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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신작시/박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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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숙
허공에 패를 놓다
그 남자에게 불안이란
심장박동의 다른 이름이었다
마음 앉힐 그늘을 찾지 못하고
공중을 도색하는 그의 빠른 움직임은
흡사 용수철의 반동에 의한 흔들림과 같아서
생은 그에게 쾌적한 공기를 나눠줄 틈이 없었다
그러한 요동이 우물처럼 고이는 순간이
있었던가, 있었다 아주 잠시
그는 지하도 계단에서 걸음을 멈추곤 했다
거리를 떠돌던 바람이 넘실대는 층계참에서
언 손으로 신문을 들고 서 있는 사내
그가 머문 시선은 신문에 담긴 세상도
신문팔이 사내의 궁색한 외양도 아니었다
그의 참을 수 없는 경멸은 오직
신문을 팔기 위해 떨고 있는 흰 손
사라고 권하지도, 외치지도 못하고
다만 위태롭게 떨고 있는 손에 있었다
그는 신문팔이 사내를
아니, 공중에서 떠는 제 누각을 향해
노역을 멈추고 비명을 질렀다
제발 떨지 마, 불안하단 말이야!
그의 시간이 단 한번 마디를 끊는 순간이었다
저울
이 도시는 너무 건조하여
밤마다 들이켜는 술잔들은 화가 났으며
가을비는 온갖 망명설에 휩싸여 있다
늦은 술자리에서 빠져나와 보니
의지 없는 길들이
사방에서 빗방울을 튕겨낸다
어디를 간다 해도 나는 반송되고
그대가 돌아가는 집 또한 울음주머니만 무성하니
사랑하는 사람이여
누가 우리의 따스한 욕조를 이 거리에 바쳤는가
홀로 걷던 나는
길가에 버려진 저울에 앉아
증거 없는 슬픔 속을 헤매고
지워지는 밤의 무게를 재어본다
도시의 흉곽을 가르며 차가워지는
재빠른 갈퀴손들의 속도와
비가 와도 젖지 못하는
백 킬로그램의 가혹한 외로움
혹은 알리바이 없는 숫자 제로가
우리의 마지막 질량이라니
버려지는 저울의 얼굴아
폐허의 허명조차 거절하지 않는
버릇없는 시간의 애인아
건조한 이 도시의 추억을 믿고
빗줄기를 막대사탕인 양 빨아먹다 보니
이건 너무 벅찬 무게의 새벽이질 않는가
박인숙
․1968년 경남 합천 생
.1996년 ≪<불교문예≫로 등단
․시집 [항생제를 먹은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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