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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지난계절작품읽기/임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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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상실과 현대의 신화
―이응준의 「황성옛터」
(≪현대문학≫ 2004년 3월)
임영봉
(문학평론가)
‘변화’가 생존의 조건 자체가 되어버린 시대에 소설이란 형식은 과연 어떻게 자신의 생명을 지탱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어떤 것은 이미 붕괴되어 버렸고 또 어떤 것은 목하 해체 중에 있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의 성격은 ‘소멸’과 ‘생성’에 놓여있음이 분명하다. 소설과 사회의 밀접한 대응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러한 삶의 변화 국면은 소설 장르의 생존 조건이 새로운 차원으로 대두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응준의 「황성옛터」(현대문학, 3월호)는 우리 시대 소설 언어의 변화 양상과 그 가능성의 일단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황성옛터」에서 독자는 무엇보다 먼저 새로운 성격의 인물과 마주치게 된다. 이야기의 첫 장면에서 주인공 ‘나’는 신비주의 서점의 유리문을 밀고 나오고 있다. 그의 가방에는 칼 구스타프 융의 ꡔ비행접시들ꡕ과 그레이엄 린치의 ꡔ무서운 미래ꡕ라는 방금 구입한 낯선 책 두 권이 들어있다. 주인공 ‘나’는 유복자로 태어났고 과거 천문학을 지망했지만 어머니의 소망에 따라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지금은 다니던 은행에 사표를 던지고 팬터마임에 빠져있는 인물이다.
중요한 것은 상식의 차원을 벗어나는 주인공의 비범한 성격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그가 맺고 있는 모종의 불화 관계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어머니를 두고 ‘속물형 낙관주의자’라거나 ‘내세기복형 비관주의자’라고 부르는 데서 나타나는 시니컬한 태도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주인공의 냉소적인 시선은 어디에서 연유하고 있는 것일까. 주인공 ‘나’의 관심사 중의 하나는 우주 쓰레기가 ‘대재앙의 씨앗’이 되리라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하늘이 가진 의미란 수명을 다한 우주 비행체들로 가득 찬 어떤 공간일 뿐이고 밝게 빛나는 별 또한 인공위성에 지나지 않는다. 주인공 앞에서 푸른 하늘과 타오르는 별빛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우주란 고철의 바다에 불과할 뿐이라는 세계관이 주인공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런 주인공 앞에서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의 의미는 자동적으로 소멸되어 버리고 그것은 곧 가치의 붕괴를 의미한다.
「황성옛터」의 주인공이 가진 비범함이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자 한다는 점에 놓여있다. 하나의 질서로써의 세계가 사라져버린 뒤에 남는 것은 유령과도 같은 애매한 불확실성일 뿐이며, 여기서 세계와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린 자아는 고독한 단독자의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서점에서 돌아오는 길에 주인공은 오랜 여자친구 현경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런데 총명했던 현경은 ‘일신상의 황당한 비극’ 때문에 순식간에 몰락한 처지가 되어있었다. 주인공 앞에서 현경은 어느 날 갑자기 성공했고, 또 어느 날 갑자기 몰락해 버렸던 것이다. 여기서 현경의 운명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세계의 정체는 불투명성, 그 자체이다. ‘그녀의 천재’는 한순간 ‘재’(災)로 변해 버렸다. 그런 세계의 한복판에 서 있는 주인공에게 있어 인생은 자신의 뚜렷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삶에 대한 모든 종류의 물음은 언제든지 “인생이란 게 대부분 그렇지.”라는 식의 주인공의 대답 속에서 해소되어 버릴 성질의 것으로 나타난다.
주인공이 보여주는 삶의 방식이 유별난 것은 그가 고아 아닌 고아로 살아간다는 점에 있다. 그의 삶은 세계의 유기적 관계성을 부정하고 스스로 자신을 유폐시킨다는 점에서 고아를 닮아 있다. 스스로 고아가 됨으로써 그가 얻게 된 것은 자유이고 그런 이유에서 주인공 ‘나’는 세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인’의 의미를 띠고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 주인공의 자유는 자신의 방향성을 전혀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성격을 띠고 있다. 그는 어딘가로부터 우연히 떨어져 나온 파편 같은 존재이기에 자신에 대한 존재 증명-정체성을 획득하는 게 불가능한 형편이다. 주인공에게 있어 이제 세계는 하나의 전체가 아니다. 과거도 미래도 부재하는 우연한 계기 속에서만 그 자신이 존재할 뿐이며 무한히 열려있는 오직 ‘현재’로서의 시간 속에서 그 삶은 지속될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순간에 세계로부터 ‘존재’ 자체를 상실하고 ‘미래’를 빼앗겨버린 현경의 운명은 주인공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이 작품의 주제라고 할 만한 것과 관련되어 있거니와 여기서 주인공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던질 때 우리는 이야기의 전편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신화적 모티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주인공이 신비주의 서점에서 구입한 또 다른 물건, ‘레인스틱’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백 년 만에 쏟아지는 사막의 빗소리를 내는” 희한한 물건이다. 선인장의 속을 덜어내고 서너 줌의 굵은 모래알갱이를 채워 넣고 봉한 뒤에 거꾸로 세우면 모래알이 흘러내리면서 소리를 내도록 만들어진 것이 레인스틱이다. 그것은 고대 마야인들이 가뭄 시에 먹구름을 부르는 제의에 사용되었던 도구였다. 마야인의 이 신비스런 이야기는, 삶이란 폐허와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그 무언가를 찾아 거리를 헤매는 부질없는 꿈에 다름 아니라는 ‘황성옛터’의 신화와 연결되고 있다. 이 작품의 끝은 주인공이 폐허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는 장면이다.
신화가 빈틈없이 완결된 이상적인 세계의 표상이라는 점에서 레인스틱은 주인공의 유토피아에 대한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제시하고 있는 ‘폐허에 내리는 빗소리’로 대변되는, 생명력으로 충만한 새로운 세계의 이미지는 매우 막연한 것으로 다가 온다. 이와 같은 문제는 작가가 이 작품에 동원하고 있는 또 다른 류의 신화적 모티프에서도 확인된다. 작가는 생텍쥐베리의 ꡔ어린 왕자ꡕ 중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우리는 그것을 마음으로만 볼 수 있어.”라는 문장을 가져오고 있는데 이는 주인공이 세계에 대해 취하고 있는 태도와 투쟁의 성격을 그대로 대변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주인공에게 있어 팬터마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마술’의 세계이며 마임이스트는 우주의 비밀을 엿보고 그것을 부활시키는 존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황성옛터」에 등장하는 신화적 모티프의 역할과 이에 지배되는 주인공의 성격은 대립과 갈등의 측면을 크게 약화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소설형식의 근간이 되는 서사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시적 감동을 읊조리는 서정적 주체로 자주 바뀌면서 정작 그가 깃들어있는 산문적인 현실 세계를 초월해 버리는 것 또한 이러한 문제와 무관치 않다.
이응준의 「황성옛터」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세대의식과 감수성이다. 이러한 ‘새로움’의 의미는 다루고 있는 소재와 구성, 표현의 측면에서 두루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소설형식이 근본적으로 요구하는 서사적 성격의 모호함이 바로 그것이다. 세계의 복잡한 실상을 추상적인 관념의 틀 속에 가두고자 할 때 그 세계는 거대한 환상 혹은 망상으로 대치될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화사한 감수성과 문체를 제외할 때 그 세계는 과연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온갖 신기한 것들로 쌓아올린 잡동사니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임영봉
․경남 김해 출생 ․1997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학술서 ꡔ한국 현대 문학비평사론ꡕ 평론집 ꡔ늪에 빠진 언어의 표정ꡕ
․현재 중앙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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