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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문화산책/박황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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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그 미메스타이적 이미지
박황재형
(시각이미지생산가)
1. 원본으로부터
모방 인간에게 사물들로 이루어진 자연의 세계는 언제나 경이의 대상이었고, 그것에 대한 모방으로서 시작된 것이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고대로부터 이러한 모방, 재현 등의 행위를 미메시스(mimesis)라 하여 인간의 중요한 원초적 태도 중의 하나로 간주하였고 개념의 역사에서 수많은 논쟁을 통해 변화해 왔다. 기원 전 5세기경 피타고라스는 음악은 수의 미메시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플라톤에 이르러 비로소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데, 플라톤은 여러 가지 개체는 원본이 되는 한 형상인 이데아를 흉내 내는 것으로 보고, 이것을 현상계의 열등성을 증명하는 이유로 삼았다. 그는 현상계는 원형의 모방으로 목수나 화가나 작가가 모두가 집을 짓지만 목수의 집에 비교해서 화가나 작가의 집은 허구인 가상이라 하여 예술을 소극적으로 평가하였다. 즉 미메시스가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한 현상을 기만적으로 복제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킴으로써 안정된 진리의 재현장치를 허물어버린다는 이유로 예술적 미메시스를 비판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개념을 플라톤으로부터 이어받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오히려 예술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렇듯 미메시스는 서구 철학의 전통인 현전의 형이상학과 존재신학적인 프로젝트의 일반적 전형이었다.
모든 예술 창작활동에서도 미메시스와의 관계를 고려치 않은 표현이나 재현의 개념은 생각하기 힘들다. 그 중에서도 사진은 가장 적극적으로 모방 행위를 수행하는 시각 이미지 생산 매체일 것이다. 사진의 재현은 지금까지 은폐되어 있던 비밀스러운 세계를 영상화하는데 그것에 의해 열리는 공간은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낯선 공간이다. 일반적으로 의식되는 세계를 넘어서는 이미지의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과학기술의 이미지 공간에서 실현된 미메시스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사진의 모방 행위는 대상을 비생산적으로 복제 내지 재현한다는 의미를 넘어 대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극복하는 주체를 통한 역사적 경험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실재에 대한 모방으로서 실재에 대한 하위개념으로 파악되는 미메시스라기보다는 마치 두 개의 거울 사이에서 끝없이 상이 맺혀가는 반복과 다양성의 움직임인 주체와 대상 그 둘의 대립을 변조시키는 작용이라 해야 할 것이다.
부재 한순간의 멈춤도 없이 작동하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발생하는 우연한 종합으로서의 사진은 사라진 원본의 흔적이 자기 반조적 반복 작용을 통해 중층적으로 접히며 만들어내는 이미지 생성 과정의 한 지점이다. 주체나 대상이 아닌 흔적의 흔적인 재흔적으로서의 사진은 이미지를 바닥이 없는 깊은 곳으로 이끌며 원본의 의미를 지우는 흔적 효과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다른 이미지들을 무한히 대체하는 보충의 이미지를 끝없이 만들어가는 차이와 지연의 구조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미지이면서 사물을 말하고, 사물을 이야기하면서 이미지를 인용하는 사진은 대상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사물을 옮기면서 사물에 옮는 이중적 변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의 증거라는 바로 그 이유가 정확히 사물의 증거가 아님을 보여주는 사진의 아이러니는 같음을 다른 것으로 전사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같음이 무수히 반복되어 그 같음이 본래의 지위를 잃고 같음이 같음 속에서 다른 것으로 작용하는 자리이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층의 심연화가 발생하는 사진의 모방 행위는 미메시스라기보다는 데리다가 그의 텍스트론에서 제안하는 미메스타이(mimesthai)라고 할 수 있다. 미메스타이는 미메시스의 동사형으로 존재하는 원본에 대한 모방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제작된 텍스트 작용이라고 데리다는 말한다. 기준이 되어야 할 원본이 없이 단지 다른 기표들을 무한히 대체하며, 밖의 사물을 지시하면서 이와 동시에 안을 향하여 접히는 이중적 움직임으로 대상의 자동적 소멸을 발생시키는 작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특성을 거의 동일하게 보여주는 사진은 진정한 원본, 기원, 존재, 진리 등이 그것의 복제에 대해 갖는 우위성을 은밀하게 전제하는 미메시스라기보다는 텍스트 체계 내에서 일어나는 기호의 자유로운 의미론적 유희를 가능케 하는 미메스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2. 미메스타이
한 번의 부름 사진은 끝없이 자리 이동을 감행하는 움직임이지만 그것은 단 한 번의 부름으로 나타나면서 동시에 사라진다. 그런데 한 번의 부름과 동시에 사라지는 것은 사진인가, 사물인가? 아니면 그것들 모두인가? 나아가 한 번, 그것은 과연 신뢰할 만한가? 이러한 물음으로 사진은 자신의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로, 분산과 해체가 발생하는 뾰족한 곳으로, 익숙하고 자연스런 모습이지만 낯설게 다가선다. 초고와 같은 드로잉으로 만성맹장과 같은 자아 정체성의 문제에 접근하는 사진은 사물을 옮기면서 사물로 옮는다.
사진과 사물은 서로 대립하지 않기에 그 둘을 경쟁하는 항으로 비교하려 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새로움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지루하고 남루한 권력의 암투이며 포도당 주사액으로 흥건한 웅덩이에서 벌이는 입씨름일 뿐이다. 하지만 탈대립의 욕망을 꿈꾼다 하더라도 분명한 사실 혹은 현실은 사진과 사물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그것들의 냉혹한 운명의 종결을 이해하고 긍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마치 후식이라는 의미로 주도적 입장을 견지하던 하나의 단어에 대한 견해에 사막과 탈주라는 의미를 덧붙이면서 그것이 그 내부에서 해체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 당혹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진은 새로이 만들어지는 우회로를 따라가며 사물을 옮기면서 사물에 옮아 스스로 또 다른 사물이 되어간다. 그리고 그것이 보여주는 진정한 의미의 새로움은 일반적 시각이라는 것의 한계를 지나치거나 일반적 시각이 시작되기 이전의 시각으로부터 느닷없이 밀어닥치는 해일과 같다.
새로운 사물 한 번의 부름으로 시작되는 사진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물로부터 시작되고, 또 시작할 수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전적으로 그것에 의존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물이 아니라면 어디에다 사진의 시작을 정초할 것인가. 그래서 사진은 사물에 빚을 지고 있고 계속 빚을 갚아가지만 그것은 더 많은 빚으로 돌아오는데, 바로 이 상반되는 무한한 미메스타이적 과정 속에서 사진의 유혹이라 불리는 빚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사진에 의해 명명되고 있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뚜렷하게 지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항상 사물 없이도 지낼 수 있는 사물의 이름이므로 사진은 결국 사물의 이름에 또 다른 이름을 덧붙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물은 자신이 더 이상 지배할 수 없는 체계인 사진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의 귀결점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라는 이름에 대한 이름으로 사진 속에서 생성적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사진 또한 사진이라는 이름의 사물이기에 사진이 사물을 완전히 재현하건 아니면 위반하건 그 결과는 여전히 사물로 귀착된다. 사물을 향해 손짓하든 그것을 뛰어넘든 어쨌거나 사진은 단지 사물을 들먹일 뿐이다. 사물에게서 지금을 빼앗아 하얀 종이 위에 사정없이 후려쳐서 사물을 사라지게 하는 사진 또한 새로운 사물인 것이다. 이렇듯이 사물은 아무렇게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유혹이라는 휨의 방식을 통해 의미의 효과를 남기며 사라진다.
사물은 아무리 평범하다 할지라도 사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언제나 매우 특이한 특성들을 보여준다. 세계가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사실의 총계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사물에게서 그것의 특이성을 제거할 수는 없다. 사물은 자가 생산적으로 그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과정과 작용을 통해 스스로를 의미하는 자기 반조적 살아가기 방식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물로서의 사진에 대한 사고의 가능성이 바로 그 사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물은 사진과 어떠한 계약도 맺을 수 없고, 단지 자신이 정의한 조건들을 통해 사진 속에서 의미를 만든다. 다시 말하자면 사물은 완전히 이타적이기에 사물이 사진의 조건을 정의하기는 하지만 사진을 구속하는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 번의 부름으로 정의되는 사진은 지체 없이 사물을 벗어나 새로운 사물이 되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사진도 결코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사물을 희생시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사진은 모든 것이 주체로 환원되는 회화에서 배운 교훈과는 다른 도덕 체계로 살아가는 새로운 사물인 것이다.
거리두기 사진의 매력은 가까이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멀리서 느껴진다. 사진은 주체와 대상을 벗어나 만들어지고 자리 잡기에 사진을 만들거나 읽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거리를 유지해야만 하고, 또 그럴 필요가 있다. 모든 권력으로부터의 거리두기는 사물의 흔적과 재흔적을 끝없이 생산해내는 필요조건이며 사진이 지닌 힘의 중요한 요소이다. 바로 그 때문에 사진은 현전의 위계질서인 권력의 실제적인 모든 과정을 끊임없이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것의 유혹은 강하나 힘의 차원에도 힘의 관계의 차원에도 속하지 않는 시스템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욕망이다. 사진에서는 아무도 이기지 않고 아무도 지지 않는다. 사진은 인위적으로 일으킨 거의 모든 경련과 마비로부터 벗어나 시간이 휘어지고 공간이 구겨지는 비스듬한 비탈길에 선다. 그것의 시작이 그러했던 것처럼 거리두기는 사진이 살아가는 남다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사진은 특별한 조건이나 대가를 전재하지는 않지만 그저 다가간다고 맛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막연하게나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거리두기일 것이다. 거리두기는 시간과 공간, 주체와 대상 사이의 빈자리, 즉 제3자의 끼어듦을 가능케 하는 열린 틈으로 생성의 충돌이 발생하는 거의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을 매개로 하는 모든 것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져 빈 자리가 늘어날수록 더 많은 사건들이 시간 속에서 포개지고, 그때 주체의 사라짐과 사물을 옮기면서 사물에 옮는 사진의 근접화가 일어난다. 오랜만에 일기장을 펼쳐 왼편에 쓰여 있는 일년 전의 일기를 읽다가 그 오른편 페이지에 오늘을 기억시키고 노트를 닫으면 일년 전 어느 특정한 날의 추억과 오늘이 겹쳐진다. 시간의 근접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손수건을 꺼내 무릎 위에 놓고 한 귀퉁이에는 사라는 글자를 다른 귀퉁이에는 진이라는 글자를 쓰고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사와 진은 주머니 속에서 접히고 구겨지며 사진이 될 수도 있다. 거리의 근접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상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결국 그것은 매우 체계적이고 도덕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언제나 세워지면서 허물어지는 일종의 반대놀이로 새로운 이타적 사물들의 체계인 것이다.
걸고리 없는 사진의 유혹은 스스로 닫히거나 열리는 미결정 상태이기에 거리를 만들면서 스스로에게서도 멀어진다. 거리두기는 멀어지거나 다가가기 위해 혹은 잊거나 기억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것이 아니라면 사진은 결코 그 의미를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사진은 모든 권력의 모퉁이를 돌아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여기로부터 질문은 새로이 시작될 수밖에 없다. 사진은 사물을 어떻게 옮기면서 그것에 옮는가?
서명을 지우는 서명 사진은 사물을 기록하는 흔적이면서 동시에 사물의 흔적을 지우는 흔적이다. 있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있음의 가상으로서 재해석되는 미룸과 보충의 반복적 흔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번의 부름으로 명명되는 사진은 그것이 사물의 원본임을 증거하는 사물에 대한 서명이면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물 자체의 부재를 정확히 증언하는 서명이다. 소리 나지 않는 개입이며 의미론적 비결정성의 확인이다. 미확인 상태로 숨어있던 사물을 드러내어 일어난 것과 일어날 것 사이에서 언제나 타자를 작용시키며, 주체나 대상이 절대적 자리를 점유하지 않은 채 오히려 그것들의 경계를 지우는 이중적 작용이다. 흔적의 반복 속에 이미 사진은 그 시작부터 자기 동일성의 고유함이 타자와의 공유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주체나 대상 그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하기에 각 항들이 서로 이타적 경험과 관계 속에서 작용하며 서로에게 옮아간다. 그것이 기원을 중요시하는 기원의 변형들인 사진이 해체의 이중적 드러내기를 시도하면서도 단절되지 않는 역사가 되는 이유이다. 하지만 사진의 전망은 끊임없이 바뀌며, 어떤 고정된 지향점이 없이 전통적 가치와 방식이 아니라 자신도 아직 모르는 새로운 사유가 생겨나는 지점으로 향한다. 어떤 한 가지의 사태를 대변하는 기호가 아니라 고정적으로 표현되지 않으면서 다양한 사태의 생성을 보여주는 흔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진은 사물을 현존하게 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사물을 옮기면서 사물에 옮는 미메스타이라 할 수 있다.
사진은 사물에 대한 서명으로 자명하고 단순한 사유방식 자체를 바꾸는 전혀 다른 시작이다. 그것은 재현해야 할 모델 없이 만들어내는 발명이 아니며, 사물을 없애거나 파괴하는 것 또한 아니다. 사진 속의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거나 존재했다고 확신할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이 하나의 사진이기에 전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재현의 관점에서 사진은 재현해야 할 원본을 가지지 않는다. 사진은 현전의 부재와 함께 바로 그 현전의 부제가 허락하는 반복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흔적에 의해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은 단 한 번의 부름인 사물에 대한 서명이지만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의 이름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언제, 어디서, 누구나 가능한 반복의 부름인 사진은 개념적 질서와 비개념적 질서의 위치를 바꾸며 현존에 상처를 내고, 이중화의 공간과 시간을 각인시키는 미메스타이인 것이다. 존재하는 원본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오히려 중심이나 근원에 대한 환상을 부재시키는 흔적의 흔적이기에 사진과 사물은 서로 다가설 수 없는 거리를 유지한 채 계약의 울타리 밖에 있다. 따라서 사진을 보고 읽는다는 것은 보통명사의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물이 존재했음에 대한 고유명사의 서명을 만들면서 동시에 그 서명을 지우는 것이 사진이지만, 사진은 서명을 자신의 바깥으로 완전히 내몰지는 않는다. 사진의 서명은 자신이 가진 자기 정체성이나 고유성의 타이틀을 잃게 만드는 아이러니로 남음과 동시에 사라지는 이중적인 것이다. 이것이 사물에 대한 서명인 사진이 영원히 남으면서 지워지는 서명이 되는 이유이다. 하지만 하나의 고유명사에 속하지 않은 채 사물의 다양성을 뒷받침하는 사진은 사물에 대한 서명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주체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사물과 무엇인가 교환을 하거나 계약을 맺기 위해 사물을 쓰러뜨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하는 봉인이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사진이 의미화될 때 현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물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것들과의 관계, 즉 지나쳐 온 어느 한 시점의 의미와 앞으로 가능한 의미들과의 혼합 속에서 발생하는 생성적 의미의 발화요소인 것이다.
낯선 여행 사진은 대상의 선명한 내세움 속에서 자신의 긴박한 위기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것은 입장 속에서 입장의 해체를 적극적으로 감행하는 것으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사물에 대한 끝나지 않는 서론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입장을 내세우며 그 입장들 속으로 들어가 입장들을 헤집고 입장들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불일치, 긴장, 모순의 관계를 추적하고 들추어냄으로써 사진이 단일하고 매끈한 의지의 표면이라고 전래되는 믿음을 파편화시키는 낯선 여행이다. 다시 역으로 전통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성급한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의미를 흩뿌리는 방향으로의 실천인 것이다. 결코 자신의 주장이나 결론을 성급하고 완고하게 무엇에 적용하려는 의도를 갖지 않으며, 맹목적인 동질성의 숲을 가로질러 다양한 이질성의 바다로 나아가는 항해이다. 다시 말하면 사진의 전략은 철저히 시간과 공간의 여러 층위들을 임상적이고 수행적 실천으로 추출해내면서 그것들이 서로 절합하여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 해체하기를 바라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전통의 중심이 아니라 그것의 경계나 가장자리를 배회하면서 이미 알려진 것의 내부에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의미의 발굴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진은 한 번의 부름으로 계획을 세우면서도 무모하게 바깥이나 유토피아를 설정하지 않는다. 기존의 전제들을 논리적으로 궁지에 몰아넣어 그것들을 무장 해제시키면서도 자신이 안과 밖을 지니지 않는다는 모순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런 이유로 사진이 포용하는 다양함과 일관됨, 분산과 결집의 힘을 모두 주목해야 한다. 사진이 드러내는 입장은 논의의 과정이 직선적이거나 어떤 출발점으로부터 하나의 결론에 이르려는 노력이 아니라 똑같은 문제를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면서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보편적으로 인정된 누구나 불편 없이 지나가는 커다란 길로 다니지 않는다. 사진의 길은 새롭고 낯선 다도해의 바닷길이다. 거기에서 하나의 원본이나 하나의 진리는 특권화하는 신학으로 난파당하고, 창조적인 것으로 충실한 삶을 구비한다고 믿어졌던 주체도 더불어 수장된다. 단지 반복 가능성의 사진 그 자체만이 홀로 남아 무한히 열려진 바다 위를 해파리처럼 떠돌며 해석을 증식시킨다. 그러므로 그것은 완고한 이항대립의 틀을 전도시키고, 경계를 무효화하는 새로운 항해술인 미메스타이인 것이다. 실재하는 세계 속에 자리 잡고 즐기기보다는 기존 세계의 밖에 서서 오직 그것들 사이의 경계를 가장 철저히 그리고 멀리까지 뒤섞으려는 시도인 것이다. 따라서 사진의 다양성은 기존의 세계 속에서 혹은 밖에서 살아가는 방법론으로서의 다양성이 아니라 세계 속에 존재하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바깥에서 살아가는 방식으로의 다양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거나 그에 답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그 자체로 접근해간다. 그것은 질문에 대한 질문으로 수많은 가설과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보통명사가 되어버린 사진과 사물을 통해서 예술 자체뿐만 아니라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조차도 부재시키는 것이다. 당연히 부재는 또 다른 부재를 낳기에 그것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거리두기이고 언제나 새로운 의미로 옮아가는 자리 이동의 미메스타이이다.
3. 해석 너머에
마술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사진은 다듬어지지 않은 원시 예술이다. 왜냐하면 사진은 잘 정제된 문화의 차원을 넘어서 너머에 서며 사물을 옮기고 그것에 옮기 때문이다. 기계에 의해 대단히 빠른 속도로 재현되는 대상은 대부분 다른 시각적 이미지들보다 느리게 읽혀진다. 사진은 그것이 보여주는 사물들의 구석과 귀퉁이를 돌아 미끄러지는 그 순간에 비로소 그 특성을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더 빠르게 객관적으로 재현하려는 노력에 의해 더 느리게 비객관적으로 읽혀지는 것이 사진의 속성인 것이다. 분석이나 유사성 속에서 해결될 수 없는 의미의 중층 심연화가 역설 속에서 이루어지기에 단일한 설명이나 해석으로 타협을 하는 전통적인 시각으로는 사진에 다가갈 수 없다. 사진은 대상과 관련되는 객체라기보다는 그 스스로 세계를 구성하고 끊임없이 의미를 흩뿌리는 능동적 주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까지 끈질기게 의미 부여를 시도하며 누려왔던 해석 주체의 독점적 권력은 쓰러진다. 자신이 죽으며 살아나는 방식으로 사물을 옮기면서 사물에 옮듯이 주체도 예전의 주도적 지배력을 상실한 채 다시 돌아와 서길 바라는 것이다.
그 시작부터 주체로의 권한을 버리는 사진이 어떤 형태로 체계화되어 완전한 질서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를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의미의 생성은 각각의 다양한 힘들 사이에서 균형이 불가능할 때 그것의 내부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안정적 질서란 자기 동일적 질서 내에서만 보편적 가치를 갖는 것이기에 그것은 무질서의 다양한 가능성과 무한함의 극히 예외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측 불가능의 불균형에 기인한 도약, 이것이 바로 사진의 마술이 보여주는 미메스타이인 것이다. 그런데 그 마술은 주체를 쓰러뜨리고 시선을 사물로 향하도록 유도한다. 주체는 사물과 마주하며 프레임의 밖에 서있는 상상의 사물로 그것의 역할은 단 한 번의 부름을 매개하는 것일 뿐 사물과 사진에 대해 어떠한 권한도 갖지 않는다. 이렇듯이 주체의 죽음을 양분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사물인 사진은 허무와 부재, 비현실성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회화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의미를 만들어왔지만 사진은 오히려 단 한 번의 부름으로 마술을 건다. 그런데 사진의 마술은 너무도 완벽하여 공모자들은 그것에 포박됨 자체를 잊고 그 놀이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자리 이동 사진은 이미 불려져 죽으며 잡힌 흔적을 다시 지우면서 살아나는 새로운 사물이다. 부유와 탈주의 욕망이 꿈틀대는 바다와 사막으로 나아가면서 혈통을 만드는 죽음이자 동시에 살아남이다. 가장 헌신적이면서 가장 거부적인, 언제나 문제시될 일정을 안고 있는 서명을 지우는 서명인 것이다. 그래서 사진에서 중요한 것은 자리 이동의 경험이다. 경험은 의미를 담아내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의미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과 사진은 반복되는 순간부터 서로의 밖으로 뛰쳐나가 서로 멀어지며 결별하는 과정으로 남는다. 혹 그 둘이 결정적인 도전을 시도하는 듯 보이더라도 승리는 허울일 뿐이고, 여기저기 떠도는 승리에 대한 신화는 잡설의 패러디에 불과하다. 그래서 언제나 이중적으로 작용하는 사진을 체계적으로 가지별로 정리하고 요약하려는 것은 그렇게 승산 있는 작업도,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사진의 번역은 주체가 주도권을 쥐고 그것이 의도하는 바를 재배열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진에 대한 번역의 가치는 사유의 대상에 따르면서 자신도 모르는 어떤 것을 향한 과정의 중간에서 발생한다. 그러기에 사진을 번역하거나 해독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차라리 사진이 사물에 그러하는 것처럼 그것의 유혹에 옮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도 굴절된 언어로 그려진 지형도를 고쳐 그려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오히려 사진은 그것의 속성답게 더 까다로운 독서의 방향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하나의 사진에 대한 번역은 시작의 순간부터 그것의 의미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뒷걸음질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의 의미를 드러내기는커녕 도리어 의미의 종자를 흩뿌리며 사막으로 바다로 내달린다. 그래서 사진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그것의 이름을 되풀이해서 길게 늘여놓는 것일 뿐이다.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고, 말하려고 한 것이 사유의 여백들 위에서 뒤섞이고 엉키고 밀어내 아무것으로도 고정되지 않는다.
전언 한 번의 부름과 동시에 사진은 말을 잊으면서 잇고, 예측한 바와는 다르게 과거를 미래에 투사하면서 현재화되는 방식을 통해 닫힌 지상의 질서를 바꾸려는 노력의 시작이다. 어디에 어느 시간에 어떤 방식으로 도달할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나 과거에 대한 확신을 제공해 주기보다는 늘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고, 기존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흔들며 실험적 상황 속으로 나아간다. 동일화 상태에 난류를 형성하여 다양한 흐름을 생성시키고, 허름하고 헐렁한 누더기를 걸치고 입체 교차로에 설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진은 그때그때 현존하면서 부재하는 흔적이기에 분명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발생하는 새로운 사건의 해석을 발굴하는 현장이고, 자신을 매개로 각자의 상황을 출발점으로 해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사진은 영원히 하나의 구조로 간직되는 안정적인 유형의 이야기가 아니라 불확정성의 해일 속으로 소멸되는 징후적 안개이고 전망적 잡음이다. 그것의 목적은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섬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바다 위를 떠돌며 파리의 비행처럼 우회하고 휘어지는 과정 속에 발견되는 행복이다.
무엇인가 하나의 대상을 설명하려면 언제나 엄청난 말무더기가 필요하다. 가장 단순하게 보이는 사물의 이해 방식도 사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생각의 채로 걸러져 축적된 것들이다. 하지만 설명이 소개되어지는 대상이 가진 내용보다 더 어려울 경우에 듣는 이나 말하는 이 모두는 참으로 난감하다. 더구나 그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음에도 어쩌지 못할 때에는 당혹스럽기조차 하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한다면 적절한 소개나 설명이란 사실 애초부터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하나의 설명이 원본 대상의 내용을 적절하고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장치든 아니든 간에 사실은 그것 모두가 이미 또 다시 설명되어져야 할 다른 원본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적절해 보이는 설명이라 하여도 그것이 하나의 대상을 또 다른 대상에게 올바르게 전해준다기보다는 그저 그 사이에서 부지런히 오가는 움직임에 불과한 것이다. 이 글 내내 사물과 사진 그리고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박황재형
․화가
․월간 ≪인천미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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