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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지난계절작품읽기/김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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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운과 촌벽 그리고 노년의 염원
―이명한의 「겨울나기」
(≪문학과 경계≫ 2004년 봄)
김동윤
(문학평론가)
1.
‘영원한 문학청년’으로 불린다는 소설가 이명한-그는 고희를 넘겨 우리 나이로 일흔셋이나 된 노작가다. 그가 이번 봄에 발표한 「겨울나기」를 읽으면서 나는 이 시대의 노작가와 작품으로 소통할 수 있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오십줄에만 들어서도 원로 행세를 하려들면서 소설가 명함만 들이대며 창작에는 뒷짐인 이들이 적지 않은 현실에서 그의 신작은 신선한 충격이라 할만했다. 더구나 노년의 일상에 머문 것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통찰이었기에 더욱 뜻 깊다.
그의 겨울 이야기는 진정한 봄날을 갈망하는 작품으로 읽힌다. 하지만 「겨울나기」에서 그려내는 세계에서 우리가 새로운 돋을새김이라고 크게 주시해볼 거리가 있는 아니다. 어떤 새로움을 추구하려는 의도가 이 노작가에게 강하게 작용했던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이명한은 이 단편에서 무얼 말하고 있는가.
2.
「겨울나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갈기갈기 찢겨진 걸레조각 같은 구름이 너울너울 하늘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겹쳤다가 풀어지고 풀어졌다가 겹치는 조화를 거듭하는 사이로 이따금 샘물 같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는 수가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순식간에 지워져버리곤 하였다.”(180쪽) 이 같은 구름의 조화와 그 뒤에 가려진 하늘의 양상은 우리 현대사의 상징이자 그런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민중들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작가는 이런 암운(暗雲)과 촌벽(寸碧) 아래로 이내 겨울 풍경을 제시한다.
‘차가운 바람’, ‘흩어져 있는 낙엽과 검불나부랭이들’, ‘을스산한 날씨’, ‘당산나무’, ‘네댓 마리의 까마귀’, ‘고목나무’, ‘할미귀신’……. 이런 농촌의 겨울 풍경이라면 대개가 그곳의 비극, 전통과 현대 혹은 세대간의 갈등 문제로 향하게 마련인 것을. 이 노작가는 그야말로 정직하게 풀어간다. 독자의 기대치에 어긋나는 법이 거의 없이 소설은 전개된다. 모범답안으로만 가고 있어서 긴장감은 덜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역동적인 스토리 흐름도 아니다.
노작가는 농사지으며 서당에서 학동들을 가르치는 노인 절산선생을 작품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절산선생은 목을 자를지언정 상투는 자를 수 없다던 최익현을 신봉하며 해방 이후까지도 상투를 고집한다. 예의범절도 모르는 놈들은 절대 용서가 안 된다거나 농자천하지대본을 강조하는 면을 보면 고지식한 시골유생의 전형임을 바로 알 수 있다. “학식 높은 도덕군자라고 해서 처사로 대접받고 있”(189쪽)는 인물이다. 그는, 처사(處士)들이 으레 그렇듯이, 가부장적이다. 집을 떠나면서도, 그것이 종내 사지로 떠나는 길이면서도, “중대한 일을 여자에게 알릴 수는 없”(193쪽)다고 여겨 함구한다. 부인 김씨에게는 ‘하늘같은 낭군’으로 떠받쳐진다.
그런 절산선생에게 가문(家門)이야말로 절대적인 가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황은 최악이다. 지금 그에게는 가문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큰 걱정거리가 되었다. 외아들 경호가 불령선인으로 몰려 일경에 붙들려가 시달린 끝에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데다, 손자마저 위태롭기 때문이다. 손자 창수는 3대 독자다. 이제 창수만이 희망인 셈이다. 그런데 요즘은 장성한 사내가 된 창수로 인해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해방이 되었는데 진정한 독립이 오지 않았고 그런 상황이 창수를 흔들어놓고 있다. “불행한 일이 생기게 되면 가문이 문을 닫을 판이니 외나무다리를 건너듯 조심해서 살아가야 하는데 매사가 자꾸만 외로 가고 있으니 걱정이요, 한숨이었다.”(183쪽) 절산선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창수는 여순사건의 와중에서 끝내 입산을 하고 만다.
이런 사회적 상황은 절산선생과 창수의 대립 구도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절산선생은 옛사람의 글을 소홀히 여기는 법이 없었다. 그는 그런 삶의 방식이 “우리 사회를 수천 년 동안 지탱해 온 질서요 이데올로기”(184쪽)라고 믿었다. 따라서 가문을 지키기 위해 손자의 입산만은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반면 창수에게는 “가족보다 중요한 것은 나라요, 이념이요, 조직이었다.”(183쪽) 끝내 할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입산의 길을 택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할아버지와 손자의 대립은 적대적인 양상으로 가게 마련이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이 점은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맥락이다.
절산선생은 가문에 얽매어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인물이 아니다.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며 마을사람들을 괴롭혔던 가나모리(金森)가 새 조국에서도 다시 경찰이 되어 등장한 것을 보고 “해방이 되었는데 일본경찰이 웬일이냐!”고 내지르고 싶었다는 데서 보듯이 역사의식도 있다. 창수를 하산시키기 위해 사지나 다름없는 곳까지 들어갔다가도 변절자가 될 수는 없지 않느냐는 손자의 말에 수긍키도 한다.
창수도 자기주장만이 절대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온 가족과 더불어 묶여있는 공동운명체”(183쪽)임을 모르지 않는다. 변절자의 낙인이 찍히게 되더라도 할아버지 앞에서 먼저 죽을 수는 없다고 다짐해 보기도 한다. 창수는 제대로 된 나라를 세움으로써 아버지의 죽음을 어느 정도 보상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렇게 이들은 서로 대립하고 있으면서도 상대를 이해하려고 했다. 사실상 그것들은 모두 소중하다는 것이 작가의 메시지로 보인다. 그런 점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작가는 화순 출신의 열다섯 살 어린 소년을 등장시킨다. 소년은 반란군을 숨겨주었다고 집이 불타고 부모가 다 죽어 입산한 경우다. 절산선생은 산에서 만난 그에게 “여기서 나가게 되면 우리집에 가서 같이 살자.”고 말한다. 해가 바뀌어 토벌대와의 전투에서 창수가 전사한다. 절산선생은 그 소식을 듣고 시신이라도 수습하겠다며 나서다가 역시 토벌대 총탄에 맞는다. 그 장면을 본 소년이 그를 끌어안다가 또 꼬꾸라진다. 소설의 마지막은 “한 덩이가 된 두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벌건 피가 마른풀을 적시고 하얀 솜눈이 한 송이 두 송이 나비처럼 날아와 그들의 몸을 덮고 있었다.”(198쪽)는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결국 세대간의 합일이다. 피범벅 된 역사는 할아비 세대와 손자 세대가 같이 걷는 길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물론 그것은 여순사건 전후의 전라남도에서만 국한되는 양상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그 시절과 그다지 다를 바 없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덩이가 된 그들은 먹구름의 터진 틈으로 과연 샘물 같은 하늘을 보았을까? 촌벽은 그들의 감겨가는 시야에 포착되었을까?
3.
이 작품에는 양두사(兩頭蛇)에 관한 에피소드가 꽤 흥미 있게 끼어들어 있다. 그러나 작품 전체에서 특별히 의미 있는 기능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아쉽다. 10년 전 어느 날 절산선생은 창수를 데리고 논으로 가다가 급히 귀가해 드러눕는다. 머리가 둘인 뱀을 보았으니, 자기는 곧 죽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손자도 그 뱀을 보았다니 이제 집안 망했다며 절망한다. 그러나 창수가 본 그 뱀은 양두사가 아니라 흘레붙은 뱀이었다. 한바탕 해프닝이었다. 물론 이는 옛사람의 글을 철저히 믿는 절산선생의 생활태도와 손자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엿보게 하는 장치가 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이 짧지 않게 제시된 에피소드이면서도 전체적인 맥락에서 확실히 맞물리지는 못하는 것 같다.
지역적인 특성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는다는 점은 더욱 아쉬운 부분이다. 여순사건을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전라도만의 사회역사적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언어 면에서 보아도 그렇다. 할아버지의 전라도 사투리인 ‘하나씨’라는 말이나 간간이 나오는 어미만이 전라도 말임을 알게 할 따름이다. 심지어 절산선생의 부인 김씨가 남편의 물음에 “아무 소식 없습니다.”라고 답하는 부분을 보면서는 고개를 흔들지 않을 수 없다. 지역의 의미를 탐색하는 일이야말로 현 시점에서 우리 문학의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아쉬운 부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겨울나기」는 영원한 문학청년 이명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노작가의 열정은 청년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음을 다른 작품에서도 계속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동윤
․1964년 제주 출생
․2001년 ≪리토피아≫로 등단
․저서 ꡔ우리 소설의 통속성과 진지성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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