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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신작단편/강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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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45회 작성일 06-03-09 11:58

본문

모닥불

강인봉




그것은
우리들
오랜 약속의 문
어느 한 둘러리에서고
밤이 익으면
또 한번 우리는 불타야 한다
지금은 이미 가고 없는 우리들이지만……
그 한 개의 불씨로
그리움이며, 기다림이며, 서글픔이며,
하는 이 모든 아쉬움들이
늦가을 그 한 산정에서 활활 타다 남으면
다시 인간이 그리워지는데
결국 산을 내려오면서
슬픈 짐승이 되어
그리고
나는 혼자다

나는 집찰구를 빠져나오다 말고 자신도 모르게 문득 그 자리에 섰다. 일순 뇌리 속으로 찬 바람이 휙 지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이 뒤에서 꾹 끌어당기는 것 같기도 한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와글거리는 사람들 속에 여자도 가지 않고 그 자리에 멈칫거리고 서 있었다. 그 여자와 눈길을 서로 스치고 나서부터 일어난 일이었다. 여자는 아래위 까만색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서양 영화의 장례식에서 보던 차림이었다. 그래서였는가.
그 모습을 보자 나는 다시 한번 가슴이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얼른 집찰구를 빠져나와 버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순호 씨. 저, 이순호 씨 맞죠?”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다시 뇌리 속으로 한 줄기 찬 바람이 휙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순호 씬 나를 전혀 못 알아보네요. 하기야 어언 10년도 훨씬 지났어요.”
그 소리의 주인이 누구라는 걸 떠올리자 일순 등줄기까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그녀보다도 먼저 그 일부터 앞질러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실 아직도 그 청운사의 며칠을 못 잊고 있었다.
“그런데 나영 씨는 그런 차림을 하고 어딜 가는 길입니까?”
그제야 나는 멋쩍게 웃으며 그녀의 눈길을 붙들었다. 찬찬히 얼굴을 뜯어보니 그녀는 그 동안 어떻게 살아 왔는지 눈가에 잔주름이 많이 잡혀 있었다. 그 시절의 맑은 애티는 어디에도 한 점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청운사에 가는 길이에요.”
나이 먹은 여자가 흔히 그러듯 그녀는 짐짓 태연을 앞세우고 말했다. 이제 그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하지 못하고 얼굴색이 변한 건 바로 나였다.
“청운사?”
택시에서 내려 좁은 산길을 타고 조금 더 올라가자 청운사는 이내 한눈에 들어왔다. 그때 나는 입대 통지를 받고 며칠간 마음도 정리할 겸 인사차 지효 스님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녀는 여고(女高)를 졸업하고 나서 바로 출가한 둘째누나였다. 그전에는 서울의 어느 절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윽고 산문에 들어서자 법당의 문은 활짝 열려 있는데 스님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법당 뒤로 산그늘이 길게 내리고 있었다.
나는 마당을 가로질러 그쪽으로 가다 말고 그 자리에 섰다.
그때 요사채에서 웬 처녀가 하나 나왔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짐짓 뒤로 한 걸음 물러서더니 나를 향해 수줍게 합장을 했다.
“어떻게 오셨는지요?”  
여자의 목소리 속에는 어쩐지 풀내음이 풋풋하게 배어 있었다.
나는 시선을 발밑에 깔며 지효 스님을 뵈러 왔다고 말했다. 이상하게 눈빛이 떨렸다. 적당히 작은 키에 백옥같이 깨끗한 얼굴이었다. 아직도 애티가 풀잎처럼 곱게 묻어 있었다. 이 여자가 바로 최나영이었다.
“정말 꿈만 같아요. 여기서 순호 씨를 만나게 되다니…….”
그녀가 힐끔 내 얼굴을 훔쳐보았다.
“청운사는 무슨 일로 가십니까?”
나는 딴전을 부리듯 물었다.
“…….”
하지만 최나영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날 그녀는 주지실을 향해 얼른 앞서 걸었다. 지효 스님은 지금 주지 스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주지실은 후원에 따로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대체 절에서 무엇하고 사는 걸까. 나이는 나와 엇비슷했다.
“아니, 순호 네가 여긴 웬일로……?”
지효 스님은 깜짝 놀라며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방안에는 조용하고 인자하게 생긴 노스님과 그와는 다소 대조적으로 얼굴이 차게 보이는 지효 스님이 마주앉아 있었다. 아무리 여승이 되었지만, 나도 누나의 얼굴을 보자 야릇한 감정이 가슴속에 뭉클 차올랐다.
“때가 훨씬 지났는데…… 아직 점심 공양 안 했지? 나영 씨, 우선 이 사람을 객실로 좀 안내해 줘요.”
지효 스님이 방안에 앉아 있는 노스님을 흘끗 한번 돌아보더니 여자에게 말했다. 그녀는 아직 한창 나이인데도 스님 노릇을 오래 해서인지 어른스러워 보였다.
요사채의 방으로 들어가 잠시 앉아 있자 최나영이 상을 들고 왔다. 산채무침들이 조촐하게 차려진 밥상이었다. 하지만 보기와는 달리 음식이 아무 맛없이 싱거웠다. 나는 밥그릇을 반쯤 비우고 상을 물렸다.
그때 지효 스님이 방에 들어왔다.
“부모님은 다들 편안히 계시지? 나는 지금 바삐 주지 스님을 모시고 서울에 좀 다녀와야 할 일이 있구나. 내가 한 이틀 늦더라도 가지 말고 기다리거라. 집에 무엇을 좀 보낼 게 있으니.”
법당 추녀 끝에서 풍경이 땡그랑, 무심하게 울렸다.
대중은 모두 합쳐 넷이었다. 지효 스님의 은사이며 그 절의 주지인 노스님, 그리고 지효 스님, 지효 스님의 두 사제 지선 스님과 지원 스님이 있었고, 최나영까지 합하면 다섯이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그때 그녀는 대학을 다니다가 여승이 되려고 그 절에 와 있었다.
“우리,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다방에라도 좀 들어가요.”
길 건너 이층 건물의 다방 간판을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문득 밝아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따라 다방에 올라가는 동안 내내 그 며칠을 떨칠 수가 없었다.
비구니 처소였고, 거기다가 막상 지효 스님까지 떠나고 나니 왠지 서먹하고 거북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내가 머뭇머뭇 후원의 뒤뜰을 배회하고 있을 때였다.
“여기 오니 어때요. 경관이 참 좋죠?”
언제 다시 나타났는지 등뒤에서 최나영이 말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가을 먼 호수처럼 맑게 물이 찰랑이는 그녀의 두 눈이 더없이 한가롭게 보였다. 그녀는 마음속까지 훤히 다 들여다보일 듯 눈이 맑았다.
“3월에 오면, 화사하게 목숨을 터뜨려 핀 저 벚꽃길은 절로 흰 눈 속을 걷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해요.”
나는 얼떨결에 머리를 끄덕거렸다. 깊은 산속이라 그런지 한여름이었는데도 몸이 아주 시원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신비의 문은 오직 자기 안에서 발견될 뿐이지, 결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래요. 이것만 알고 살면 절대 시간에 속지는 않을 거예요.”
그때 법당 쪽에서 다시 풍경소리가 바람결에 묻어 왔다. 땡그랑…….
“알고 보니 나영 씨가 나보다도 더 결혼을 늦게 했더군요.”
다방에 들어가 자리에 마주앉으며 이번에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 동안 무슨 고생을 했는지 역력히 지쳐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측은하게 뜯어보았다. 사람이 어쩌면 이처럼 변했을까.
“그때 차라리 청운사에서 그대로 비구니가 되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그녀가 이렇게 된 것은 순전히 다 내 탓이었다. 그런데 지효 스님은 왜 그렇게 일부러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은 것일까.
내가 군대에서 제대를 하고 돌아와 지효 스님에게 그녀의 소식을 묻자 대뜸 한다는 소리가, 이제 그만 나영이는 잊으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다시 복학을 해야 할 처지였지만, 그녀는 이미 졸업한 뒤였고 해서 나는 지효 스님의 말을 다 곧이곧대로 믿었다.
하지만 그것이 지효 스님의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뒤였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결혼은커녕 아직 약혼도 안 했다고 다른 스님이 귀띔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을 약속한 뒤였다.
“그래, 지금 물론 바깥어른과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겠지요?”
그러자 천천히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다 말고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남편은 이미 죽었어요.”
“아니, 언제?”
순간 나는 입을 딱 벌렸다. 멍청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찡 아파 옴을 느꼈다. 그녀는 고개를 두어 번 내저었다.
“지난 겨울에요. 그러고 보면 지효 스님의 말이 맞나봐요. 그 스님은 사랑이 눈에 가리면 사랑도 못하고 공연히 몸만 상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대상이 마침내 자기의 소유가 됐을 때는 이미 그 사랑은 끝이 난 것이라고.”
“그런데 그때 나영 씨는 사랑하지 못한 죄 때문에 청운사에서 지낸다고 했는데, 대체 누굴 사랑하지 못한 겁니까?”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그거요.”
그녀는 희뜩 웃었다.
“새어머니였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뒤 계모가 들어왔는데 도저히 그 여인을 사랑하지 못한 죄였어요. 그래서 차라리 비구니가 되려고 그 절에 갔던 거예요.”
그날 그 약수터에서였다. 약간 가파른 산신각 뒤쪽으로 올라가면 거기 큰 바위 틈에서 약수가 찔끔찔끔 부처님의 눈물처럼 솟고 있었다. 그녀가 거기 놓인 바가지로 그 물을 열심히 받아서 내게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는 약수를 먹지 않고 그 옆 편편한 풀밭에 앉았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우리 이 순간을 뚝 끊어 가지고 어디론가 가서 살았으면…….”
나는 까닭 없이 얼굴을 붉혔다. 산 속에서는 이름 모를 산새들이 왁자하게 우짖어대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여기 와서 지내고 있는 겁니까?”
나는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바가지를 제자리에 놓고 그녀 옆에 가서 앉았다. 그때 소나무 사이에 줄을 서듯 강렬한 햇살이 비쳐 들어왔다.
그녀는 다시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사랑하지 못한 죄 때문이에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 죄……. 순호 씨도 그런 적이 있나요?”
“…….”
“지효 스님한테서 순호 씨의 말을 여러 번 들었어요. 그래서 더 친숙하게 느껴지고 있는지도 몰라요. 순호 씬 절대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그런 죄는 짓지 마세요.”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이렇게 처음부터 내게 마음의 문을 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곧 군대에 가야 할 몸이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릴케는 말했어요. 사랑은 인간의 마지막 시련이며, 우리의 모든 생활은 그것을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고. 그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한번 기가 막힌 사랑을 했었대요.”
이 말을 하면서 그녀는 몇 번이나 뚫어지게 나를 보았다. 하지만 나는 절로 시선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햇살이 너무도 강렬하게 비쳐서였을까. 그때 그녀의 눈은 마치 모닥불처럼 화르르 타고 있었다.
그런데 용케도 그때 공양 목탁 소리가 길게 울렸다.
“그럼, 바깥어른은 무엇 하는 분이었습니까? 아직 한창 나이였을 텐데요.”
나는 어정쩡하게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거래처야 내일 들러도 되겠지만 회사에는 전화를 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제분회사 영업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냥 개인 사업을 했어요. 이것저것. 그런데 지난 겨울 친구들과 함께 산을 타다가 그만……. 설악산에서였지요. 그래서 지금 청운사에다 남편의 위패(位牌)를 모시려고 가는 길이에요.”
대충 눈치를 보니 그 사람도 어지간히 속깨나 썩인 모양이었다.
“그쪽은요? 순호 씨야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겠지요.”
이번에는 그녀가 은근하게 내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나는 바보처럼 입가에 웃음을 흘렸다. 나도 실은 이미 결혼에 실패하고 이혼을 해서 썰렁한 홀아비로 꾀죄죄하게 옷을 입고 지금 막 온양에 출장을 내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 입에서는 왜 이런 말이 나왔는지.
“우리 안식구는 지금 잠시 파리에 가서 그림 공부를 하고 있지요.”
“어머, 그래요? 좋으시겠어요. 잘했으면 그게 내 자리가 될 뻔했는데…….”
뜻밖에도 그녀의 목소리에 풀잎처럼 풋풋한 생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두 눈을 맑게 반짝였다. 그 눈 속에는 아직도 그 모닥불이 은은히 타고 있는 듯했다.

……밥을 먹어서 주린 창자를 위로할 줄은 널리 알면서도, 진리를 배워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 줄은 알지 못하는구나. 실행과 지혜가 갖추어짐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면 새의 양쪽 날개와 같다. 자기의 죄를 벗지 못하면 남의 죄를 풀어주지 못한다. 그러하니 계행이 없고서 다른 이의 공양을 어찌 받겠는가. 용상(龍象)의 덕을 우러르며 능히 긴 고통을 참고, 사자의 좌(座)를 기약하여 길이 욕락을 등지어야 한다.……

새벽 3시. 나는 누군가 경을 외우며 도량석(道場釋)을 하고 있는 소리를 잠결에 아득히 듣고 있었다. 그것으로 도량 안에 있는 모든 대중의 잠을 깨운다. 그래서 스님들은 이 시간 시계 바늘처럼 정확하게 몸을 일으킨다. 하지만 주지 스님을 모시고 서울에 올라간 지효 스님은 사나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경을 외우는 소리는 점점 가까이에서 청아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 새벽 도량석은 또한 일체 생명체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그 소리는 샘물처럼 생기가 끝없이 넘치고 있었다.  
이제 스님들은 예불을 모시기 위해 정하게 가사 장삼을 수하고 법당의 돌계단을 밟고 오른다. 법당 안은 언제나 은은한 향내음으로 가득하다. 모두들 부처님을 향해 경건히 선다. 말할 수 없이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부처님.
이 순간 모든 사물들은 그 눈 끝에서 고요히 정지한다. 그래서 산사에서는 그 영롱한 태양이 법당의 부처님으로부터 움터 나온다. 이때는 나무 끝을 스치는 바람 소리도 그대로 법음(法音)이다.
예불을 다 모시고 나면 스님들은 큰방에 눌러앉아 참선을 하거나 각자 자기 방에 돌아가 책을 읽는다. 하루 시간 중에서 사람의 정신이 가장 맑을 때가 바로 이 새벽 시간이라고 한다. 어둠이 가시고 밝음이 퍼지기 시작하는 이 교차로에 대우주의 기가 가장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나영은 그 시간 내 방에 와서 노크를 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아직도 틈틈이 모닥불이 타고 있었다. 그래서 내게는 이때가 가장 두려운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이상한 일이지. 나는 아직 한번도 그녀를 제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심 반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가 방문을 열자 바람이 훅 방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촛불이 한번 크게 펄럭였다. 방안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촛불은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디서 소쩍새 울음소리만 애달프게 들려오고 있을 뿐 소리 하나 나지 않는 세상이었다. 이런 눈이 시리게 적막한 밤이 있어 스님들은 산에서 떠나지 못하는가.
나는 슬쩍 그녀를 한번 건너다보았다. 그녀는 눈이 부시게 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눈길을 아래로 내리깔고 자기의 발끝만 묵묵히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10분쯤 말 한마디 없다가 슬그머니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그날 그녀는 말했다.
“가만히 보면 순호 씨도 어딘가 좀 이상한 데가 있는 사람이에요.”
여자의 붉은 입술이 웃고 있었다. 어디서 소쩍새 울음소리가 다시 애달프게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시큰둥하게 그 말을 귓가에 흘려버리고 말았다.
“마치 달팽이 같아요. 그 딱딱한 각질 속에 자기 자신을 감추고 사는…….”
“달팽이?”
“그래요. 전생에 무슨 인연이었는지, 난 정말 순호 씨를 처음 만나자마자 금방 마음이 끌려 사랑해 버렸어요.”
“……?”
나는 갑자기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기분이 묘했다.
“그건 아마 순호 씨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여자의 직감은 무서운 거예요. 척 보면 다 알잖아요. 만약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순호 씨가 솔직하지 못한 거예요. 그런데 무엇을 망설이죠?”
그녀가 새침하게 말했다.
“…….”
나는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감은 눈 속에서 잠자리떼들이 어지러이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를 한번 가져봐요. 나도 이젠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요.”
이제 그녀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순호 씬 나를 책임질 수 있어요. 릴케도 말했잖아요. 사랑은 인간의 마지막 시련이며, 우리의 모든 생활은 그것을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고…….”
어느 사이 그녀는 입으로 불어서 촛불을 끄고 있었다. 나는 주춤했다. 이제 달아나 숨을 곳이라곤 어둠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서 뱀이 허물을 벗듯이 그녀는 옷을 벗고 있었다. 나는 목구멍에 꼴깍 침을 넘겼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알몸을 꼭 껴안았다. 이제 보니 그녀는 더없이 미끈하고 탐스러운 몸이었다. 맨살의 감촉이 물살처럼 빠르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나는 자꾸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정작 키스도 하나 제대로 할 줄 몰랐다. 그녀는 잠자리의 날개처럼 파르르 떨고만 있었다.
나는 그 흰 젖무덤에 입술을 대었다. 잠시 가슴에 뜨거운 고통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그 모닥불은 내 가슴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제야 죽은 듯이 사지를 늘어뜨리며 눈을 감고 누워 있던 그녀가 서툴게 손을 뻗어 내 허리를 더듬어 왔다. 그 손은 차츰 팽팽하게 힘을 주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또 잠시 허둥대었다.
나는 다시 모닥불 속에 장작개비를 한 개 집어넣었다. 불꽃이 긴 혀를 날름거리며 장작개비를 냉큼 집어삼켰다. 나는 아슬하게 절벽을 기어오르는 기분이었다. 불은 무서운 속도로 타올랐다. 그녀의 온몸도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열심히 모닥불 속에 장작을 집어넣었다. 나는 아무래도 몸살이 날 것만 같았다. 그녀의 얼굴에 황홀하게 불의 날개가 파닥이고 있었다. 불은 이제 무아의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지요.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잘못하다간 청운사에 닿기도 전에 어두워지겠는데요.”
나는 넌지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여기서 택시를 타고 20분만 가면 되는 걸요, 뭐. 그보다도 어때요. 같이 올라가지 않을래요?”
그녀가 소리없이 웃었다.
“나랑 같이요?”
나는 흠칫 놀랐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최나영은 다시 부드럽게 입가에 웃음을 물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만약 지효 스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나는 이제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나. 어쩌면 그녀와의 일을 벌써 다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청운사에 오래 올라오지 못하리라. 아직도 모닥불 타는 소리는 귓가에 맑게 울렸다. 이때 내 나이는 한창 좋은 21살이었다.
“나는 그때 순호 씨 덕분에 다시 집에 돌아가 새어머니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순호 씨가 그렇게 그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는가요. 순호 씨도 같이 올라가요. 지금 올라가면 아마 저녁 예불을 모실 수 있을 거예요.”
그녀가 간절히 타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녁 예불은 6시에 모신다. 그 시간만 되면 으레 핏빛 가사를 어깨에 드리우고 노을도 서서히 산모퉁이를 돌아오고 있었다. 이때는 삼라만상 곳곳이 다 숙연하게 예불을 모시는 빛깔이었다. 먼 마을의 저녁 짓는 연기도 법향(法香)처럼 길게 흔들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럼 한번 그래볼까요.”
나는 다시 은근히 동요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하긴 나도 어차피 기다려줄 사람 없는 썰렁한 홀아비였다.
“지효 스님도 지금쯤은 많이 늙어 있을 거예요.”
“이제는 그 스님이 주지로 있다나봅니다. 노스님은 돌아가시고…….”
“그럼 어서 빨리 가요.”
그녀가 먼저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하지만 그때 지효 스님은 비구니가 되려고 온 여자가 그 무슨 해괴한 행실이냐며 길길이 뛰었다. 그녀의 노여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최나영은 밖에 나오자마자 이내 택시를 잡았다. 어느새 서쪽 하늘에는 해가 두어 뼘밖에 남지 않았다. 택시는 산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먼 산빛들이 차츰 눈에 익어 왔다. 택시는 새로 닦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산길을 꼬불꼬불 오르고 있었다.
택시 운전수가 말했다.
“지금은 길을 잘 닦아 놓아서 절 마당까지도 차가 들어갑니다요.”
이제 이 산모퉁이만 돌아나가면 청운사가 한눈에 들어오리라.
단청을 새로 해서인지 법당이 맑고 산뜻한 기운에 싸여 있었다. 그 아래 요사채가 보이고, 법당 왼쪽에는 산신각이 있었다. 다시 눈길을 돌려 요사채로 내려오면 산문 옆에 수각이 보였다. 산문을 나오면 돌다리가 하나 있고, 거기서 샛길을 따라가면 바로 정랑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 잘 어우러지고 있어서인지 도량이 한층 더 청정하게 보였다.

강인봉
1979년 ≪한국문학≫ 1백만 원 고료 당선
1989년 ≪문학정신≫ 제1회 1천만 원 고료 소설문학상 수상
시집 '수덕사의 쇠북소리' 등, 장편소설 「구나의 먼 바다」 등
산문집 '누가 부처를 보았다 하는가' 등, 법어집 '늙은 원숭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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