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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신작시/허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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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1,739회 작성일 06-11-08 18:59

본문

허금주


책으로 태어나는 여자․13


나의 길은
가족들 모두 떠난
옛집에 남아
새벽 눈물을 캐면서 시작되었다
자주 파리하게 깜박이는 형광등
꾹꾹 삭인 어둠의 옆구리를 쓸어내리며
내 무성한 피로는
내 속에서 일으키는 불면의 빛과 만나
파아란 이파리로 너울거렸다
가끔, 수취인 불명으로 반송되는
우편물을 집어들 때마다
삶의 반대편 땅에 거꾸로 서서
태양의 손에 경작된 모래밭을 지나
목마를 때까지 걷고 걸으면
버리고 버려주는 슬픔들이
일제히 모래알로 쓸려 다니곤 했다
그리운 내일
가난으로 불안해도 돌아갈 주소가 없어
한 줄 불멸의 문장으로 남을 수 있기를
세상 저 밑바닥에서 울리는 노래가 될 수 있기를
나는 그렇게 한 가지 기도로만
홀로 남은 어둠을 견디었다.






책으로 태어나는 여자․6


당신을 사랑할수록
내 몸 속에는 곰팡이가 번져간다
내 초록의 가슴을
조용히
아주 천천히
갉아 먹으면서
당신은 썩어가는 육체의 허물을
나에게로 완벽하게 이식시킨다
만약 처음부터 당신 눈에 걸려든
생명을 바치며 죽어가야 하는 사냥감이었다면
끔찍한 높이에서 떨어뜨릴 작정이었다면
나를 오랫동안 끊임없이 시들게 하라
살아있는 것이 고통이라면
세상이 하느님을 괴롭히듯이
나는 이제 당신을 괴롭힐 것이다
늙은 당신의 속옷보다
내 이마를 짚고 간 달의 손처럼
나는 외로움으로 순결하다
당신이 나에게 이별의 옷을 입혀도
나는 사랑하는 당신을 향하여
온몸에 곰팡이를 뒤집어쓴 채
내 하나뿐인 왕국의 성전(聖典) 안을
저 달과 함께 흘러다니며
시들면서 완벽해지리라


당신은 영원히 나를 울릴 것이다





허금주
․1966년 부산 출생
․1993년 ≪심상≫으로 등단(시) ․2001년 ≪한국문인≫으로 등단(평론)
․시집 [저문 길은 나에게로 뻗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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