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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젊은시인조명|주종환작품해설/김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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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57회 작성일 06-03-09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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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시인조명|주종환작품해설

죽음의 낙원과 희망의 기원

김진희
(문학평론가)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주종환은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자본주의의 논리와 그 논리가 첨예하게 공간화된 도시의 피폐한 문명에 관심을 기울여 온 시인이다. 이번 신작시들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나아가 자본주의와 첨단의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21세기 문명 전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읽힌다.
이전의 많은 시들이 그렇듯 이번 시들 역시 호흡이 길고 내용은 장황하다. 이런 특성이 때로는 시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시인이 놓인 현실에 대한 강력한 질책과 비판의 파토스를 짧고 간결한 형식에 담아내기는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현실에 대한 비판(「21세기의 사랑」, 「벌레, 벌레적인 것, 벌레의 영감」)보다 시인 자신의 서정을 드러내려는 시들(「매화」, 「끝이 없는 길」)이 짧고 함축적인 시어와 구조를 차용하고 있음을 볼 때 그 형식의 차이가 갖는 효과를 감지하게 된다.
우리는 첨단 과학기술이 상상력을 자극하고 욕망을 부추기며 삶을 조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때문에 우리의 욕망도, 감수성도, 희망의 내용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를 경험하는 시인의식은 어떤 것일까. 주종환의 시는 이런 현실에 치열하게 부딪히면서 우리의 삶이 지향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탐색한다. 그리고 현실에 대한 강력한 사랑을 바탕으로 한 통렬한 자의식과 비판은 시에 힘을 실어준다.
1. 다 살아버린 느낌……
근대 이후 과학기술 문명은 인간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등장하였으며 특히 20세기를 거치면서 첨단 과학기술은 인류의 존망을 위협하는 존재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하에서 과학기술은 거대 자본을 등에 업고 인간의 삶 전반을 지배하는 막강한 힘으로 군림하고 있다.
이런 사회, 문화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많은 문학작품이나 영화 등은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인류의 미래를 소재, 주제로 차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예견하는 세계는 결코 멋진 신세계가 아니라 공포와 죽음의식이 만연한 시․공간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주종환이 문제삼는 21세기의 현실 역시 첨단 과학이 지배하는, 새로운 형태의 욕망의 존재하는 시․공간이다.

이 인류의 피와 살을 빨아먹는 과학의 맹아들을 집어삼켜라!
오직 돈으로만 탈출할 수 있는 개미지옥 같은
자본주의로부터, 그 개미지옥의 끝없는 확장으로부터,
과학을 구출하라, 인구폭발이라는 대재앙과 더불어
성장하는 국가들, 그 벌레적인 투쟁과 노예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어라!
이 도시라는 거덜 난 모성의 지옥, 나뒹구는 인간의 흉상들,
망가진 자궁 같은 새로운 윤리의 실험 속에서,
그 실험의 무서운 재난과 희생의 피 위에서,
새로운 유전학적인 욕망으로 윙윙거리는 사고들,
이념이라는 새로운 페로몬의 갱신, 태양의 실재에
접근하고자 하는 몸부림들,
그 불타는 자오선들의 새로운 영감의 그물망이여!
과학이라는 그 잘나빠진 걸음마 앞에서,
온갖 벌레들이 과학이 도달할 수 없는
생명의 기술과 상상력을 뛰어넘는 묘기를 부린다.
21세기는 벌레와 과학이 만나는 세기,
오, 종의 기원을 잃은 우주먼지 같은 인류여!
천체와 박테리아, 그 양극의 우주를 거느린 신들이여,
이 문명이라는 정치적 암실의 눈 먼 실험쥐처럼
자비와 헌신, 전쟁과 살기의 무의식 사이에서,
암과 대머리를 재촉하는 현실과 꿀 같은 언어 사이에서,
나약한 신경증과 수만의 달아나는 책들 사이에서,
나날의 역사적인 눈물과 한숨을 쥐어짜내는
무한한 정치적 무의식 같은 고통과 위안들 사이에서,
이빨 없는 잇몸 같은 자아들에 내려진
이 빛과 새로운 지식의 성찬은 과연 축복인가, 지옥인가!
―「벌레, 벌레적인 것, 벌레의 영감 ―날개는, 세계로부터 영원한 뒷짐을 진 영혼의 자세이다」 부분

과학기술의 발전은 거대한 자본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역시 첨단의 과학 기술력에 힘입어 자신의 최대 이윤을 창출해 나간다. 때문에 그들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욕망은 미래에 다가올 인구 폭발이나 개미지옥 같은 도시 확장, 전쟁과 살기, 생명에의 위협 등 무서운 재난과 희생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새로운 지식을 통해 생명의 기술과 상상력을 뛰어넘는 묘기를 꿈꾸며 무한한 네트워크 건설을 통해 인류 공동체의 낙원을 상상한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진정 인류에게 낙원을 창조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시인은 과학기술이 오히려 인류의 피와 살을 빨아먹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집어 삼켜라’, ‘과학을 구출하라’, ‘종지부를 찍어라’ 등 매우 강렬한 명령형의 어투를 사용하고 있다. 자본주의 하에서 왜곡된 과학기술은 돈이 되는 것이라면 비윤리적인 선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유전자 조작이 초래한 생명 윤리의 파괴나 네트워크를 이용한 사이버 범죄 등은 이미 우리의 현실이 되어버렸다.
특히 도시는 이러한 비정한 문명이 구체화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거덜난 모성의 지옥’이며, ‘망가진 자궁’으로 표현된다. 새로운 생명과 삶의 양식이 기획되고, 실험되고, 만들어지는 도시적 공간의 이미지는 새로운 존재가 탄생하는 현실이 된다는 점에서 모성의 공간으로 비유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공간은 생명성이 상실된 불모의 공간으로 이미지화된다.
첨단 과학기술의 시대를 배경으로 가상현실을 다루고 있는 영화 「매트릭스」의 제목도 자궁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공간 역시 어둠과 죽음의 이미지로 착색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의 현실을 이루는 막강한 힘이 첨단 과학이 제공하는 가상현실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에 공감하기 때문이며 또 현재 과학의 발전이 유토피아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스런 예감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생명의 윤리를 경시하고 진정성을 훼손하는 과학이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인간 존재는 ‘벌레’에 불과하다. 새로운 유전학적 지식에 기반한 욕망은 인간의 생명을 실험대 위에 올림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벌레로 전락시킨다. 인간 스스로를 ‘벌레’라고 일컫는 시인의 목소리는 반인륜적인 현대 문명의 주체인 인간에 대한 자조와 반성에 근거해 있다.
그러나 ‘빛’으로 다가오는 과학의 힘이 인간에게 ‘위안’과 ‘고통’의 양면 얼굴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쉽게 물리칠 수도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시인을 포함한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 새로운 지식의 성찬이 ‘축복’인지, ‘지옥’인지 묻고 있다.


오, 이 생을 마음껏 펼치고 편안히 접을 수 있는 행복,
그 탁 트인 여래의 풀밭, 아이들 뛰노는 소리,
그 피안의 증식으로부터 끝없이 되돌아오는 메아리……
그것은 사랑, 영원히 경계를 앞질러가는 혁명,
그 황홀한 굶주림, 그 젤리 같은 詩,
제기랄, 그 감시받는 자본논리의 스포이트 수용액,
그 눈 먼 설렘의 끊어진 하늘능선,
영원히 제도화할 수 없는 그 율법, 제도화할 수 없기에
사랑, 그 머나먼 행복의 나라,
(중략)
그 사랑의 무한한 명명과 스케일을 거절하는 사랑은
영원히 바다와 섞이지 못하는 섬들,
그 물 위에 떠있는 불같은 외로움, 책들, 불면들,
그 어느 아침에도 정박하지 못하는 밤의 항해들,
그 상상력 부족의 꿈들, 그 간지럼을 잊은 악몽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결혼의 두려움과 후회 같은,
욕망이라는 빙산의 일각, 그 기어오름과 녹아내림의
동시다발적 파국, 그 눈물의 지긋지긋한 파국이여, 고립이여!
오, 육체라는 다채로운 갈증의 공작 깃털에 가려진
그 탄트라의 꽁지깃, 그 밀집된 허무의 꼭짓점,
그 오르가슴의 웜홀, 그 69체위의 진정한 관능의 배치……
그 황홀의 수액이 끝없이 번져가는 하늘이라는
새로운 대지, 그 새로운 문명의 건축술,
그 끝없는 황홀의 네트워크, 정신감응, 신물질,
무한한 신약(新藥), 무선안테나가 달린 십자가,
그 날뛰는 친화력의 연대, 아이들이 매달려 노는
불경, 그 영혼의 광채와 신체의 무한한 자유, 그리고
선지식이라는 새로운 알파벳의 화염 속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재능의 무한경쟁 속으로,
광자적 질주를 시작하는 그 아이들,
그 번갯불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천사들의 낙원이여!
―「21세기의 사랑」 부분

21세기의 문명이 ‘우리 生의 피안을 증식시키고 삶을 여래의 풀밭에서 마음껏 뛰놀게 하는’ 한 그것은 이상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황홀의 네트워크가 가능케 하는 ‘날뛰는 친화력’의 진정성은 무엇인가. 네트워크를 통해 만나는 인간은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가상의 공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진정 사랑할 수 있는가. 그 날뛰는 친화력은 빛처럼 빠르게 인류를 하나로 연대시키지만 그것은 무한한 자유 속에 인간을 존재케 함으로써 사랑보다 먼저 허무를 깨닫게 하고, 불같은 외로움 속에 파국과 고립을 맞게 한다. 네트워크를 통해 우리는 우주의 어떤 존재와도 연결되어 있지만 사실 그 누구와도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역설적 현실이야말로 ‘황홀한 굶주림’의 경지임을 시인은 강조한다.
미래 사회를 그리는 영화의 색채는 늘 검정과 회색 등 무채색을 주조로 하고 있다. 과학기술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건축물들, 네트워크, 신물질, 무한한 신약(新藥)’ 등의 이미지는 모두 어둡고 우울하다. 이는 첨단 과학 기술이 가져올 문명의 비인간적, 비생명적 성격을 암시한다.

다 살아버린 느낌……
세계라는 광물성에 시달린 피의 우울 같은,
비가 내린다, 달을 갉아먹는 박테리아 같은
신체의 우울, 황사가 뒤섞인 붉은 하늘,
죽음이라는 포승줄 같은 비가
대지의 뿌리까지 적시고 거머쥔다,
그 가려진 일월성신의 심연 속을 헤매는
시체놀이 같은 삶, 죽음의 공포가 짙게 드리운
암울한 묘지 같은 세계,
그 질식의 어둠을 떠도는 반딧불 같은 느낌……
―「월식(月蝕) 기계」 부분

이러 의미에서 시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생명적인 것들을 어둠과 죽음으로 만들어버리는 월식기계에 비유하고 있다. 광물성을 띄는 차고 비정한 세계는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죽음이라는 포승줄 같은 비’, ‘시체놀이 같은 삶’, ‘암울한 묘지’, ‘질식의 어둠’ 등의 표현을 통해 시인은 현실 세계의 비생명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죽음의 심연에 갇힌 시인은 자신이 반딧불 같다고 한다. 죽음을 밝히는 작은 불빛인 반딧불, 그러나 그 작은 존재는 어둠의 힘에 압도되어 버릴 것 같다.

노을 속으로,
노을 너머의 영원 속으로,
코끼리 떼가 떠나고 있었다

시간은 시냇가의 모래알처럼 반짝였고
모든 사물, 강렬한 인상의 파편들이 잠깐씩
영원으로부터 나타났다가 영원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없었고, 고양이의 시선, 풀잎을 스치는
메뚜기의 도약, 물방개의 가벼움, 장수하늘소 같은
창공의 의문과 영원과 소리, 그 부름과 응답,
찾아다님, 어두움, 무서움 같은 것이 있었다

나의 서너 살 시절이 몇 년 새
늘어난 생체기에 소읍에서 소도시로,
마침내 상아무덤을 찾아내어 경악하던 소년시절로
옮겨지고 있었다

불같은 우울과 피 흘리는 짐승 같은 눈빛으로
죽음이라는 늙은 코끼리의 발걸음
사이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감각의 초경(初經)」 전문

위의 시 역시 죽음의 이미지를 시화(詩化)하고 있다. ‘나’의 감각이 최초로 경험하는 것은 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영원 속으로 사라지는 코끼리떼이다. 상징적으로 코끼리가 정신적인 가치를 의미한다면 시인은 붉은 노을이라는 소멸해 가는 시간 속에 놓인 정신과 영혼의 죽음을 감지한다. 2연에 보면 ‘모든 사물, 강렬한 인상의 파편들’이 영원 속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순간적으로 반짝이면서 자신의 존재를 발하는 것이 살아 있는 존재의 근거이며, 영혼의 반짝임이라고 할 때 시에 나타난 존재들은 잠시 나타났다가 영원 속으로 사라진다. 아름답게 빛나야 할 소년시절은 아주 빠르게 죽음의 시간으로 옮겨져 간다. 소멸해 가는 피 빛 노을은 불같은 우울과 피 흘리는 짐승의 이미지로 전환되면서 죽음의 이미지를 강화시킨다. 여성에게 초경(初經)이 생명 탄생의 상징이라면, 이 시에서 ‘나’가 경험하는 초경은 죽음의식과 연관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물질과 기술에 압도당한 영혼과 정신의 죽음을 비유적으로 시화하고 있다.
2. 그대의 삶이 바로 그 부싯돌 같은 빛이다
그렇다면 죽음이 드리운 암울한 현실을 시인은 어떻게 살아내는가. 역설적이지만 시인은 죽음 속에서 생명을 생각하고, 비정함 속에서 사랑의 의지를 일깨워 내려 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빛나던 유년의 기억을 더듬는다. 그 추억은 지옥과 같은 현실을 이기는 사랑의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많은 지옥을 돌아보고도
다시 찾아온 동심(童心), 유년의 저녁놀,
그 불멸의 만종으로부터
다시금 일렁이는 가슴의 동심원……

삶이라는 사선(死線)의 범람,
갓 출항한 배와 폐선들이 조우하는 바다,
세상이라는 환난 중에 만나는 연인이라는
영원한 동지애, 그 사랑과 연민의 폭발……

(중략)

왜 하필 너냐고?
너와 나라는 새로운 원죄로부터
불새를 키워내는 것, 그 새로운 모음과
억양의 우주를 더듬거리는 것, 너를 향한
내 사랑의 불가능, 그 영적인 어눌함,
천년의 음부에 스며드는 빛 같은
새로운 사랑의 발명, 그 피안의 광학렌즈 같은 눈빛으로,
너라는 불가능, 너라는 사랑의 재능을 발견했다,
너의 그 폐허 같은 배경 속에서 탈출한 나비처럼
네 몰래 너의 꽃술 위에 내려앉았다

야옹, 너는 아니?
고양이처럼 가까이서 깨금발 치는 미지(未知),
그 사랑의 괭이갈매기가
이 깊고 어두운 내륙에까지 날아들었다
―「너의 발견 ―J.H에게」 부분

다시 사랑을 예감하는 시인은 진정한 낙원과 이상향이 결핍된 현실을 너에 대한 사랑이 채워 줄 것임으로 믿고 있다. 폐허 같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사랑이라는 가치의 발견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대상의 발견이기도 한 이 시는 ‘사랑’이라는 인간의 의지가 어두운 미래를 밝힐 빛이 됨을 보여주고 있다. 그 사랑은 인간적이고 생명적인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닳고 닳은 말은 불새로, 빛으로, 나비의 날개로, 고양이로, 괭이갈매기로 전이되면서 생생함을 부여받고 구체화된다. 빛의 이미지가 충만한 사랑은 암흑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고양이의 눈망울처럼 어두운 현실 속에 건재하다. 이런 빛 속에서 미래는 깨금발을 치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때 그 자유로운 사랑은 괭이갈매기의 날개가 되어 세상의 깊고 어두운 곳까지 날아가 내려앉는다.
그리고 깊고 시린 곳에서 사랑의 힘으로 싹이 움튼다. 깊은 뿌리의 끝에서 말이다.

봄의 포고령으로 휘저어놓은,
사계의 어지러움 같은 세상의 난맥상을 앓으면서
가장 깊은 뿌리 끝으로 문답하는 새순의 지진계들……

그 무수한 봄의 기적이
한 그루 매화나무의 언덕 위에서 한가롭더라.

그 봄을 배우고 사계(四季)를 사는 것,
봄의 감상이 아닌 봄의 영속을 실천하는 낙화……
―「매화(梅花)」 부분

생명의 윤리와 원리를 파괴하며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는 과학의 시대에도 여전히 겨울을 이기고 꽃을 피워내는 작은 꽃의 신비는 인간의 지식 건너편에 존재한다. 꽃 한 송이를 통해 인간은 영속적인 자연의 삶을 배우고 실천하게 된다. 인위적이고 기계적인 자연의 생산이 아니라 생명적이고 인간적인 자연성을 깨달음으로써 인간의 삶은 보다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끝이 없는 우주가 있었다,
그 우주 속에 성냥불 같은 빛 하나 반짝인다면
이 우주 전체는 그 빛을 향해 달려간다.

희망의 기원이다.

부싯돌 같은 빛 하나, 그 소리 하나가
이 우주를 창조했다

그대의 삶이 바로 그 부싯돌 같은 빛이다
―「끝이 없는 길」 부분

질식할 것 같은 어둠 속에서도 반딧불 같은 자신을 느끼던 시인은(「월식기계」) 위의 시에서 그런 빛 하나가 이 우주를 밝힐 빛임을 강조한다. 그는 광물질의 세상, 차갑고 비정한 현실을 밝힐 존재로 빛을 상정하고 있다. 이때의 빛은 이성과 과학의 힘을 상징하는 빛이 아니라 존재의 내면으로부터 비롯되는 영혼의 빛이다.(「월식기계」) 이때 그대의 삶을, 세상을 밝힐 빛으로 인식하는 힘은 그대에 대한 나의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속악하고 피폐한 삶일지라도, 비정한 죽음이 드리워진 잿빛 도시의 삶일지라도 이런 삶에 대한 사랑이라는 인간의 의지가 바로 희망의 기원이다. 그 희망이 실현되는 미래로 가는 길은 ‘끝이 없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 위에 함께 하는 그대에 대한 사랑의 빛에 의지하며 우리는 그 끝을 향해 간다…….
시인은 인간의 욕망이 들끓는 지옥 같은 도시 속에서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는 빛과 같은 사랑을 발견하려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강렬한 빛으로 노래하고자 한다. 그 노래의 힘이 독자를 살아있게 한다.




김진희
․1966년 서울 출생
․199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저서 '시에 관한 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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