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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지난계절작품읽기/정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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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으로 남겨진 ‘50퍼센트’
―이호철의 「동베를린 일별(一瞥) 기행, 2003년 가을」
(≪창작과비평≫ 2004년 봄)
정문순
(문학평론가)
사람살이의 모든 일은 합리적이고 필연적인 법칙이 대강 50퍼센트이고, 나머지 50퍼센트는 전혀 위험한 ‘우연’ 속에 내동댕이쳐져 있다.
이호철의 창작집 ꡔ남녘사람 북녁사람ꡕ(2002)에 나오는 이 진술은 단순한 듯해 보여도 세상사를 보는 작가의 시각이 응축되어 있다. 작가의 현실 인식은 역사나 사회 체제 같은 거대한 힘의 그림자에 완전히 포획되지 않는 낱낱 개인의 정체 모를 영역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한 인간의 일생은 역사의 파장이 미치는 영역에 몸의 절반만 담그고 있을 뿐 나머지 부분은 예측불허라고 할 때, 인간을 어떤 지경으로 몰아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이 50퍼센트의 ‘우연’이 곧 작가가 소설에서 줄곧 탐사한 대상이 되어 왔다.
개인의 삶이 역사의 격랑에 가랑잎같이 내몰리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합리성이니 필연성이니 하는 계량화되기 쉬운 잣대에 휘둘리지만은 않는다는 인식은 그동안 우리 문학사에서 탈역사화 경향이 나오기 이전만 해도 그다지 대세를 이룬 관점은 아니다. 작가의 통찰은 인간의 운명을 그 개별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을 도외시하고 이론과 법칙을 들이대는 데 이끌리거나 개인의 삶을 반드시 사회 전체의 틀 속에서 재단하려는 습성을 떨치지 못했던 그동안의 지배적 경향과는 미묘한 긴장 관계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그의 작품들에 자전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당대의 현실이 녹아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 자신이 리얼리즘 소설가로 불리기를 그리 탐탁해하지 않았다는 사정을 헤아릴 수 있게 한다. 작가는 개인의 자율성을 역사의 합법칙성에 가두려고 했던 통상적 리얼리즘 경향에서 반발을 느꼈을 수 있다.
「동베를린 일별(一瞥) 기행, 2003년 가을」 역시 개인의 삶에마저 손을 뻗치지 못하는 ‘50퍼센트’의 탐색이라는 그의 소설적 여정과 닿아 있다. 작품은 소설적 허구를 과감히 걷어내고 작가의 실제 체험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들어와 있는 에세이 형식을 띠고 있다. 작가는 독자들이 생판 모르는 화자를 창조하지 않고 자신의 육성을 여과 없이 노출함으로써 픽션의 기교를 굳이 요하지 않는 현실의 강렬한 진실성을 일깨우려고 한다. 작가의 손에 채취된, 가공을 거치지 않은 섬뜩한 현실은 통일 후 십수 년이 지난 현재 옛 동독 지역이다. 이곳은 거대한 역사적 격변을 치른 후의 사람들이 지금은 각자 어떤 식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가 하는 궁금증을 풀어주는 데 매우 적절한 소재로 쓰이고 있다. 무엇보다 이 땅에 대한 관심은 북녘에 고향을 둔 실향민으로 평생을 살아온 작가(화자)로서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며, 그 때문에 동베를린 기행의 소감은 아직 분단체제 속에 사는 우리에게 현재의 반성과 미래의 거울로 삼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무너진 장벽 위에서 환호하던 영웅적인 동독 주민들의 모습이 아직 뇌리에 선연한 화자에게 한 주일간의 체류 기간 중 취재해본 이 지역 사람들의 풍경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시간이 흘렀을망정 통일이 가져왔을 들뜸과 활력을 기대하고 있던 ‘나’는 생기라곤 찾을 길 없이 하나같이 땅이 꺼지듯 푹 가라앉아 있는 그들의 일상에 충격을 받는다. 폭압적인 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역사를 일군 사람들이라면 그 삶이 얼마나 활기차고 기운이 넘치겠는가. 그러나 취재 중에 만난 사람 중 누이가 공안당국에 자신을 밀고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통일 후에 알게 되어 남매간에 의절해버린 ‘해괴한’ 경우까지 있는 등 자기들 손으로 체제를 무너뜨렸음에도 정작 그 역사의 반경 안에서 덕을 보고 있는 개인은 찾을 수 없었다. 그들 스스로 바꾼 역사에도 불구하고 낱낱의 삶은 그것과 동떨어져 보이더라는 것이다.
통일? 그런 것은 잠깐의 흥분이지 결국은 금방 그냥저냥 본래의 사람살이로 돌아왔구나. 그렇게 고압적인 권력의 굴레에서 모처럼 본래의 사람살이로 돌아와본즉슨 남매간에 저런 일이나 터지고 죄다 매가리들이 없이 자질구레한 일상에 몽땅 휘감겨버려 있구나 싶어지기도 하더라구요.(177쪽)
통일의 감격이야 한순간일 뿐 낱낱 개인들의 삶이 귀결한 건 결국 세상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대로 “자질구레한 일상”에 침윤된 생활, 남루하고 누추하고 피로에 젖어 있는 “본래의 사람살이”일수밖에 없음을 ‘나’는 깨닫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전의 체제로 돌아가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건 결코 아니다. “깡그리 바보”로 살았던 그 시절은 돌이켜보면 기막힐 따름이다. 그러나 아무리 컴컴한 세상에서 놓여났어도 그들이 목숨 걸고 선택한 체제가 자신들의 일상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50퍼센트’는 결국 각자의 몫인 셈이다. 여기서도 ‘나’의 관심은 역사의 격랑에 모조리 휩쓸리지도, 고유의 영역을 모조리 침해받지도 않는 개별적 개인에 있을 수밖에 없다. 공적인 영역이 몽땅 집어삼킬 수 없는 사적인 것들,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다들 제 각각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범속하기 짝이 없는 개인이란 존재야말로 심오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로 다가오는 것이다. 동독이 망한 이유가 명쾌하게 진단되는 것과 대비되어 낱낱 개인들의 삶은 그 지나친 범속함 때문에 ‘나’의 경외감을 부른다. 역시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체제의 힘은 문득 누추해지고 정작 누추한 개인의 존재가 이기는 순간이다. 개인이 거대한 체제로부터 고삐가 완전히 풀려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역사의 지각 변동이 개별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장악하지 않더라는 통찰은, 더없이 범속하면서도 심오한 것이 인간이란 존재요 사람살이가 아닌가 하는 작가의 진단에 동참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인식이 화자의 눈에 지나칠 정도로 맥이 풀려 있고 삶의 낙이라곤 없는 것으로 비쳐진 옛 동독 지역 주민들의 삶을 얼마나 명쾌히 짚어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사람살이라는 게 본디 볼품없고 누추하다는 생각으로 재단하기에는 그들의 삶이 그리 한가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기실 화자도 사람들이 왜 그리 ‘매가리’ 없이 사는지 속 시원히 해소하지 못한 의문을 텍스트 여기저기에 떨구어 놓고 있다. 이런 의문은 사람살이가 본래 그런 것이라는 작가의 거듭된 확신과는 상충될 수밖에 없다. 고작 한 주일간의 체류 경험에서 이런 충돌을 해소할 열쇠를 찾기는 어려웠겠지만, 사회와 개인을 은연중에 배타적인 관계로 보는 작가의 인식은 처음부터 이런 충돌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점이 있다. 어쩌면 동베를린 지역 주민들의 김 빠진 삶은 인간의 본질이니 하는 관념적인 것보다 텍스트 바깥으로 밀려난 물질적인 현실로 조명되어야 할지 모른다. 통일 후 옛 동독 지역이 겪고 있는 문제에 관해서는 많은 사회학적 분석이 전해지고 있다. 가령 이 지역의 높은 실업률, 옛 서독과의 갈등, 빈부 격차의 심화, 체제에 대한 부적응 등 그 나라의 정치적 현실이 김 빠진 인생들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럴 경우 이호철의 소설에서 정치가 침범할 수 없는, ‘생긴 대로 사는’ 개인의 고유 영역은 그 범위가 좁아지는 셈이다.
필연성도 합법칙성도 통하지 않는 인간의 ‘50퍼센트’ 영역에 대한 작가의 확신은 자칫 삶을 비의적인 것, 알 수 없는 미궁의 세계로 끌어올릴 여지가 있다. 작가는 아무리 엄청난 세계사적 대격변을 치르더라도 사람살이가 특별한 것이 없다는 깨달음에 그칠 뿐 그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할 수 있는지는 묻지 않는다.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의 배제는 누추하면서도 심오한 인간의 삶에 대한 탐사를 입구에서 중단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역사에서 분리 독립한 개인 본연의 공간을 설정하여 그것을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놓기보다는 역사와 서로 겹치고 침투함으로써 역동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작가에게 주문하고 싶다. 환경에서 결코 놓여나지 못하고 그것과 상호 의존함으로써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 결국 인간이기 때문이다.
정문순
․1969년생
․여성문화동인 <살류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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