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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지난계절작품읽기/백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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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47회 작성일 05-05-30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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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운명’을 가늠하는 또 하나의 축
―김영미의 「고파비 철지철」
(≪시와반시≫ 2004년 봄)


백인덕
(시인)




7년째 다니는 출근길에 새 건물이 들어섰다
여기에 무엇이 있었더라
사무실로 드는 네거리에
신장개업 화환이 늘어서 있다
여기엔 또 무엇이 있었더라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데
‘고파비 철지철’
백선 계량사 입간판이 오늘도 내게 말을 건다
그래, 고픈 게 어디 비뿐이겠니? 근데
철지난 차지철이는 왜, 공화국 그 사람 먼지가 되고도 남았을……
이쯤에서 아차, 나는 세로로 고쳐 읽는다
고철, 파지, 비철.
입구 쪽에 세워진 내 키만한 계량저울이
아래위로 나를 훑고 있다

나와 나 사이
가장 가까운 통로에서조차
길을 잃어버리는 나는
앉으면 고철
누우면 파지다
모든 부스러진 기억들은
이미 비철이다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바람 냄새
내 안 어디선가 흘러내리는 흙들
오전에는 티브이 위에 놓였다가
오후에는 장식장 위에 쌓인다 살아서
먼지가 되고 있다

신호등이 바뀌었다
나를 밟아라
백선계량사를 지나
고파비철지철을 지나

지금 여기는 먼지구간이다

1.
시의 ‘죽음’, 또는 시의 ‘위기’라는 말이 열병처럼 유행하고 있을 때, 언제나 성급하기 짝이 없는 나는, 그런 현상의 배경이나 이유를 반성적으로 고찰해보기보다는 그 결과와 영향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상상해보곤 했다. ‘시인’이라는 자긍심이 부족했기도 했지만, 어차피 생겨난 모든 것은 제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상상은 대략 두 방향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하나는 미셀 라공의 주장처럼 예술이 스스로 ‘무화(無化)’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동시대의 모두가 시인이라면, 시인과 독자를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자연스레 제도의 담지자로서의 ‘시인’은 사라질 것이며, 더불어 ‘시’도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행복한 상상이지만, 기성 시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므로 별로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다른 하나는 아더. C. 단토의 ‘예술종말론’을 오해한 것인데, ‘시’의 개념이 비약적으로 도약해버리고 나면, 내가 그토록 가슴 졸였던 ‘시’, 그리고 생산자로서의 ‘시인’이란 개념도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나 북경원인을 우리와 같은 사람의 개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상상도 꽤나 유쾌한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 단절과 도약의 시기가 그때 무르익고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두 방향의 상상은 다 텍스트의 생산자로서의 ‘시인’의 입장을 반영한 것들이었다. 다른 한축, 텍스트의 소비자(개인적으로 수용자라는 말을 싫어한다)로서의 독자의 입장은 전혀 고려되지 못했다. ‘독자’란 거칠게 일반화하자면, 창작행위를 완성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지난날 예술사에 있어서 너무 쉽고도 가볍게 취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교훈’이나 ‘쾌락’을 받아야 하는 자들이지 요구하는 자들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팽배해 있었던 것이다. 이 방향으로 오늘의 ‘시’의 문제를 진단해본다면, 독자들의 당연한 ‘반란’이 시의 왜소화(?), 심지어는 ‘죽음’의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시’ 써서는 미얀마인만큼도 못산다. 그렇지 않은가?

2.
김영미의 「고파비 철지철」은 제목부터가 독특한데, 곧 시의 본문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지만 ‘세로’로 읽어야 하는 것을 ‘가로’로 읽었을 때 발생하는 비문이 바로 시의 제목이고, 시적 인식의 출발점이다. “이쯤에서 아차, 나는 세로로 고쳐 읽는다/고철, 파지, 비철./입구 쪽에 세워진 내 키만한 계량저울이/아래위로 나를 훑고 있다”는 부분이 그것이다. 이 작품이 무엇보다 재미있는 점은 어떤 지적 포즈나 현대적인 기법을 동원하지 않고도, 다시 말해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기본’이란 자동화된 인식이나 관습적인 태도를 넘어서서 외형적 관찰을 통과해 시적인 비약을 이룩하고 이를 통해 창조적 인식을 드러내야 한다는 점을 말한다. 결국 좋은 시란 소재나 주제의 크기나 깊이보다는 그것을 다루는 시인의 시적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김영미의 작품의 경우를 따라가 보면, ‘7년째 다니는 출근길에 새 건물이 들어섰다’는 첫 행은 시인이 그 거리에서 매우 자동화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새 건물이 하루나 이틀에 들어섰을 리 만무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사건으로 인식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또 신호등 앞에서 무심코 바라본 ‘백선 계량사’의 입간판이 ‘고파비 철지철’로 읽힌 것은 시인이 매우 관습적인 태도로 주변을 탐색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아무도 눈치챌 수 없는 작은 실수, ‘고픈 게 비뿐이겠니’와 ‘철지철’을 철지난 ‘차지철’로 읽는 순간,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실수가 ‘계량저울’에게 읽히는 순간 시적 인식의 단계로 비약한다. 그 비약은 ‘고파비 철지철’이 비록 ‘고철, 파지, 비철’로 바로잡혀도 그 자체로 머무르지 않고, 전혀 연관이 없어 보였던 시인(화자)과의 연관관계가 드러나면서 이룩된다. 마지막으로 창조적 인식의 단계는 ‘내 안 어디선가 흘러내리는 흙들’을 느꼈을 때 발생한다. ‘고철, 파지, 비철’이 그 용도를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버려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내 삶도 비록 ‘흙’(죽음)으로 돌아가는 ‘먼지구간’을 지나고 있지만 섣부른 비애나 슬픔에 사로잡힐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김영미의 작품은 공간적으로는 출근길, 시간적으로는 신호등이 바뀌는 사이라는 미시적 차원에서 전개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매우 일상적인 사건을 모티브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깊이 있는 ‘시적 인식’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거대 담론이 무너진 후, 그리고 권태로운 일상만 강요받는 오늘의 외적 현실을 감안할 때, 이러한 작품들은 독자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독자에게로 향해야 하는 시인의 태도를 파블루 네루다는 그의 「시」라는 작품에서, “시는 독자를 되찾아야 한다…… 시는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며 인간의 심장을 만나야 하고, 여자의 눈, 거리의 나그네들, 황혼녘에나 별이 빛나는 한 밤에 적어도 한 줄의 시의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렇게 예기치 않은 사람들을 방문하는 일은 가본 일이 있는 먼 곳, 읽은 모든 것, 배운 모든 것에 값한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야 하며, 그리하여 그들은 거리에서, 모래에서, 같은 숲속에서 수천 년 동안 떨어진 나뭇잎에서 우리의 어떤 것을 문득 주워 올릴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만든 것을 조용히 갖게 될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시인이 될 것이다……그것 속에서 시는 살게 될 것이다……”( 정현종 역, ꡔ시의 이해ꡕ, 민음사)라고 역설하고 있다. 스스로를 시인의 이름으로 정위시킨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처절한 외침에 다시 한 번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백인덕
․1964년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ꡔ한밤의 못질ꡕ  
․한양대, 한양여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추천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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