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15호 신작시/양영길
페이지 정보

본문
양영길
천년의 미라를 위하여
들꽃들이 만발했던 산허리
그 산허리 잘려나간 언저리에
아직도 썩지 못한 미라 하나 있었다
천년을 두고도
아직 못다 한 일이 무엇이었을까
천년을 두고도 썩지 못하는
이 여자의 한은 무엇이었을까
또다시 맨몸으로 눈부신 하늘을 봐야 하는 고통
죽음의 고통이란
이름 모를 손에 의해 발가벗기는 걸까
썩지 못한 시신보다
살 냄새 배어 있는 옷가지에 더 야단을 떠는
살아있는 사람들 틈에서
뒷전에 밀리는 이 맨몸의 아픔
천년 땅속에서 나와
햇빛을 봐야만 하는
이 썩지 못한 육신
땅속에 고이 묻히지 못하고
어느 구석진 곳에
누구인지도 모른 채
어느 살아있는 후손을 위해 밀려나 있어야만 하는
천년 미라의 인권
살아있는 자들의 욕망으로 발가벗겨진
맨몸의 아픔
녹둔도를 아시나요
대한민국 땅이었던
지금은 러시아 땅이 되어버린
녹둔도를 아십니까
두만강 하구 삼각지 기름진 땅
1860년에 러시아가 꿀꺽 삼켜버린 땅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함락한 틈을 타서
러시아가 빼앗아간 우리 땅
녹
둔
도
힘없는 나라가 빼앗겨버린 커다란 섬 하나
그 땅에 농사짓고 살던 사람들은
빼앗겨버린 우리 땅에
빼앗아간 그 놈들 몰래 들어가 농사를 지었단다
빼앗겨도 돌려달란 말 한마디 못하는 나랏님들 욕하면서
밤에만 몰래 들어가 도둑질하듯 숨죽이며 농사를 지었단다
걸리면 모든 것 다 빼앗기고 맞아죽는 걸 잘 알면서도
어쩌란 말이냐
나랏님들이 우리 처자식 먹여 살리지도 못하는데
앉아서 굶어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살아있는 것이 무슨 형벌인 양
처자식과 우리 목숨이 저 빼앗겨버린
남의 땅에 메여 있으니
어쩌란 말이냐
지금은 남의 땅
녹둔도를 아시나요
거기에는 아직도 연자방아랑 맷돌이랑
남의 땅에 가서 도둑농사 짓던 그 조상들의
피와 땀이 있거늘
힘없는 나라에 태어난
그 죄 값을 치른 뼈들이 묻혔거늘
지금은 남의 땅
녹둔도를
아십니까
양영길
․199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바람의 땅에 서서]
․저서 [한국문학사 인식 어떻게 할 것인가]
- 이전글15호 신작시/이인원 06.11.08
- 다음글15호 신작시/정수자 06.11.0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