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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신작시/이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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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원
프릴 장식을 단 생각들
한 여름 푸른 하늘에 뜬 양떼구름, 또는
그 구름을 몰고 가는 바람의 패턴으로
어쩐지 기시감(旣視感)이 드는 골목길, 또는
무인도로 남아 있는 모든 섬의 지도를 멋대로 축척한
낯 뜨겁게 둘러댔던 너덜너덜한 거짓말, 또는
억지로 베풀었던 얄팍한 동정과 친절의 두께로
헤프게 터트렸던 웃음이나 울음, 또는
힘껏 내질렀던 고함소리의 파장으로 퍼져가는
치맛단에 바이어스 재단한 천을 대고
느슨하게 박아가며 프릴을 달아내듯이
손에 물을 적셔가며 하늘하늘 늘려나가는
말캉한 생각반죽의 아우트라인
방금 한 국자 건져 올린 푹 무른 상상들
그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가는
하루 종일 비 오시는 날
수제비 끓여 먹기
무조건,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조건 없이,라는 말에서는 꿀꿀이죽 냄새가 나네
쉰 밥풀같이 물크러진 조건 1,
벌건 찌개국물 속 멸치대가리로 갈앉은 조건 2,
곰팡이 꽃 화려한 치즈조각으로 썩어가는 조건 3,……
역겨움은 다시 좋은 조건의 거름이 되어
시퍼런 잎과 달콤한 열매를 맺고
그 식탁 주변으로
킁킁대며 몰려오는 살진 돼지 같은
맹렬한 먹성의 조건들 4, 5, 6,…… 12,……
무조건,이란 말에서는 피비린내가 나네
졸지에 총알받이로 내몰린 소년병, 조건 A
혼인날 병신 신랑을 처음 본 각시, 조건 B
건강검진에서 말기 암 판정을 받은 신입사원, 조건 C……
일단 하늘이 무너져내린 다음에는
마약 한 듯 절망도 두려움도 싸악 가시고
그 아수라의 전장터로
하룻강아지처럼 달려가는
맨주먹에 청맹과니인 조건들 D, E, F,…… X,……
이인원
․1992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마음에 살을 베이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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