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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지난계절작품읽기/엄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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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모두가 크다!
―신현정의 「파문波紋」
(≪리토피아≫ 2004년 봄)
엄경희
(문학평론가)
연잎 위의 이슬이
이웃 마실 가듯 한가로이 물속으로 굴러 내리지만
여기 평화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이슬 한 개 굴러내리면서
아, 수면에 고요히 눈을 뜬 동그라미가 연못을 꽉 차게
돌아나가더니만
이 안에 들어와 잠을 자던 하늘이며 나무며 산이
건곤일척, 일거에 일어서서 그 커다란 몸을 추스른다.
새들, 도도히 날아간다.
―「파문波紋」 전문
진리는 발견하는 자의 것이다. 언제나 한 자리에 놓여 있는 사물을 언제나 동일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 아니 비어있는 시선으로 지나칠 때 그 사물은 ‘없음’으로 향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고정된 시선은 존재가 일정한 틀 속에 갇혀 있다는 증거이다. 그것이 반복될 때 진리는 피안의 세계로 영원히 숨어버리게 된다. 한 존재의 시선이 사물의 외피를 뚫고 거기 감추어져 있는 진리를 캐낼 때 우린 그것을 혜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현정의 「파문」은 자연에 대한 주관적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 채 자연의 현상만을 고스란히 기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깊고 깊은 시인의 혜안이 담겨있다.
우선 시인은 아주 작은 이슬방울에 자신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작은 것에 시선을 집중할 수 있는 힘은 마음의 여유에서 온다. 그 여유가 연잎 위를 한가로이 굴러가는 이슬과 그보다 좀더 깊게 떨어지는 이슬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낱낱이 지켜보고 있는 시인의 시간을 물리적으로 측정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양적인 시간이 아니라 한량없음으로 진행하는 질적인 시간이기 때문이다. 신현정은 「파문」과 함께 발표한 시 「이사」에서도 이러한 시간 의식을 내보이고 있다. “달팽이집에 기거하면서//더듬이를 앞장 세워//깃발들 느릿느릿 지나가게 하고//길가에 나무들//느릿느릿 지나가게 하고//초록을 느릿느릿 지나가게 하고//분홍을 느릿느릿 지나가게 하고//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그는 그야말로 독자들의 상상력이 느릿느릿 지나가도록 넉넉한 여백을 시에 안배하고 있다. 이 또한 한량없는 시간의 그릇이다. 이 한량없음 속에서 자기의 시선을 이슬 한 방울에 온전히 바치고 있는 또 하나의 자연으로서의 인간을 나는 이 순간 떠올려본다. 뻣뻣한 뒷골이 풀려 내리게 하는 이 풍경을 나는 지금 살아보는 것이다.
작디작은 이슬 한 개가 ‘연못을 꽉 차게’ 돌아나가다니! 이 충일한 에너지는 결코 작다할 수 없을 것이다. 연못 안에 들어와 ‘잠을 자던 하늘이며 나무며 산’을 일시에 몸 추스르게 하는 이슬 한 개의 힘은 모든 생명 하나하나가 우주라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 준다. 이슬 한 개는 흙과 대기를 순환하는 오랜 여정을 거쳐 연못에 맺혀든 온전한 생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슬 한 개는 작지만 우주 속에서 저 하늘과 나무와 산과 동급인 것이다. 이 동급들이 서로를 두드리며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그 평화를, 시인은 ‘건곤일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시가 지닌 절묘한 맛은 ‘건곤일척’이라는 말의 쓰임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슬 한 방울과 연못 속에 비쳐든 우주와의 몸싸움. 작은 것과 거대한 것의 뒤섞임. 크고 작음의 경계가 무너지는 건곤일척은 기실 건곤일색(乾坤一色)을 이루어내는 화쟁(和諍)의 순간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의 힘은 또한 움츠려들었던 ‘새’를 드넓은 대기로 날아가게 한다. 나는 건곤일척이 건곤일색이 되는 발견의 순간을 그저 오래 음미하기 위해서, 작은 것은 끝없이 왜소해지고 큰 것은 더 큰 것을 욕망하며 투쟁하는 인간사를 이 자연에 대비시키는 일을 오늘은 그만두기로 한다.
엄경희
․1963년 서울 출생
․200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저서 ꡔ빙벽의 언어ꡕ ꡔ未堂과 木月의 시적 상상력ꡕ 등
․현재 숭실대 및 이화여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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