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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문화산책/박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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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95회 작성일 05-05-30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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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영상, <송환>의 고백이 딛고 선 자리


박유희
(영화평론가)


1. 들어가며
대화에서 소통되는 것이 화자의 사유나 정보만은 아니다. 발화의 분위기가 더불어 전달되며 전언(傳言)의 진의와 효과를 결정한다. 여기에서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은 화자의 발화 상황, 태도나 세계관 등 다양한 변수이다. 따라서 청자는 전언과 함께 감각되는 분위기를 통해 이러한 변수 항목에 해당하는 화자의 면모를 역으로 가늠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동일한 문제에 대해 같은 충고를 하는데도 어떤 사람이 하면 비수로 꽂히고, 어떤 사람이 하면 맷돌같이 내리누르며, 다른 사람이 하면 물처럼 스며든다. 이때 이러한 효과를 유발하는 것은 충고의 기표를 둘러싼, 또는 내재하거나 이면에 도사린, 쇠와 돌과 물일 것이다. 이 질료의 세세한 성분과 형상화되는 과정을 추론하면서 우리는 화자의 현재 위치, 화자의 됨됨이, 그리고 화자와 청자의 관계 등을 짚어보게 된다.
이는 영화라는 대화 형태에서도 마찬가지다. 전쟁에 반대하고, 사랑을 말하고, 휴머니즘을 외치는 그 많은 영화에서 관객은 정작 그 메시지와는 거리가 먼 느낌을 종종 받는다. 표면적으로 전쟁에 반대한다는데 그것을 말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전투 장면은 오히려 폭력을 찬양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사랑을 말하면서 소수 개인의 욕망 충족을 미화하여 은연중에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람 간의 유대를 배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휴머니즘을 외치지만 현실 문제를 현실적인 맥락에서 분리함으로써 도리어 인간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문제 해결을 향한 열정을 희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혐의스러울 때도 있다. 반대로 겉으로 드러나는 선명한 메시지는 없는데도 샘솟는 감동으로 마음이 벅찰 수 있고, 단편영화의 몇 장면이 형성하는 형용하기 힘든 정서가 메시지와 관계없이 가슴에 오래 남을 때도 있다. 이러한 느낌으로부터 전언의 맥락을 더듬어보면 우리는 영화 생산자의 정체성과 상황을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이다.
2004년 봄, 한국 영화계가 휴머니즘의 기치 아래 관객 천만 시대를 자축하며 폭죽을 터뜨릴 때, 우리는 그 한편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는 <송환>이라는 영화를 만날 수 있었다. <송환>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게다가 낡아 보이기까지 하는 이미 북송된 장기수 문제를, 더구나 다큐멘터리로 만든 영화다. 신록과 같이 푸른 바탕 위에 그늘 없이 환하게 웃는 노인의 얼굴과 ‘한국영화 최초 선댄스영화제 수상’이라는 문구가 찍힌 포스터가 아니었다면, 그나마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개봉 여부조차 알지 못했거나 알더라도 피해갔을지 모른다. 그것은 이 영화의 제목이나 형식이, 지나간 일로 잊어버리고 싶은, 지나간 일이 아닐지라도 외면하고 싶은 어두운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것이라는 선입견과 그로 인한 두려움을 충동하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송환>이라고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송환 운동 차원에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선전 영화일 것이고 생각했다. 이는 ‘다큐멘터리’라는 형식 자체가 사회고발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인식이 일반적인 데다가, ‘송환’이라는 제목이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사안을 상기시키는 데 연유한다.
그러나 상영 현장에서는 매회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고, 영화를 본 사람들에 의해 입소문이 퍼지면서 약 1만8천 명의 관객이 이 영화를 보고 갔다. 천만이라는 숫자에 비하면 턱없이 왜소해 보이지만, 일부 예술영화 전용관에서만 개봉되었다는 점과, 전체 인구 서너 명 중 한 명꼴로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를 본 시기라는 점, 그리고 탄핵 정국과 총선으로 인해 영화 관람률이 뚝 떨어진 시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더 커 보이는 숫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상업적 유통 구조와 거리가 있는 독립영화집단이 외면당하기 쉬운 소재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이 영화가 관객들의 가슴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키며 발걸음을 불러들일 수 있었던 그 감동의 힘은 어디에 있을까?
2. 조용한, 그러나 전복적인
<송환>은 다음과 같은 감독의 고백으로 시작된다. “이 영화를 비전향장기수들께 바친다. 반공주의자셨던 돌아가신 아버지가 이 영화를 보셨으면 화를 내셨을 것이다. 장기수 선생님들도 썩 마음에 들어 하시지는 않을 것 같다.” 아버지가 화내셨을 걸 알면서도 장기수들에게 바치는 영화를 만들고, 그러면서 장기수들도 썩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화자의 애매한 태도는 관객을 다소 당황하게 만든다. 그것은 정치적 신념에 차서 비판의 칼날을 휘두르는, 관객의 선입관 속에 존재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은 ‘그렇다면 이 영화가 딛고 선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 의문이 관객으로 하여금 이 영화에 주목하게 하는 첫 번째 힘이다.
이 영화는 감독의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는, 차분하고 유보적인 고백으로 일관된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독의 고백을 들으며 점차 고백자처럼 모든 판단을 유보한 채 장기수들과 대면하게 된다. 관객은 고백자의 존재를 잊으면서 고백자의 시선에 동화되어 간다. 이는 <송환>이 상영되기 바로 한해 전인 2003년 봄, 한국에서 상영되었던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콜럼바인 Bowling for Columbine>(2002)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이 영화는 1999년 미국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청소년 총기 난사 사건에서 시작하여 미국의 폭력과 범죄에 대해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로, 감독의 고백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송환>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마이클 무어는 시종일관 자신의 시각과 존재를 부각시킨다. 직접 노스컨트리 은행에 찾아가 계좌를 열고 경품으로 총을 받아 들고 나옴으로써 미국 사회의 총기 문제를 야유하고, 흑인 범죄만을 크게 다루는 기자들에게 환경 문제에 주목할 것을 제안하여 미국 언론의 태도를 꼬집는가 하면, 대기업의 CEO를 찾아가 노동과 인권 문제에 물어보다가 쫓겨남으로써 정경유착 문제를 폭로하기도 한다. 또한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에서 콜럼바인 사건 피해자들과 함께 K마트를 찾아가 실제로 탄약판매중지라는 뜻밖의 성과를 얻기도 한다. 이러한 장면들을 연출하는 내내 그는 항상 자신감에 차 있으며, 날카로운 비판의 서슬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기자에게나 자본가에게나 경찰에게나 당당하게 항의하며 그들의 거짓을 눈앞에서 까발리고, 필요하면 사실을 뒷받침하는 통계 자료나 사진, 동영상 등을 서슴없이 제시하여 등장인물이나 관객 모두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터져 나오는 관객의 웃음은 권위적이고 완강한 것들이 한방의 펀치에 깨져 나갈 때 느끼는 통쾌함에 가깝다. 미국이 전 세계에서 저지른 충격적인 학살 장면이 연이어 제시되는 가운데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가 흘러나오는 시퀀스는 이 영화의 압권을 이룬다. 동시에 이것은 감독이 말하는 방식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비아냥거림이다. 비아냥거림은 화자가 누군가의 행동이 터무니없거나 어처구니없을 때 드러내는 태도로 대상을 낮잡는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 이는 자신의 비판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자신감을 근거로 하며 정치적 신념을 선명하게 표출하는 방법이다. 이 영화를 보고나면 누구나 커다란 덩치에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눈매를 빛내며 곤란한 질문만 퍼붓고 다니는 마이클 무어의 강한 태도를 머릿속에 각인하게 된다.
이와 달리 <송환>의 김동원 감독은 겸손함인지 부끄러움인지 애매한 태도로 시종일관 자신 없어 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나약한 자유주의자라고 칭하기도 한다. 많은 인물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담은 화면을 펼쳐 보이면서, 한 인물의 행동에 대해서도 이럴 때는 느낌이 좋았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좀 낯설었다, 잘 모를 때는 그저 잘 모르겠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 목소리는 큰오빠처럼 차분하고 소박하며 친근하다. 큰오빠가 자신 없어 해도 동생들은 그의 성실함과 진정성을 믿는 것처럼, 관객은 그러한 고백자를 은연중에 신뢰하며 따르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이 영화는 영화를 보기 전에 관객이 갖게 되는 선입견과 두려움을 조용히, 하나씩 뒤엎는다.
3. 왜곡된, 그리고 슬퍼서 따듯한
1992년 4월 27일, 김동원 감독이 장기수가족협의회의 부탁으로 비전향장기수 두 명을 봉천동으로 데려오기 위해 아산요양원에 가서 조창손과 김석형을 만나는 것이 <송환>의 첫 번째 사건이다. 조창손과 김석형은 인민군이나 빨치산 출신이 아니라, 1960년 이후에 남파된, 그야말로 간첩들이다. 우리 역사에서 ‘간첩’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는 두말할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외모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노인과 다를 바 없고, 그들의 말투도 북한 억양이 배어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화면에서 드러난다. 관객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멀고 두렵게 느껴졌던 사람들을 유심히 보고 있을 때, 김동원 감독은 자신도 간첩에 대해 호기심이 들었다고 고백하며 관객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자신의 어린 시절 체험을 이야기하며 간첩에게 가질 수밖에 없었던 선입견의 형성 과정을 탐색한다. 이 과정에서 과거에 정부나 언론이 간첩의 얼굴을 찍는 방식과 반공 드라마의 특징이 제시되며 이념에 대한 반감을 부추겼던 매체적 특징이 폭로된다.
그런데 이 부분의 효과는 과거의 왜곡이 폭로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사용된 ‘대한 늬우스’나 ‘113수사본부’ 등의 자료 화면은 남한에서 동시대를 살아온 관객의 보편적 경험과 겹치며, 한편으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폭로와 향수는 일견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나, 이 영화는 이러한 모순을 아무렇지도 않게 순접(順接)시킨다. 예를 들어 113수사본부 화면에서는 임현식, 변희봉, 오지명 등 코믹 연기로 최근까지 인기를 끌었던 배우들이 간첩 혹은 수사관으로 등장하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부분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저절로 웃음이 나오게 만든다. 이 웃음은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와 같은 통쾌한 웃음이나 조소가 아니다. 일그러진 과거를 인정하며 담담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슬프지만 따듯한 웃음이다.
이 웃음은 조창손 노인의 표정이나 김영식 노인의 얼굴을 닮아 있다. 이 영화에서는 보다 지적이고 정치적 신념이 투철한 김석형 노인이나 안학섭․신인영 노인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고, 선원 출신으로 푸근한 인성을 지닌 조창손 노인이나 전향 장기수이지만 순박하기 그지없는 김영식 노인에게 주목한다. 조창손 노인이나 김영식 노인은 이념적인 태도를 비교적 드러내지 않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세상이 부패했다는 것, 사람의 생각을 폭력으로 바꾸려 했다는 것 등 보다 보편적인 기준에 근거하여 분개하고, 그러면서도 주변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지키며 성실히 살아간다. <송환>의 이러한 시각은 같은 소재의 극영화 <선택>의 시각을 상기시킨다.
2003년 가을에 개봉되었던 영화 <선택>은 최장기 비전향장기수 김선명의 옥중 생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송환>에서 김선명 씨는 매우 인격적이면서도 이념적인 인물로 드러나는데, <선택>에서는 김선명 씨의 정치적 신념에서 비켜나 그가 고통을 이겨나가는 인간적 면모에 주목한다. “선택은 무언가를 택하는 게 아니라 버리는 것”이라는 대사는 이 영화가 택한 선택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여기에서 김선명이라는 한 인간의 선택은 이데올로기를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강인한 의지의 산물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 영화에서는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일 때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질 수 있다는 것을 ‘남한의 감옥에 빨갱이가 수감되었을 때’라는 극한상황에서 뽑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택>은 감옥의 문제를 다뤘으되 감옥을 위한 영화가 아닌 만큼, 이데올로기 문제를 다뤘으되 이데올로기를 위한 영화가 아니었다.
이러한 점에서 <송환>은 <선택>의 시각과 부합되는 면이 있다. <송환>에서도 전반적으로 장기수들의 인간적인 면모에 주목한다. 시골 노인과 같은 완고함, 자상한 할아버지의 면모, 생활고와 평범한 욕망 등이 드러난다. 그들은 역에서 “너 몇 살이냐?”며 싸우기도 하고, 고달프게 일하면서도 동네를 청소하고 아이들을 돌보는가 하면, 송환을 앞두고 갑자기 결혼을 발표하여 주위 사람들을 당황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송환>은 장기수들의 정치적인 부분까지도 인간적인 면모로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택>과 다르다. 이 영화는 이념이란 인간 이성의 일부이며 이성도 여러 속성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장기수 노인들은 야유회에서 큰소리로 김일성 찬가를 부르는데, 그 모습이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청년시절을 회고하며 응원가를 부르는 듯하다. 감독은 이 장면을 찍을 때 카메라가 휘청거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끝까지 촬영하여 보여준다. 여기에는 역설적으로, 정치적인 부분만을 굳이 확대해석하지 않겠다는 감독의 태도가 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송환을 앞두고 납북자 가족들이 찾아왔을 때 그들을 부정하는 장기수 노인들의 완고한 모습도 매우 정치적인 것이면서 또한 매우 인간적이다. 납북자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들이 온갖 고초를 겪으며 지켰던 그들 마음속의 순수한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그들의 인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절대로 납북자를 인정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관객은 이해한다. 마찬가지로 납북자들의 입장에 대해서도 공감한다. 월북이든 납북이든 남은 가족들이 무조건 납북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나 그들이 얼마나 힘든 세월을 살았는지에 대한 대답은 바로 장기수 가족이 겪어온 신초(辛楚)에서 이미 여실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 영화에서는 다양한 인간의 면모 중 어느 하나를 배제하거나 대립시키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이 모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존에 대립항목으로 받아들여지는 요소들, 즉 비전향 장기수와 납북자 가족을 비롯하여 좌파 지식인과 조선일보 기자, 공산주의자와 기독교도 등이 다양한 양상으로 만나는 것을 비추는데, 갈등 국면의 긴장보다는 갈등의 다중적인 양상과 맥락을 차분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관객은 모순의 긴장을 심하게 겪지 않으면서 비판과 이해를 함께 경험하게 된다.
4. 탈이념적인, 그래서 보다 정치적인
정치적인 제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의 목표는 대개 명확하다. 폭로와 고발을 통해 정치 운동의 힘을 견인해 내려는 것이다.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이나 <로저와 나 Roger and Me>(1989), 김동원 감독의 초기작인 <상계동올림픽>(1988)을 비롯한 푸른영상의 일련의 작품도 이에 해당한다.
<볼링 포 콜럼바인>의 경우, 콜럼바인 사건을 일으킨 책임은 미국 국가권력에 있으므로, 권력을 가진 자들은 지금이라도 반성하고 무기 생산을 멈출 것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 마이클 무어는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실태를 조사하고 논쟁하고 요구한다. 그리고 돈을 가진 자, 힘을 가진 자, 돈과 힘에 아부하는 자들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콜럼바인 의 피해자들이 K마트에 가서 총기를 팔지 말 것을 요구할 때는 K마트 측에서 본 체도 안 하다가 기자들을 대동하고 가니까 책임자가 나와서 총기를 팔지 않겠다는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보여주고, 어린이 살인 사건을 보도하는 기자가 카메라가 켜지면 엄숙한 표정을 짓다가 카메라가 꺼지면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대비시키며, NRA(미국총기협회) 회장 찰톤 헤스톤을 찾아가 질문 공세를 퍼붓고 나서 총기 사고 희생자인 7살짜리 여자 아이의 사진을 그의 현관 앞에 놓고 나온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그들’의 위선을 알아채고 ‘그들’을 밉살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볼링 포 콜럼바인>은 위선적인 ‘그들’이 누구인가, 저항해야 할 적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마이클 무어의 입지도 분명해진다. 그는 그들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정치적 이념의 대립, 그 항쟁 관계를 명확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볼링 포 콜럼바인>은 매우 정치적인 영화임에 틀림이 없다.
이에 비해 <송환>은 정치적 대립을 부각시키지 않는다. 이념적 지향을 뚜렷이 드러내지도 않는다. 감독은 처음부터 반공주의자는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장기수들의 이념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영화의 중간에서 일본인 저널리스트 이시마루가 보여주는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에 대해서는, 근거의 신빙성을 인정하면서도 차마 맞장구칠 수는 없다는 태도를 드러낸다. 그리고 장기수 노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영화는 정치성이 오히려 약화되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송환>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정치적이다. 고발이나 폭로를 통해 정치 운동을 촉발해 내는 것도 정치적이지만, 결국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저항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대립이나 분쟁을 조정하며 서로의 삶을 보다 조화롭게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이 영화는 이러한 정치의 목적이 이상적인 것이라고, 우리가 도달하기에는 너무나 먼 곳에 있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에 대해 반성을 촉구한다.
<송환>은 장기수 송환 문제를 통해 남과 북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가를 보여준다. 남한에서 장기수를 가두고 고문하는 동안 갇혀 고통당한 것은 장기수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였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을 빨갱이로 몰고 고문함으로써 우리도 모두 극단적인 이념의 틀에 갇혀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었으며, 직접적으로 그들과 혈연 관계에 있는 남한 국민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사회적으로 매장 당했다. 그들의 문제는 곧 국군포로의 문제이고, 납북자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지금도 계속 상처와 희생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장기수들에게 송환은 귀향과 회복을 뜻하나, 현재의 상황으로는 또 다른 이산을 의미하기도 한다. 30년 만에 어머니를 만난 신인영 노인은 다시 헤어지지 말자던 다짐도 소용없이 북으로 송환되어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만나지 못한다. 결혼으로 인해 송환되기를 포기한 안학섭 노인은 송환의 실현과 함께, 수십 년 생사고락을 함께한 벗들을 기약 없이 보내야만 한다. 비전향장기수 노인에게 가족과 같은 정을 준 동네 아낙들은 이별을 슬퍼하며 편지 왕래만이라고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인민군에 입대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형이 학살당해, 모친에게조차 죽은 자식으로 되어 있던 김선명 노인이 출감 후 병석에 계신 어머니를 만나는 장면은 이념 대립으로 겪어야 했던 고통이 얼마나 현재적인 것인가를 통절하게 보여준다. 신념과 자존심으로 버텨왔을 아들은 노쇠하실 대로 노쇠하신 어머니 앞에서 죄송하다며 울먹이고 어머니는 네가 어른 말을 안 들어서 그런 거라며 흐느낀다. 그러나 이 장면도 빨리 나가 달라는 제수씨의 출현으로 오래 가지 못한다. 그 이후 김선명 노인은 가족들의 두려움 때문에,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송환될 때까지 어머니 산소조차 찾아보지 못하게 된다. 이를 통해 이 영화는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이미 많은 피를 흘려 왔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그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서로를 인정하고 대립을 벗어나는 것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생존의 문제라는 것을 일깨운다.
여기가 <볼링 포 콜럼바인>과 <송환>이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저항을 촉구하기 위해 비판의 칼날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표면적으로는 <볼링 포 콜럼바인>이 정치적으로 보다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움에 미움으로, 공격에 공격으로 대응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정치적 효과는 비판 대상과 동일한 차원을 맴돌고 있다. 이와 달리 <송환>은 저항의 과거와 현재적 맥락, 역사의 질곡과 개인의 상처를 껴안으면서 그렇기 때문에 통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통일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서로의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서로가 살아남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 <송환>의 남다른 성취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 영화가 딛고 선 자리는 어디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 영화의 성취를 가능케 한 힘의 연원을 짚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5. 송환, 그 너머를 향해
많은 사람들이 <송환>을 훌륭한 영화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송환>은 사실을 여과 없이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다큐멘터리라고 말한다. 그들은 다큐멘터리는 사실(事實)이라고, 실제(實際)라고 은연중에 믿는다. 그러나 다큐멘터리가 사실 그 자체라면 우리는 <송환>을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 현실에게 잘했다고 상을 주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지만 사실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만드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사실을 촬영하고 편집한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송환>이 높이 평가되는 것이기도 하다.
<송환>은 김동원 감독을 비롯한 푸른 영상 촬영팀이 1992년부터 2003년까지 12년에 걸쳐 장기수들을 쫓아다니며 500여 개의 테이프에 800여 시간을 촬영했다는 놀라운 기록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 기록에서 추려낸 분량은 148분에 불과하다. 장기수 노인들과 지내는 12년 동안 김동원 감독으로 대표되는 이 영화의 제작팀은 인간적으로 성숙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리고 편집 과정에서 선택과 배제의 원칙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으리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각 개인의 성숙이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얽히며 복잡한 인생의 국면들을 드러내고, 또다시 그것은 편집 과정에서 정제되고 어우러졌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 영화는 세월과 공동작업이 빚어낸 개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무언가 대답이 석연치 않다. 모든 사람들이 오래 작업한다고, 같이 일한다고 해서 이러한 성과를 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2001년 북한에서 열린 8.15 통일 축전에 참가했던 김동원 감독의 후배가 찍어 온 필름 속에는 조창손 할아버지가 김동원 감독을 아들처럼 여긴다는 말이 들어 있다. 이 화면이 나가고 나서 김동원 감독은 “조 할아버지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부끄러움이 이 영화를 완성하게 한 힘이었다.”고 말한다.
부끄러움.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부끄러움을 잊고 산다. 부끄러움을 잊으려 한다. 부끄러워하면 못난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할 것이라는 강박관념이 작용하여,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그러나 부끄러움은 자기 쇄신을 위한 내적 충동이자 타인에 대한 배려의 원천이기도 하다. 부끄러움이 없어지면 노쇠와 부패가 쉽게 찾아든다. 부끄럽다는 것은 반성적 사유의 시작이며 부끄럽지 않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도 마련될 가능성이 확보된다. 그래서 <송환>의 남다른 성취를 가능케 한 중요한 인자는 사십이 넘어서도 부끄러울 줄 아는 인성과, 부끄러움과 부끄럽지 않으려는 마음 사이의 긴장이 아니었나 싶다. 극영화에서든 다큐멘터리에서든 부끄러움은 쉽게 만나기 힘들다.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에서 우리는 자신만만한 사람이 보여주는 당당함과 시원함은 맛볼 수 있지만,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의 신중함과 배려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신중함과 배려가 위축이나 유보가 아니라 보다 넓은 인식의 지평을 여는 토대라는 것을 <송환>은 증명한다.
그러기에 이 영화는 ‘송환’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다시 현재를 부끄러워하며, 어긋난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난 이후에 대한 전망을, 서로가 다름을 다름대로 인정하며 마음을 나누는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조용히 열어주는 것이다.


박유희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영화평론 「속임수 사이로 자기정체성을 향해」 등
․저서 ꡔ1950년대 소설과 반어의 수사학ꡕ
․현재 고려대학교 BK 한국학교육연구단 연구전임강사

추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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