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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지난계절작품읽기/오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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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더없이 어렴풋해진 인간
―정영문의 단편소설 「배추벌레」
(ꡔ작가세계ꡕ 2004년 봄호)
오양진
(문학평론가)
정영문의 「배추벌레」는 우리 시대가 처한 사회문화적 상황의 한 징후가 되어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일단 이 소설에서 삶의 무의미성과 의미 없는 삶의 더없이 무의미한 소모를 그린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인 나는 어느 날 새벽 배추와 무를 뽑으러 가는 사람들 틈에 낀다. 배추와 무를 뽑는 일은 일종의 성과급이 적용되고 또 일당이 주어지는 일이었는데, 나는 기운이 부족한 사람으로 분류돼 일이 쉬운 만큼 일당이 적은 배추 뽑는 일을 하게 될 것이었다. 나는 안내하는 사람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행선지로 우리를 데려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과수원과 댐을 보게 된다. 이때 나는 이런저런 영상들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 사과 서리를 했던 과수원의 주인이 보여준 넋 나간 듯한 모습이나 그의 과수원 한복판에 있던 부서진 배의 영상을 기억했는가 하면, 누군가 댐에서 떨어지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는 날이 밝아올 무렵 휴게소에 도착한다. 그리고 잠시 쉬면서 우리는 저마다의 과거에 대해 잡담을 주고받는다. 거머리와 참치에 대한 얘기가 전부였고, 과거에 소방수였다던 한 사람은 시종 귀찮다는 표정만으로 가방처럼 말이 없었다. 다시 출발한 우리들은 또 한번 멈춰 서는데, 도로에 깨진 수박과 함께 전복된 트럭 한 대와 넋이 나간 듯한 트럭 운전사를 목격했을 때였다. 얼마 후 우리는 산속에 있는 고랭지 채소 밭에 도착해 곧바로 일터에 투입된다. 배추 뽑는 일이 서툴러 감독의 적을 받기도 했지만, 나는 일이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자 나에게 은밀한 아편 거래를 청해 오는 사람도 있었지만 싱겁게 가버렸고, 식사를 마친 나는 다시 일에 열중한다. 그런데 나는 배추 뽑는 일이 점점 쓸데없는 일처럼 여겨지고 또 자신이 점차 쟁기를 끄는 소처럼 생각된다. 그 무렵 나는 숲 가장자리에서 노루 한 쌍이 구애하는 과정을 목격하고 지켜보는데, 어느 순간 내가 노루를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노루가 나를 지켜보는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갑자기 나는 내가 배추를 상대로 너무 애를 쓰는 것이라고 느끼고 또 내가 무엇을 상대하는지조차 모호해지면서 숨쉬기가 어려워진다. 이때 나는 배추벌레를 간절히 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배추벌레를 볼 수 없다면 꿩이 날아오르는 것이라도 보고 싶었던 나는 마침내 가슴에서 오래된 통증을 느끼고 한 기억을 떠올린다. 오래전 나는 언젠가 밤길을 걷다가 누군가로부터 이유 없이 가슴을 얻어맞고 쓰러진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일이 점점 힘들어지고 의식 또한 점차 혼미해지면서, 나는 누군가 댐에서 거꾸로 떨어지고 있는 환영을 보고 또 그것의 그림자가 내 몸을 덮을 만큼 거대한 크기의 배추벌레의 나방을 보았다고 느끼며 결국 쓰러지고 만다.
이 소설에서 우리 시대의 사회문화적 상황을 읽어내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지나친 비약인지도 모른다. 「배추벌레」는 배추 뽑는 일과 같은 하찮고 무의미한 일을 하다가 죽음에 가까운 정신적 육체적 소진을 경험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무의미 삶 속에서 난파당한 인간’이라는 정통적 주제를 적절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주인공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 각인된 과수원의 영상은 상징적이지만 선명하게 그러한 주제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과수원의 주인이 된 이가 폐허와 같은 과수원에서 자폐적인 삶을 살다가 죽고 만다는 이야기나 한때 과수원이 옛 도자기의 발굴 장소로 흥성했다가 무가치한 도자기 조각의 무덤이 되고 만다는 이야기는 주인공의 무의미한 삶의 이야기와 정확하게 겹친다. 이것은 사실 「배추벌레」에서 가장 핵심적인 모티프라고 할 수 있는 ‘과수원 한복판에 있던 부서진 배의 영상’으로 모두 집약된다. ‘무의미한 난파의 삶’이 이 소설의 주제를 이룬다는 것은 여기서 암시적이지만 명백한 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징후적인 해석이 허락된다면, 이 소설은 우리에게 최근의 사회문화적 상황을 스스로 증거하는 작품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소설이 삶의 무의미성이라는 의미로 겨우 구제된 최소한의 소설적 주제마저 지우고 삭제하는 지점에서 징후적이다. 실제로 작가 정영문은 삶의 무의미라는 의미마저 무의미하게 만들려는 실험적 의도를 작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시킨다. 그리고 그 방식들의 최종 목표는 인간의 의미와 가치를 격하 내지 하락시키는 데로 모아진다. 삶의 의미와 가치의 생성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토대인 인간(성)을 경멸하고 폄훼하고 부정한다면, 삶의 무의미라는 최소 의미조차 설 자리를 잃고 소멸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배추벌레」에서는 인간을 경멸하고 멸시하는 아주 걱정스러운 표현들이 빈번히 나타난다. 심지어 이 소설의 제목과 관련하여 인간에 대한 경멸과 멸시는 아예 이 소설의 주제가 된다고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 표현들은 두렵기까지 하다. 그런 만큼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얼마나 하찮고 왜소한지, 그리하여 인간의 의미와 가치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보는 일이다. 인간에 대한 경멸과 멸시는 우선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배추나 무를 뽑는 일과 같은 하찮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서 가장 먼저 환기되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를 배추나 무를 뽑는 왜소한 일로 안내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뭔가 지시 사항을 전달하는 장면은 좀더 은밀하지만 중요한 양상을 보여준다. “그는 사람들이 지시 사항을 얘기할 때면 곧잘 그러듯 허리에 두 손을 얹은 채로 말했다. 그렇게 하자 그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지시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여기서 지시자는 어떤 요지를 숙지하고 전하는 한 사람의 인격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지시 사항을 전달할 때 허리에 손을 얹는다는 관습적 표상이 그 지시자가 ‘지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지시 대상에 떨어져 있다. 사람이 표상의 근거가 아니라 표상이 사람의 근거가 됨으로써 인간은 언어의 흔적이나 문법의 환상으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인간이 사물과 동등하게 취급되거나 동물에 비해 저열하게 간주되는 경우도 있다.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 그려지는 것 가운데 ‘가방’이라는 무거운 침묵의 사물과 스스로를 귀찮은 존재로 생각할 정도로 과묵한 벙어리 ‘소방수’의 통사적 병치는 전자의 대표적인 예가 되고, 주인공의 경험 속에서 드러나는 것 가운데 ‘인간’이 장식적인 뿔과 신중한 구애 과정을 보여주는 ‘노루’ 한 쌍 앞에서 구경당하는 존재로 규정되는 의미론적 전도는 후자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이 경우는 사실 너무 많은 예를 보여주고 있어 그 중요성을 지나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한 표현은 인간의 인간 자신에 대한 회의적이고 자성적인 태도를 넘어서 이제 인간에 대한 냉정한 무관심의 상태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추벌레」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어떤 인간적 감정으로도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나아가 어떤 증오나 경멸의 감정으로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비록 인간의 외양을 하고 있을지라도 자신을 포함한 다른 인간들에 대해 한없이 무관심하고 냉랭하다는 점에서 하나의 무기물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배추를 잘못 뽑은 일을 두고 소리치는 감독이나 지적을 당하는 주인공이 어떤 증오나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었다는 증거는 이 소설에서 찾을 수 없다. 주인공이 가슴에 통증을 느끼면서 떠올린 과거의 한 경험은 좀더 명백한 예를 제공해준다. 밤길을 걷다 이유 없이 누군가로부터 가슴을 얻어맞은 적이 있는 그는 그 사건을 분노가 아닌 웃음으로만 기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용서를 운운할 때조차 그 사건은 다만 알 수 없는 것이고 혼란스러운 것으로만 느낀다. 이처럼 인간의 비인간화와 무의미의 혼돈을 무해하고 따분한 방식으로 가치화한 문학적 사례는 아마도 정영문의 이 작품 이전에는 없었을 것이다.
정영문의 소설은 그렇게 많은 독자들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요사이 몇몇 명민하고 박식한 독자들은 그의 소설을 즐기고 있는 듯한 인상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배추벌레」와 같은 정영문의 소설이 두렵다. 한편 그들은 정영문의 소설이 인간에게 가치 있고 의미 있는 특질들이 점점 무가치해지고 무의미해지는 우리 시대의 사회문화적 상황을 미학적 아이러니로서 반영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정영문의 소설은 그러한 사회문화적 상황의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그 상황의 조건이 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이때 미학이나 전위는 일종의 장식적인 알리바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와 가치의 생성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토대인 인간(성)을 경멸하고 폄훼하고 부정함으로써 삶의 무의미성이라는 의미로 겨우 구제된 최소한의 소설적 주제마저 지우고 삭제하는 방식과 양상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미학의 한 구현물이기 이전에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 병리적 보충물이 되는 셈이다. 소설에 작가의 창작 동기나 창작 과정을 밝히고 있는 듯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나는 배추벌레로 시작해 자유자재로 번져나가는 생각들을 자유자재로 번져나가게 했다.” 이 구절은 우리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생각을 마음에 새기도록 만든다. ‘자유자재인 것은 언제나 위험천만한 것이다.’
오양진
․1969년 인천 출생
․2000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평론 등단
․현재 서울산업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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