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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지난계절작품읽기/최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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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 기도하는 겨울나무
ꠏꠏ신달자 「겨울나무 속으로」
(≪문예중앙≫ 2004년 봄)
최서림
(시인)
바람 불 때 보인다
몇백 개 십자가 엉켜 펄럭이는
겨울나무
앙상한 가지들 맨몸으로
강풍 속에 뼈 부러지도록 흔들리는
극기 지나고 나면
건널 강을 모두 건넜는지
나무 한 그루 마치 교회 같다
바람 잠자고
십자가 하나로 몸 줄인 묵상의 집
나는 강한 손짓에 이끌려
가볍게 교회 안으로 들어선다
겨울 마른 나무 속이
사람을 눕히고도 그만큼 다시 넓다
생명은 안으로 다 통해 있어서
아래로 내려가면 봄을 안고 있는
따뜻한 뿌리
가늘고 여리지만 톡톡 튀는
생기 있는 말씀들
영하의 강풍을 이기느라 말 없었구나
겨울나무는 지금 미사 중이다
―신달자 「겨울나무 속으로」
나무나 산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는 것은 이미 나이가 상당히 들었다는 징조이다. 나무나 산, 그것도 겨울나무나 겨울산이 몸에 영혼에 깊숙이 파고들 때는 이미 중년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예고하고 있다 하겠다. 박목월이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서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보고 수도승이나 하늘문을 지키는 파수병쯤으로 인식하게 된 것도 중년을 넘어서이다. 필자인 나도 마흔 중반이 넘어서야 나무, 겨울숲, 겨울산에 대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끌림을 받아오고 있다. 사실 나도 겨울나무나 겨울숲에 대해 시를 써보고자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지만 별로 소득이 없었다. 겨울산에 한번 가보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지. 삶이 왜 그리 빡빡한지.
≪문예중앙≫에 실린 신달자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자연과 우주, 그리고 인간이 지닌 생명의 신비와 존엄에 대한 것들이다. 그 중 「겨울나무 속으로」는 여타의 다른 생명시와 구별된다. 이 작품은 구도자적인 의미에서, 종교적인 의미에서 인간과 자연의 숭엄한 생명의 미를 다루고 있다. 이 구도자적이고 종교적인 뉘앙스는 겨울나무를 제재로 선택할 때부터 이미 부여되고 있다. 앙상한 겨울나무가 하늘을 향해 팔을 들고 서있는 모습을 보면 서서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이 연상된다. 신앙생활은 잎이 무성한 여름나무보다 앙상한 겨울 나목에게 더 어울린다. 자기 자신의 것, 지상의 것들을 다 떨쳐버리고 하늘 향해 맨몸으로 두 팔 벌리고 설 때 절대자와 보다 가까워지고 친밀해지는 것이다. 자기 것을 다 가지고 자기 것으로 절대자를 만나기는 불가능함을 이 겨울나무는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겨울나무는 바람이 불 때 보인다. 세찬 겨울바람에 몹시 흔들릴 때 나무(구도자)는 비로소 절대자를 찾아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드는 것이다. 환난과 고난이 다가오지 않고서 스스로 절대자를 찾아 기도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게 사람이다. 시인은 그냥 ‘기도하는 나무’라는 평범한 표현을 피해가고 있다. 대신 강풍 속에 뼈가 부러지도록 흔들리는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에서 몇백 개의 뒤엉킨 채 펄럭이는 십자가를 보고 있다. 이 고난을 상징하는 겨울나무 십자가는 그렇게 강풍 속에 뼈가 부러지는 극기를 거쳐서야만 제대로 봄의 생명과 환희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즉 건너야 하는 험하고 거친 강은 다 건너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 풍파를 겪을 대로 다 겪어야 모든 인간적인 방법을 포기하고 두 손 다 들고 절대자에게 귀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환난과 고난을 다 겪은 겨울나무는 한 그루 한 그루가 마치 교회 같다. 사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가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피로 산 것이다. 겨울 동안의 동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해당된다. 그리고 봄에 새싹이 피어남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해당된다. 강풍 끝에 바람이 잠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평안과 휴식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생의 풍파가 잔잔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강한 손짓에 이끌려 가볍게 교회 안으로 들어선다는 것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겨울나무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절대자를 상징하는 그 겨울나무의 마른 속이 사람을 눕히고도 그만큼 다시 넓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품이 너무도 크고 넓다는 것을 나타낸다.
한편, ‘생명은 안으로 다 통해 있어서’ 라는 구절에서 기독교적인 생명시학을 읽게 된다. 흔히 생태시학자들은 기독교를 반생태적인 것으로 오해들을 하고 있는데 비해, 신달자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유기론적인 시학을 전개해 가고 있다. 겨울나무 줄기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봄을 안고 있는 따뜻한 뿌리가 연결된다는 표현에서 생명은 생명끼리 통해 있다는 유기론적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은 그렇게 유기적으로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는 겨울나무의 생명적 현상 속에서 ‘가늘고 여리지만 톡톡 튀는 생기 있는 말씀들’을 발견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생명은 궁극적으로 ‘생기 있는 말씀’, 곧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생기 있는 말씀’은 지금 겨울나무 속에서 영하의 강풍을 이기느라 침묵하고 있다. 침묵 속에서 끊임없이 생명 살리는 일을 계속 하고 있다. 겨울나무는 지금 예배 중이다.
신달자의 이러한 기독교적인 유기론적 생명시학은 「오대산이 허리춤을 풀다」에서도 돋보인다. 겨울 오대산에 산행을 갔다가 태초에 창조된 생명의 아름답고 황홀한 잔치를 보고 즐기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이 시는, 주로 불교나 노장, 아니면 샤머니즘적인 생태시가 유행을 이루는 이 시대, 생태시의 새로운 모색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같은 지면에 실려 있는 「저 우주의 신비를 보아라」 역시 새로운 감각으로 쓰여진 기독교적인 생태시라 할 수 있다. 끝으로 「감자밭에서」라는 작품은 안식을 기도와 노동을 통해 즐긴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감각적 신선함이 물고기 비늘처럼 싱싱할 뿐만 아니라 사유에서의 새로움도 눈부시다.
최서림
․1956년 경북 청도 출생 ․1993년 ≪현대시≫ 등단
․시집 ꡔ이서국으로 들어가다ꡕ ꡔ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ꡕ 등
․저서 ꡔ말의 혀ꡕ ꡔ서정시의 이데올로기와 수사학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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