 항(項)을 디지털 매체, 디지털 시대, 디지털 상상력 등이 대신하여 다시 또, 아니 여전히 논의되고 있는 현상에 있다. 그리고 영상 매체를 타자로 내세워 문학의 위기의식을 한껏 고취하는 논의들이 그 말미에 비장하게 제기하는 ‘그렇다면 이 시대의 문학은 어떻게 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들이 과연 실효성 있는 대답을 제시했던가 하는 회의적인 물음도 이 글의 방향을 잡는 데 중요한 몫을 한다.
이러한 논의들이 이렇다 할 만한 대답을 생산해내지 못한 원인이 문제 제기 자체에 내재해 있다고 보면서 이 글은 디지털 시대의 문학, 특히 시에 대한 논의의 방향을 조금 수정해 보려고 한다. 말하자면 디지털 기술이 시의 존립을 위협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이냐 하는 소모적인 논의가 아니라, 디지털 기술이 시의 영역에 초래한 변화는 무엇이며 그 의의는 또 무엇인가에 집중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진단이 있고 나서야 향후 어떠한 변화들이 있을 것인가 하는 예측과 또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가 당위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문학의 위기설이 논의를 위한 논의가 아니라면 디지털 상상력, 혹은 디지털 기술이 새롭게 개척하게 될 정신의 지평, 말하자면 디지털 상상력에 의해 찬탈되었다고 간주되는 진지성 대신 우리가 조우하게 될 새로운 정신의 영역에 대해서 언급해야 공평할 테니 말이다.

2.
디지털 기술과 시에 관한 보다 생산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논의를 구분하여 진행할 필요가 있다. 거칠지만 적극적인 차원에서의 접목과 소극적인 차원에서의 접목으로 층위를 나누어 디지털 기술이 우리 시의 현재와 미래에 미칠 영향을 살펴볼 때 그 가능성과 한계를 보다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편의상, HTML이나 자바 스크립트, 플래시 같은 컴퓨터 언어를 이용하여 시를 생산하고 향유하는 행위를 디지털 기술과 시의 적극적인 접목이라고 한정 지어보자. 말 그대로 언어를 바꾸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디지털 문학, 혹은 사이버 문학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출현하지 않았다거나 아직 미흡한 단계라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신범순, 「사이버 시대 시의 유령적 초상과 창조적 고민의 소멸」, 김종회․최혜실 편저, ꡔ사이버문학이 이해ꡕ(집문당, 2003); 이진우, 「한국의 사이버 문학 현황」, 류쥰형, ꡔ현대 문학과 정보화 사회ꡕ(도서출판 형설, 1999)> 특히 서사에서는 비교적 다양한 실험들이 시도되고 있으나 시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과연 시퀀스와 시퀀스의 이어짐을 기본 속성으로 하고 선택과 배제라는 원리를 작동 속성으로 하는 서사는 선택에 따른 재배열을 기술적으로 구현해 놓은 하이퍼텍스트와 접점을 찾기 어렵지 않으며, 이를 통해 모든 소설가들이 그토록 염원해 마지않던 상호 소통, 열린 결말, 다양한 가능성 등을 실제로 구현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반해 시의 경우는 디지털 기술과 그 생산물을 소재로 다루는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시와 디지털 기술의 진정한 만남은 ‘나의 말(言)이 너에게 흘러간다’고 컴퓨터 한글 자판으로 모니터 위에 쓰는 것이 아니라 HTML 같은 디지털 언어를 이용하여 가시화하는 것이다. 가령, 좌우에 색깔이 다른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왼쪽의 동그라미 한 가운데서 조그만 글자들이 줄지어 생겨나서 물결처럼 굽이치며 오른쪽의 동그라미의 가운데로 빨려 들어가는 그런 이미지 같은 것 말이다, 시의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가 형상화라고 한다면 이보다 훌륭한 형상화가 어디 있겠는가. 적극적인 차원에서 디지털 기술을 받아들인다면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하는 감정은 다음과 같이 만들어야 할 것이다. 투명한 유리컵에 가득 찬 물이 마우스를 갖다 댈 때마다 넘칠 듯 잘름거리는 플래시 영상과 격정적이면서도 감미로운 음악.
그러나 진정한 디지털 문학을 위해서는 이들 디지털 언어를 문자 언어만큼 자유자재로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견해<정과리, 「유령들의 전쟁=디지털의 점령」, ≪문학과사회≫, 1999, 가을; 조용복, 「디지탈 혁명과 시의 미래 혹은 사치­ 시적 근대성 비판」, ≪시와사상≫, 2000, 봄. >에 동의하면서도 현실적으로 과연 가능한가 하는 물음과 더불어, 문학이란, 특히 시란, 언어를 떠나서 생각할 수가 없다는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시인이 디지털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는 이러한 지적이 과연 근본적이고 타당한 것인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까지 우리 문학계에서 생산된 사이버 문학, 혹은 디지털 문학이라는 것이 ‘사이버’ 혹은 ‘디지털’ 문학이지 사이버 혹은 디지털 ‘문학’은 아니라고 하면서 ‘사이버 문학은 없다’고 주장한 김재인의 지적은 주목할 만하다.<김재인, 「사이버예술의 도전 - 새로운 예술가를 기다리며」,(http://www.cyberism.co.kr/forum/frame.htm)> 그의 주장의 논지는 결국 이와 같은 적극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디지털 기술과 문학과의 접목은 새로운 형태의 예술, 새로운 장르의 탄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인데, 프로크루테스처럼 심술궂게 자신의 침대에 맞추어 새롭게 태동하는 움직임들을 재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전통과 역사는 삼촌에게서 조카로 계승이 된다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선언은 고전적이긴 하지만 문학사에만 적용되는 말은 아닐 터, 문학 내에서 새로운 장르가 출현하는 현상 뿐 아니라 문학, 미술, 음악 등등 거대 장르들이 서로 간섭하며 새로 탄생하는 예술사 전반에 걸쳐 유효한 통찰이다. 이때 새로운 기술, 새로운 매체의 출현이라는 물질적 토대의 변화는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이 됨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적극적인 차원에서 디지털 기술을 수용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시의 소통 방식에 관한 것이다. 시의 소통 방식에 일어난 변화는 문학 위기설의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정반대의 주장을 위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한편에서는 문학 소비자 층의 감소, 따라서 곧 문학의 위기를 디지털 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그에 의지하여 생겨난 다양한 문화 현상들 탓이라고 본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디지털 기술이 갖고 있는 상호 작용적, 즉시적, 공간 초월적 소통 방식이야말로 엘리트적이고 비민주적이며 권위적인 시의 생산과 소통 과정을 뿌리부터 흔들 것이라고 기대한다.
과연, 디지털 언어를 이용한 적극적인 접목이 서사에 비해 시가 미미하지만, 그 소통의 양적인 증가에 있어서만큼은 서사를 훨씬 능가한다. 그리하여 어쩌면 다른 어떤 시대보다 시의 유통이 활발할지도 모른다. 인터넷상에서 동호회를 만들어 좋은 시를 추천하고, 자작시를 발표하고, 서로의 시를 평해주는 이러한 사이트들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언제 어디서나 문학의 생산과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고, 일방적이고 비동시적인 자극과 반응의 흐름을 상호적이고 동시적으로 바꾸어놓는다. 이러한 주목할 만한 현상에 대해 문학 왕국 내부의 반응은 미묘하다. 시의 소비자가 늘어난다는 점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으나 고귀하고 영예로운 선지자의 지위가 도매금에 떨이로 팔려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문학중심주의, 시중심주의가 지나치게 원리주의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과연 디지털 기술이 소문대로 시의 생산과 소비에 혁명적인 변화를 초래했는가에 대해서는 따로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고 누구나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만, 그리고 그렇게 발표된 글에 대해 독자의 반응을 보다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이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기성 문단에의 진입이며, 기성 문단으로부터의 인정이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디지털 매체가 약속하는 이상적인 문화의 가능성이 서사보다 시에서 비교적 뚜렷하게 감지된다고는 하지만 그 안에서도 눈에 띄는 차이들이 보인다. 조금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다 싶은 사이트들은 비교적 큰 출판사나 잡지사와 연계되어 있어 인터넷을 통한 유명 시인들의 첨삭 지도가 이루어진다. 창작 교실을 on-line상으로 옮겨놓은 듯한 이러한 사이트들은 구성원들 간의 동등한 수평관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의 전형을 가르치고 배우는 공간으로써 장르와 장르 관습, 그리고 좋은 시와 나쁜 시 등에 대한 기성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문학의 사회화 공간이라 할 만하다.
인터넷상에서 조성된 동인회이건, off-line상의 한계를 on-line을 통해 보충하려는 동인회이건 그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동인회 사이트의 게시판들을 살펴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신춘문예나 각종 신인상, 그리고 문학상 등에 관한 정보들을 공유하는 게시판이 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준다. 진정 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가 모색하고, 시를 문화운동으로 확산시킬 궁리를 하기보다 기성의 문단에 당당하게 입성할 수 있도록 품앗이를 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혐의도 이로부터 나온다.
그러니 시에 고귀한 의미를 부여하고 시작(詩作) 행위에 거창한 사명감을 갖고 있는 많은 시인들은 디지털시대에 시가 과연 살아남을 것인가, 자신의 시쓰기 작업이 과연 가치가 있을 것인가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무엇보다 시와 시인에 대한 평민들의 동경은 고래로부터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치지 않고 있으니 누구에게 개방적인 디지털 환경은 시를 보다 널리 확산시키고 접근하기 쉽게 만들어줄 것이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시가 좋은 시이고, 어떤 시가 말도 안 된다고 결정 내릴 시에 대한 기득권을 당신이 갖고 있는 한, 그리고 시의 왕국에 편입되기를 바라며 당신의 한 말씀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한, 시란 아무나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신화는 쉽게 깨어지지 않을 것이며, 디지털 매체는 오히려 이러한 신화를 공고하게 해주는데 훌륭한 도구가 되어줄 것이니 말이다.

3
소극적인 차원에서 디지털 기술은 몇몇의 소수를 빼놓고 대부분의 시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바이다. 원고지가 아니라 컴퓨터로 시를 쓰는 행위를 말한다. 고작 글쓰기 도구의 변화에 불과한 것을 이처럼 비중 있게 다루는 것이 과도한 의미부여는 아닌가 싶기도 하겠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마샬 맥루한의 유명한 명제 ‘매체가 곧 메시지’라는 말로 대신하자. 월터 옹이나 데리다도 그 방향은 다르지만 일찍이 말하기에서 글쓰기로 표현 매체가 달라진 것에서 인식의 변화까지 읽어내지 않았던가.
90년대 말 시단을 휩쓴 시적 경향의 눈에 띌 만한 변화들이 포스트모더니즘, 세기말적 증후군, 해체적 징후 등의 정신사적인 맥락에서 설명이 된 것은 이미 오래지만, 직접적인 물질적인 차원에서 일어난 매체의 변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90년대 새롭게 등장한 시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어법상의 특징을 환유적인 것이라고 할 때, 시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은유적 어법을 환유적 어법이 대신할 수 있게 된 일정한 원인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컴퓨터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소재를 찾고 글로 옮기는 시쓰기 과정이야 시인들마다 다르겠지만, 또한 컴퓨터로 시를 쓴다고 하여 모든 시인들이 같은 방식으로 쓰는 것은 아니겠지만, 더구나 컴퓨터로 쓴다고 하여 모든 글쓰기의 과정에서 동일한 현상이 발견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시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은유적인 어법에 기대고 있는 것은 손으로 종이 위에 쓰는 방식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은유적인 어법이 이중적인 것들 간의 유사성과 상이성의 발견을 주요한 사고 작용으로 한다고 할 때, 이를 위해서 깊은 사색과 통찰력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다. 사고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는 글쓰기의 느림은 이런 점에서 시를 더욱 옹골지고 알차게 해준다.
그러나 많은 논자들의 지적과 같이 속도를 생명으로 하는 컴퓨터로 글쓰기는 이와 같은 사색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박주택, 「컴퓨터 글쓰기와 시적 사유의 변화」, ≪시와사상≫, 2002, 겨울호. > 종이 위에 글쓰기가 어느 정도 완성된 시를 받아 적는 것이라면, 컴퓨터로 글쓰기는 한두 줄의 착상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면서 시를 즉각적으로 자아내는 것에 가깝다. 마치 거미가 실을 뽑아내듯이, 자신이 방금 자판으로 쳐 넣은 구절을 보면서 즉각적으로 다음에 와야 할 말을 잇는다. 이는 지우고 고쳐 쓰는 것이 용이하다는 점, 한눈에 시의 형태가 들어온다는 점, 복사하고 붙여넣기가 용이하다는 점 등과 같은 컴퓨터 글쓰기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편리함들 덕이다. 적절치 않은 부분은 'delete' 키나 ‘백 스페이스 바(←)’ 하나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삭제한다. 교정부호 없이 완전히 삭제되고 그 위에 다시 쓰여진 구절들은 자신이 본래 쓰려고 했던 것에 대한 기억마저 말끔히 지우고, 새롭게 고쳐 써 넣은 그 구절이 원래 쓰려고 했던 바로 그 구절인 양 바로 그 지점에서 다음에 올 구절을 불러들인다.
봉합의 흔적마저 말끔히 지워주는 이러한 기능뿐 아니라 아무리 긴 구절이라도 ‘F3'의 블록 지정을 하여 ’Ctrl+C'의 단축키를 누르면 본래 있던 자리에서 떼어낼 수 있으며, 'Ctrl+V' 단축키는 그렇게 복사한 구절을 원하는 자리 어디에든 통째로 갖다 붙일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러한 복사 기능은 시의 길이를 길게 만들 뿐 아니라 전통적인 서정시에서 볼 수 있는 반복과는 다른 반복을 보여준다.

그녀의 눈물 한 방울이 뼈 속으로 떨어진다
돌이 되어 떨어진다
알고 있니? 알고 있니?
뼈 속은 빛나는 밤
돌이 된 눈물은 밤에게 포획되어
별처럼 빛이 난다
알고 있니? 알고 있니?
그녀의 눈물 한 방울이 뼈 속으로 떨어진다.

첫 번째는 그녀의 이름, 두 번째는 나의 눈, 세 번째는 생각,
네 번째는 나에게 오는 밤, 다섯 번째는 별,
여섯 번째는 눈물, 일곱 번째는 바다, 여덟 번째는 그녀의 여름,
아홉 번째는 벌레들, 첫 번째는 그녀의 이름, 두 번째는 나의 눈,
세 번째는 생각, 네 번째는 나에게 오는 밤,
다섯 번째는 별, 사로잡힌 별.

별이 되어 떨어진다
알고 있니? 알고 있니?
별의 표면에 언덕이 솟고
나무들이 자라고
벌레들이 자라고
빛나는 밤을 먹는 짐승들이 자라고
알고 있니? 알고 있니?
그녀의 눈물 한 방울이 뼈 속으로 떨어진다

첫 번째는 그녀의 이름, 두 번째는 나의 눈, 세 번째는 생각,
네 번째는 나에게 오는 밤, 다섯 번째는 별,
여섯 번째는 눈물, 일곱 번째는 바다, 여덟 번째는 그녀의 여름,
아홉 번째는 벌레들, 짐승들. 첫 번째는 그녀의 이름, 두 번째는 나의 눈,
세 번째는 생각, 네 번째는 나에게 오는 밤,
다섯 번째는 별, 사로잡힌 별.
―박상순 「일주일에 세 번」의 전문(≪세계의문학≫ 2004, 봄호)

회화의 성공적인 접목을 시도했다고 평가받는 박상순의 위의 작품은 밑줄 친 부분을 제외하고는 1연과 3연, 2연과 4연의 거의 완벽한 반복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시가에서 반복이라 함은 규칙적인 운율을 만들어 노래 부르거나 읊조리기 좋게 만들어주며, 전통적인 구술 문학에서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정형구들은 구송자의 기억을 도와 이야기를 계속적으로 이어가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담당했다면, 이러한 시에서의 몇 개의 단어만 바꾸어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구절의 연속은 중심 모티프를 이끌어 가기 위한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율에 가까운 흐름을 만들어 시의 뉘앙스와 분위기를 조성하는 핵심적인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구술성을 창출하는 반복이라 할만한 이러한 반복이 가능한 것은 앞서 언급한 편리한 컴퓨터의 문서 편집 기능 덕분이다. 워드프로세서의 사용이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이라면 3연과 4연을 일일이 다시 쳐 넣는 대신 1연과 2연을 각각 블록 지정하여 복사해 놓은 후 부분을 수정했을 것이다.
이런 식의 글쓰기는 인접해 있는 것들 간의 자유로운 연상에 크게 의존하는 것으로써 그 연상의 흐름과 맥락이 반드시 의미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유보다 훨씬 접근 불가능하고 난해한 경우가 많다. 디지털 기술이 만들어준 가상의 공간에서 누구나 시를 쓰고 또 만방에 알릴 시쓰기의 민주화를 가져왔을지는 모르나, 디지털 기술의 편리함은 오히려 시의 소통에 장애를 초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4.
디지털 기술을 소극적으로 수용한 보다 보편적인 예는 컴퓨터로 글쓰기, 혹은 컴퓨터 사용에 관한 경험들을 시적 소재로 받아들이는 경우이다. 이 정도를 갖고 디지털 상상력이냐고 핀잔을 받는 경우가 대개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재가 단순히 소재적인 차원에서의 차용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먼저 디지털 기술이 열어준 새로운 경험의 세계를 그리는 작품들 또한 주로 환유적인 어법을 구사한다는 점을 먼저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물론, 앞서 논의한 환유가 단절과 파편화를 주된 기제로 하는 환유라면 이들 디지털시대의 경험을 시화한 작품들의 환유는 삭제와 생략보다는 인과와 인접이 주된 기제로 작동하는 산문 어법으로서의 환유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환유적 어법이 만들어내는 효과와 그 세계이다. 많은 논자들이 디지털 상상력에 의한 글쓰기가 미메시스와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디지털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인공자연은 주관적 공간이기 때문에 자연을 모방한다는 미메시스적 글쓰기에 대한 회의로 연결된다는 지적이나,< 이용욱, 「인터넷 시대의 서정시」, ≪시와사람≫, 2002. 가을.> 대중 매체나 디지털 매체를 통해서 비춰진 가상 현실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고 세계와 소통한다는 점에서 이제 우리 문학 속에 리얼리티는 없고 버츄얼 리얼리티(virtual reality)만 있을 뿐이라는 지적<하상일, 「미메시스의 거부와 상상력의 위반」, ≪시와사상≫, 2002, 여름.>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를 실제 자연으로, 사이버 공간을 인공 자연에 각각 대응시키는 이원론적 사고도 그렇지만 현실 세계를 물질성과 배타적으로 연결짓는 것에 대해서도 재고해 보아야 한다. 현실 세계가 물질 세계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보드리야르의 언급을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문제의 소지가 있다. 무엇보다 복사와 원본의 구분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 시뮬라르크 시대에 현실 공간과 가상 공간을 대립시키는 것, 더 나아가 각각을 물질적 상상력과 비물질적 상상력의 대립쌍으로 연결짓는 것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비물질적 상상력은 디지털 기술의 혁명적 발전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의 사고와 꿈과 실천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예기되어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말하거나, 유희적이라고 말하거나, 진지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 또한 섣부른 판단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다음 작품들은 흐르는 물 위에 떠가는 꽃잎을 노래하는 것 못지않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는 것 못지않게 현실을 핍진하게 재현하고 있다.

그녀를 아직 구하지 못했다 술통들은 이리저리 구르고 원숭이는
코코넛을 던진다 제발 날 건드리지 마라 부탁에도 불구하고 코코넛 하나가
내 머리를 때린다 이런 제기랄 욕을 하면서 나는 아파한다 혹이 났다 저 녀석
올라가기만 해봐라 나는 나무를 기어오르고 이 기묘하게 생긴 나무는
나에게 너무 불리하다 야 너 내려오지 못해! 나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원숭이는 못 들은 척한다 원숭이는 나무 위에서 코코넛을 던지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다 원숭이도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미
결정되어있다 원숭이는 내려오지 않는다 내가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중얼거리는데, 쾅- 푸른 별들이 반짝인다
먹을 수도 없는 코코넛이 머리를 때린다
에너지가 부족하다 방금 코코넛이 에너지 막대를 반이나 깎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아프잖아 살살 던져 표정에 변화가 없다 원숭이는 어차피
나는 나무를 기어오른다 내 칼은 너무도 짧다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니까 그럭저럭 원숭이를 찌를 수 있게 되었다 푹-
단검으로 원숭이를 찌른다
원숭이는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나무 밑으로 떨어진다
나는 기분이 나빠져서 나무 밑을 본다 뭐 어차피 그렇게 프로그램 되어 있으니까
그녀, 공주를 구하러 가야만 한다 원숭이는 500점이다 보너스까지는 아직 멀었고
에너지는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서정학 「비디오 게임/모험의 왕과 코코넛의 귀족들」의 전문

물론 이 작품이 그리고 있는 공간은 현실 공간이 아니다. 단적으로 ‘프로그램’이라는 디지털 용어에서 이 모험이 동물원이나 아프리카의 밀림 속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컴퓨터나 비디오 게임 내지는 영화나 만화 속의 일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비현실적인 가상 공간의 가상 체험을 가상의 주체를 내세워 그리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상상력과 관련되어 언제나 제일 먼저 거론되곤 하는 이원의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캐나다 토론토의 k가 보낸 첨부 파일을 클릭한다
붉은 장미들이 이슬을 꽃잎에 대롱대롱 매달고
흰 울타리 안에서 피어난다
k가 보낸 꽃은 시들지 않았다
곧바로 나는 인터넷 무료 전화 dialpad를 클릭한다
k의 전화번호를 클릭한다
나는 6589 마일리지 너머로 연결되고 있다
나도 누가 세팅해 놓은 프로그램인지 모른다
―이원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지고 있는 꽃들은 저희들 각각 지상에
내려와야 한다 나는 업데이트된 애기동자꽃을
연다 그러나 애기동자꽃의 서버를 찾을 수 없다는
그곳에서 나는 갑자기 멈추어 선다 막힌 세계
너머에는 광활한 신대륙이 펼쳐지고 있겠지만 창은
금방 벽이 되어 내 앞에 선다
진공 포장되어 장기 보존되고 있는 것이
나일 수도 있다
―이원 「나는 검색 사이트 안에 있지 않고 모니터 앞에 있다」에서

오래간만의 안부를 묻는 편지에서 ‘붉은 장미들이 이슬을 꽃잎에 대롱대롱 매달고/흰 울타리 안에서 피어난다’는 표현은 보고픔과 애절함에 대한 시각적 형상화가 아니다. ‘k가 보낸 꽃은 시들지 않았다’는 표현 또한 오랜 그리움과 보고픔의 감정을 비유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 그려진 장면은 컴퓨터 앞에서 화자가 실제로 보고 있는 장면이다. 두 번째 작품에서 ‘애기동자꽃을/연다’는 표현이나, ‘창은/금방 벽이 되어 내 앞에 선다’는 표현 또한 마찬가지이다. ‘열고 닫는다’나 ‘창’이나 ‘벽’ 같은 표현은 새로운 창을 열 때마다 새로운 공간이 열리는 윈도우즈 운영 체제나 클릭 하나로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기도 하고 또 방화벽에 부딪히기도 하는 인터넷시대의 관용어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서정학의 작품이나 이원의 작품은 오히려 보이는 것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을 뿐이며, 따라서 새롭게 창조한 것이라고는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선택의 축을 결합의 축에 투사한 것이 시’라는 전통적인 정의에 따르면 이 작품은 결합의 축을 결합의 축으로 고스란히 옮겨다 놓은 산문적 진술에 불과하다.
이들 작품이 시적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시적인 어법의 탁월함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먼저 새로운 현실이 열리고 있음을 포착한 기민함, 그리고 그 현실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또 그 체험을 추체험하여 언어화하는 진지함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물질적 현실과 비물질적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원본과 복사본의 구별이 무의미해지고, 무엇보다 그토록 견고하고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주체가 신기루처럼 희미해지는 디지털시대의 불안한 징후들을 금속성의 차가운 언어로 그려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뭐 어차피 그렇게 프로그램 되어 있으니까’라는 서정학의 독백이나 ‘나도 누가 세팅해 놓은 프로그램인지 모른다’, ‘진공 포장되어 장기 보존되고 있는 것이/나일 수도 있다’는 의심은 윤동주의 순결한 언어로 토로된 자기 반성 못지않게 심각하고 현실적이다.
더 나아가 자아에 대한 이러한 불안과 의심이 디지털 매체가 장악한 이 시대에만 특별히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이들 비시적인 시들이 결코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데 집착하는 편집증적 징후의 발현이 아니라는 단서가 된다. 과장되어 말하자면 현실비판적 면모마저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이미 그렇게 하도록 운명 지워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심지어 내가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마저도 나의 자의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주입되고 조종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은 굳이 디지털시대에 한정되지 않는다. 모든 현상의 배후에 숨어 나를 프로그램화하는 그 어떤 것은 자연의 힘이나 운명의 힘, 신이나 이성과 논리, 또는 메카니즘과 구조 등등,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 왔지만 한결같이 인간의 주체성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인식만큼은 변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작품이 재현하고 있는 디지털 세계는 가상 공간의 단순한 재현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며, 지금 여기의 당대적인 현상에 대한 고발만도 아니다. 그보다는 최첨단 과학 기술 문명이 발달한 시대조차 반복되고 있는 인간 숙명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적극적인 차원에서 디지털 기술을 받아들였건 소극적인 차원에서 디지털 매체를 사용하여 시를 쓰고 또 읽었건 디지털 시대에 시를 생산하고 수용하는 일이 기존의 방식과 구별되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그 때문에 전통적인 서정시의 영역이 협소해지고 또 전통적인 서정시의 생산도 눈에 띄게 위축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섣불리 문학의 위기로 진단하는 것은 문학이, 그리고 시가 역사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과 비교하여 시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고, 그 시초가 인류 역사의 처음과 일치하는 의미심장한 우연이 있기는 하지만, 시 또한 시대와 사회에 따라 그 섬세한 결을 달리하는 엄연한 역사의 산물이다. 우리에게 서구식의 서사시가 없었던 점이라든지, 반대로 한시나 하이쿠 같은 단시가 서구에는 없었던 것을 굳이 예로 들지 않아도 시의 영역은 사회와 문화마다 다르며, 또한 시대마다 그 테두리가 넓어지기도 하고 또 좁아지기도 한다. 때로는 인접한 장르에 시의 영역을 침략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 시의 양분을 얻기도 한다. 그 계기가 디지털 기술이기 때문에 특별히 더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는가? 그에 대한 대답을 하기는 아직 이른 듯하다.

윤지영․
1974년 공주 출생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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