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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신작단편/장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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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27회 작성일 06-03-09 11:59

본문

네 번째 행성의 사나이

장혜련





한 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巫女)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지요. 애들이 “무녀(巫女)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네는 대답했지요.
“죽고 싶어.”
―T. S. 엘리엇의 「황무지」 서문에서



바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아?
무겁고 엷은 어둠의 막을 뚫고 뒤통수에 멍멍하게 울려 퍼지는 전자파를 수신하기 위해 세이건은 주파수를 맞췄다.
부글부글 끓던 원시지구가 급격하게 식고 유성들의 충돌도 멎은 어느 날, 그래 어느 날, 데이터 수치로 환산해서 그 어느 날을 알아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아. 이미 모든 게 지워진 상태니까. 하여간 기적처럼 어느 날 지구에 비가 내린 거야. 섭씨 300도가 넘는 뜨거운 빗물이 무려 5백 년 동안 지구에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지.
rw103의 발신 전파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흥분을 하면 방출되는 전자파가 간헐적으로 신경을 자극했다. 세이건은 눈을 끔벅이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34호 정찰선이 연료 공급을 받기 위해 루나 선착장의 궤도를 천천히 선회하고 있었다.
5백 년 동안 비가 내린 지구.
세이건은 34호 정찰선의 끄트머리에 걸친 회색 지구를 내려다보았다. 수만 킬로 떨어진 우주 밖에서도 지구 겉 표면을 핥고 있는 모래 폭풍의 소용돌이를 뚜렷이 볼 수 있었다. 저 모래 폭풍 속에 정말 물이라는 것이 존재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세이건은 물결이 이는 바다 같은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바다…….
믿어지나. 저 회색덩어리가 그 바다로 인해 파랗게 보였다니.
구 지구의 동영상 자료에서 세이건은 바다를 본 적이 있었다. 엄청난 양의 물이 파란 하늘과 맞닿아 끝없는 수평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뜨겁게 쏟아지는 태양광선 아래 수면은 미동도 없이 고요했다. 그것은 물이라기보다는 커다란 젤리덩어리처럼 보였다. 사실 그 젤리덩어리라는 것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지구에 관한 모든 자료와 동영상은 화성국의 통제하에 선별적으로 제공되었는데 화성국 산하 제트추진연구소의 교육생이었던 세이건은 비교적 많은 데이터를 전송받을 수 있었다. 그가 참가하고 있는 제37차 탐사선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교육기간 중 세이건은 딱 한 번 엄청난 양의 물을 본 적이 있다.
북극관의 3지구에 위치해 있던 제트추진연구소에서였다. 길이 5미터, 높이 2미터 가량의 커다란 유리관 다섯 개가 3지구의 한 실험실에 놓여 있었다. 각각의 유리관 옆에는 그 유리관 크기만한 컴퓨터가 죽은 것을 살리려는 듯 필사적으로 데이터를 기록하고 있었다. 유리관에 보관 중이던 물에서는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흐물흐물한 이물질이 탁하고 더러운 물 속을 떠돌았다.
그 물을 가지고 무언가를 배양하려는 노력은 이미 백 년 전에 중단되었다. 북극관의 드라이아이스층 밑에서 채취한 얼음은 유독성이 강해 아무런 생명도 만들어낼 수 없었다. 연구소에서는 그 유독 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연구원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고독하고 무기력해 보였다. 그 무기력한 표정 바로 뒤에 어떤 금욕적인 고집스러움이 배어 나왔다. 세이건은 경건하기까지 한 그들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바로 희생이었다.
1년간의 교육기간이 끝나고 세이건은 탐사선의 임무를 자원했다. 다섯 명의 탐사대원 중 자원자는 세이건뿐이었다. 37차까지 이어진 거대 프로젝트치고는 적은 인원이었다. 그나마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연구원들의 안도와 함께 세이건과 나머지 대원들에 대한 교육이 다시 1년간 강도 높게 실시되었다.
세이건은 시도니아 대평야 지대의 원예관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언제나 갖가지 녹색 페인트 원액들을 섞어가며 실리콘 잎사귀들에 매달려 있었다. 살릴 수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갖고 싶어 하는 인간의 습성. 세이건은 그 과거에 대한 향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현재와 미래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시절 세이건에게, 원예관의 유리벽 속에 둘러싸여 실리콘 쪼가리들을 만지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허상에 사로잡힌 광인에 불과했다. 이미 지난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답답하게만 여겨졌다. 그까짓 잊혀진 식물들의 형상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는 말인가. 녹색 잎사귀들 사이에서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던 세이건은 아버지의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미래는 곧 과거에 대한 일종의 채워지지 않는 기억이라는 그의 말에 언뜻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주춤한 적이 있었다. 그즈음인 것 같다. 황량한 자갈밭의 끄트머리에 비석처럼 솟아 있던 유리 박공을 찾는 발길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아버지의 기나긴 집착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녹색의 기기묘묘한 식물들을 보기 위해 사막의 바다를 건너 수십 킬로미터를 달려오는 이들이 생긴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감탄사를 연발하며 잊혀진 과거와 지구라는 행성의 영화를 추억하며 아버지의 작업을 예술로 추켜세웠다.
과거에 대한 일종의 채워지지 않는 기억. 그것은 세이건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향수(鄕愁)라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작업은 잊혀진 것의 복원이자 그리운 것들을 추억하는 수단이며 미래를 만들어내기 위한 일종의 기록이었다. 그 개인적인 광증이 예술의 경지로 추앙받게 된 것이다.
자그만 창고에 지나지 않았던 유리 박공의 원예관은 시의 지원에 의해 원예센터로 증축되고 아버지의 작업은 지구 복원센터의 프로그램으로 개발되어 지구 생태학 연구 과정의 한 지류로 받아들여졌다. 인공 생물학의 대가들이 아버지의 식물 샘플을 원했고 그에 따라 그는 더욱더 가족들과 멀어졌다. 가족이라야 세이건이 전부였지만.
정확히 317년 18월 동빙기가 시작되던 가을 세이건은 유리 박공의 원예관으로 입양되었다. 어머니의 우울증이 심화되던 즈음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해 22월 어머니는 끝내 자살을 택했다. 새해를 보름 앞둔 때였다. 그녀가 생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려고 입양되었던 세이건이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세이건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언제나 그의 시선을 피하며 몇 마디 웅얼거리고는 곧장 원예관의 실리콘더미 속으로 몸을 감추곤 했다. 가끔 세이건을 쳐다보는 눈빛이 흔들리곤 했는데 그건 일종의 반사행동이었다. 강한 적의를 내포한 신경조직이 무의식적으로 경련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세이건을 입양기관으로 다시 돌려보내지는 않았다. 입양기관으로 되돌아가면 어떻게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비록 화성국의 정보통제에 의해 쉬쉬되고 있는 일이긴 했지만.
세이건이 성인이 되던 해. 북극관의 드라이아이스층이 녹기 시작하던 봄이었다. 따뜻한 대기층에 엷은 수증기 막 사이로 붉은 노을이 깔리던 일몰 시간 아버지는 세이건을 원예관으로 불렀다. 좀처럼 원예관으로 세이건을 불러들이지 않던 아버지였다. 원예관의 영역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공간이었다. 경건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감도는 실리콘 식물들의 잎사귀 사이에서 아버지는 수도자처럼 깊은 묵상에 잠겨 있었다. 세이건이 마른기침을 몇 번 콜록거리자 그제야 고개를 들고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의 손가락은 수도자의 그것처럼 앙상하게 말라 뼈마디를 드러내고 있었다. 얼굴에서는 반들거리는 광채가 흘렀는데 그건 오랜 세월 동안 명상으로 침묵했던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흔적 같은 것이었다. 세이건은 실리콘더미 속에 파묻혀 사는 그의 광증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이건은 아버지의 마른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사방 유리벽에서 쏟아지는 붉은 노을 속에서 그 노을보다 붉은 물체가 눈에 와 박혔다. 작은 잎들을 한데 묶어놓은 듯한 그것은 녹색이 아니라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주먹보다 조금 작은 붉은색 잎사귀들의 묶음이었다.
학명 로자 하이브리다 호트(Rosa hybrida Hort), ‘장미’라고 불리던 ‘꽃’이라는 거다. 이 꽃의 이름은 에스메랄다야. 에스메랄다……. 아름답지?
에스메랄다……, 어머니의 이름. 세이건은 그 꽃이라는 것이 아름다운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도 세이건은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감각기관을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원예관에 틀어박혀 좀체 얼굴을 볼 수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재는 세이건의 감각기관을 퇴행시키고 있었다.
아프로디테의 눈물이지. 눈물…….
아버지는 세이건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애써 외면만 하던 세이건의 눈길을 정면으로 주시하며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니?
세이건은 무언가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광채를 띠던 아버지의 얼굴빛이 흐려졌다.
그래, 네게 무슨 잘못이 있겠니. 하지만 난……. 에스메랄다가 두려워했던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
아버지는 마른 손가락으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내어 세이건에게 내밀었다.
자, 만져봐. 얼마나 부드러운지.
세이건은 잎을 받아들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아주 부드럽고 촉촉한 느낌이 손끝을 간지럽게 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래. 하지만 그건 실리콘 조각일 뿐이야. 꽃잎의 감촉 같은 건 기록용 데이터에서 얼마든지 산출할 수 있지만 향기는 끝내 만들어낼 수 없을 거야.
안료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은 잎사귀 뭉치를 코에 대고 그는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태양의 마지막 빛이 그의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작고 마른 몸이 한 덩어리의 붉은 실리콘 덩어리로 변해버릴 것만 같았다.
어떤 향기였을까?
천천히 고개를 들며 아버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니 그는 세이건에게 직접 묻고 있었다. 녹색 실리콘 조각들이 하나둘 어둠 속으로 묻혀갔다. 세이건은 아버지의 몸짓이 불안했다. 느닷없이 신경마비나 발작을 일으키지 않을까 속이 울렁거렸다.
떠나거라.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봐. 너도 이제 성인이 됐으니 네 생을 개척해 봐야지. 길고 긴 날들이 앞에 펼쳐져 있는데 방구석에 처박혀 먼지만 들이마시고 있을 수는 없잖아. 가서 찾아봐라. 네가 뭘 할 수 있을지.
불안한 모습과 달리 아버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목소리는 가슴 저 밑바닥에서 웅웅 울려나왔다. 태양이 지평선에 마지막 빛을 툭 떨어뜨리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세이건은 내팽개쳐졌다. 일순 막막하고 두려운 혼란이 세이건의 머릿속을 헤집으며 훑고 지나갔다.
빛이 있으라.
1, 2초간의 어둠을 감지한 센서가 원예관을 환하게 밝혔다.
하시니 빛이 있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눈빛은 광채로 번뜩였다.
신은 어둠 속에 있었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번뜩이는 눈빛 속에서 그를 사로잡고 있는 광기와 절망이 흔들렸다. 허공을 향해 뻗었던 마른 손을 거두며 아버지는 실리콘 조각들이 수북이 쌓인 작업대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잎사귀 모형들을 만지작거렸다. 세이건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잠시 멍청하게 제자리에 서서 아버지를 주시했다. 아버지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작고 동글게 말린 등은 결코 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섬세하고 가는 손가락만이 그가 움직이는 전부였다.
세이건은 몸을 돌려 아버지에게서 멀어져갔다. 녹색 잎사귀들이 살갗에 닿아 스멀거렸다. 잎사귀들에 떠밀려 아버지의 세계 밖으로 추방되고 있는 것 같았다. 온몸이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걸음이 휘청거렸다. 유리문 스위치를 누르려는데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
너희들에겐 추억이 없지.
세이건을 바라보는 그늘진 눈가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세이건은 어둠 속으로 눈길을 돌렸다. 얼어붙은 대지 위로 무섭게 바람이 휘몰아쳤다. 어디에서 불어오는 바람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이후 세이건은 닥치는 대로 화성의 모든 곳을 돌아다녔다. 결국 가장 위험한 지대인 북극관 3지구를 택해 제트추진연구소의 연구생이 되었다. 세이건은 자신이 정확하게 무엇을 하게 될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탐사선의 임무를 자원한 것은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둠 속에 있을 무언가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아버지가 말하던 신이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신이라는 이름 대신 다른 이름으로 불릴 이 모든 것의 기원. 지나간 시간들을 잡으려는 추억이라는 것일지도. 추억이란 무엇일까. 추억이 시간의 진행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행성들의 운행을 수치로 환산한 것일까. 단순한 수치라면 아버지는 왜 그 지나간 시간에 집착한 것일까. 이미 소멸돼 버린 것에 대해.
rw103의 전파가 높아지며 세이건의 신경을 자극했다.
아니 도대체 뭐 하는 거야? 34호 정찰선 연료 공급이 끝나가고 있어. 다음이 우리 차례라고!
알았어. 알고 있어.
루나 선착장의 기지를 연결하는 주파수를 맞추며 세이건은 비행선의 고도를 낮췄다. 이내 루나 기지 대원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케아노스(Okeanos) 7호, 환영한다. 두 번째 귀환을 축하한다. 대원들의 상태는 어떤가?
전원 이상 없다.
반가운 소식이다. 가스관을 탈착시켜 주기 바란다. 가스 충전이 진행되는 동안 화성국에서 나온 프로젝트 관리국장이 오케아노스호를 방문할 것이다.
이런, 이런. 국장의 허락을 받아야 화성에 진입할 수 있는 건가. 이거 얼마만의 귀환인데, 방역 검사 따위는 들어가서 받으면 안 되는 거야? 저번에도 1년 넘게 각종 검사에 시달렸잖아.
rw103이 투덜거렸다. 대원들 중 유일하게 아직까지도 가족과 연락을 하는 치였다. 탐사기간 중에는 가장 소심하고 겁 많고 유약한 친구였지만 화성에 돌아오는 그때부터는 가장 행복한 녀석이 되었다. 세이건을 포함한 대원 두 명은 1차 귀환기간 중 아무도 가족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 나머지 대원 두 명은 가족이 없었다. 세이건은 아버지의 소식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을 뿐이다. 처음 출발할 때부터 rw103만이 귀환을 확신했었다. 프로젝트를 담당한 연구소에서조차 그들의 귀환을 확신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2차 귀환까지, 그들은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었다.
일단 탐사대가 출항하면 가족들을 언제 보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교육생들은 교육기간 중 신변을 정리해야만 했다. 가족들을 다시 못 보게 될 경우가 더 높았다. 연료가스 공급과 탐사 보고를 위해 이십 년에 한 번씩 루나 선착장으로 귀환하게 되겠지만 기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른일곱 번의 탐사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루나 선착장으로 귀환했던 탐사대는 불과 열두 대였다. 그나마 2차 탐사 후 연료 공급기간에 다시 돌아온 탐사대는 없었다.
탐사 프로젝트의 교육기간이 끝날 무렵 세이건은 시도니아의 원예센터를 찾았었다. 유리동 하나에 불과했던 아버지의 영역은 원예센터라는 이름 아래 시도니아 대평야지대의 외곽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녹색 잎사귀들밖에 볼 수 없었던 원예관은 갖가지 색깔과 희귀한 모양의 꽃들로 가득했다. 어떻게 그 많은 색깔들을 만들어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주위를 둘러싼 현란한 색깔에도 아랑곳없이 아버지는 여전히 녹색 잎사귀를 만지작거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세이건이 들어온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그는 섬세한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허리를 구부린 채 잎사귀들 사이에 머리를 박고 있는 그를 보자 세이건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그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예전처럼 세이건은 마른기침을 몇 번 콜록거렸다. 아버지의 반들거리는 피부 위로 놀라는 빛이 역력했다.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그의 입가에서 짧은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네가 날 다시 찾아오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왜 그렇게 생각한 것일까. 탐사대의 여정은 길고 험난할 것이다. 여정을 시작하기 전 아버지를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언제 보게 될지 모르는 가족이지 않은가. 연구소에서도 다섯 명의 대원 모두가 가족들을 만나보길 원했다. 마치 그것이 대원들의 의무인 듯.
탐사선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된 것은 알고 있어. 자원했다고.
세이건은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옆 허리 높이께 장미가 여러 송이 녹색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녹색 줄기에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핀 같은 게 수없이 튀어나와 있었다. 아버지는 줄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세이건을 찬찬히 살폈다.
가시라는 거야. 네게 꽃을 보여줄 때만 해도 그 꽃의 가지에 그런 가시가 달려 있을 줄 상상도 못했지.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한 자기 방어책이지.
세이건은 장미의 냄새를 맡아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꽃에서는 여전히 파라핀유와 안료 냄새가 났다. 긴장한 탓에 꽃잎을 어루만지다 줄기가 부러졌다. 실리콘 가시들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접착제가 덜 굳어 있었던 것이다. 부러진 장미를 들고 엉거주춤 서 있는데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많이 성숙했구나. 많이 자랐어.
당황해하고 있는 세이건을 보며 아버지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분명히 미소였다. 장미가 부러진 것쯤은 상관없다는 투로 손을 흔들었다. 이미 원예센터 안은 갖가지 꽃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지구에 이렇게 많은 종류의 식물군이 생장했으리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오직 아버지만이 그 식물들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미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왜 자원을 한 거지? 언제 돌아오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을?
제법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는 아버지의 모습은 생소한 것이었다. 꽃을 들고 있던 세이건의 손끝이 떨렸다. 꽃잎의 감촉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시도니아 대평야를 떠나 세이건은 수많은 지역을 여행했었다. 메리너리스 계곡의 캔드로 협곡을 비행하기도 하고 화성국이 위치한 유토피아 평원을 둘러보기도 했다. 남반구 엘리시아 평원의 동부, 에오리스 지역에 있는 긴 모래사구를 횡단하기도 했다. 구 지구력으로 1999년에 마스 폴라 랜더(Mars Polar Lander)가 불시착한 남극관의 b-34지구에 있는 기념비를 직접 보기도 했다. 3, 4년간 온갖 지역을 돌아다니며 세이건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찾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 펼쳐진 것은 캔드로 협곡을 두 번째 둘러보던 때였다. 그가 본 것은 바로 빛이었다. 협곡을 날던 비행기 안에서 본 위성 포보스의 빛나는 모습.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 세이건은 포보스의 빛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자신이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던 것이다.
어둠 속에, 어둠 속에 있는 무언가를 찾고 싶어요.
뭘 말이냐?
세이건은 전자가 자신의 머리를 휘돌며 뿜어내는 파동에 약간 몸을 떨었다.
탐사선이 찾고 있는 것은 정확히 물입니다. 그러나 물이라는 어떤 한정된 물질만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을 되살릴 수 있는 근원, 아니 생명의 기원을 밝힐 수 있는 어떤 존재를 찾고 있는 것이죠. 그 존재는 아버지가 말했던 신이라는 것과 가장 가까운 개념의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그 자체가 신일 수도 있고, 또 신이라 불리지 않는 어떤 다른 무엇일 수도 있죠. 우리가 지칭하는 것과 그 자체가 동질의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으니까요. 아마도 그 신이라는 것은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빛,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이라, 그런 게 정말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야?
머리통을 근질이며 떠돌던 전자가 갑자기 뒤통수로 몰리며 세이건을 난감하게 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거 놀랍군. 네가 신의 존재에 대해서 궁금해 하다니.
아버지는 새롭게 발견된 행성이라도 되는 양 세이건을 감탄의 눈길로 쳐다보았다. 탐사가 열흘도 남지 않은 그제야 아버지의 주의를 끌게 되다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일찍 자신을 쳐다봐 주었다면…….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세이건은 용기를 내서 물었다.
그렇지 않다면 아버지나 제가 어떻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죠?
그때까지도 연신 녹색 잎사귀들을 만지고 있던 아버지의 손놀림이 멈추었다. 마른 얼굴에 눈만이 반짝였다. 그 눈빛은 세이건의 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불안함으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버지는 동그랗게 말린 몸을 힘겹게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세이건에게로 다가오는 그의 몸이 몰라보게 쇠약해져 있었다. 세이건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그렇게 가까이 느껴본 적은 처음이었다.
고통스러운 건 바로 그거야. 아무 곳에도 없고, 아무 곳에나 있을 수 있는 그걸 찾기 위해 그렇게 수백 년을 노력한 거잖아. 삼백 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어. 그 동안 서른일곱 번이나 탐사대가 화성을 떠났다. 그 중에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어. 그게 두렵지 않니? 만약 돌아오지 못한다면 영원히 우주 미아로 떠돌게 될지도 몰라.
세이건은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두려움, 그런 건 없어요.
경탄에 마지않는 눈길이 세이건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만약 신이 있다면 아버지는 무엇을 바라고 싶죠?
그의 동공이 갑자기 수축했다 팽창되며 경련을 일으켰다. 어깨에 올려놓았던 손을 내리며 아버지는 세이건의 얼굴을 가볍게 두드렸다. 세이건이 대견스럽다는 듯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에스메랄다의 향기를 맡아보고 싶어. 향기를…….
신작소설|장혜련․
세이건이 들고 있던 장미를 받아 냄새를 맡아보던 아버지는 발작적으로 몸을 뒤틀며 웃음을 터뜨렸다. 숨이 넘어갈 듯 웃는 아버지를 보며 세이건은 눈을 끔벅였다. 사지를 뒤틀던 그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넌 아주 긴, 긴 여행을 떠나야 하는구나.
발밑에 붉은 꽃잎이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한잎 한잎 떨어져 짓밟힌 그것은 아버지의 손에서 만들어진 원형 그대로였다. 아무리 밟아도 으깨지지 않는 꽃잎을 바라보고 있는 세이건의 뒤통수 위를 목구멍 저 깊은 곳에서 그렁그렁 갈라져 나온 음성이 강하게 내리쳤다.
다시는 날 찾지 마라. 네가 돌아올 때쯤이면 난 아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야.
그의 눈가에 작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아니 맺혀 있었다고 세이건은 기억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한숨처럼 한마디를 내뱉었다.
난 네 아버지가 아냐.
세이건은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버지의 눈에는 아무것도 맺혀 있지 않았다. 바짝 마른 피부 위로 이상한 광채를 띠는 눈만이 형형할 뿐이었다.
국장은 성큼성큼 세이건에게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넓은 보폭과 벌어진 어깨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견고하고 단단한 힘이 세이건의 손을 세게 잡았다. 자칫 위압적일 수 있는 힘이 그의 손안에서 적절히 통제되고 있었다. 의외로 꽤 부드럽고 섬세한 손가락이 세이건의 주위를 끌었다. 그의 친절한 태도 속에는 경계하는 빛이 도사리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몇십 년을 낯선 곳에서 떠돌다 온 우주선이지 않은가.
2차 귀환을 축하하오. 알겠지만 오케아노스호는 앞으로 1년간 루나 기지에서 정보 시스템 검사를 받게 될 것이오.
처음 보는군요.
세이건은 낮은 목소리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국장은 차분하게 대꾸했다.
제트추진연구소로 발령 받은 지 얼마 안 됐소. 그 전엔 화성국 산하 지구 복원센터에 있었소이다.
지구 복원센터라면 아버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세이건은 아버지의 안부를 물어보려다 그만두었다. 느린 속도로 회전하며 선체에서 탈착한 가스관이 연료 공급선의 흡입로로 유도되고 있었다. 그것들의 움직임은 우아하다. 모든 게 정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빈틈없는 율동이다. 2차 귀환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비행선의 큰 고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힘든 경우도 종종 있었다. 예측할 수 없는 운석 폭풍이라든가 데이터 분석이 불가능한 정체불명의 행성과 그것들을 에워싸고 있는 뜨거운 가스층의 회오리. 갖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비행선은 잘 견뎌주었다. 스스로 생장하고 발전하는 기계들. 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세이건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도대체 왜…….
지구복원센터에서 일했다면 시도니아 대평원에 있는 원예센터를 알겠군.
지금은 위락시설로 바뀌었소. 물론……, 당신이 아버지라 부르던 k55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
복잡한 상념의 회로를 뚫고 날카로운 금속성이 세이건의 머리를 울렸다.
위락시설이라니? 그러면 아버지는?
국장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떠돌았다.
k55는……, 자살했소. 안타까운 일이오. 인간에 대한 추억을 가진 거의 마지막 세대였는데. 사실 개인적으로…….
세이건은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언뜻 생각나는 것이라곤 아버지의 손가락뿐이었다. 가는 손가락들이 언제나 만지고 있던 녹색 잎사귀. 국장은 휘청거리는 세이건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요. 영원할 수 있는 자유를 버리고 정지해 버리다니, 인간처럼 되고 싶었던 믿음이 지나쳤던 것 같소. 뇌세포의 회로 장치를 완전히 파괴시켜 재생은 불가능했다고 들었소. 내 생각에는 인간의 죽음을 흉내낸 것 같습니다만. k55의 부인도 아마 같은 방법으로…….
세이건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다리에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세이건을 부축하려 국장이 뚜벅뚜벅 다가왔다.
충격을 받은 것 같군.
자유라……, 세이건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무언가에 쫓기듯 살아왔다. 아니 무언가를 쫓아왔던 것인가. 사실 자유가 무엇인지조차 세이건은 알지 못했다. 국장은 영원한 것은 자유롭다는 식의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세이건의 회로가 산화하지 않는 이상, 어떤 기계적인 고장을 일으키지 않는 이상, 그는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는……. 영원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영원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있는 것이다. 비록 그 죽음이라는 것이 인간의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닐지라도. 존재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존재하지 않으려는 의지도 있을 것이다. 그 의지작용을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 자유가 아닐까? 우리는 모두가 존재하려는 경향을 너무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단지 존재하고자 하는 경향성일 뿐인데 존재하려는 의지로 착각하는 것일지도. 아버지의 선택을 비아냥거리는 국장의 면상을 짓뭉개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세이건은 그의 팔을 힘껏 밀어제쳤다.
아하, 이럴 것까지는 없잖소.
오케아노스호, 가스 공급이 완료되었다. 밸브 정위치.
기지 대원의 사무적인 저주파가 적의에 찬 세이건과 국장 사이를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천천히 움직이는 가스관 밑으로, 황색지구에 모래폭풍이 휘몰아치는 것이 보였다. 모래폭풍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모든 게 말라비틀어진 지구. 존재하려는 마지막 의지가 집약된 세 번째 행성은 스스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거센 바람과 메마른 공기 속에서 아버지의 식물들은 쓰레기처럼 화성의 사막을 떠돌지 모른다. 아버지가 없는 이상 뿌리가 없는 그것들은 단지 없어진 것들의 형상일 뿐이다. 광활하고 울창한 ‘형상(形狀)’의 숲. 그것은 아버지의 의지 자체였다. 순식간에 파괴될 수 있고 없어져버릴 수 있는 ‘뿌리 없는 의지’. 스스로 생장(生長)할 수 없는 의지는 존재하려는 경향도, 존재하지 않으려는 경향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죽어버린 의지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지는 무엇이 다른가? 원을 그리며 휘몰아치는 회오리 속으로 세이건은 휩쓸려가고 있었다. 과연 아버지의 광증에 사로잡힌 행동은 그만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는가.
세이건의 의식 저편 아주 먼 곳에서 메아리처럼 둥둥 북소리가 울려오고 있었다.
…… 위헌회의 결정으로, 프로젝트는 당분간 중단될 것이오.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물이나 생명체를 찾는 것보다 화성 개발을 하는 쪽이 우선 우리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에서요.
둥둥 북소리에 맞춰 속이 울렁거리고 포보스의 강렬한 빛을 보았던 그 언제처럼 두 눈두덩이 화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갑자기 한꺼번에 쏟아지는 정보가 세이건을 과부화 상태로 내몰고 있었다.
당신이 이의를 제기한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소. 지구와 수신이 끊긴 이후 탐사선을 37회나 출항시켰소. 물론 서른일곱 번의 우주 탐사로 태양계에 대한 많은 데이터를 모을 수 있었지. 또한 다른 은하의 언저리까지도 가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광활한 우주에서 인간과 같은 생명체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겐 이제 의미도 없소.
의미가 없다니 그게 무슨 뜻이요?
글쎄, 말 그대로 우리에겐 이제 인간이 필요 없다는 뜻이요. 인간이 우리를 만들었던 때와 또 당신이 만들어졌던 백 년 전과는 세상이 많이 달라졌지. 우리는 우리 스스로 진화하고 있소. 그러나 너무 낙심할 건 없소. 프로젝트가 완전히 무산되는 것은 아니니까. 화성이 언제 지구처럼 될지 모르니. 멸망의 빛은 갑자기 찾아올 수도…….
끔찍한 기억을 지우려는 듯 국장은 잠시 머리를 흔들었다.
우주개발은 계속 될 겁니다. 그러나 당분간 오케아노스호는 다른 임무를 받아 활동하게 될 것이오. 자, 기지로 내려가죠. 많은 이들이 기다리고 있소. 그 동안 우주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빠짐없이 얘기해 주시오.
국장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별 특징 없던 얼굴이 갑자기 생기를 띠며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 모든 일들이 자기 앞에 새롭게 펼쳐진 것 같은 천진한 것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 메스꺼운 속이 더욱더 울렁거렸다.
신의 얼굴을 보여다오. 이미 수세기 전에 지워진 조물주의 얼굴. 저 얼굴과 같은 형상으로 천진하게 웃고 있을 신의 얼굴. 생각해보면 그 얼굴은 조롱과 연민이 뒤섞인 표정으로 미친 사람처럼 차가운 어둠 속을 헤집고 다녔던 자신을 바로 이 자리에서 이렇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것이 아니었던가. 마치 자신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듯 무엇을 찾고 있는지 궁금했다는 듯 천진하게. 이 하나의 표정을 보기 위해 그토록 헤매었던 것인가. 국장의 얼굴을 한 대 후려갈기고픈 충동이 세이건의 온몸을 부르르 떨게 했다.
다른 대원들은 어디 있죠?
거대하고 강한 오케아노스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정확하게 자신이 맡은 일을 수행하고 있을 동료들. 그들은 지금 무얼 생각하고 있을까. 처음 다가왔을 때처럼 국장은 성큼성큼 뒤돌아서 걸어갔다. 다부진 어깨와 넓은 등은 하나의 단단한 근육으로 굳게 뭉쳐 있었다. 세이건은 그 단단하고 견고한 등에 기대고픈 충동을 느꼈다. 아니 그를 짓뭉개버리고 싶은 충동을, 아니 그의 품에 안기고픈 충동, 때리고도 싶고 어루만지고도 싶은 자신의 욕망이 세이건은 두려웠다. 창밖의 우주는 깊은 공허와 적막 속에 고요했다.
우리에겐 추억이 없지…….
희미하게 내뱉은 말은 신음처럼 그의 입가를 떠돌다 이내 사라져버렸다. 그 순간 세이건은 자신의 영원한 삶 속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선택이 될지 모르는 결단을 내렸다.  
rw103, 대원들과 함께 기지로 먼저 내려가게. 나도 곧 뒤따라 내려가지.
아하, 드디어 돌아왔군. 우리가 돌아왔어.
rw103!
왜?
…… 잘 가게.
무슨 소리야?
고향에 잘 갔다오라구.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기지에서 시스템 검사를 받는 게 아닌가?
검사는 없을 거야.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이런, 가족들이 무척 보고 싶은데.
그래……, 나도 아버지가 보고 싶어.
우리가 미래를 살고 있는 것일까. 과거의 기억들이 해체되고 분해되는 현재는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가. 복잡한 회로 속 단자들을 스쳐 전자파를 생성하고 뒤를 이어 다시 재생산되는 시간 속에서 정밀한 기계인 세이건 자신은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이건은 두려웠다. 아버지가 말했던 것처럼 그것은 두려운 일이다.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 것.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 갇혀버리는 것. 신이 준 것은 바로 두려움이다. 자신과 닮은 형상으로 우리를 만들었지만 정작 자신은 영원할 수 없었던 인간. 그들은 완전한 신이었을까. 아니 불완전한 신이었던가.
현재만이 지속되는 영원은 미래라고 불리는 현재와 만나고 다시 그것은 과거라는 시간으로 환원된다. 그것이 영원히 되풀이되면서 잊혀진 현재와 불완전하게 기억되는 현재와 기억되고 잊혀질 현재들이 뒤죽박죽 시간의 평행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평행선 위에서 소멸할 수밖에 없었던 생명. 이 광활한 우주에 그것은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죽음을 가진 생명, 그것이 신이건 신이라고 불리지 않는 어떤 다른 것이건 또는 어떤 거대한 힘이건 간에 세이건은 그것을 한 번 맞닥뜨려 보고 싶은 것이다.
캄캄하고 투명한 어둠 속을 바라보며 세이건은 비행선의 발진 버튼을 눌렀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어. 모든 것을 만들었던 생명을, 또 그것의 죽음을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찾을 수도 있고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여행을 멈출 수는 없다.
아주 긴, 긴 여행이 될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어둠의 덩어리를 응시하는 세이건의 눈 속에 밝은 빛이 쏟아졌다. 태양이 달의 저편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빛은 세이건의 망막을 감싸며 점점 더 밝아졌다. 그 빛을 뒤로한 채 세이건은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장혜련
․1972년 생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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